작성일
2005.01.04
수정일
2005.01.04
작성자
김혜준
조회수
1203

賀桂梅, <당대 중국 인문사상 분화의 요소 및 그 과정>

당대 중국 인문사상 분화의 요소 및 그 과정

 

北京大學 中文系 賀桂梅(부산대 서남주 옮김)

 

"적색" 사회주의 중국은 70년대 말 이후 "개혁개방" 혹은 "현대화"라 일컬어지는 역사적 변화를 보였다. 그것은 당대 중국이 경제 발전 전략, 사회 구성, 국제적 위치 등에서 중대한 변화를 보인 20여 년이었다. 이 과정에서 당대 중국의 인문사상은 시종일관 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문화의 변화와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20여 년의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중국 당대 인문사상 역시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거칠게 말해서 이 "변화"는, 보편적인 "공통인식"으로부터 부단히 분화로 나아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전반 내내 당대 중국 인문사상계를 주도한 흐름은 50-70년대(즉 毛澤東 시대) 사회주의 주류 문화사상에 대한 비판이었다. 毛澤東 시대에서 포스트 毛澤東 시대에 이르는 이 전환에 대해서는 李澤厚가 이미 적확한 설명을 한 바 있다. 그는 80년대는 "구국이 계몽을 압도한다"고 말했으며, 90년대는 "혁명에 작별을 고한다"고 말했다. 80년대 중국 사상계는 일종의 보편적인 "공통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곧 "신계몽" 사상으로 대표되는 "현대화"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1989년 "6·4"를 거친 후, 90년대 초부터 중국 사상계는 분화가 일어났다. 사상계의 이러한 분화는 우선 "사상사"에서 "학술사"로의 전환(1990년 陳平原, 汪暉, 王守常이 주편 한 《學人》 창간으로 대표됨), 현대 중국역사에 관한 "급진"과 "보수"의 반성과 논쟁(1992-1993), 문화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인문정신 토론(1993-1995)으로 표현되었다. 그 후 여기서 더 나아가서 90년대 중·후기에는 이른바 "신좌파"와 "신자유파"의 대치구조가 출현(1997-2000년)했는데,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사안은 2000년의 "長江 독서상"에 관한 논쟁이었다. 그리고 이제 21세기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제 당대 중국 인문사상의 분화현상은 대단히 명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따져 보아야 할 점은, 당대 중국 사상계의 분화를 야기한 요소는 무엇인가? 어떻게 80년대에서 90년대 중국 인문사상변화의 맥락을 이해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본고는 이 점과 관련하여 사상문제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인문사상 분화의 역사적 맥락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중국 인문사상의 변화 맥락은 기본적으로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다.

(1) 80년대, 당대 중국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毛澤東 시대에 처해있던 긴장된 상태의 "현대화"와 "사회주의" 사이의 모순된 결합을 버리고, 단지 "현대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毛澤東 시대 사회주의 역사(특히 1966-1976년의 "문화대혁명")를 "전현대"("봉건") 역사와 잠재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사실상 사회주의 역사에 대해 보다 복잡한 분석과 평가를 회피하였다. 이 바람에 사회주의는 당대 중국역사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무시되었다. 전통과 현대, 계몽과 혁명의 대치는 바로 이런 사고의 전형적인 표출이었다. 80년대의 현대화 개혁과정에서 인문사상계가 발휘한 역할은, 일종의 ''입법가''이자 ''해설가''로서 현대화의 진전을 추진하면서 현대화 이데올로기를 보편적인 사회 공통인식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인문지식인 집단과 국가 사이의 관계는 일종의 밀접한 협력 및 공모의 관계로서, 비록 표면적으로는 인문지식인이 마치 국가에 대해 반발하는 것같이 보였지만, 공동의 현대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전에 없이 일치했다. 인문지식계는 국가와 공동의 현대화 이상을 향유하면서도 동시에 상상적인 대립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독립된 주체의식과 주체태도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80년대 인문사상계로 하여금 내부적으로 보편적인 일체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80년대 발생한 인도주의와 소외에 관한 토론, 현대화와 현대주의에 관한 토론 등과 같은 일련의 논쟁은 그 대립적인 관계는 모두 지식인 집단과 국가 사이에서 표현되었으며, 지식계 내부의 일체감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80년대 후기에 이르르자, 한편으로는 사상계의 현대화 기획이 시장화의 진행 과정에서 직면한 곤경에 의해 무너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계의 정치적 실천이 이미 파괴적인 반정부 역량으로 전화됨으로써, 결국 80년대에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영웅주의적 계몽사상의 붕괴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은 현실적으로는 사상계와 정부 사이의 사회변혁에 대한 공통된 목표로 인해 형성된 조화 공존의 분열로 나타났다.

