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05.01.04
수정일
2005.01.04
작성자
김혜준
조회수
1423

고운선, 정은아, <중국영화속에 반영된 문혁상>

                                                                                          중국영화속에 반영된 문혁상


                                                                                                                                                                         고운선, 정은아
                                                                                      


Ⅰ. ''78년 베이징 영화아카데미 문을 열다

A: 얼마전 TV연예가중계에서 중국의 장이모우張藝謀 감독이 현지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한국의 탤런트 김희선을 모델로 하여 TV광고를 찍는다고 떠들썩하게 방영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국가간 배우와 감독의 만남이라는 국제적 측면에서 관심을 끈 일이었겠지만, 특히 장이모우라는 국제 영화계에서 명성이 높은 감독이라 더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B: 그렇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유럽, 일본, 미국등지의 대중들은 장이모우의 영화를 통해 현재 중국대륙의 영화를 알게 되었을 테니까요. 저도 〈붉은 수수밭紅高粱〉이란 영화를 통해, 청롱成龍과 조우룬파周潤發가 출연하는 액션영화외에 다른 종류의 중국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A: 대륙영화가 각종 국제 영화제의 상을 휩쓴다고 워낙 떠드는 바람에, 저도 〈붉은 수수밭〉〈홍등大紅燈籠高高掛〉〈패왕별희覇王別姬〉등 국내에 비디오로 들어와 있는 중국영화를 제법 보았고, 또 영화잡지에 간간이 소개되는 감독 프로필과 영화평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지루한 감도 없지 않지만, 중국영화 매니아층이 생기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중국영화까지 굳이 구해서 보려고 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제 입장에서는 주로 작품을 통해 그들의 문화를 상상하죠. 근데,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제한된 화면을 통해, 한 나라의 문화·역사·인간의 삶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니까 훨씬 흥미롭더군요. 길어야봐야 2시간 내외이니, 짧은 시간 안에 많을 것을 배울 수 있어 효율적이기도 하구요. 근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장이모우나 천카이거陳凱歌같은 이들을 ''제5세대'' 감독이라 칭하는 것이 통용되고 있더군요. ''세대''라는 말에 주목해보면, 선대를 계승하고 후대를 연결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자연히 1-4세대와 6세대도 있겠군요?

B: 사실, ''제5세대''로 시작되는 세대구분은 누구에 의해서, 무엇을 근거로 나뉘게 되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그 출전을 밝히기 힘듭니다. 중국이 ''죽의 장막''으로 불린 이래, 해외 영화제에 출품된 첫 작품은 천카이거의 〈황토지黃土地〉(1984)입니다. 중국영화가 자유주의 국가들이 참가하는 영화제에 출품됐다는 자체가 관심거리였는데요, 이것이 로카르노 영화제와 낭트3대륙 영화제에서 수상하자, 1985년 홍콩 국제영화제에서 다시 상영됩니다. 영화의 심오한 주제와 뛰어난 형식을 통해, 사람들은 ''중국 내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변화는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당시 ''홍콩신문''상에 처음으로 ''제5세대''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토니 랭Tony Rayns은 중국 영화사를 나름대로 정리하는 와중에, "1982년 베이징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다수의 젊은 영화감독들이 중국에 "새로운 물결"을 형성했고, 이들이 연출과 제5회 졸업생이었으므로 그들을 ''제5세대''로 부르게 되었다."고 정의하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이 명칭은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화되었는데, 중국영화 감독을 대상으로 한 ''세대구분론''은 현재 일종의 학술용어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A: 장이모우나 천카이거가 문혁종식 후, 첫 대학입시 세대라는 것은 들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황토지〉의 황색이나 〈붉은 수수밭〉〈홍등〉〈국두菊豆〉의 붉은 색으로 대표되듯이 강한 색채와 독특한 구도를 사용한 영상미의 추구가 전 세대와 다른 혹은 중국 영화사의 전환점이 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도 하더군요. 그런데, 〈향혼녀香婚女〉(1992)를 제작한 시에페이謝飛의 활동기간은 5세대들과 같은 시기였지만, 작품 경향상 4세대 감독으로 분류하는 걸 보면, 영화의 테마와 내용·형상화 수법·영화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B: 이른바 ''세대구분법''은 학술상의 편의를 위해 일반화되어 있는 정도이지, 그 기준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1세대는 1905∼1920년대 무성영화 시기의 감독들을 가리키며, 1930∼1940년대 유성영화 시기의 감독들은 제2세대에 해당됩니다. 1950∼1960년대 "예술적 성과보다는 정치적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교육받은 감독들은 제3세대, 1960년대에 베이징 영화아카데미를 수학하고 1970년대 말에 활동을 시작했던 감독들은 제4세대입니다. 3, 4세대 감독들은 영화에 관계된 지식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념론·당사까지 배워야 했다고 합니다. 정부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교육받아서 그런지, 개인성과 정치성을 잘 융합시킨 멜로 드라마가 주요한 특징이죠.

