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07.05.05
수정일
2007.05.05
작성자
김혜준
조회수
1164

葉維廉, <타이완, 홍콩 모더니즘 시의 역사적 지위>

타이완, 홍콩 모더니즘 시의 역사적 지위

 

와이림 잎 葉維廉 (Wai-lim YIP, UC San Diego 교수) Wai-Lim YIP_01

 

 

1. 중심과 주변

 

2. 현대 중국 이질 문화의 중심과 주변의 다툼

 

3. 1950,60년대의 타이완과 홍콩의 모더니즘의 유행

 

타이완과 홍콩은 1950, 60년대 의식의 위기에 있어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으나 이를 촉발한 미학적 대책은 공통적으로 서양 모더니즘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식 위기를 필자가 동시에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타이완, 홍콩의 역사와 문화적 잠재의식에 대해서는 역시 현대 중국문학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 중국 시인들이 상상한 구조는 복잡하고 다양한 것으로, 모두 ‘거대담론’과의 교류를 통해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거대담론’은 제국주의의 제반 종류의 침략과 본토의 전제라는 이 두 가지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온 것이다. ‘해방에 대한 요구’라는 이 ‘거대담론’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이것은 그 속에 내재하는 욕망과 고민도 포함한다) ‘해방에 대한 요구’는 초기에는 분노와 흥분과 동경으로 충만했다. 그 예로 ‘(전통에 대한) 우상숭배를 타파하는 것’과 같은 거친 어휘는(꿔모뤄), 신중국의 연이은 탄생에 대해 무한한 동경과 흥분, 외침과 동시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산업세계 및 과학 기술세계에 대해 열광적으로 심취하도록 했다. 마치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쉬즈머우의 시에서 보이는 아직 경험하지 않은 고통(혹은 아직 알지 못하는 고통)을 진심으로 원하는 감정의 폭발과도 같다. 불행히도 이 꿈같은 ‘해방’의 ‘복음’에는 상당히 많은 신도들이 따랐다. ‘해방에 대한 요구’라는 이 ‘거대담론’의 또 다른 글쓰기는, 앞서 말한 ‘심취’ 속에서 각성한 작가들로부터 나왔다. ‘비판적 리얼리즘’의 소설들은 시에 반영되었을 때는 대개가 서사형식을 띠게 되었다.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가 물거품이 된 공간에서 혁명을 위해 나아가는 분노와 외침으로부터 나온 혁명문학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행동이 우선, 예술이 그 다음’이었으며 주로 혁명적 정서만이 가득하고 예술성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구호식의 시를 양산해냈다. 이러한 (실질적)‘행동’을 촉발하기 위해서 이 시들은 종종 ‘선동에 개입할 것’을 주장하곤 했다. 언어에 대한 예술적 고민은 밑바닥으로 치달았다. 현대 중국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바로 지금껏 이야기한 이산으로부터의 방황과 고민들일 것이다.

 

중국과 서구 양쪽은 각기 다른 농단의 압박행위로 인해 배척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서양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극단적 산업화와 도시화의 농단으로부터 전반적인 생명의 응축과 변형의 문화 산업으로부터 야기된 것은 물론, 중국의 위기는 외래 패권과 본토 전체정치의 복잡한 제약과 핍박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중국 지식인들은 일종의 ‘애증’의 정서로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그들이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자부심을 유지하면서도 한편 벗어나려 했던 태도를 가리킨다. 그 손상되어서 자성할 도리가 없는 체제를 넘어서는는 것은 한편으로는 서양에 대한 증오와 그 패권식의 정복의식에 대한 증오였다. 하지만 서양으부터 유입된 민주와 과학이라는 두 가지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민주와 과학이 다시금 중국을 뒤흔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중국의 진정한 응집력의 핵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서양의 진정한 응집력의 핵심은 (만약에 있다면 말이다)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것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문제이며, 관련하여 수많은 탐색과 질문이 놓여 있다. 아마도 이것은 모더니즘적 지식 추구에의 출항이자 영어의 Odyssey에 해당될 것이다.

 

사실상, ‘5?4 신문학운동,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가 시작된 때부터 중국 작가들은 일종의 문화적 공허함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각자가 다양한 여정 속에서 찾아내고, 고민하고, 방황하며, 희망을 구하면서 하나의 탈출구를 가리키는 부호를 기다리다가 영원히 기다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의를 계속 구하면서 시시때때로 궁지로 빠져드는 상황이었다. 루쉰은 말했다. “그러나 나는 빛 가운데에서 방황하길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어둠 속에서 침몰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나는 마침내 빛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 (〈그림자의 고별〉중에서) 루쉰은 비석에서 어떠한 지시를 찾길 희망했으나 단지 그 흔적만 보았을 뿐이다. “한 떼의 혼들이 뱀이 되었는데 입에는 독이빨이 있으나 사람을 갉아먹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갉아먹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심장을 도려내 스스로 배를 채우고 그 본래의 맛을 알려고 한다. 고통과 아픔의 본래의 맛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통증이 잦아들고서는 서서히 그것을 먹는다. 그러나 그 심장은 오래되었으니 본래의 맛을 더더욱 알 길이 없다.”(〈비문〉중에서) “방황하며 찾아다니지만 얻질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곧 현대 중국 사람들의 민족문화의 본질이 추방당하고 난 뒤의 아픔이다. 중국의 시인들은 이러한 문화적 허위들이 만들어낸 추방상태를 직면해야 했다. 인간에 대한 복합적 폭력과 억압을 직면하게 됨으로써,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탐색의 여정을 가게 되었고 영원히 재현되지 않을 것 같던 융합의 핵심을 다시 찾길 기대했다. 그들은 어쩌면 언젠가는 이 핵심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게 될 것이며 모든 단절들이 다시 회복되고 숨만 불어넣으면 부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중국 모더니즘의 특수한 배경이며 어쩌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현대에 경험하였던 고민일지도 모른다.

 

1950, 60년대의 홍콩과 타이완 모더니즘 사조의 발생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항일전쟁 승리 후 숨을 돌리기도 전에 내전이 중국인들을 격리시켰으며 모진 아픔을 겪도록 했다. 이때 타이완과 홍콩으로 도피한 학자, 작가들은 상황의 특수성과 국내의 변화, 그리고 삼반 오반 운동과, 연이은 청산투쟁에서부터 이후의 철의 장막의 형성까지를 목도하게 되었다. 땅과 몸의 이산은 영원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영원하다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조국의 향수와 아픔은 총총히 그물처럼 얽혀 응어리지게 되었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들의 예감은 얼마나 정확했던가, 이산의 시간이 이미 40년이나 되지 않았던가!)