(2) 1992년 후, 사상계가 좌절을 한 상황 하에서, 당대 중국 정부는 전면적으로 현대화 과정을 추진하였다. 문화시장이 점차 성장하면서 대중문화 역시 발전해나갔고, 인문지식인 집단은 사회구성체의 중심 위치에서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 시작하였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바뀌는 즈음에 중국 사회의 격심한 정치적 압력에 대해 인문학계에서 보인 주된 반응은, 한편으로는 80년대 적극적인 개입(사상사 연구)에서 학술의 직업화와 전문화로의 후퇴(학술사 연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6·4의 실패를 전체 현대 중국역사 중 급진적인 변혁사상의 실패로 이해하고, 전통문화로 돌아가자는 보수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런 조정과 토론은 기본적으로 사상계 내부의 조정이었으며, 90년대 중국 현대화의 결과 즉 사회현실에 대한 토론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93-1995년에 일어난 ''인문정신논쟁'' 이후 인문사상계는 비로소 현대화 사회현실에 대한 인문학계의 태도를 전면적으로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인문정신논쟁''의 주류는 문화시장과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것이으로서, 인문학과 인문사상이 80년대의 주류 현대화 이데올로기의 역설적인 상황에 대한 자발적인 반성과 재조명이었다. 그러나 인문정신의 입장을 견지하는 인문연구자들은 여전히 영웅주의 입장을 핵심 내용으로 삼고, 인문정신을 상당히 허구적이고 공허한 도덕 태도로 이해하였다. 이로 인해 그것이 시장(시장화)에 대해 내린 양자 대립식 비판은 인문학계로 하여금 사실상 사회현실과 유리되게 하면서 사회현실을 거절하도록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논쟁 중 ''후현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일컬어진 사상은 오히려 현실에 대한 인정과 포용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정은 일종의 무비판적인 신시대 환영 식의 태도로서, 90년대 중국의 사회 현실을 계몽과 현대성을 초월한 후현대시기로 칭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인문정신을 지지하는 계몽주의자와 인문정신에 반대하는 후현대주의자는 중국 사회현실에 대해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즉 단순히 거절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인정하는 식이었다. ''인문정신논쟁''은 사상계의 결론도 없고 결과도 없없던 대규모 논쟁일 뿐이었으며, 그것이 제기한 핵심적 문제는 인문사상계가 시장화의 사회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3) 1997년 대륙의 학자 汪暉는 논문 《당대 중국 사상계 상황 및 현대성 문제》를 발표하고, 당대 중국 사상계의 여러 이론과 사상 형태가 비판적 사회기능을 상실하였으며, 이는 보편적으로 90년대 중국의 신국면을 홀시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자본주의의 전지구화(글로벌화) 과정이 이미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범세계적 현상이 되었고, 중국의 사회주의 개혁은 이미 중국의 경제와 문화생산 과정을 전지구적 시장에 위치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汪暉는 사상계의 비판 명제에 대해 새로운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을 기점으로 사상계에서는 새로운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젊은 인문학자들을 양대 사상 진영으로 나누었으며, ''신좌파''와 ''자유파''의 논쟁이라 일컬어졌다. 이 논쟁의 핵심 문제는 중국 시장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다른 평가였다. ''신좌파''로 불리는 연구자들은, 현대화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 분화의 현실 및 중국이 전지구 자본주의 국면 중에 처한 위치에 관심을 가졌고, 시장화의 신화를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다시금 毛澤東 시대의 사회주의의 유산과 마르크스주의적 맥락에서의 좌익적 사상 자원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자유파''로 불리는 연구자들은, 중국의 주요 문제가 과도한 시장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화를 충분히 전개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여기고, 시장화를 저해하는 주된 요소는 중국이 아직도 철저한 정치 개혁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들이 의지한 사상적 자원은 중국 현대 역사 중 胡適으로 대표되는 서구 사상 중의 海耶克, 伯林, 栢克 등의 자유주의적 사상전통이었다. ??

이 사상계 내부의 논쟁은 2000년 5-8월 사이에 北京三聯書店의 《讀書》 잡지와 홍콩 長江그룹이 시행한 ''長江 독서상''의 심사 및 선정과 관련하여, 대중 문화 매체가 대거 개입하는 사회적 사건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長江 독서상'' 입상자 명단이 공정한지에 대한 논란, 여하히 공정한 학술 심사 시스템을 확립할 것인지에 관한 토론, "공공 토론장"의 출현 가능성 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면의 도화선은 ''신좌파''와 ''자유파'' 사이의 사상적 이견 및 이로 인해 야기된 인문학계 내부의 복잡한 인간관계였다. ''인문정신논쟁''과 비교해 볼 때 ''신좌파''와 ''자유파''의 논쟁은 더욱 혼란스러웠으며, 결과적으로는 현실을 겨냥한 사상 토론이 대중 문화 매체가 좌지우지하는 사회적 사건으로 바뀌고 말았다. 아울러 구체적인 물질적 이익(상 및 상금)이 연계됨으로써 상당 정도 대중사회의 반지성주의 경향을 야기했고, 이로 인해 사상 토론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보여준 신드롬적 현상(즉 인문사상의 혼란과 무질서, 사상적 충돌이 비사상적 요소에 의해 소실됨)은, 사상계의 80년대의 공통 인식(즉 어떤 문제에 대해 공동으로 토론한다는 전제)이 이미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상의 분화가 문화시장에서의 인문집단의 위치(대중문화매체를 점유하는 정도, 학계시스템에서의 위치, 자본이익집단과의 관련성 등을 포함) 및 이런 위치의 쟁탈과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더욱더 분명히 보여 주었다. 따라서 ''신좌파''와 ''자유파''의 논쟁이 최종적으로는 학술상에 대한 부정과 회의로 귀착된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닌 것이다. 사상의 배후에 이해 관계가 존재한다는 80년대에는 볼 수 없던 이런 요소가 90년대에는 사상 논쟁의 기본적인 환경이 된 것이다. 비록 논쟁에 참여한 학자들은 이런 이해 관계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자체는 인문사상의 분화가 단지 사상 관점상의 분화 일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성과 인문학술 기제 중에서의 인문집단의 위치가 더 이상 통일될 수는 없으며, 이는 사회현실에 대한 그들의 판단, 사회문제에 대해 그들이 제시한 해결 방안 및 인문사상이 사회에 개입하는 방식이 더 이상 동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당대 중국의 사회현실과 사회구성의 변화에 따라 인문지식인 집단 자체도 이미 분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80년대 지식인 집단의 공통인식 및 지식인에 관한 자기 상상 방식은, 90년대 후기에는 이미 더 이상 사회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변화와 분화는 사상 이데올로기 면에서 통일된 현대화 이데올로기의 분열로 나타났다. 달리 말하자면, 현대화 이데올로기의 내재적 분화와 충돌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야말로 당대 중국 인문사상 분화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였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분화는 21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며, 아마도 부동한 ''사상''과 부동한 경제, 정치, 사회 집단과의 연계를 통해서 미래의 중국 사회 발전을 좌우하는 부동한 역량이 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인문지식인 집단의 90년대 분화 상황을 분석하자면, 현대화가 80년대 이후 중국에서 전개된 특수한 방식에 대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 현대화와 80년대의 문화혁명

