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05.08.27
수정일
2005.08.27
작성자
김혜준
조회수
991

北島, <《今天》에 관하여>

《今天》에 관하여

 

베이다오 北島

 

1978년 겨울 北京에 큰 눈이 내렸다. 동쪽 근교, 꾀죄죄한 개울을 사이에 두고 멀리 외국 공관 지역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인가라고는 몇 안되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농촌과 도시의 경계선상으로, 엄혹한 통제 하에서도 거의 놓쳐버린 곳이었다. 그 중 한 조그만 집의 창문이 낡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어둑한 불빛 아래 젊은이 일곱이 낡아빠진 등사기를 둘러싸고 분주했다. 나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삼일 밤 삼일 낮의 신고 끝에, 1949년 공산당이 집권한 이래 최초의 비관방 문학 잡지인 《今天》이 탄생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의 한 식당으로 가서 조용히 잔을 들어 축하를 했다. 이튿날 나는 두 친구와 함께 대자보를 붙였다. 출발 전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자전거의 번호판을 고쳤다. 1978년 12월 23일, 정부 기구, 출판사, 대학가, 天安門 광장 등에 《今天》이 나붙었다. 이어서 우리는 독자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런 작품들, 특히 시가 중국에서 종적을 감춘 지 이미 30년이었다. 예상을 뛰어넘어 독자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今天》의 역사는 1960년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毛澤東은 당시 학생운동이 가져온 전국적인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도시의 중등학교 학생들을 농촌으로 보내 ‘빈농 하농 중농의 재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 결과는 공교롭게도 毛澤東의 의도와는 정반대였다. 사회의 꼭대기에서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데다가, 바닥 현실과 나라의 거짓말 간의 모순 탓에, 왕년의 홍위병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신앙의 위기가 발생했다. 그들은 책을 통해 진리를 찾고 글을 써서 막막함을 표출했다. 매년 겨울 농한기가 되어 北京으로 돌아오면, 서적과 작품을 서로 교환하면서 갖가지 문화 모임을 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스무 살 되던 그 해 食指의 시를 읽었을 때의 그 격동을. 그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1967년에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후 30년간에 걸친 시의 새로운 물결을 이끌어낸 개척자였다. 그의 시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하도 들어 그러려니 해왔던 설교와 갈라서서, 처음으로 젊음의 곤혹을 표현해냈다. 그 이미지의 신선함과 소리의 매끄러움은 젊은이들을 매혹시켰고, 필사본을 통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오랜 후 내가 食指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정신병을 얻어 집과 병원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내가 시를 쓴 것은 食指의 시를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때 나는 건설 노동자였다. 北京에서 300킬로미터 쯤 떨어진 산촌에서 발전소를 짓고 있었다. 폐쇄된 환경 속에서 내심의 소리는 뭔가 분출구가 필요했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구체시를 쓰는 것이 한때를 풍미했다. 아마도 이는 구체시를 썼던 毛澤東의 영향 탓인 듯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구체시를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나 역시 구체시를 썼었다. 그러나 금세 알게 되었다. 격률의 속박 때문에, 이별이나 회고를 제외하면, 좀 더 복잡한 주제를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글쓰기란 일종의 금지된 유희였다. 심지어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지된 것일수록 흡인력이 있는 법이다.

건설 공사장에서 나는 수십 명과 함께 임시 숙소에서 잤다. 한밤 중, 사방에 코고는 소리가 진동할 때, 나는 밀짚모자로 만든 탁상등 아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현장 선전 팀이 임시로 나를 사진 전시회에 차출했다. 나의 건의에 따라 암실이 만들어졌을 때 나는 속으로 미칠 듯이 기뻤다. 두터운 커튼이 세상과 나누어놓았다. 마침내 나만의 공부방이 생긴 것이다. 그 짧은 몇 달 동안, 나는 시 외에 중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기도 했다.

내 친구 趙一凡이 체포되었다. 그는 지하문학 작품의 수장가였다. 경찰은 종이 한 장까지도 다 압수해갔다. 그 속에는 나의 시와 소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원대 복귀되어 감시 대상이 되었다. 나는 편지와 원고를 처리하고 친구들과 고별인사를 하면서, 언제든지 감옥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밤중, 자동차 소리라도 들릴라 치면 나는 놀라서 깼고,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건 참으로 오랜 기다림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경찰은 나의 시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문학연구소의 전문가를 불러왔지만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문가라는 이들은 서양시들을 베낀 것이라고 단언했다. 나는 요행으로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

그 시절은 책읽기가 금지된 때이기도 했다. 공공장소에서는 책이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폐쇄된 도서관에서 훔치거나, 폐품 수집소를 뒤지거나, 다른 모임이나 사람들에게서 빌렸다. 이 바람에 ‘책을 헤맨다’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다. 좋은 책을 얻기 위해서는 사방을 헤매고, 끈질긴 인내심을 가져야 하고, 협상、승낙、교환하고 그래야 했던 것이다.