 

두 번째로, 영원한 조국과의 결별은, 홍콩의 작가들에게는(타이완의 작가들이 당면했던 현실에 대해서는 네 번째 항목을 참고) 잠시 거주할 것으로 여겨졌던 현실, 그리고 모호하기만 했던 ‘신분정체성 문제’를 첨예하게 마주하도록 했다. ‘신분정체성 문제’의 우선적 고려 요소는 문화정체성에 대한 탐구다. 홍콩에서는 비록 Albert Memmi가 말한 것처럼 문화적 정체성 의식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즉, 역사의식, 사회의식, 종교나 문화의식의 전승, 문화기억의 언어의 보존가 아프리카 토착민족과 같이 그렇게 전면적으로 소멸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원주민을 식민화하면서 유혹과 위로와 마비의 수법을 이용한 식민교육을 통해 식민지 정부에 복무하는 도구로 제조했다. 이로써 원주민들이 식민지배자들에 대해 의존적인 정서를 갖도록 만들었다. 식민지가 지배자들을 중심화 하는 주변으로써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의존적 정서 속에는 원주민의 역사와 사회와 문화의식을 약화시키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더불어 일종의 생산형식과 계급구조, 사회, 심리, 문화적 환경 등을 조합해냈다. 이로써 직접적으로 지배구조를 위해 움직이는 시스템과 문화에 충실히 일하도록 했다. 서양 산업혁명 자본주의하에서의 ‘문화산업’은 물화, 상품화, 목적규범화를 거쳐 인성을 억압하고 마음대로 농단하여 하여 도구화하는 역할을 했고 또한 민족의식의 약화를 조장했다. 식민문화의 유혹, 위로, 마비, 그리고 문화적 경제화와 상품화는 일정한 수준에 올라서 잔존하는 어떠한 개입과 항거의 자각을 완전히 묵살시켰다. 문화영역에 있어서 신문의 문화란과 잡지는 이러한 분위기로 넘쳐났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대중문학은 대개 부담스럽지 않고 가벼운 문학이었으며 문화에 대한 마음속 깊은 곳의 우려와 걱정을 논하는 문학은 아니었다. 그 결과 짧고 간편해진 오락성의 가벼운 문학이 넘쳐났다. 독자들은 잠시 동안 몰두한 후에는 책에서 손을 놓아버리게 되고, 그리고는 잊어버리게 되었다. 문화의식과 민족의식의 표면에서만 미끄러질 뿐 잔잔한 물결조차도 일으키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문화의 상실에 대해서도 드물게는 진중하고 진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타나긴 했지만 일순간 모두 파묻혀버리게 되었다.

 

나는 〈자각의 여정: 영혼에서 죽음까지-쿤난을 처음 논하며〉(1988)에서 1950, 60년대에 자주 등장하던 두 개의 문화적 부호를 뽑아내었다. 즉 ‘백화’11)와 ‘황가’12)는 식민교육 속에서 민족의식을 약화시켰던 일련의 징후로 볼 수 있다. 나는 글에서 쿤난을 자세히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강렬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빵은 이즘이고 장미는 계급’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문화신분을 사색하고 미망하는 것과 이러한 문화의식의 공백에 대한 자각은 분노 및 슬픔, 무력감, 그리고 방심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시를 살펴봄으로써 분노와 시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결코 타조와 같은 삶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우리가 결코 참을 수 없는 것은 길가에 하나씩 덧대어 쌓아놓은 막돌과 같아지는 것이며 다른 민족의 유린이라는 비극적인 침묵에 복종하는 것이다. (거인 중국이여, 너는 그때 벌써 전쟁이 끝난 후의 세계를 깔보지 않았는가?) 우리는 결코 각성과 굴복 사이에서 견딜 수 없고, 복수와 망각을 참을 수 없으며 신념과 회의, 불안과 일시적인 안일을 참을수 없다.…이렇게 거대한 건축물 속으로 들어가서 기계의 한 바퀴가 되고…부속품이 되고…. 《현대문학 미술 선언》

 

하지만 그의 《땅의 문》의 주인공 예원하이처럼 자각이 있는 사람이나 혹은 쿤난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도, 식민문화 산업에 필적하는 단절과 민족자각의 압박이라는 이러한 중층적인 인성의 왜곡을 타파할 수 있는 문화적 근거를 찾지못했다.

세상, 그것은 마치 높은 산 하나가 그에게 쏟아져 오는 것과 같다. 국가와 민족은 한 차례 풍사와 같아서 그가 눈도 뜨지 못하게 한다. 중국인은 고난을 겪고 있다. 이렇게 숙명 지워진 것인가? 인구등록 말인가? 홍콩에서 출생한 것은 영국 국민이다. 노란 피부에 검은 눈이 영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타이완은 조국이다. 대륙은 조국이다. 국가가 둘로 나뉘어 민족의 기백은 흩어지게 되었다. 중국인은 중국인을 적대시한다. 중국인이 중국인을 살해한다. 외국인은 중국인을 통치하고 외국인은 중국인을 노략질한다. …중국인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시예의 〈성장의 노래-예웨이롄에게 바침〉(1957)과 〈1957년 봄: 홍콩〉의 두 편에서는 사무치는 무력감이 나타나고 있다. 우시예의 비애를 들어보자.

시간은 무겁게도 우리의 몸을 짓누른다…우리는…불안하다/허리를 구부린 채로 위태롭고 큰 건물의 틈에 끼어있다/ 핏빛의 위기에서…자신이 아닌 의지를 따라서/ 이 중문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문은 굳게 잠긴다/ 우리의 욕망을 잠궈버린다 …생존과 사망은 무어란 말인가/ 몽유병자가 끌어당긴다. 기계적 세계를 끌어당긴다/ 세계를 이로써 움직인다 협소하게 움직이는 세계/ 시간은 무겁게도 걸음마다 무게를 더한다/ 샘플이 표본을 억누른다. - Sir, 당신의 충성스러운 하인/ 평생을 모시고 마음 졸이며 보냈으니 이 얼마나 일등 시민다운가. 아, 무수히 많은 서민들, 당신들은 정체성이 조금도 없다./ 역사의 배경만 된다…우리는 더욱더 슬프다. 우리는 곧 반영함과 반영됨/피과 살로 된 몸이 타인의 어좌에 쌓여있으며/ 자신의 만리장성은 아니다… 흥망의 야사는 누가 흥미진진하게 평가할 것이며 발길을 멈추고 들어줄 것인가/ 누가 그 감개무량함과 격앙을 위해 존재할 것이며 누가 호기심이 남아있겠는가

 

(〈성장의 노래〉)

시대와 당신들은 서로 위배된다. 눈앞의 호수는 우주를 끌어안고 태평산/ 뒤엎어진다, 의연히 전 중국의 그림자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시체가 온통 뒤덮혔구나! 역사의 영광을 방불케 한다/ 돌연 윗 세대를 위한 기념이 된다. 심지어 네모반듯한 한자/ 옛 물건처럼 잊혀지고 이름도 없이/ 하지만 노예근성이 있어 그 광채가 곳곳에서 보이는 것이 자랑스럽구나! (〈1957년 봄: 홍콩〉)

 