 

8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당대 중국 인문사상 변화의 과정은 두 개의 기본적 요소와 관련되어있다. 하나는 당대 중국의 발전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한 현대화와 사회주의 이론 사이의 모순이다. 다른 하나는 인문지식인 집단이 사회구성체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지식인 집단의 자기 상상에 대한 끊임없는 조정이다.

현대화와 사회주의 목표 사이의 긴장 관계는 당대 중국(1949년에서 현재까지)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 사안으로서, "중국 공산당이 1949년 정권을 잡았을 당시 한 차례의 혁명이 아니라 두 차례의 혁명 부르조아혁명 및 이에 이은 사회주의혁명을 인정했으며, 毛澤東 시대 사회주의 중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현대공업화 수단을 사회주의 목표와 상호 조화시키고자 한 독특한 시도" 때문이었다. 이는 당대 중국의 현대화 발전이 대단히 독특한 길을 가도록 만들면서 당대 중국의 핵심적 특징이 되었다. 예컨대 1958년의 대약진, 특히 1966-1976년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50-70년대의 사회주의 목표와 현대화의 상호 조화의 실패라는 역사적 사실은,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중국 사회가 전환의 과정에서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권태가 일종의 보편적인 사회심리가 되도록 만들었으며, 80년대 이후 毛澤東 시대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당대 중국 발전의 기본 방침은 사회주의 목표에 대한 추구는 잠시 제쳐두고 현대화를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두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전환의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지도자 집단은 그 제안자이자 실천자였다. 그들이 선택한 방침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는 정권의 합리성을 보장해주는 전제 조건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毛澤東이 강조한 ''계속혁명론''과는 달리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화를 내세우는 것으로서, 즉 사회주의 목표를 먼 미래에 두고,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는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점은 80년대 이후 공산당 정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으며, 이로써 현대화가 유일한 임무가 되었다. 비록 관변 언론에서는 이 임무의 단계성과 일시성을 부단히 강조했지만, 실제 실천 과정에서는 毛澤東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아 이데올로기 면에서 커다란 후퇴가 아닐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개혁 개방의 역사 과정은 기본적으로 두 차례 혁명이 한 차례 혁명으로 바뀐 현대화 과정이 되어 버렸다.

문화대혁명의 종결로부터 20세기가 마감하기까지, 당대 중국은 하나의 역사적 단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문화대혁명식의 사회주의 혁명을 종결하고 현대화를 사회 발전의 주제로 삼은 것은, 당대 중국이 고전적인 혁명의 길을 벗어나서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당대 중국에서는 이를 ''신시기''로 부른다). 현대화와 사회주의 목표 사이의 모순적인 결합은 80년대에 이르르자 기본적으로 더 이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현대화가 유일한 시대적 역사적 주제가 되었으며, 농밀한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부여되었다. 이런 유토피아적 색채는 주로 사회 생산력 발전을 사회의 주요 목표로 삼는데서 표현되었으며, ''현대화''는 물질이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고도로 민주화되고 부강한 중국이 출현하는 것으로서 상상, 묘사되었다. 이와 상응하여 농촌과 도시에서 개혁에 따라 부단히 심화되던 사회적 불평등이 주목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날로 확대되던 사회적 불평등이 오히려 충분히 합법화되었다. 사회주의 목표를 제쳐두고 현대화를 강조한 것이 이룬 실제 효과는, 사회적 모순의 존재를 더 이상 강조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모순의 해결을 오로지 경제적 발전에만 기대하고, ''시장''을 자발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기제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80년대의 현대화 과정은 현대화 이데올로기가 급속히 확산되는 과정이었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바뀌는 시기에 있었던 사회적 격동은 돌연변이였다기보다는 하나의 교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와 지식계의 충돌은 실질적으로는 정부가 엄혹한 수단으로 지식인 집단이 현대화에 부여한 이상주의적 색채를 씻어내면서, 그것을 적나라한 상품, 시장, 소비문화로 환원하고, 강력하게 중국을 전세계적 자본주의 확장의 과정에 개입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20세기가 마감할 당시 이미 사회주의 개혁 과정에서의 이익 재분배와 전세계적 자본의 분배가 대충 완료되었다. 역사는 확실히 이 시점에서 획을 그었다. 아니면 달리 말해서 그때 막 새로 시작하였다. 문혁의 종결로부터 20세기가 마감하기까지는 이제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 그 속에는 커다란 ''이야기''가 들어있으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현대화''였다. 이야기의 발단과 대단원은 바로 현대화의 발단, 전개, 회의, 시정 및 전면적인 승리의 전 과정이었다.