청년 시절의 독서 경험은 개인의 일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읽다가 차츰 골라서 읽게 되었고, 나중에는 ‘노란색 책’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노란 색 표지의 이 번역 전집은 거의 백 권이나 되었는데, 서방 현대문학 및 소련과 동구의 해빙문학을 체계적으로 번역 소개한 것이었다. 전적으로 고급 간부용으로 출판된 것이라서 출판량도 적었고 발행 범위도 엄격하게 통제된 상태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혼란 와중에 일반인들 사이에까지 흘러들었다. ‘노란색 책’은 北京의 문화 모임들 사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섭렵물이 되었다. 당시 이런 일이 흔했다. 책 한 권이 단 며칠 간 어떤 모임을 거쳐 가는 동안, 사람들은 줄을 지어 기다리며 모두 먹고 자는 것을 잊어버렸다. 좋은 책이라도 왔다 치면 [노동에서 빠지기 위해] 나와 친구들은 그저 환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몸에 해로운 약이라도 먹어가면서 시간과 맞바꾸었다.

‘노란색 책’은 지하작가들이 정신적으로도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찾아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관방 담론의 문체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문체 번역 문체를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1949년 이후 다수 작가들이 창작을 포기하고 직업을 바꾸어 외국문학의 번역과 연구에 종사했다. 그중에는 1940년대 후기 중국 시단에서 가장 특출한 시인이었던 穆旦、袁可嘉、陳敬容、鄭敏 등 나중에 ‘九葉派’라고 불린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번역 문체는 창작 욕망과 새로운 언어의 담체가 되어 지하문학에 필요한 토대를 제공해주면서 전통의 사슬을 이어주었다.

1978년 가을, 상층의 권력 투쟁이 정치적인 느슨함을 불러왔다. 《今天》으로 대표되는 지하문학이 마침내 표면으로 떠올랐고, 미술、사진 등의 민간단체와 함께 관방 담론에 충격을 가하는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今天》은 시를 위주로 하는 간행물로서, 주요 시인으로는 芒克、顧城、多多、舒?、嚴力、楊煉、江河 등이 있었다. 인쇄 설비가 형편없어서 편집부는 수작업실이 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거들었다. 1980년 말 폐쇄될 때까지 《今天》은 모두 9기의 잡지와 4종의 총서를 출간했고, 그 외 여러 가지 문학 활동을 주관했다. 매월 한 차례의 작품 토론회에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1979년 봄과 가을에 《今天》은 北京의 玉淵潭 공원에서 두 차례의 야외 낭송회를 열었다. 그때 아직 베이징영화대학교 학생이었던 陳凱歌 감독도 우리가 낭송하는 것을 와서 도왔다. 경찰의 엄밀한 감시 속에 거의 천 명에 이르는 청중들이 그 난해한 시들을 흥미진진하게 감상했다. 1949년 이래 그런 낭송회가 이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공산당과 민주의 밀월은 금방 지나가버렸다. 鄧小平은 魏京生과 여타 민주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今天》 역시 1980년 12월 폐쇄되었다. 내가 막 靑島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서면 사찰을 거부하자 직장에서 정직 근신에 처해졌다. 저녁에 귀가를 하는데 친구 하나가 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믿을 만한 소식에 따르면 내가 언제든지 체포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도망쳐야 하나 마나? 나는 아내와 밤늦도록 의논했지만 결국 남아서 사태의 진전을 보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 정치적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나는 또 한 차례 요행으로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

《今天》은 폐쇄되었지만 그 시들이 관방 잡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몽롱시’라고 불리면서 수년간 전국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관방 평론가들의 눈에 그것은 홍수나 맹수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런 비판은 더 많은 독자를 끌어 모았다. 관방 담론에 질식해가던 젊은이들이 마침내 숨 쉴 만한 곳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한동안 대학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를 쓰고 시 동아리를 만들고 시집을 출판했다. 그러다 상업주의적 물결이 밀려들어오게 되자 시는 다시 주변부로 물러나게 되었다.

《今天》은 그보다 젊은 세대의 창작에 그늘이 되기도 했다. 1984년 ‘제3세대’의 시가 《今天》의 시에 반발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今天》의 시인들과는 달리 ‘제3세대’ 시인들은 문화대혁명 후에 성장하여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역사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현재의 동태에 더욱 주목하면서, 작은 가락으로 큰 가락을 대신했다. 그들 중 중요 시인으로는 柏樺、張棗、西川、歐陽江河、宋琳、翟永明、韓東、張眞 등이 있는데 대부분 四川 출신이다. 나는 그 중 여러 명과 친구가 되었고, 우리의 시에는 공통점이 차이점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1989년 天安門 광장에서 발포가 있었다. 이듬해 봄 다수의 중국 작가들이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회의를 열어 《今天》의 복간을 결정했다. 25년이 지났다. 《今天》은 그 탄생에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까지 흡사 중국 시에 대한 하나의 은유가 되어버린 것 같다. 호리병 속에서 풀려나온 거인은 다시는 도로 집어넣을 수 없다는.

 

2005년 5월 30일 한국 부산대학교에서

 

(김혜준 옮김)

첨부파일
첨부파일이(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