A: 1978년 대입을 치르고 1980년대 중반에 작품을 내놓은 장이모우·천카이거·티엔주앙주장田壯壯등이 바로 제5세대 감독들이겠군요. 이들은 기존 영화의 멜로드라마적 분위기를 전복시키고, 영화가 지닌 영상적 매력에 초점을 돌린 세대이기도 합니다. 제작 당시의 정치 현실로 인해, 영화의 주제를 고대의 환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제한을 벗어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법은 오랫동안 누적된 이데올로기 문제를 깊이 파묻어 버리는 동시에, 중국인의 민족성·중국문화의 전통·중국의 다양한 사회·문화에 대한 사색과 고찰을 시각언어로 전환시키는 데 공헌하기도 합니다. 제6세대 감독은, 1990년 전후 베이징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영화소로 배치받을 시에, 1989년 6·4 천안문 사건을 겪은 세대라고 합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정책하에 ''검열과 자본난''의 이중고를 겪으면서, 다큐멘타리식 독립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특징이지요.(여기에서는 각 세대별 감독의 이름은 나열하지 않기로 한다. 초기 중국의 영화산업에 관심있는 분들은, 국내에 비디오로 소개되어 있는 1991년에 발표된 홍콩영화 〈완링위阮玲玉〉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고 보니, 세대별로 서로 다른 역사적·문화적 경험을 가지고 있군요.

B: 하지만, 개별 작품과 감독들의 인터뷰 자료를 보면, 같은 세대라도 감독별로 다릅니다.  "우리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각기 다르다. 그 좋은 예가 나와 티엔주앙주앙이다. 그의 촬영에 대한 발상과 일하는 방법은 나와 다르다."(천카이거), "제가 잘 아는 천카이거나 장이모우 감독이, 스스로 서방의 평론가나 관객들을 의식하여 잘 보이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기는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볼 때, 그들 자신에게는 그런 심리가 전혀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을 내부에서 충동적으로 느끼고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서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이미지나 힘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지 일부러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제가 영화에서 추구하는 것은 사실적인 것이며 내용 자체에 뚜렷한 풍자나 비판이 들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회 속에 존재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찍어내면 바로 그 안에 강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잘 표현해내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티엔주앙주앙,《KINO》,2000/6)
정치적 변화가 각 분야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국적 상황에서는, ''세대구분법''이 큰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일목요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영화사적 측면에서 활용해도 괜찮을 듯 합니다. 물론, 앞으로의 발전사항을 주시하며 이후에도 이런 방법을 계속 적용할 것인가는 남겨둘 과제구요.

A: 〈푸른 연〉(1994)〈패왕별희〉(1993)〈인생活着〉(1993)〈햇빛 쏟아지던 날들陽光燦爛的日子〉(1995)을 보면서, 문혁을 어떻게 보는가가 그들의 화두인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10년 대란"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만큼 국·내외의 역사적 배경과 권력층, 그리고 10억 인민들이 함께 연루된 전국가적 사건일텐데,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는 중국에서 이런 영화가 계속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놀랍기도 합니다.
한편, 그런 측면에서 이상한 점도 느꼈는데요...1978년 12월 18일에 개최된 당 제11기3중전회는, "과거 문화대혁명 10년간은 마오쩌동毛澤東의 좌경착오노선이었다"는 것이 덩샤오핑鄧小平을 통해 공식 발표되고, ''계급투쟁''을 중지하고 ''사회주의 현대화 노선''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한 역사적 대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동안 문예계를 떠나야 했던 인사들이 복권되었고 창작이 활성화되어 문예계는 해빙기를 맞는 듯 했지요. 그런데, 군문예계에 소속되어 있던 극작가 바이화白樺의 영화극본 〈쓰라린 사랑苦戀〉이 영화화되었을 때, 이것의 상연을 놓고 군선전부가 고민하다가 결국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던 덩샤오핑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근데, 이 영화를 보던 덩샤오핑은 "이것은 마오쩌동에 대한 부정뿐 아니라 사회주의마저 부정하는 작품이다"라며 크게 격노하여 퇴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1979년 제4차 문대대회에서 덩샤오핑은, ''광대한 인민을 위해 봉사하되 우선적으로 노농병을 위해 봉사해달라는 것''과 ''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해 봉사해 달라는'' 두 가지 조건만은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후, 이와 같은 영화는 국내 상영이 통제되어 금지당하거나 재수정해서 개봉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정작 현 중국당국의 태도를 보면, 영화 감독들이 해외자본과 손잡는 것은 방임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이를 통해 해외 영화제 수상을 권하는 듯한 느낌도 들구요.