그람시의 문화혁명에 관한 관점을 빌리자면, 그 어떤 사회정치혁명도 문화혁명을 수반하며 또 그에 따라 인간을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현대화와 동반해온 최근 20년간의 중국 개혁 역시 하나의 문화 또는 이데올로기 혁명을 완성한 것이었다. 이 ''문화혁명''은 80년대 중국의 콘텍스트 속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이중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하나의 문화적 변환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중국 경제가 "자본의 부동한 단계를 받아들이는" 혹은 "완곡하게 표현해서 현대화의 삼투라는" 과정 속에서 포스트식민주의적 문화 상황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毛澤東 시대의 고전적인 사회주의 담론과 이별을 고하고, 혁명으로부터 ''포스트혁명'' 또는 ''비혁명''적인 이데올로기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 혁명은 기본적으로 인문사상계와 국가(정부) 간의 고도의 묵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기본적인 전제 혹은 이데올로기적 기획은 毛澤東 시대에 실패한 사회주의 역사를 ''전근대''적인 ''봉건''역사로 지칭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현대화''와 ''사회주의 목표'' 사이의 모순을 ''현대화''와 ''봉건''적인 이데올로기, 가치관 사이의 모순으로 지칭하는 것이었다. 毛澤東 시대의 경제적 침체, 정치적 독재, 문화적 몽매함을 질책하는 가운데, 현대화와 사회주의 목표 사이의 충돌을 ''문명''과 ''무지'', ''현대''와 ''전통'', ''계몽''과 ''혁명'' 사이에 있었던 충돌이라는 일련의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이로써 사회주의 현대화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효과적으로 회피하고, 단일한 현대화 과정으로 하여금 충분한 합법성을 획득하도록 만들었다. 대단히 효과적인 이러한 정치적 은유 전략은 80년대 사회의 기본적인 공통 인식으로 바뀌었으며, 인문지식계의 ''신계몽'' 완성의 공통적인 전제가 되었다.

이 문화혁명은 80년대에 파죽지세로 인문사상계의 ''위대한 문화진군''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는데, 그 비판의 창끝은 50-70년대 그 주류적 위치를 확보한 사회주의 현실주의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담론을 향하였다. 문화계는 전에 없이 주체적인 태도로 열정적이고 맹목적이면서 또 집착하여 새로운 지식 담론의 자원을 찾았다. 80년대 초중반, 19세기 인도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 인도주의가 가장 목소리가 큰 계몽 담론이었다. 그것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담론과 대립적인 상황 속에서 "동심원식으로 폐쇄된 사회 형태 및 역사 시기의 산물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80년대 동안 끝내 완성하지 못한 ''문학사 다시 쓰기'' 운동은 이 동심원식의 대립적 구조가 인문학 분야에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전체 사상문화계의 기본적 추구는 李澤厚의 유명한 언급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현대 중국은 ''구국이 계몽을 압도''한 역사이자 ''전근대''적 혁명이 ''현대적'' 계몽을 압도한 역사이다. 이로 인해 80년대는 무의식 중에 계몽을 구국의 위에 두었던 시대였다. 이와 더불어 인문학과 예술의 자율성 자체가 부단히 고조된 문학예술계의 갈망이 되었다. 문학, 영화, 음악, 미술 등은 모두가 불현듯 자기 본연의 면모를 발견한 듯이 ''자신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80년대 문화혁명의 행동 주체는, 50-60년대에 지식 체계와 정신 면모를 이룩한 후 ''다시 출현한 세대''(혹은 그 동시대인)과 홍위병운동과 하방운동을 경험한 지식청년 세대(혹은 그 동시대인)이었는데, 특히 후자가 한층 기세가 당당하고 문화사명감이 강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인도주의 담론은 새로운 지식 담론의 자원을 제공하였다기 보다는, 그저 50-70년대 주변적 지위에 처해있던 현대화 담론이 80년대에 이르러 한 차례 중심을 향해 찬란한 진군을 하면서, 일종의 비이데올로기적 호소와 면모를 보임으로써 그 만큼 더 강렬했던 이데올로기 담론있다고 할 수가 있다.

 

3. 80년대의 결말과 인문연구의 규범화

 

80년대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현대적 담론이 급격하게 확산된 시기이다. 위에서 분석한 것과 같이, 현대화 이데올로기에 충분히 합법성을 부여한 것은 보편적인 사회의 공통인식이었다. 즉 50-70년대의 사회주의 역사는 전근대적인 봉건시대였고, 80년대에 들어서면 현대화의 신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문지식계는 충분한 주체적 태도를 획득하였다. 즉 毛澤東 시대의 사회주의 현실주의의 고전적 담론의 한계를 넘어서서 부단히 새로운 계몽 담론을 찾아나갔던 것이다. 이는 경제, 정치의 현대화 개혁과 보조를 같이한 하나의 문화혁명 과정이었다. 80년대 인문학계의 ''신계몽'' 과정은 푸코가 묘사한 것 처럼 "일종의 시간의 불연속적 의식으로,

곧 전통과의 단절이요, 전적으로 새로운 감각이자, 사라져가는 시각과 마주하여 갖는 어지러운 감각이었다."