자각은 ‘파괴’와 ‘재건’의 시작이다. 당시의 의지는 있으나 무력했던 감정은 분명 엄청난 아픔이었을 터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하나의 중요한 지향도 포기하지 않았다. 즉, 진짜 시를 통해 아직 왜곡되거나 오염되지 않은 인성을 되찾아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수많은 작가들이 중국 대륙을 떠나 타이완이나 홍콩으로 가기를 강요받았다. 처음 ‘남천’한 시기에는 많은 이들이 돌연 중국 대륙이라는 공간과 문화로부터 분리된데다 영원히 고향과 이별하였다는 감상에 젖어, ‘현재’와 ‘미래’의 사이에서 걱정하고 머뭇거리거나 방황했다. 여기서 ‘현재’는 중국문화가 전면적으로 훼손되는 시작점이었을 것이며 ‘미래’란 측량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1950, 60년대 타이완과 홍콩의 시인들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들은 5?4 신문학운동이래의 문화적 허위의 아픔을 계승하면서 다시금 무력하게 눈앞에서 실질이없어진 파편화된 공간을 바라봤다. 당시의 역사 형편에서 이전의 중국적 감수와 운명과 생활의 격변에의 우려, 고독, 구속, 향수, 희망, 정신과 육체적 추방, 몽환, 두려움과 망설임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현재와 미래의 사이에 서서 깊이 생각하며 머뭇거리고, ‘원인을 쫓고’, ‘탐색하는’ 것은 루쉰의 《방황》에서 굴원의 시구를 통해 다시 나타나고 있다. “길이 아득히 멀어서 나는 아래위로 다니며 찾는도다.(路曼曼其修?兮,吾?上下而求索)” 하지만 몇몇 독자들이 말하는 소위 ‘현실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며 사실상, 그러한 감수야말로 당시의 역사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감상과 표현의 순응 문제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국문화의 격변 중에 가져오게 될 전면적인 와해를 마주하면서 시인들은 내면의 탐구로부터 방향을 전환하여 새로운 ‘존재이유(raison d''etre)’를 찾으려했고 창작을 통해 가치가 통일된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시도하였으니 그것이 미학의 세계였으리라! 실질이 소멸되고 산산조각난 중국공간과 문화를 벌충하면서 지금 해체되고 있는 현실에 맞서는 것이다. 뤄푸는 말했다, “시를 쓰는 것은 잔혹한 운명에 대한 일종의 보복수단이다.” 예를 들어, 샹친의 〈무균질의 흑수정〉은 신체의 내부에서 ‘나의 나됨’ 본질로부터 촉발되어 존재주의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고 있다. 또 다른 감수와 표현적 순응문제는 우리가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사색하며 망설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단선적, 종적 구조를 타파하고 전통과 현대의 다른 문화적 시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문화역사의 목소리 및 다층적 메아리와 대화를 하게되었음을 의미한다.(쿤난의 〈비창교향곡〉, 야셴의 〈심연〉, 나의 〈부격〉)

 

당시의 역사 형편에서는 ‘추색’과 ‘사색’은 자주 보이는 요소가 되었고 당시의 시에서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찌해야 하나?’,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들은 자주 보이는 화법이었다. 나의 〈부격〉(1958-1959)은 당시 일부러 계획하지 않고 단숨에 써내려간 것으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문화의 응집과 상실되어 방황하는 정서를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나는 호반에, 세찬 물소리

어두컴컴한 버들 갈대의 옆에서 만난 듯도 하여라

오리떼는 부리에 떠도는 생명을 머금고

어디로 가버렸나? 시의 끝부분은 이렇다.

그대는 보이지 않는가, 후대의 자손을 위해서 누군가가

인류의 본래 모습을 찾아줄지?

그대는 보이지 않는가, 무섭게 쏟아지는 폭포에서

산과 돌의 노래를 찾아줄지?

그대는 보이지 않는가, 은탄환이 울리는 가운데

저 밖의 진정한 도리를 찾아줄지?

결국 땅이 갈라지고 물이 갈라지니

벽에 있는 멸시의 돌성 위에서

우리가 천하를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다 다녀보았다.

온갖 꽃과 나무들은 멀리서부터 흘러 가까운 곳을 돌아가는데

우리가 천하를 알 수 있을까?

우리는 거듭 경험해본다

성조와 대구의 기교와 평측음운의 오묘함

우리가 천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고대 악부의 〈성벽 남쪽에서 싸우다〉에서 시체들이 만리에 넘쳐나는 문화적 기억이 어둡게 배회하고 뒤엉키는 것이다. 20세 청년이었던 나의 눈앞에 펼쳐진 단편들은, 위대함을 숭상하는 심혈을 기울인 유적도 아니고 만리길을 자연백태로 흐르는 것을 직접 보아야 되는 것도 아니며 굳이 만권시를 읊조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생명의 완전함을 다시 찾아 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토록 천변만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칼로 잘라내는 듯한 깊은 고민 속으로 소용돌이쳐 들어가던 당시에 (소위 말하자면 ‘반공문학’과 같은) 유행어는 오히려 완전히 이런 급격한 변화에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완전히 벗어낫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전의 필요에 의해,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당시 일반적으로 신문잡지의 작품들은 적극적인 의식과 전투정신을 고취시켰고 때로는 어떠한 전략적인 필요에 의해 진실이 아닌 거짓들을 마구 실었다. 사실상 중공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문학과 비교할 때 구호는 비록 다르지만 팔고문13)은 똑같았다. 소위 언어의 예술성은 오래전 생겨나 자주 이야기되던 관용어를 피하는 것 외에도 또한 당시의 실질적인 감수와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당시 시인들은 언어상의 실험과 발명에 있어서 반드시 이러한 관건에서부터 살펴나가야 했다. 야셴은 그의 장편시 〈심연〉에서 “격류는 어찌 형태를 거꾸로 비추는 것일까?”라고 했다. 타이완 현대 시인들의 책임 중 하나는 바로 역사적 경험과의 선회와 결탁, 그리고 한편으로는 문화의 전도와 격동으로 인한 심리적 복잡성을 통해, 언어미학적 사고를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시인들은 응축적이며 다의적인 정서를 만드는 쪽으로 향해갔다. 이에 그들은 서정시 즉, Lyric 핵심으로부터 비서술을 만들어내어 왜곡되고 응축된 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네 번째로 여기서는, 우리는 타이완의 당시 정치적 분위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당 쟝제스 정권이 타이완으로 옮겨간 이후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타이완은 세계적인 두 패권의 대립의 냉전 무대 위로 뛰어들게 되었다. 당시에는 (독재적 ‘공산중국’에 대비되는 의미로) ‘자유중국’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당시 정부의 ‘공산주의에 대한 잠재적 공포’는 이러한 균형의식을 잃도록 했으며, 심리학에서 자주 언급되듯이 망상, 편집광(paranoia)의 상태로 치닫도록 했다. 숲에 서있는데 갑자기 모든 풀과 나무들이 스파이로 변하는 것과 같았다. 숙청과 유형무형의 진압에 의한 이러한 공포분위기는 더욱더 본질을 전도시키며 심각해졌다. 피해를 입은 작가들은 어쩔 수 없이 본토의 무고한 지식청년들, 뜻을 굽히지 않고 타이완으로 이주한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특히 1950, 60년대에 말) 신체적으로 상당 정도 통제를 받았고 이로써 작가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문자 검열을 내재화시켰다. 이러한 압박은 뤄푸의 초기 시 ‘영하’(1957)의 한 구절에서 암시되어 나타나고 있다. “나는 날고 싶은 굴뚝이다” 이것은 소년시기에 그저 날고자하는 꿈같은 환상이 아니라 전쟁으로 상처입고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군대를 따라 타이완해협을 건너 영원히 고향과 이별한 마음 상태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날고 싶다’거나 ‘구름 속을 거니는’ 경쾌한 새 한 마리가 아니라 날아오를 수 없는 외롭고 암담한 굴뚝인 것이다. 날아오를 수 없으나 날고자 하는 욕망은 그의 이후 모든 시 창작의 밑바탕을 이루었다. 왕성한 생동감과 천지를 가로막을 것만 같은 기세로 그런 속박을 극복하려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와 같은 시기의 모든 이들의 공통된 감성이었을 것이다. 시인들의 특수한 ‘고독’과 ‘분노’의 원인은 상당히 복잡하다. 생존의 위협이나 언어의 위기, 문화계승의 고민까지 그 원인들은 다양하다. 그들이 1930, 40년대의 언어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점이나 바다를 건너 타이완으로 온 ‘구속감’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인 것이었다. 미국 제7함대가 타이완해협으로 들어온 후로 당시의 타이완은 형식상은 방위협조지만 사실상은 ‘반공중국대륙’의 의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정부의 ‘반공정서’ 노이로제는 점점 더 모습을 변화시켜갔다. 야셴은 1981년 〈모더니즘 시 30년의 회고〉에서 “1950년대의 언론은 오늘날과 같이 개방되어 있지 않아서 어떤 의견을 말하고자 하면 바로 말한 내용을 싣기가 매우 곤란했다. 초현실주의의 몽롱시, 상징시의 높은 정서적 언어는 마침 우리와 부합하므로 여러 사회적 의견과 항의를 상징적 잎사귀의 뒤편에 숨기게 되었다.”