B: 국내에 소개된 최초의 문혁소재 영화로, 시에진謝晋이라는 원로감독이 제작한 〈부용진芙蓉鎭〉(1986)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국내에 소개되자,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는데…''하며 호응 반 부러움 반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국내 관객은 8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오버 랩시켜 관람하기도 했겠지요? 〈부용진〉은 구화古華라는 작가의 장편소설(1981년)이 원작입니다. 불행했던 역사적 시기를 소재로, 지난날에 대한 반성·회고·재평가를 담아내고자 한 점이 높이 평가되어, 제1회 마오뚠茅盾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지요. 문혁으로 인한 상처와 호소를 넘어서서, ''어떻게 하여 이렇게 되었는가''하는 문제까지 언급한 것을 보면, 그만큼 작가가 그 사건에 대한 거리두기를 했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또, 이것이 영화화 되었을 때, 1억이 넘는 중국 사람들이 관람하였다고 하며, 동유럽을 비롯한 세계 50여개국에 수출 되었다는군요. 감독 역시 당의 부름에 응해 이것을 제작하였구요. 이러한 모든 상황은 곧, 문혁 종식후 당과 인민들이 가장 먼저 가졌던 공통된 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데...혹, 방금 가졌던 의혹을 푸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요?


Ⅱ. "이제는 남을 고발해야 살 수 있다"

A: 〈부용진〉을 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남자배우가 등장하던데, 알고보니 〈붉은 수수밭〉에서 궁리鞏利와 호흡을 맞추기도 한 지앙원姜文이더군요. 어떤 영화인지 대충의 줄거리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B: 이 영화는 1963년 중국 남방의 부용이라는 시골마을을 무대로, 주인공인 후위인胡玉音과 남편인 리꾸이꾸이黎桂桂가 경영하고 있는 쌀두부를 파는 노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위인이 소규모 장사였지만 이윤을 추구했다는 명목으로 자본주의자로 몰리게 되자, 부용마을의 식량사무소 주임인 구옌샨谷燕山은, 곡물 제공껀으로 연루되어 상부에서 파견된 리꿔시앙李國香에게 실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당원이자 한때 연인이기도 했던 리만껑黎滿庚은 자신의 지위와 가정 때문에 위인을 고발하고, 남편은 공무당원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결국 죽게 되지요. 이후 위인은 거리를 청소하며 세월을 보내야 했는데요, 문혁을 겪으면서 이전에 이미 반동파로 찍혔던 친수티엔秦書田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위인이 아이를 가지게 되어 결혼신고를 하고자 했지만, 허가서는 고사하고 친수티엔의 하방이라는 판결만 나오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1979년, 위인으로부터 이전에 압수했던 집과 1500원을 돌려주겠다는 상부로부터의 통보가 전해지고, 하방되었던 친수티엔도 돌아오게 됩니다. 이들은 눈물속에 해후를 하며 다시 쌀두부 장사를 시작하고, 구주임과 리만껑도 복귀되어 부용마을은 안정을 찾아간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A: 저는 우선 대중집회를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처음에 친수티엔이 선두가 되어 호명을 하고 경례를 하는 장면은, 스토리 전개 이전 시기에 이미 우파로 찍혔던 사람들의 당시 처우를 보여주는 경우였습니다. 몸이 아픈 노인이 손자를 대신 내보낸 장면에서, 한번 우파로 찍히면 자신과 가족이 그 마을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두 번째는, 리꿔시앙이 후위인 부부를 대상으로 부용인민공사에서 경고성 집회를 여는 장면이었습니다. 우파인 친수티엔을 본보기로 으름장을 놓은 뒤, 만껑과 구주임을 대상으로 일부 당원들을 운운하는 장면 말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직접적으로 지명하여 비판을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B: 저도 구주임이 듣다못해 소변보러 가야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리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그때만 해도 대중집회에서 상부의 지시에 대한 공포심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A: 하지만, 그 이후부터가 본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당원이기도 한 리만껑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죠. 그리고는 자신의 신변과 가족의 안위에 영향이 미칠 것임을 두려워하여, 위인이 맡긴 1500원을 리꿔시앙에게 고발합니다. "이제는 남을 고발해야 살 수 있다."는 만껑의 대사에서 상황이 변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B: 대중집회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홍위병이 마을에 당도하고 리꿔시앙이 실권했을 때의 장면도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홍위병 자신들은 비를 피하면서도 친수티엔과 후위인, 그리고 리꿔시앙을 빗속에 세워둔 부분 말입니다. 더군다나 리꿔시앙에게는 목에 장화(신발은 부정한 여인이 상징)까지 걸게 하고서 말이지요. 리꿔시앙이 거부하면 그들은 "감히 반항을 해!"라고 하며 손에 혁대를 들고 위협을 가하더군요. 겨우 17,8세에 해당하는 앳된 얼굴의 홍위병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을 관장하던 당 간부에게 말입니다. 원작에서는 배식시에 ''검은 요괴(문혁때 반혁명 세력으로 몰린 사람을 가리키던 말)의 춤''을 춰야만 밥을 주었다고 묘사되기도 합니다.