이런 현대성 확장의 과정이 80년대에서 90년대로 바뀌는 어금에 종결된 방식은 극히 검토해 볼 가치가 큰 사안이었다. 분명 이 과정의 종결은 고도로 상징화된 정치적 사건인 ''6·4''로 표현되는 바, 그것은 지식계와 정부 사이의 공개적인 분열을 초래하였다. 이런 분열은 통상 지식인과 정부의 대립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지식인의 민주 요구와 정부의 독재, 지식인의 전면 개혁 요구와 정부의 극좌 사상으로의 회귀 사이의 충돌이 그러하다. 그러나 핵심은 결코 그런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은 지식인의 민주에 대한 몽상의 파멸이라기보다는 80년대 지식인이 정부가 이미 확정해둔 민주의 한계에 부딪친 것이요, 지식인이 추진한 개혁의 중단이라기 보다는 지식인이 가진 개혁 이상이 중국의 실제 개혁 진전과 정면 충돌한 것이었다. 1989년 이후, 중국은 비단 개혁의 진전을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92년에는 오히려 전면적으로 개혁의 발걸음을 촉진하였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당대 중국의 개혁 과정이 시종 국가가 사회에 대해 충분히 제어하는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오늘날 중국에 존재하는 자본주의형 경제 관계가 주로 국가가 만들어낸 현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

鄧小平 시대의 공산당 국가가 毛澤東 시대의 공산당 국가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주인이다."라는 점에 있는 것이다. 설령 사회주의 목표가 먼 미래로 밀려났다고 하더라도, 사회 구성 방식과 경제 발전 방식은 오히려 "毛澤東주의 구제도의 합리적이자 정교한 재판, 특히 구제도 중에서도 소련에서 모방한 부분의 정교한 재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은 두 가지 면을 설명한다. 한편으로는 설령 80년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현대화 이데올로기에 자리를 내주었다하더라도, 국가 내부의 조직 방식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80년대 후에도 중국이 여전히 상당히 뚜렷한 사회주의적 특징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서, 당대 중국의 개혁이 단순히 자본주의화하는 과정(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적인 독특한 형태)으로 간주될 수 없도록 만든다. 다른 하나는 80년대의 개혁 과정이 결코 지식인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그들의 주도로 말미암아 진행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체적 위치는 한번도 국가 체제를 벗어나본 적이 없다. 이는 다시 말해서 지식인이 시종 국가의 체제 내에서 개혁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계에서 가졌던 주체적 감각과 주체적 태도는, 그들이 80년대 현대화 이데올로기의 주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정부에 대립하는 주체도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시종 일관 단지 현대화 이데올로기의 합법적인 선전자였을 뿐이다다. 혹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메가폰''이었을 뿐이다. 비록 그것이 고도의 주체적 감각과 주체적 태도를 가진 ''메가폰''이기는 했지만.

1989년 후의 중국 인문 지식인은 상당히 긴 시간동안 겪었던 고뇌는 바로 이런 주체적 형상이 산산조각난 것에 따른 고통과 초조함이었다. 90년대 인문학계의 여러 차례 논쟁과 논전은 모두가 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노력에 불과하다. ''신좌파''의 소리가 터져나오기 전까지 90년대 인문사상계는 줄곧 ''6·4''의 그림자하에서 혹은 피동적으로 혹은 능동적으로 인문학과 인문지식인 집단이 사회구조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재정립하고 있었으며, 인문지식인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80년대와 다른 해석과 실천을 행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해석과 실천의 기본적인 경향은 곧 ''80년대의 종결''을 추구하는 방식이자 일정 정도에서 인문학의 시스템화를 완성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분화는 인문지식인 집단이 사회 여론 공간에서 학술 기구로 물러서면서 각기 다른 규범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치 실천면에서의 보수성만큼은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그러한 분화는 대략 세 가지 담론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學人》 잡지로 대표되는 바 사상사에서 학술사로 전환된 토론이다. 이 토론은 표면적으로는 80년대 학풍이 공허함에 대해 반성하면서 학술 발전 내부에서 인문 연구의 내재적 법칙을 찾고자 시도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학자의 사회적 위치와 기능에 관한 재정립이었다. ''사상사''가 대표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태도였고, ''학술사''가 대표하는 것은 사회 참여로부터 조용한 서재로 되돌아가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실제로는 인문연구자들이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포기하면서 일종의 직업 윤리 규범으로서만 강조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의 선택은 특히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즉 20세기 중국 학술을 건너뛰어 곧바로 청말 이전의 학술전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태도는 실제로는 지난 100년간 중국 지식인이 비판적 기능을 추구해온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지식인의 의미를 그저 서재 속에서만 독립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담론 형태는 90년대 초기에 점차 확산되어, 한편으로는 ''6·4''의 충격으로 인한 지식인의 사회 관여에 대한 염증 정서에 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인문 연구의 직업화라는 시장 법칙의 적용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촉진하였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2000년의 ''長江 독서상''을 수상한 주요 논저들이 상당히 상아탑화되고 학술사적 특징을 가진 인문학 전문서로서, 기본적으로는 ''자유파''에 의해 공격당한 ''신좌파''적 이데올로기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2000년의 ''長江 독서상'' 사건은 신좌파에 대한 자유파의 공격이라기보다는 학원 시스템의 주류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신좌파 연구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구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는 학술 시스템내 인문지식인 집단의 지위와 이익에 대한 다툼이었다.