 

‘고향과의 영원한 결별’로 낙담하고 절망하는 것은 분명 당시의 아픔이지만 그들은 말할 수 없었다. 당시의 시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종의 ‘창조성의 회삽’ 혹은 ‘다의적 상징’, 그리고 ‘말과 소리 빌리기(두보의 〈추흥팔수〉에서 한나라 역사를 이용해 당나라를 풍자했던 것과 같이)’를 이용했다. 예를 들어 당시 내가 쓴 중국인의 유리됨과 이산의 경험에 관한 작품〈부격〉의 중간에 돌연 유년기에 암송한 고시 한 수가 나타난 것과 같다. “노나라 보고파 가슴을 죄어도 귀산이 높이 가려 아득하구려. 도끼자루 어디있나 찾아보아도 저 귀산(龜山) 어이타 높기만 하이.(予欲望魯兮, 龜山蔽之, 手無斧柯, 奈龜山何)”이것은 바로 내재화된 무형의 구속적 절망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가장 분명한 예 중에 하나는 띠엔쪈의 것인데, 그가 쓴 〈반격 무망론〉은 그를 10년간 감옥에 갇히도록 했으니 1957년 전후의 타이완 모더니즘 시에서 절망감이 아니라 오히려 과도한 무사태평함이 표출되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이해될 것이다.

 

아이러니의 천국, 즉 문화적 신분을 상실한 혹은 아직 동트지 못한 1950, 60년대의 홍콩에서는 중국문화전승은 어쩌면 기회를 부활시킬 수 있는 장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중국 대륙과 타이완의 신문학 전통에 대한 봉쇄와 신문학 전승이 기원하고 있는 신문학 서적들은 단지 홍콩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고 읽을 수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 마오쩌둥의 세 편의 글을 ‘흠정’한 것은 일종의 문예노선이었다. 세 편의 글은 곧 〈5?4청년운동〉(1939), 〈신민주주의론〉(1940)과 〈연안문예좌담회강화〉(1942)이다. 이 글들에서 그는 5?4 신문학운동이 전적으로 “무산계급의 영도 하에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로 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문화운동”이라고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흠정’의 역사노 상에서 문학사는 후스, 신월파와 기타 도시의 지식인들은 얘기조차 꺼낼 수 없었다. 이로써 1940년대에 시의 예 에 천착한 시인들을 말할 필요도 없이 침묵하도록 했다. 마오쩌둥은 그의 독재정권과 독재정당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갖가지 정풍운동을 추진했고 작가들의 자유로운 창작정신을 모조리 말살시키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중국문화의 이화에 있어서 또 다른 가장 큰 상처가 되었다. 이 시기 문화금지구역에는 소위 봉건여독의 고전문화와 문학을 포함하여 5?4 신문학운동의 대표적 주관주의와 비판정신의 모든 작품들은 물론, 5?4 신문학운동이래의 시예술과 신문화건설에 마음이 있는 모든 작품들, 말하자면 거의 모든 서양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타이완에서는 국민당정부가 남하하여 타이완으로 옮겨온 이래로 중국대륙처럼 정풍이나 투쟁운동이 기본적으로 없었지만 중국문화의 계승과, 소생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과정 에서 이상적이지 않은 요인들이 올바르지 않은 문화와 문학적 특징을 만들어냈다. (1) 앞서 언급한 ‘공산주의를 두려워하는 잠재의식’이 가져온 상당히 엄격한 숙청과 유무형의 진압, 그리고 (2) 책과 간행물의 유통금지와 학교 교재 중 5?4 신문학운동 이래 문학의 제거 등이 바로 그것인데, 이로써 많은 작가들이 신문학 전통을 계승할 수 없었고 특히 1930, 40년대 시집, 소설과 연계할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는 대개 목록은 있지만 책이 존재하지 않곤 했다.

 

홍콩도 비록 모든 책이 다 있었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중요한 1930, 40년대 작가들의 많은 책들이 여전히 구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수혜자 중의 하나이며 이로써 상당부분 단절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다섯째, 홍콩 쪽에 있어서 모더니즘을 확대시키는 문학 간행물과 단체들이 1950년대에 나타났다. 여기에는 《시의 봉오리》, 《문예신조》, 《홍콩문학미술협회》, 《신사조》, 《아름다운 몽콕》등이 있었다. 모두들 당시에 가장 결핍된 것이 이론적 틀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예쓰는 후에 그가 펴낸 《홍콩단편소설선(1960년대)》에서 〈1960년대 홍콩문화와 홍콩소설〉 머리말에 적지 않게 설명을 해 놓았다.

모더니즘의 문예관은 1956년에 출간된 《문예신조》와 1959년 쿤난, 왕우시예, 필자의 《신사조》, 1960~61년 리우이창 주편의 《홍콩시대, 침사추이》, 1963년 쿤난, 리잉하오와 진삥싱 주편의 《아름다운 몽콕》등의 태동으로 인해, 현대문학의 소개에 대해서 1960년대에 들어서 더욱 광범위한 영향력과 성과를 얻게 되었다. 현대소설에 대해서 순수하게 서양 작품들을 추천하고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중국어로 된 작품들을 수용하고 다루기에 이르렀다. 역시 196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리잉하오의 《비평적 시각》(1966)과 필자의 《현상, 경험, 표현》(1969) 등도 있다. 그 뒤에 후쥐런의 소설기교와 서사각도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1960년대 쿤난, 루인, 진삥싱 등은 오랫동안 영화평론에, 왕우시예는 예술평론에 종사했는데 모두 1950년대에 비해 현대문예에 대한 토론이 성숙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에도 역시 《땅의 문》(1961)과 《주객》(1963)은 현대적 기교를 창작에 융합시킨 홍콩의 생활을 쓴 소설들로 읽혀졌다.