A: 네, 이런 것들을 두고 문혁의 광기라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푸른 연〉에서는 학생들이 교장 선생님을 단상으로 끌고가 머리를 자르는 장면으로, 〈패왕별희〉에서는 평생을 같이해온 두안샤오로우段小樓(패왕 역)와 청디에이程蝶依(우희 역)가 서로를 반동이라 비판하는 장면과 아내인 쥐시엔菊仙마저 기생(문혁당시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은 四舊로 타도의 대상이었음)이라 비판해야 했던 장면으로 표현되더군요. 화면상으로 너무 격정적으로 고발하고 성토하고 있어, 문혁은 인간의 삶을 말살한 잔인한 운동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B: 이것을 통해 문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친수티엔과 위인이 결혼을 허가받지 못하고 하방될 때의 대중집회를 예로 들어봅시다. 우파와 자본주의자라는 이유로, 결혼은 커녕 위인에게는 3년형, 수티엔은 10년 동안 하방시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들을 도와줄 경우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놓지요. 자신들의 눈밖에 난 사람들은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이에 동조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왕따시켜버렸던 것입니다. 만삭인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청소하는 위인을 남몰래 도와주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어쨌든 각자 알아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했던 것은 무리에서 소외되는 공포였군요. 언젠가, 문혁 당시 대중을 움직인 동력은 ''혁명''이라는 명분이라기보다, 대중들 자신의 실제적 이익이었다고 하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천카이거는 자서전에서 "나도 나의 집이 당하고 난 뒤에야, 간신히 카키군복을 입고 붉은 완장을 팔에 찬 채,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채 무언가 자기도 동료로 보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예순 다섯 살에 간신히 공산당에 입당했다. 아버지의 웃는 얼굴은 마치 원하던 축구팀에 들어가게 된 소년의 좋아하는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어느 영화감독의 청춘》, 푸른산, 1991, p.118)라고 기술하였는데, 그처럼 간신히 실현된 30년만의 입당은, 결국 심리적인 안정 외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던 거지요. 집단에 소속되지 않으면 자기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을 테니, 권력 쟁탈과는 상관 없었던 당시 인민들에게 이것만큼 손해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B: 문혁 시기의 대중운동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던 만큼, 지역에 따라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의 특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단지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독단적 질서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이 가장 독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죠. 중국 공산당은 ''49년 이후 경제정책에 효율을 도모하기 위해, ''대중 차별화 정책''이라는 것을 고안했습니다. 일반 대중들의 계급은 출신성분과 당에 충성하는 정도에 따라 유동적이었고, 사회 상층부는 정치 엘리트(정부 수립자)와 기능 엘리트(구 지식인)로 나뉘어 서로 불만을 쌓아가게 됩니다. 결국, 상하층은 각각의 갈등 속에서 불안한 균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인데요, 상층부가 권력투쟁을 시작하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결국 문혁 때의 과격한 군중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Ⅲ. 남자는 청소할 때 여자를 위해 왈츠를 춘다

A: 영화에서 친수티엔의 형상을 특이하게 보았는데요, 반동분자에게 연락을 담당하거나 벽보를 쓰고, 거리를 청소하거나 남의 집의 잡일을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해가는 듯 했습니다. 한편, 남의 집에 대련을 써주고, 새집에 장식하는 도공일을 해주기도 하고, 위인의 결혼식때는 가무단을 직접 지휘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웬만큼 글과 예술을 아는 인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즉, 해방군 세대인 구주임과도 다르고, 농민층에 해당하는 위인과도 다르고, 또 문혁때 자기 세상을 만나 설쳐댔던 왕추셔王秋赦와도 다른 인물로 비치던데요.

B: 소설 속에서 그의 경력을 보면, 한때 중학교에서 음악과 체육교사를 하였으니, 일종의 지식인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중국은 정부가 수립(1949. 10. 1)되기 전에 벌써 1949년 7월 2일에 중화전국문학예술계연합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둘러 문예단체부터 조직한 이유는 대략 3가지로 추려집니다. 1927년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주로 농촌을 중심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였고, 이것을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함으로써 농민들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1949년부터 정치활동의 무대를 도시로 옮겨야 했는데요, 당시 공산당을 잘 알지 못했던 도시인들에게는 농촌과는 다른 선전공세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효율적인 방법으로 도달한 결론이, 문예계를 통한 신정부와 공산주의의 선전과 도시인들의 자발적인 지지 유도였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소부르조아 계급을 포섭하기 위해서 였을 겁니다. 무산계급 독재정권이라고는 하지만, 도시를 구성하는 주요계층이 소자산계급임을 감안할 경우에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지식계급이 소외계층이 된 적은 없었으니, 만약 공산당이 노동자·농민·병사등의 혁명주체에 속하지 않는다고 이들을 소외시켰다면 그 여파가 어땠을지는 모를 일이지요. 마지막으로, 문예계 인사들의 포섭과 통제를 위해서였을 겁니다. 소련의 정책을 모방하여 일찍부터 문학예술을 정치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이들이 펜을 가지고 소외계층으로서의 불평을 문장으로 발표할 시에는, 언제고 통치계층을 곤혹스럽게 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아마 선수를 쳐서 통제하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이것은 친수티엔으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이, 왜 그렇게 오랜 세월에 걸처 박해를 받아 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겠지요.