두번째 담론형태는 ''급진''과 ''전통''으로 불리는 충돌이다. 70-80년대의 사회적 전환은 상당 정도로 ''5·4''의 역사적 담론에 대한 차용에 의지하였다. 5·4의 역사적 지위 전통과 현대의 전환 를 차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신화라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로서 5·4를 이용하람으로써, 毛澤東 시대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민주'', ''과학'' 등의 현대화 담론에 합법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 같다. 5·4 이후의 중국 역사를 구국이 계몽을 압도하였다고 묘사한 것은 실제로는 혁명의 역사를 건너뛰어 계몽의 역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사회주의에서 신민주주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80년대 인문사상계의 문화적 진군의 이면에서 담론의 가장 큰 버팀목은 5·4 였다. ''6·4''의 실패는 5·4의 실패로 이해되었고, 더 나아가 전체 서방현대화 사상의 실패로 이해되었다. 급진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일층 후퇴하였다. 단순히 ''혁명''에서 ''계몽''으로 후퇴했을 뿐만 아니라, ''반전통적 계몽''에서 다시 ''전통''으로 후퇴하려는 것이었다. 웨버의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의 유행은 아시아의 유교 자본주의 국가가 성공적으로 현대화한 데 대한 관심 및 급진적 현대화 사조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90년대 초기의 ''전통문화 연구붐''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연구는 문제의 쟁점을 전통/현대 사이에 그치게 만들면서 현대 중국 역사 자체의 복잡성과 파라독스에 대해서는 충분한 토론이 결여되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 담론 자원은 중국 인문학계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지칭되는 ''포스트학''이라는 담론 형태이다. 그것은 포스트구조주의, 정신분석학, 서구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비평, 페미니즘, 제3세계 이론, 포스트식민주의이론 등을 포함하는 각종 이론을 광범위하게 지칭한다. 이와 같은 이론 계보는 그것이 더욱 용이하게 ''국제 학술 규범''과 궤를 같이 할 수 있는 담론형태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유학생들이 대거 본국의 학술에 개입함에 따라서 어쩌면 그것을 당대 인문학에서 가장 발전 전망을 가진 규범적인 담론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담론형태가 80년대에 확실히 일정 정도 80년대 이데올로기를 해석할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90년대에는 오히려 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됨으로써 ''포스트 모더니즘''이 현재의 인문학계에서 시종일관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의 명칭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런 이론 자원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50년대 중반에서부터 60년대 중반에 태어나고, 80년대에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80년대 중·후반에 역사적 무대에 등장한 세대 혹은 집단이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학문 집단은 영화 연구 분야의 젊은 학자들이었다. 60년대 이후의 서구 현대이론은 처음 영화 연구를 통해 80년대 중국에 전해졌다. 80년대 중반, 문학, 역사, 철학, 미술 분야에서 아직 대량으로 사회역사비판, 심미비판 등을 사용하고 있을 때, 구조주의·기호학·정신분석학·이데올로기비평·페미니즘·포스트구조주의 등의 비평이론은 영화 연구 분야의 젊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흡수하는 중요한 이론 자원이 되고 있었다. 그 영향은 영화 연구 분야에서 동시대 인문 연구 분야로 점차 확산되었고,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오는 시기에는 새로운 인문 비평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들 연구자가 취한 것은 서구 문화이론과 거의 동시적인 것이었다. 즉, 효과적으로 50-70년대의 사회주의 현실주의 담론을 해체했을 뿐만 아니라, 80년대의 새로운 주류였던 계몽주의 담론을 해체했다. 80년대 중반 劉再復이 "주체론"을 내놓으면서 인도주의적 시각에서 본질주의적 ''주체''라는 상상을 확립했을 때, 이들 젊은 사람 중 일부는 이미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의 기구》를 읽으면서, ''주체''란 단지 이데올로기 구조가 규정한 ''허상''일 뿐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예컨대 戴錦華가 1989년에 평가한 것처럼, "중국의 인도주의가 사람들에게 은밀히 동경되면서 호소력 있는 외침과 속삭임이 되고 있을 때, 일부 젊은 사람들은 방자하면서도 무시하는 듯한 어투로 ''인도주의는 이미 사망하였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80년대 문화에 의해 양성되고 문화적 진군의 물결 속에서 등장한 사람들로서, 운명적으로 담론의 해체라는 의미에서 80년대 문화의 공통인식 혹은 공감대를 종결짓고 그것을 누덕누덕한 누더기로 만들어버리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즉 그들은 80년대 문화 진군이 탄생시킨 문화의 종결자가 될 터였다.