 

나는 여기서《문예신조》에서의 일부 비교적 쉽게 생략될 수 있는 특색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선, 마랑은 지셴이 그것을 타이완에 가져온 것과 같이 상하이 모더니즘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는 자주 주지주의를 들고 나오며 통상 주지적 입장을 유지하는데,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언어예술로써 그 의미를 새겨서 적용해야 할 것이다. 마랑의 초기는 대망서(<비오는 골목>과 같이)와 악기, 음조, 음색의 중복과 변조로부터 ‘정서의 박자’와 기분을 포착하는 것을 전수받았다. 비교적 고무적인 방법이다. 그는 상하이에서 영향이 컸던 신감각파의 대표자인 프랑스의 Paul Morand와 일본에서 Morand의 영향을 받아 다시금 일본과 상하이에 영향을 준 요코미쓰 리이치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 역시 상하이의 당시 주요한 인물인 리우나어우를 다루고 있다) 이 역시 그의 특징을 잘 나타내어 준다. 하지만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현대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이야기했다. 그는 《문예신조》에서 매번 한 명의 현대 화가를 소개했고, 현대 유럽의 모든 대표적인 예술가들에 대해서 나름의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계획적으로 세계 의 모더니즘과 전위적인 작품들을 소개했는데 구미지역뿐만 아니라 일본, 인도, 북유럽, 터기, 라틴 아메리카도 있었으니 그 광범위함은 후에 타이베이에서 시작된 《현대문학》을 제외하고는 당시로서는 비적할만한 다른 잡지가 없었다. 특별집 역시 전망이 밝았는데 프랑스 문학 특별집, 세계문학 특별집, 영미모더니즘 시 특별집 상하, 타이완 모더니즘 시 특별집 상?하(타이완, 홍콩 모더니즘 시에 상호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 소설 특별집, 프랑스 모더니즘 시, 그리고 브레튼 Breton을 필두로 하는 초현실주의 시를 포함하였고 또한 사르트르의 존재주의, 테네시의 희극과 타이완과 홍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카뮈(Camus)에 대해서도 소개하면서 연이어 그의 《이방인》 전문을 번역해서 실었다. 그 중 옥타비오 파즈 Octavio Paz의 <1948, 허위 속의 찬송> (멍빠이란, 마랑 역, 1956)은 직접적으로 타이완 야셴의 작품 《심연》에 영향을 주었다.

 

1950, 60년대 타이완의 분위기는 매우 이상했다. 억압의 분위기 속에서 정부의 당시 태도는 여러모로 제약을 부여했고, 특히 대학생들이 만들어내는 간행물과는 줄곧 충돌하였다. 한번은 한 교포학생이 학교 측과 학생회의 기금을 얻어 학생간행물을 한 부 만들어내고 당시의 억압적 분위기에 대해 일종의 항의를 담은 어조의 시를 실었다. 곧 그 학생은 경고를 받았고 ‘너희들은 화조풍월은 할 수 있지만 시대와 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하지 말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화조풍월은 분명 당시에 많은 신문 문화면에서 반공문예 아젠다 이외의 또 다른 활로였고 또한 우리들에게 일종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곧 위에서 말했던 함축과 다의성이다. 모더니즘을 상하이로부터 타이완으로 가져온 지셴은 그가 출판한 《모더니즘 시》에서 종적인 계승이 아닌 횡적 이식과 주지주의 등 8가지 항목의 선언을 통해 예를 들어서 ‘반공을 다짐’이라는 두 단어를 첨가함으로써 일종의 호신부로 썼다. 정부측은 문예를 국가와 군을 위해 복무하는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 후 정부는 중화문화 부흥 운동을 전개했지만 중공문예에서 팔고문과 다를 바 없는 반공문예를 제외하고서 전통문학은 모두가 규칙을 잘 지키는 고정된 반응의 팔고문에서 성현의 도를 논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독창적인 견해가 드물었고 대개가 도덕적 재정비 구호의 문화정책적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모더니즘 및 전위적 작품이 우선적으로 군대에서와 영문학과 학생들 사이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이런 작품들 90%이상이 자비로 만들어낸 문학 간행물에 등장했고 신문의 문화면에 등장했다. 서정산문 이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가벼운 문예작품이었다. 정부 주도 하의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 문예계에는 불리했다. 하지만 군대에는 적잖이 개방적 인사들이 있어서, 이 중 두각을 보인, 예를 들어 창세기의 작가군들, 게다가 장교 출신들, 예를 들어 야셴이나 해군의 뤄푸처럼 혹은 헌병대의 샹친과 같이 그들은 생활이 극히 곤란한 상황에서도 (일례로, 샹친은 따쯔에서 타이베이까지 친구를 만나러 올 수 있는 버스비조차 없었다) 열심히 몰두해서 상징주의 이래의 현대작품들 그리고 초현실주의, 존재주의 작품들과 회화들을 읽어나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당시의 전위이자 선봉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이러한 갖은 곤경에 처해있었고 고독으로 ‘한 맺힌’ 지경에 처해있었다고 생각한다. 한 맺힘은 비록 내가 당시에 제시한 용어이긴 하지만 뤄푸, 야셴, 샹친과 내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외로운 속박감과 원래의 고향이 나눠진 아픔, 정신과 육체의 추방, 몽환, 향수, 절망, 기억의 뒤얽힘, 두려움과 방황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다. 뤄푸는 그의 <석실의 사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분명 그 톱으로 잘린 배나무 한 그릇임에 틀림없다.

나이테로 보아 여전히 바람소리, 매미 소리는 분명히 들을 수 있지만.

(石: 1: 초고, 1959)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단절’이나 ‘아픔’, 혹은 ‘생명이 끊어질 것 같은 위협, 혹은 역사기억과 상흔이 계속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민족적, 그리고 문화적 ‘단절’, ‘아픔’, ‘생명이 끊어질 것 같은 위협’과 ‘역사기억과 상흔의 계속됨’의 메아리였다. 당시 지독한 숙청과 유무형의 억압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에 더해, 뤄푸의 상황을 이야기하자면, 더욱 복잡하다. 그는 군인으로서 정부가 그를 돌봐준데 대해 어쩔 수 없는 고마움을 안고 있었지만 시인의 한 사람으로는 단절의 상처에 대해 불안하게 진실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정서적인 일종의 긴장감이었으니 그의 글에도 이러한 긴장감은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었다.