A: 주인공인 후위인은 강한 여성상으로 묘사되더군요. 전 남편인 리꾸이꾸이가 당 간부의 한마디에 주눅들었을 때, "이 정도 일에 이렇게 겁먹으면, 이보다 더한 일이 닥치면 어떻게 감당하려 하느냐?"하던 씬이 한 예가 되겠지요. 또, 친수티엔의 하방 앞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비록 짐승의 대우를 받더라도 끝까지 살아 남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할 때에는 강인한 생명력, 삶에 대한 의지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했었는데요.

B: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그야말로 "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일하는" 중국의 인민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은 여린 듯 하지만, 재산을 몰수당하고 거리를 청소하는 죄인이 되어도, 만삭의 몸으로 3년형을 선고받으면서도, 이를 악물며 끝까지 살아 남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지닌 인물로 묘사되지요. 비록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끼쳤던 역사가 정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역사는 근면한 인민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결말은 ''되돌아보기 문학''의 공통점이자 한계점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수난과 고통을 겪고서도 변하지 않는 조국에 대한 신뢰와 조국의 부강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지요.

A: 참, 리꿔시앙이라는 당간부의 형상도 인상깊었습니다. 문혁 때 홍위병에게 잠깐 당한 것 말고는 계속 지위를 유지하더군요. 마지막, 친수티엔이 하방에서 돌아오는 장면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깔끔한 중산복에 검은 승용차를 타고 등장하지 않습니까? 단지 이기적이며 권력욕에 충만한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약할 정도로, ''좌''라는 이데올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더군요. 위인·수티엔과 함께 홍위병에게 모욕을 당할 때 "난 반동분자와 같이 서 있을 순 없다."고 하고, 그들이 위로차 말을 걸었을 때 "넌 반동우파야!"라고 끝까지 자신은 그들과 다름을 주장하지요. 그런 그녀가 계속해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용인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사실, 정치운동으로 인해 초래되는 문제중 가장 심각한 것은, 이와 같은 사회적 정체성의 위기와 공동체의 정신적 상처가 아니겠습니까? 파장의 확대와 치유에는 오랜 시일에 걸친다는 점에서.

B: 영화의 첫 장면에서 무위도식하던 왕추셔는 결국 나중에 미치광이가 되더군요. 어찌보면, 왕추셔야말로 계몽되고 혁명의 주체로 변화되어야 할 무산계급층이 아니겠는지요? 그런데 실체를 파헤쳐 보면, 무산계급이 주체가 되는 국가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왕추셔와 같은 인물은 지난잘 표현이 금기시 되었던 건달 부랑자형의 무산계급입니다. 이전에는 당의 문예강령에 의해, 이런 인물들이 어느 날 계몽되어 혁명에 앞장서는 것으로 묘사되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인물도 따지고 보면 동정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지만, 무위도식하고 정책이 바뀔 때마다 박쥐처럼 행동하며,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같은 계층의 사람을 핍박하는 형상에는, 아무리 무산계급 국가라 해도 그의 편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이 요구했던 무산계급 형상도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겠지요?

A: 비록 이 영화가 중국의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인상깊게 남았던 장면으로는 위인과 수티엔 두 사람이 다정하게 거리를 청소하던 것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가장 고통스러웠을 두 사람이 오히려 남의 간섭없이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었던 시기로 각인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B: 실제 원작에서는 폭우가 쏟아지던 날 두 사람이 비를 피하다가 우연히 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어느 정도 멜로 드라마적인 요소를 잘 활용했다고 볼 수 있죠. 집앞에 나란히 놓여진 한 쌍의 빗자루는, 함께라면 고난도 힘겹지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씬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요, 이로써 위인은 열심히 살던 시절의 행복을 상징하던 쌀두부를 다시 빚게 됩니다. 수티엔이 하방된 뒤에는 혼자 아들을 키우며 묵묵히 세월을 기다리구요. 이와 같은 가족간의 사랑은, 〈푸른 연〉에서도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으로 표현되는데요, 중국인들은 결국 10년이란 세월을 사랑에 의지해 버텨왔음을 전하고자 했는지도 모르지요. 시에진의 연출노트를 참고로 하면, "〈부용진〉은 내가 문혁 때 겪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그 시기에 나는 거리의 청소부였다. 중국의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은 모두 청소부, 농사꾼, 막노동꾼, 운전수등의 일을 했다.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점점 가까워지고, 계절은 조금씩 변해간다. 남자는 낙천적이지만 여자는 비관적이다. 남자는 청소할 때 여자를 위해 왈츠를 춘다. 문혁이 비록 힘들었지만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고 하여, 역사를 반영하는 와중에 사랑·가정·권선징악이라는 요소를 적절히 첨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티브는 후위인의 사랑을 지켜갈 수 있는 원동력도 되면서, 영화와 관객간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도 하겠죠.