우연만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바, 90년대 전반 중국사회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 위한 고통을 겪고 있는 전환기에 처해 있을 때, 주로 이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많은 ''후''니 ''신''이니 하는 것이 붙은 어휘로 80년대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80년대의 계몽담론을 매듭지으면서 가차없는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90년대의 사회환경에 대처할 때는 그 중 가장 높았던 목소리는 오히려 일종의 80년대의 방식있다. 즉 90년대를 모든 것이 전혀 새로운 ''신시대''라고 명명하면서, 80-90년대 지식계의 자아 형상 파멸의 곤혹감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90년대 사회현실의 합법성을 충분히 인정하였다(이 점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중국 인문 콘텍스트 속에서 비판을 받게 되는 주요 원인이다). 1993-1995년 인문정신에 관한 논쟁 과정에서, 일부 포스트모더니즘 연구자들은 상술한 방식으로 인문정신의 대립되는 면을 충당하였고, 이로써 ''포스트모던''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가 더욱 가중되었다.

여기서 거론해야 할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해체이론에 조예가 있던 다른 일련의 젊은 연구자들이 90년대 인문계에서 상당히 활발한 비판 집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왕왕 더욱 순수한 이론적 깊이를 지닌 연구자로 여겨졌는데, 알튀세·라깡·푸코·데리다·사이트·膽明信 등이 그들의 지식 계보와 이데올로기 비평의 주요 이론적 지주가 되었다. 그들은 이런 해체이론이 가진 비판성을 빌어, 90년대 중국의 성차별적 문화질서, 제3세계적 상황, 이데올로기의 함의, 대중문화 등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해체이론의 비판적 입장의 견지와 해체이론과 좌익문화자원 간의 친화적 관계에 대한 반성과 자각은 일련의 연구자들로 하여금 90년대 중국 인문학계 ''신좌파'' 중의 중요한 한 흐름을 구성하도록 했다. ''신좌파''로 불리는 연구자들이 ''신''으로 불리는 까닭은 주로 이 이론자원 때문이었다. 분명 이런 비판 입장의 획득은, 90년대 이후 중국 학술연구 및 국제 학술(미국, 유럽 및 일본, 한국, 대만, 홍콩 등 아시아 국가 혹은 지역)의 상호 활동과 상당히 명확한 관계가 있다. 혹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좌파는 80년대 후반 해체이론 집단 속의 돌연변이로, 국제 학술 기제와의 상호 교류 속에서 좌익적 입장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어느 면에서는 국제 학술이 당대 중국 인문학술을 반대로 재정립한 하나의 예증이다. 즉, 신좌파로 불리는 많은 학자들이 외국에 유학을 하거나 다녀온 후 비로소 ''좌익 입장''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론(정확히 말하자면 해체이론)이 90년대 인문학계의 이른바 ''포스트학''과는 다른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경향이다.

 

결론 : 비판성 사고의 가능성과 발판

 

본고는 90년대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향력 있는 인문사상 분화는 신좌파와 자유파의 논쟁 중에서 생성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이 논쟁이 인문사상계가 80년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오는 관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좌파의 소리가 나타남으로써 중국 인문학계로 하여금 당대 중국의 현대성 문제를 논의하는 현실적인 출발점과 핵심적인 고리를 찾아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당대 중국의 현대화와 사회주의 사이의 모순적인 결탁 관계를 새롭게 제기함으로써 문제의 논의가 상당히 효과적인 현실적(혹은 중국적) 입각점을 획득하도록 만든 것이다. 신좌파 중의 일부 연구자들은, "중국의 반제, 반봉건, 반자본주의적 논의"는 "얼마간 현대성에 대해 회의하는 문제적 공간을 지켜냈으며", "오직 이러한 위치에서만 비판의 가능성이 구체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대화와 사회주의가 한데 결탁한 이중 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새로이 사고하고, 중국의 현대화에 대해 부박한 추상적 사고를 피하면서, 문제의 논의를 구체적이면서 대상이 명확한 현실 상황 속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는 戴錦華가 말한 것과 같이, "유산이자 빚인 당대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가 현실 속에서 연기한 다중적 배역을 직시"하면서, 90년대 이래로 이미 전세계적 자본화과정에 깊숙히 빠져든 중국 현실을 사고하기 위해서, 필히 중시해야 할 사상적 자원인 것이다.

분명 이런 결론의 도출은, 인문학이라는 학문적인 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과 인문 지식인의 사회 비판 기능을 완성시키는 데도 그 의의가 있는 것이며, 인문 연구의 학문 분야 내부 토론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문 연구와 사회 참여 사이의 상호 관계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인문연구가 사회현실에 도달하는 또 다른 효과적인 경로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당대 중국 인문사상의 함축된 활력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본고가 20세기 최후의 논쟁이기도 한 90년대에 그친 것은 기본적인 의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신좌파와 자유파 사이에 제대로 된 사상적 교전도 없었고, 논쟁의 쌍방 모두 완결된 사상체계를 형성하지도 못했지만, 그러나 사상사의 의의에서 보자면 자유파와 대립면을 형성한 신좌파의 사상은 상당히 중요한 한 가지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곧 毛澤東 시대와 당대 중국 사회주의 역사문화에 대한 새로운 평가이다. 이는 어쩌면 인문사상계에서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래 처음으로, 증오감으로 50-70년대의 사회역사를 일거에 부정하지도 않고, 혐오의 방식으로 ''좌파'' 사상을 다루지도 않은 그런 일일 것이다.