 

타이완 모더니즘은 대학가에서도 영문학과에서 특히 시작되었으며, 당시 시아지안 교수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었다. 시아지안 교수는 문자예술의 신도였으며 강단에서, 그리고 그가 펴낸 《문학잡지》에서, 헨리 제임스의 아름다운 어휘의 예술을 소개했다. 연이은 창작에 가세하여 좁디좁은 그의 당시 교원 기숙사는 우리 타이완대학 영문학과에서 문학창작을 애호하는 학생들이 마치 성지를 순례하는 것과 같은 장소가 되었다. 나와 동급생이었던 총쑤, 진헝졔, 한 학년위의 쭈나이쟝, 한 학년 아래의 리우샤오밍, 두 학년 아래의 빠이셴용, 왕원싱, 리어우판 등은 자주 방문하여 새로운 지식을 경청하였는데 그중 중요한 정보 하나는 문학창작이 반드시 ‘고정적 반응’의 어휘, 정서를 피하고 신선하고 독특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학잡지》에 실린 그의 글은 영향력이 막대했며 그 중 두 편의 글 <두 편의 나쁜 시>와 <첫째는 이야기, 둘째는 글쓰기>는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들이다. 후에 빠이셴용, 왕원싱, 첸루어시, 어우양쯔, 따이톈, 리어우판 등은 《현대문학》을 창간했고 이것은 시아지안 교수의 미학이념을 계승하면서 한층 더 발전시켰다. 《현대문학》는 매 기에 가장 중요한 모더니즘과 전위적인 작가를 소개하면서 모더니즘운동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나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동참했다. 《현대문학》에서 발표된 중요한 작품의 작가들은 문학잡지의 동인들 외에도 첸잉쩐, 황춘밍, 왕쩐허와 윗 세대인 위광쭝, 허신, 야오이웨이 등이 있었으니 실로 거센 움직임이었다. 첸잉쩐, 황춘밍, 왕쩐허, 허신, 야오이웨이 등은 당시에 사실 노선이었으나 동시에 현대적 기교의 《필회》를 창간하고 이어 《문계》의 주요작가가 되었으며 모두가 1950년대에 경질된 서술법을 타파하며 문자의 예술을 위해 고민하였다.

 

4. 서양 모더니즘의 계시

 

5. 1950, 60년대 타이완과 홍콩의 모더니즘

 

1950, 60년대 타이완과 홍콩의 시인들이 자각한 생존상황과 의식위기의 흐름은 서양의 현대성 및 모더니즘과는 다른 측면에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홍콩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홍콩은 중국인의 땅이고 본래 있었던 조건 즉, 아편전쟁 이래의 역사적 환경적 조건으로 얘기하자면 유사한 서양의 고도화된 산업화와 유사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식민주의의 침략과 통치에 대해서는 홍콩은 산업혁명이 없던 조건 아래에서도 아도르노가 말한 것과 같은 인성 물화, 상품화에서 목적 규범화의 문화산업이 유입되었다. 홍콩 상품화의 생명적 상황은 식민문화 산업의 조장 하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인성의 본질을 제압당하고 답습하며 도구화하였고 이것은 인성을 중층적으로 왜곡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서양 현대의 시인들과 같이 1950, 60년대 시인들은 그들의 사명 역시 인성의 축소와 변형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또한 아도르노가 이해한 Lyricists와 같이 그렇게 탐구하며 ‘일종의 활발하고 변형되지 않았으며 오염되지 않은 시’를 다시 건설하고 또한 아직 감추어지지 않은 솔직한 세계를 되찾아오려 한 것과 같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개인, 민족의 역사적 병폐로 얽매여있는 콤플렉스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들은 다방면으로 해답을 모색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서양의 오디세이와 같이 모두 집을 떠나 고통스러운 지식을 찾아 헤매는 여정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쿤난이 벌거벗은 영혼(‘너희는 옷을 벗어라, 벗어라, 벗은 것으로 충분하다’, 《입맞춤, 창세기의 면류관》, p.2)으로부터 《꿈속의 사람을 읽으며》에서 ‘감각과 지각의 도구화’의 특성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나는 벌거벗고 걸어 나온다. 분명 벌거벗었다, 확실히.’) 식민문화 산업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워놓은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가 자주 쓰는 비유로는 ‘나무를 보고서는 목재만 생각하는 것’, ‘유일하게 사용하는 것은 도식’의 가치로써 정해지는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노래》에서 시인들은 어쩔 수 없이 감정을 토로하여 사람의 非물화 非상품화를 긍정하는 수단이 되며, 모두가 무형이지만 서양의 시인들의 오디세이식의 탐색을 반향한다.

 

타이완에서 당시의 새로운 지식과 생활은 당연히 영향을 끼쳤지만 고도의 문화사회, 상품화, 비인간적 공간의 촉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중국 제 1물결의 모더니즘은 상하이 조계지에서 생겨났다. 영국과 미국, 일본으로부터 모더니즘 작품들이 건너왔고 도시에 관한 서사는 피식민적 각도에서 사고되었다. ‘모던’에의 심취, (모던은 서양 모더니즘의 일부분의 뜻만을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일반인은 현대화에 무한한 동경을 가지고 있으며 산업기술의 잠재능력을 긍정하고 사회와 자아가 모두 무한한 창조와 개조의 능력이 있는 듯 여기며, 일종의 행복감(euphoria)에 젖어있는 것) 이것은 특히 일본의 신감각주의의 서사를 통해서 나타났다. 타이완 일제 강점기의 전승은 비록 역시 신감각주의를 통했지만 비교적 주지적이고 또한 비교적 논리적 구조사유를 중시했다. 하지만 1950, 60년대 타이완에서의 도시와 시골의 차이가 있는 사유 공간에서는 이것은 홍콩과는 크게 달랐다. 서양기교를 답습하는 것, 억압된 인성의 왜곡과 복잡한 심리적 현실을 표현하는 것은 실제 현실 공간에서 보여지는 것보다 많았다. 문화적 추세에서 보더라도 ‘일종의 활발하고, 미변형된, 오염되지 않은 시’를 뒤쫓고 다시 건설하려 하였으며, 역사적인 요인은 달랐지만, 숨겨지지 않은 진솔한 세계를 되찾아오려고 했다.

 