A: 〈부용진〉이 바라본 문혁은, 시에진 스타일이 많은 영향을 미쳤겠지만, 결과적으로 낭만적으로 표현된 한계점을 지닌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비판의 시점이 과거에만 머물며,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은 인민들의 건강하고 긍정적인 삶을 그려낸 결과, 역설적이게도 덩샤오핑의 신 정권을 선전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구요. 개인과 역사의 대결이 등한시 됨으로써 주체적 힘에 대한 인식이 표현되지 못한 측면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B: 문혁이 〈부용진〉을 비롯한 〈패왕별희〉속에 비장감 넘치는 화면으로 이미지화되는 것은, 문혁의 성격이 건국 이후 신중국에 내재된 모든 문제들을 분출한 비극적인 사건이라는 역사 인식의 연장선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5세대의 것이지만 문혁의 폭력성을 진지하게 반추한다는 점에서 〈푸른 연〉 역시, ''되돌아보기(反思) 문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확실히 4, 5세대 감독들의 문혁 관련 영화는 무겁고 침울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최근에 나온 〈햇빛 쏟아지던 날들〉은 밝은 화면으로 처리되어 대조적입니다. 문혁을 주제로 하면서도 성장영화로 해석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선배들의 심각하고 정치적인 문혁 이미지를 전복시키지요.


Ⅳ. "나의 기억이 정확한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B: 〈부용진〉에서 친수티엔으로 열연한 지앙원姜文이, 1994년 왕슈어王朔의 소설 〈동물은 사납다動物凶猛〉를 각색한〈햇빛 쏟아지던 날들陽光燦爛的日子〉로, 감독 데뷔를 했더군요. 우선 대략의 줄거리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이 영화는 성인이 된 주인공 마샤오쥔馬小君의 나레이션으로 진행이 되는데, 배경은 문화 대혁명이 한창 진행중인 1970년대 여름입니다. 아버지는 출신성분이 나쁜 장인(지주출신)을 둔 덕에 외지로 떠도는 인민해방군으로 시골로 좌천당하여 떠났고, 어머니는 지주인 외할아버지 때문에 교사직을 박탈당하고 사상 개조를 위해 매일 노동을 나가게 되어 자유를 얻게된 주인공 마샤오쥔. 그는 전쟁 영웅을 꿈꾸지만 그는 뒷골목 불량 청소년의 한 명에 불과합니다. 소년은 온갖 자물쇠를 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낮동안 집에 어른이 없으므로 아버지 책상 자물쇠를 열고 아버지의 훈장과 견장등을 옷에 달고서 전쟁 놀이를 하곤합니다. 그러다 이에 싫증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의 집 자물쇠는 여는데 성공을 하게 되죠. 어느 날 항상 자물쇠만 열다가 무엇엔가 홀린 듯 붙박이 열쇠를 열게 됩니다. 그 집에 들어가 구식 망원경을 발견, 신기한 마음으로 거기에 눈을 갖다대고는 넓은 집안을 휘둘러보던 중 벽에 붙어있는 소녀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 소녀 미란을 짝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날 우연히 소년이 짝사랑하는 연정을 품게된 소녀 미란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친하게 되죠. 소년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이 겪은 일에 덧붙여 자신이 영웅이 된 양 모든 일을 부풀려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패거리들에게 소개해 주던 날 미란에게 잘 보이려고 아주 높은 굴뚝에서 뛰어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출신 성분이 나쁜 지주 출신의 외할아버지가 핍박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게 되고,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시골에 가게 되지요. 그 사이 미란은 자신의 패거리 대장격인 유의고와 사귀게 되었고, 서서히 소년의 가슴 떨리는 첫사랑의 색깔이 퇴색되어 가면서 소년들은 성장하게 되어 북경의 대로를 롤스로이스를 타고 나타나게 되면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B: 영화의 도입 부분에서, "아버지는 가셨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나는 항상 그런 부류의 아이들이 부러웠다."고 하는 나레이션이 흥미로왔습니다. 그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문혁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말이잖습니까? 이를 통해 역사는 의도적으로 배제되는 듯 합니다. 또, 주인공이 어른이 아닌 아이라는 점에서 더욱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죠.