사실 이른바 ''신좌파'' 집단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단지 인문학계에는 연구의 사고 방향만 존재할 뿐이다. 즉 현대화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새로이 사고하는 것 뿐이다. ''신좌파''가 ''구좌파''와 다른 점은 국가 구조 중의 정치집단(毛澤東주의를 견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역량은, 80년대에 ''개혁파''에 대해 상대적인 의미에서 ''보수파''로 불렸으며, 바로 이것이 ''구좌파''이기도 하다)이 아니라는 것이며, 毛澤東 시대의 유산에 대해서도 그들은 ''구좌파''와 같이 그렇게 정치적 신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방기하고, 마르크스주의(서구마르크스주의도 포함하여) 이론을 낡고 경직된 것으로 간주하는 주류 담론이 20년이 경과한 지금 다시금 나타난 좌익이기 때문에 이를 ''신좌파''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상 분야에서 신좌파는 시장에 대한 비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신좌파는 현재 중국의 주요 문제가 현대화(시장화)의 불충분이라고 보지 않으며, 그보다는 사회주의적 역사 경험을 결합하여 현재 중국의 현대화 과정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는 위에 새로운 제도의 창안 계기를 찾고자 한다. 이런 문제들에서 자유파는 대립적이다. 자유파는 오늘날 중국의 문제는 국가 권력이 시장에 대한 지나치게 관여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계속해서 제도 개혁을 추진하고 더욱 철저하게 시장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본다. 국가와 사회의 관계 면에서도 자유파는 중국의 주요 문제가 지금도 여전히 80년대의 문제 국가가 사회를 제어하는 것이며, 시장은 사회를 국가로부터 해방시키는 중성적인 역량이자 자동 조절 기제라고 본다. 그러나 신좌파쪽에서 보자면 오늘날 중국의 주요 문제는 국가와 사회의 충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이미 전세계적 자본 구조 속에 말려 들어갔다는 데 있다. 전세계적 자본 확산은 가장 긴박한 현실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공산당이 정권을 갖고 있는 국가가 자본화하는 과정에서 이미 갖가지 권력 관계가 침투한 공간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단지 국가/사회 사이의 충돌만을 고려해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가 현대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하나의 파라독스로서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신좌파와 자유파의 논쟁은 흐지부지 끝났다. 새로운 사상 자원을 내놓지도 못했고, 이른바 신좌파라고 불린 학자들과 그 연구 역시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며 게다가 내부적인 차이도 컸다. 그렇지만 신좌파 출현의 의의는 그것이 하나의 계기를 마련한 데 있다. 즉 중국이 현대화를 추구함과 동시에 사회주의의 역사 경험과 이상을 새롭게 사고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이는 다음과 같은 현재의 중국 사회현실을 여타 담론 유형에 비해 훨씬 효과적으로 파고 든 것이다. 즉, 한편으로 현재의 중국은, 예를 들면 도농간 차이의 급격한 확대, 농촌의 영락, 사유화 과정에 따라 갈수록 소멸되는 사회 복지, 노동자의 명퇴, 실업자의 급증, 자본 축적 과정에서의 원시적 착취 등등의 현대화 과정에서 부단히 확대된 사회적 불평등이 이미 간과할 수 없는 사회현실이 되었다. Maurice Meiser가 80년대 중반에 이미 예고한 것과 같이, "사회적 화해를 중시하고 일찍이 계급투쟁에 관한 毛澤東주의의 관점을 잘못되고 유해한 것으로 비판한 정권이 만일 진정한 계급투쟁이 불가피한 새로운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이야말로 비극적인 풍자일 것이다." 당대 중국 현대화의 현실은 이미 곤경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현대화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현대성에 대해 회의하는 문제적 공간을 제공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중국은, 당대 중국의 현대화가 현대화와 사회주의가 결탁한 두 차례의 혁명에서 시작된 과정을 새롭게 사고하는 가운데, 어쩌면 사회주의의 결함을 피함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모순도 피할 수 있는 성공적인 실천을 모색하는 데 대해서 상당한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독특한 현대화 상황으로 되돌아간다면 혹시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문 연구 분야에서 신좌파와 자유파에 관한 논쟁이 지난 간 후 생길 수 있는 일은 80년대의 ''문학사 다시 쓰기''(현대사 다시 쓰기)가 다시 한번 재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80년대는 (전근대적 봉건시대라고 불린) 혁명을 회피한다는 걸 전제하면서 비좌익적 역사와 문화가 갈수록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새로운 재연은 80년대의 ''반성''에 대한 ''재반성''일 것이다. 즉 현대 중국 역사 속의 진정한 무게 중심과 현대화의 내재적 논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대 중국 역사와 문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毛澤東 시대의 유산을 재평가하고, 현대화와 사회주의의 모순 관계를 다시금 주목하는 것이다. 어느 역사학자가 말한 것과 같이, 이 이전 毛澤東 시대에 대한 사고의 위험성은 그것이 역사적 사실의 거대한 오점 "그 혁명이 인류로 하여금 겪게 한 고통의 대가, 그 혁명이 범한 죄행"을 회피하고서 논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히 망각하고자 하면서 침묵하는 가운데 그 혁명의 거대한 성취를 간과"하는 데 있는 것이다. 아마도 90년대 중국 인문학계가 21세기를 위해 제공한 가장 가치 있는 사상은 바로 이 말 속에 함축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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