하지만 ‘파괴’로부터 ‘건설’에 있어서 서양 모더니즘이 우리에게 준 계시는 반드시 인성의 응축과 도구화에 항거하여야 하며 주변화 된 언어가 반드시 있어야 할 정신과 숭고함을 찾아와야만 비로소 진정한 시가 생겨날 수 있다고 하였다. 순수하게 혁명이나 정치개혁만 있고 시의 예술적 언어로써 일으킬 수 있는 숭고함과 깨달음이 없다면 이로써 얻어지는 유토피아는 영혼이 없는 빈껍데기일 뿐이다. 하지만 진정한 시는 반드시 ‘한 단계 한 단계 신중하게 수학 공식처럼 정서와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타이완과 홍콩의 1950, 60년대의 문화생태에 대해서 말하자면 최소한 두 종류의 건설적인 사유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우리의 백화건린 이래로의 병변적 쇠약함을 대폭 수정하고 시를 풍부하게 해야 한다. 둘째는 ‘문자의 소조’가 줄곧 우리 전통 시의 자랑이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안’, ‘경구’, 두보의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못하는 것’ 등의 말 속에 잘 나타나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가져와서 현대와 융합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는 내가 학자로서 다시금 바로 세워야 할 노력의 일부분이다. (《비교시학》과 《중국시학》, 그리고 《도가미학》을 참고) 사실상, 언어예술의 고민은 1950, 60년대의 시와 소설 속에 모두 고도로 발달되어 있던 부분으로 특히 주력해서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는’ 연습을 했다. 이 시기의 시와 소설은 언어의 간결함에 있어서 문언문과 백화문의 융합과 새로운 발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형식과 새롭게 하기, 교향악과 건축식의 음악구조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신문학이래로 가장 풍부하고 가장 성숙한 것으로 진정으로 새로운 시야와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1950, 60년대의 모더니즘 문학은 거짓되고 진실하지 못한 ‘반공문학’을 타파하고 이에 더욱 큰 공간을 열어주었으며 ‘신생대’가 다양한 주제와 기교를 탐색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선 백화 속의 내포된 연역성을 보자. 백화는 시의 표현매개체로 응용되기 이전에 주로 삼언(三言)에서 여러 고전소설의 표현매개가 되어왔다. 고대소설 속의 시는 모두가 문언시이며 서술과정 중 시의 깊이와 어떤 순간에 접어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화자 혹은 소설가는 모두 중국고전시를 빌려오지 결코 백화시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신시를 대하는 사람들은 백화로 시적 표현 매개를 채택할 때, 백화 속의 모든 연역성을 모조리 가지고 들어왔다. 서양의 과학, 논리적 시스템, 그리고 시의 형식적 유입은 더욱 더 이러한 추세를 깊어지게 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서양의 어법을 가져와 해석하고 심지어 문법을 세우기까지 했다. 한때는 균형을 잃고 쓰러질 정도에 이르렀던 이러한 것들은 마치 패권의 서양에게 우리도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처럼 보였으며 시어가 애매하고 풍부한 것을 일종의 수치와 같이 여겼던 것이다!

 

모순과 무지의 변증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1930, 40년대의 (중국)시인들과 1960년대의 (타이완과 홍콩)의 시인들은 전통에 대한 성찰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중국 고전전통의 미학을 가지고 서양 모더니즘의 전략을 조정하는 일종의 새로운 융합으로 모더니즘의 더욱 넓은 네트워크를 이루고자 하였다. 사실상, 백화시의 시어 사용과 간결함의 역사궤적은 중요한 미학적 아젠다이다. 예를 들어 백화가 사용된 초기에, 표면적으로 볼 때는 문언이 이미 힘을 잃고 무력해졌다고 했으나 (우리 현재의 역사적 공간에서 볼 때는 이것은 당연히 편향된 말이지만), 사실상 그것의 흥성은 어떤 임무를 띠고 있었다. 오히려 신문화신사상의 필요를 빨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했고, ‘문언’은 극소의 지식인들만이 고수하는 언어가 되었다. 백화의 좋은 점을 군중이 감상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조정하고 설명하는 것은 아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고, 최소한 당시의 역사 조건하에서 모두가 백화로부터 일어난 사명과 신사조를 군중에게 ‘전달’하는 것을 기다릴 수 없었다. 이 사명이 언어적으로 반영된 것이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어떠어떠하다’ 이러한 화법(전통적인 ‘무아’의 화법)은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휘트먼의 《초엽집》에서 ‘Song of Myself’는 사실상 서양의 일반적인 서술성, 설명성, 연역성이 모두 반영된 것으로 이 시들은 5?4 신문학운동이래로 유행했다. 문제는 우리가 백화를 시적 언어로 사용할 때 도대체 어떻게 문언의 좋은 점을 백화 속에 집어넣을 것인지가 우선적인 고려대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5?4 신문학운동의 초기에는 모두들 구호를 전달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서양 열강의 침략은 연이어 일본침략으로 야기된 전쟁에다가 내전이 더해져 많은 상상적 사유들이 혁명문학으로 전향되도록 했고 심지어 원래 깊이 있고 풍부했던 언어들을 버리고 구호적 단선언어의 사용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후에도 정치의 변화에 따라 마오쩌둥식의 사회주의 현실주의 공농병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한창 백화를 통해 시도하고 연습하는 시인들은 강제적으로 추방되었다. 앞에서 말한 마오쩌둥 ‘흠정’의 문예노선 하에서 시의, 시적 예술 언어는 더욱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홍콩 고유의 식민문화와 문화산업적 영향 하에서 한층 더 나아간 ‘언어적 도구화, 단선화’를 야기하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홍콩의 1930, 40년대 시인과 비평가를 발견하고 이 방면의 노력에 있어서 우리가 그들의 사색을 계승하게 되었으며 전략적 토대가 되는 언어의 간결함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와 1930, 40년대 혈연관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정서의 내재적 호응’, ‘장면의 변환’, ‘사물을 그대로 눈앞에 보여주는 것’, ‘희극 장면’, ‘사건 율동과 전개의 긴박감’ 등은 이후의 시 속에서 음악적 경향과 분위기의 융합으로부터 분위기의 풍부함과 효과를 얻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홍콩의 독특한 식민문화생활의 역사현실과 개인 사색, 역사의 통섭성 관계와 지위의 개입에 있어서 개인적 예술 스타일의 확립이 가능해졌다.

 

타이완의 1950, 60년대의 시와 소설 속에는 모두 빛나는 발전이 있었다. 특히 ‘한 자도 허투루 집어넣지 않는’데 주력했다. 중국에서 타이완으로 이주한 작가들은 1930, 40년대 작품에 심취했던 기억을 가지고 일제 치하의 타이완 출신 시인들이 일본 전위 신감각주의 시인군으로부터 몇 가지 전략을 찾아내어 이로써 그들 마음속에서 직설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근심과 분노를 표현해냈다.14) 이 시기의 시와 소설은 언어의 간결함에 있어서 문언과 백화의 융합과 새로운 어휘의 발명, 형식의 뒤집기, 교향악적인 것과 건축식의 음악 구조를 포함하였다.……이것은 중국 신문학 이래로 가장 풍부하고 가장 성숙한 것이었으며 실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 것이며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1950, 60년대의 모더니즘 문학은 거짓만을 읊는 ‘반공문학’을 없애고 더욱 큰 공간을 열었으며 ‘신생대’가 다원적으로 주제와 기교의 탐색을 하도록 했다. 곧 이러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미국에 간 첫 해에, 타이완의 모더니즘 시를 영어로 번역해야겠다는 사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초보적 소개는 1964년 《Trace 문학잡지》에 발표했고, 시선의 역본은 1970년 《모더니즘 중국 시: 타이완의 시인 20인, 1955-1965》(아이오와 대학 출판)로 출판되었다. 후에 영미권에서 번역된 중국 고전시가 만들어낸 왜곡을 발견하고 가장 근본적인 것은 중국적인 미학적 사유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겨 번역의 재창조와 중국 시론의 두 방면의 서사로부터 서양 배권식의 전역습관을 바로잡는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책으로는 《에즈라 파운드의 케세이》, 《세상을 감추어: 왕웨이의 시》와 《공간의 간극: 중국과 서양 시학의 대화》 등이 있다. 이것 역시 내가 최근 중국시학과 도가미학에 주력하여 집필을 하고 새롭게 번역하게 된 이유이다.