A: 이 영화는 앞에서 살펴본 〈부용진〉과 달라서, "문혁"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지앙원은 이전 세대처럼 역사를 서술하려 하지않고, 영화의 이미지를 통해 역사를 보여주려 하기도 하구요. 그 시기 출신성분이나 권력의 중심에 반대하는 자들은 하방당해 암울한 시기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중심부에 있지 않고, 하방도 당하지 않은채, 권위와 진지함을 내세우는 어른들의 제재도 받지 않는 "텅 빈 도시"에 남아있던 세대들에게 "문혁"은 다르게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B: 겉으로 보기엔 그냥 아름다운 하나의 어릴 적 추엄담만이 존재합니다. 화면 내에서 표현되는 아름다운 배경과 서정적인 일상들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가능했던 것인지 의식스러울 정도로요. 이러한 어릴 적의 천진난만함과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은, 문혁과 같은 대격변조차 얼마나 (주인공을 중심으로 했을 때)주변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상적인 삶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문혁은 영화의 전편에 걸쳐 단지 배경묘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습니다. 혁명가요와 높은 톤의 뉴스소리가 외부 세계와 〈햇빛 찬란한 날들〉이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되지요. "5세대 감독들은 문화혁명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화를 보면 문화혁명에 대한 뿌리깊은 기억을 정확하게 묘사한 대목이 많은데, 6세대 감독들은 자신의 성장기에 인상 깊었던 것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대여섯살 때 문혁을 경험했던 우리들은 5세대에 비해 비교적 행복한 삶을 누렸다."(딩지엔청丁建城, 《KINO》, 2000/11) 이러한 점에서, 지앙원은 5세대 감독의 문혁 인식과 상당히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 참, 영화 중간 부분에서 마샤오쥔의 무리가 옆 동네 건달들과 패싸움을 하려고 철길 아래 모였을 때, 결국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양쪽 대장들의 화해로 싱겁게 끝나던 장면이 생각나십니까? 원작자 왕슈어가 우정 출연 하였더군요! 1992년 ''왕슈어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작가인 그는, 영화속의 마샤오쥔과 비슷한 인생을 살았더군요. 의사인 어머니와 행방군 정치대학의 교원이었던 아버지 하에 태어나, 먹고 사는 것에 대한 큰 근심없는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때 발발한 문혁으로 인해 무너진 생활질서와 기존의 가치관념을 바라보면서,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왜, 영화에서도 잠깐 나오지 않습니까?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책상위를 뛰어다니고, 능청스럽게 선생님을 골리는 가하면, 수업도 자주 빼먹고 하는 장면들 말입니다.

B: 저도 그런 장면들에서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무의미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삶에 대비해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상궤를 벗어나는 일탈적인 경험들만 두루 섭렵하지요.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고상하고 엄숙한 것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을 표시합니다. 마샤오쥔이 망원경으로 선생님이 담벼락에 실례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시원하시겠습니다!"하고 낄낄대는 장면이 한 예가 될 것입니다. 또, 마샤오쥔 무리가 괜시리 대사관 앞에 있다가 공안에게 끌려갔다 온 뒤의 장면도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그 앞에서는 비록 쩔쩔맸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혼자 거울을 보며 공안들을 흉내내며 조롱하지 않습니까? ''건달''과 조롱이나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가 왕슈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는데, 영화를 이해하는 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A: 마샤오쥔의 일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더군요. 붉은 기를 들고 혁명가요에 맞춰 "환영, 환영, 열렬히 환영"하는 단체활동이나 친구들과 어울릴 때의 모습도 있고, 카랄레리아 루스티카나라는 오페라 곡을 배경으로 지붕위를 뛰어다니거나 자전거에 좋아하는 여자애를 태우고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았습니까? 문혁기에 마샤오쥔과 비슷한 연령이었던 한 지식인은 자신의 일기에서, 끊임없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고민과 마오 주석에 대한 외경심이 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마샤오쥔의 삶에서 혁명과 가족이 모두 주변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어쩌면 저항적이고 예외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곁가지에서 뜻밖에 출현하게 된 사적 공간이 한 소년의 성장 과정을 통해, 중공 수립이후 철저하게 부정되어온 사생활의 재발견이라는 의미를 갖는 거지요. 역사의 개입은 지극히 제한적인 영역에서 의미를 가지구요.

B: 영화상에 간간이 등장하는 약간 정신이 모자란 듯 항상 쇠뭉치 막대기를 타고 다니는 "고화목"도 특이하던데요, 그가 처음에는 "고화목"하면 그저 "우바"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잖습니까? 그런데 마지막에 소년들이 성장하고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어 롤스로이스를 타고 북경 대로를 지나가다, 그를 보고는 "고화목"하고 부르자, 그는 서슴없이 그들을 쳐다보면서 "바보"라고 대답하지요. 견강부회인지는 몰라도, 정해진 말만을 해야했던, 아니면 차라리 침묵함만 못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장면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바보"라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요.