 

6. 중심과 주변의 변증법

 

앞서 기술한 바, 중국의 모더니즘 시라든가 타이완과 홍콩의 모더니즘이 성행하게 된 경위 및 문화적 이질성과 관련한 쟁론은, 사실 창작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동서 비교문학 중의 문화, 문학의 논의에서도 일어났다. 그것은 처음 시작하자마자 필연적으로 방법론 면에서부터 발생했는데, 1974년에 내가 모델의 응용을 제기한 것은 바로 서양의 문화적 모델, 이론적 패러다임, 미학적 근거에 대한 의문이었으며, 그 이후의 글들은 다방면에서의 증명이자 경고였다. 나의 주장은 이렇다.

 

만일 우리가 가능한 시학 토론의 지표들을 내세우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그저 한 가지 문화의 모델에만 국한된다면 절대로 그 공통의 기초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 단일한 문화의 각도에서 제시된 소위 ‘보편성’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도출된 ‘보편성’ ‘차이’로부터 그 문화의 의제에 맞는 부분을 취한 ‘같음’ 은 종종 불합리한 축소 행위로 인해 다른 문화 본연의 미적 경계를 심대하게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축소와 왜곡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한 가지 문화의 이론적 가정을 유일하고 영원한 문학적 권위라고 간주하는 이러한 행위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부동한 문화 체계의 이론적 근저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행해야 한다. 즉 그것들은 어디에서부터 연원하는가, 어떤 사회 정치 철학 하에서 변화하고 건설되고 구성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의 과정에서 우리가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분석 그 자체도 한 가지 언어틀 속의 행위이며, 이론적 대항의 장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되는 어떤 입장에 의해 우리 자신이 제약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본질 요점식’ 초역사적 진리의 구축을 탈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처리가 동양식이든 아니면 서양식이든 간에.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미학과 역사의 교묘한 결합을 이뤄내야 한다. 주의할 것은, 미학과 역사는 모두 확고부동한 범주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 계통의 문학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스타일이, 반드시 동일한 의미를 지시하는 아니며, 그 작용 역시 동일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미학적 입장은 문화 특유의 역사가 남긴 담론에 뿌리박고 있다. 역사의 문제도 상황은 복잡하다. 우선, 어떤 기술된 역사도 감히 ‘객관적’이라거나 ‘불편부당’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역사적 통체성, 객관성을 획득할 방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장악이 가능한 기간 내의 역사에서도 그것이 기술되는 과정에서 개인의 역사 철학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헤이든 화이트 Hayden White는, 역사의 기술에는 이데올로기적, 도덕적, 미학적인 최소한 세 가지 제약이 존재하며, 그 중에도 미학적 작용(구성, 취사, 경중의 조절 등)이 가장 미묘하고 복잡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중국현대사가 바로 극명한 예다. 동일한 사건이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혀 다른 역사 기술을 가능하게 한다. 또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남경대학살의 역사적 진상에 대한 기술을 거부하고 있다. 다른 예로는 흉노족을 들 수 있다. 우리에게는 한족이 흉노족에 대해 서술한 것만 존재할 뿐 그들 자신의 역사에 대한 흉노족의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패권적 담론에 의해 거듭해서 주변화되었던 퍽 복잡한 타이완의 역사도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균열들은 무형 중에 통섭적 역사 기술의 신뢰성과 정확성에 중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엄밀히 말해서, 어떠한 미학적 의제도 사회 정치적 네트워크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문학작품은 사회 정치적 상상의 투영이다. 모든 예술적 재현은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하게 모종의 은폐된 사회 정치적 의제의 담론 및 반담론이다. 주의할 것은, 사회 정치적 의제는 반드시 변동중인 비정태적 네트워크 속에다 두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주 범하는 한 가지 오류에 유가 사상에 대한 독법이다. 현대 중국의 상황을 논할 때 유가 사상과 관련한 서술이 엄청나게 많은것을 알 수 있는데, 종종 축소형 선택에 의존함으로써 마치 유가사상이 수 백 년간 전혀 변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유가 사상 특유의 복잡한 역사 심리 상황을 간취하여 현대에 재현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문화의 상호 교류의 진정한 의미는, 상호 확장, 상호 조정, 상호 수용이라는 일종의 활동이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고도의 장력과 대치 속에서 더욱 큰 원으로 나아가는 이해라야 한다. 이와 같은 문화와 문화 간의 상호 조응, 상호 식별, 상호 인식적인 열린 대화만이, 문화와 문화 간의 쟁론 공생하는 궤적을 우리가 더욱 완전하게 밝혀내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렇게 할 때라야만 우리는 우리의 담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중심과 주변의 참된 정위를 되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1) 《비교문학》(타이베이: 동대, 1982) 제 2장을 참고

2) 이후의 나의 책 《역사, 해석, 미학의 서》(타이베이: 동대, 1988)의 논점은 가장 먼저 〈작품과의 대화 - 해석학의 다양한 면모〉(연합문학, 1985)에 실렸었다.

3) Albert Memmi, The Colonizer and the Colonized, tr. Howard Greenfield (Boston: Beacon Press, 1967)

4) 역사의식, 사회의식, 종교와 문화의식의 계승, 문화기억을 간직한 언어

5) 특히 최고의 기술력과 저속한 내용을 담은 미국의 프로그램들은 음악방송의 균질화와 저속화를 거쳐 우리의 영상공간마저 ‘문화의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렸다.

6) 오랫동안 소설의 해석은 완전히 서양의 소설이론에 입각해 읽혀져 왔으며 시 역시 서양 관점과 이론에 편향되어 있었다.

7) 역사를 서술하는 철학적 기초와 일반 사회과학의 연구가 모두 서양의 자연과학 실증주의의 발전에서 생성된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

8) 〈도가 미학론〉(1978), 《비교시학》(1983) 2, 3장, 〈말이 아닌 언어: 도가 지식론〉(1987), 〈도가 미학〉(1998) Encyclopedia of Aesthetics, ed Michael Kelly, 그리고 《도가미학과 서양문화》(2002)를 참고.

9)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모더니즘과 제국주의’(“Modernism and Imperialism”》, in Nationalism, Colonialism and Literature, ed. by Terry Eagleton et al., (Minneapolis, 1990); Edward Said, Culture and Imperialism, (New York, 1993), "A Note on Modernism".

10)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 《식민지화의 기술: 인류학의 대화들("Representing the Colonized: Anthropology''s Interlocutors")》, in Critical Inquiry, 1989; 15, p.211.

11) 황색 피부가 식민자의 정치 아젠다와 심리 형태적 중국인을 내재화시켰다.

12) 정부공을 타도하는 것 혹은 홍콩의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유학 후 돌아와 신문관이나 감찰을 맡아 불가사의하게 무자각적으로 ‘황가를 위한 복무’에 열중하던 현상.

13) 문장과 작법에 대한 하나의 지침으로 당시 지식인들을 곤란하게 만든 제도였으며, 청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논의되어 1901년 폐지되었다.

14)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타이완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의 두 가지 문화의 전도가 발생한 모더니즘 시> 참고 (증보판《중국시학》, 인민문학출판사, 2006)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과정 (중국현대문학)
고 혜 림  Hyelim KOH ( huilin@pusan.ac.kr )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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