A: 저는 소년이 남의 집 자물쇠를 열 때 "찰칵"하고 나는 소리에, 소년과 똑같은 희열감과  무언가 답답한 것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듯했습니다. 스토커적인 엿보기와 공장 굴뚝에서 뛰어내리기, 끊임없는 말썽과 기성 교육체계에 대한 거부, 당성을 말하는 엄격한 당 간부가 보는 성인영화 엿보기등의 희화적이고 반권위적인 행동이 젊은 날의 추억으로 채색되고 있어서,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고 인상깊은 에피소드로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지앙원이 바라본 문혁은, 결코 살아남은 자들이 슬픔을 투사시키는 대상으로만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 속에 철저하게 내재되어 있으므로 새롭게 재해석될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지요.

B: 저도 마샤오쥔이 미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굴뚝에서 뛰어내리던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어느 순간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고, 그의 기억이 실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나레이션이 나오며, 그가 지나치게 미화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합니다. 동네 패거리들과의 무용담도, 이성에 눈뜨게 해준 여인의 존재도 실제인지 만들어진 기억인지 모호한 모양새로 뒤죽박죽 헝크러 버리죠. 영화의 제목처럼, 강하게 내리쬐던 햇살 사이에서 헛것을 보듯, 그는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있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과 사실사이의 유리 사이에서 영화는 아름답게 각색된 셈인데요, 우리의 기억이란 실제 사실위에 자신의 강렬한 욕망이 덧붙여져 곧잘 변조되게 마련임을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결과적으로 소년의 그 아름답던 여름날의 추억은 편집된 과거에 불과하게 되지요.

A: 마지막에 소년들이 자라서 롤스로이스를 타고가는 장면도 자꾸 되씹어 보게 됩니다. 흑백으로 처리된 점도 그렇고...롤스로이스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최고 위치에 있는 자본가들의 소유이잖습니까? 그런데, 소년들은 청소년기에 문혁이라는 혼란기를 거쳤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대비도 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타고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하긴, 문혁 시기에도 이들은 무리를 지어 ''모스크바 식당''과 같은 호화 레스토랑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이 돈의 출처는 알 수 없었습니다. 화면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그들의 자동차에는 모택동 사진이 마스코트로 붙어있고, 비록 "우바"에서 "바보"라는 말을 할 줄 알게 된 고화목이지만, 여전히 나무를 끌면서 거리를 배회하고 있고....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변한 것도 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기억의 모호함과 원작에는 없는 이러한 장면에 제대로 걸려든 듯합니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보다가 끝으로 갈수록 "그럼, 내가 본 것은 뭐지?"하는 생각이 들게하니 말입니다.

B: 모든 것을 다 해석해낼 수는 없겠지요. 더군다나 우리들은, 영화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중에서도 일단은 문혁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나머지는 이후의 과제로 남겨놓고, 에피소드와 이미지를 중심으로 얘기를 나눈 것에 의의를 두도록 합시다.


Ⅴ. 청사에 이름을 남긴다

A: 중국의 영화는 단 한순간도 자국의 역사를 벗어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건 문예계 전반에 걸친 사실이기도 하겠지만은요. 실제로 중국이라는 사회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과도기로서 계속 변화하고 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회·경제 발전으로 인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형태가 변하는 것은 보이지만, "지금이 2000년이지만 50년대와 마찬가지"라고 한 티엔주앙주앙 감독의 말을 참고로 하면, 심의와 검열을 거칠 때의 이데올로기는 그대로 적용됨을 알 수 있습니다.

B: 〈햇빛 쏟아지던 날들〉도 제작 당시에는 검열에 걸려 개봉이 허가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자 태도를 바꿔 국내 상영을 허가했는데요, 국보급 스타로 대접받고 있는 지앙원의 명성에 힘입어 결과적으로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고 합니다.

A: 문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대상으로 얘기를 풀어보는 과정에서 느낀 것이 있다면, 〈부용진〉이든 〈햇빛 쏟아지던 날들〉이든, 현실적으로는 문혁의 실체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관객·영화시장·당국의 검열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문학보다 입지가 좁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우언화시키고 동화적 색채를 가한다 하더라도, 중국 당국의 입장에서는, 문혁이라는 과거 역사에 대한 비판이 사회주의 체재비판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B: 하지만, 이전 사회나 지금 사회에 대한 풍자나 비판이 담겨 있는 것은 중국영화의 공통점입니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영화가 좋게 평가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중국적 상황에서 시대정신을 느끼게 하는 위와 같은 영화가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중국인들에 있어서 역사는 삶의 지표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부분이 아니라 중국인의 인문학적 사유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지요. 중국인들의 회고록이 매우 공식적인 성격을 갖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의 결과일 것입니다. 왜, 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A: 영화속에 반영된 역사를 바라볼 때, 영화적 진실과 역사적 진실을 대치적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영화는 ''허구''를 매개로 ''진실''을 이미지화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의 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역사적일 수 있겠지요.

B: 현재 중국영화는 투자할 자본가를 찾기 어렵고 흥행에 따른 수입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천카이거와 장이모우처럼 주목받는 감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영화산업을 이끌 수준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성공''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국내의 불안정한 영화상황과 국제적인 평판 사이에 서있는 중국 감독들이 어떤 영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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