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07.12.04
수정일
2007.12.04
작성자
김혜준
조회수
864

林非, <21세기 중국 수필 창작의 미래>

21세기 중국 수필 창작의 미래

 

Linfei  린훼이 林非 (Linfei, 中國社會科學院 교수)

 

21세기에 이르러 모든 사회의 발전 추세에 따라, 민중들의 생활수준 역시 점진적으로 향상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정신적 소양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고, 더욱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 있게 자신의 여러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평등하고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는 분위기 가운데, 우리는 더욱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아름다운 생존환경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고, 당면한 수필 창작 역시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미래 사회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더 높고 광활하며 심오하고 성숙한 아름다움을 향해 끊임없이 거듭나야 한다.

수필 창작의 본래 특징에서부터 이야기하자면, 수필은 주관적의 시각에 편중되어, 인생과 우주의 풍광에 대해 체험하고 느끼고 질문하여 얻은 깨달음을 표현해 낸다. 이 때, 필연적으로 갖가지 깊고 은밀한 감정들이 맺히고 휘발되며, 이로 인해 스스로 영혼을 토로하고 철학적 사상으로 승화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자신의 내심이 솔직하게 토로되어 나올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문화적 수양의 점차적인 향상과 개개인의 개성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각성시켰다. 그리고 이는 문학에서 가장 잘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으며, 널리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서로 교류하고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에서 현대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수필은 사실 사람들의 정신적 영역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

현대적인 생활의 리듬이 점차 가속화되면서, 갈수록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게 되었고, 이로 인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가 시간에 장편소설을 읽곤 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도 이미 그 숫자가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지만 수필의 상황은 오히려 이것과 사뭇 달랐다. 수필이 가진 짧지만 강한 힘은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으며 그 숫자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물론 현대의 심미적이고 오락적인 방식은 끊임없이 풍부하고 다양해지고 있으며 이는 사람들을 더욱 다양한 여가활동과 취미생활을 가진 단체들로 분산시키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 중 가장 위협적인 역량을 가진 것은 통속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각종 TV 프로그램들이다. 보고 즐기기에 특히 편리한 특성으로 인해 대규모의 독자들을 TV 프로그램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상황들 속에서도, 수필은 자신이 가진 뛰어난 가독성으로 인하여 독자들이 구미에 맞는 작품을 단시간에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친화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다양한 사회적인 원인들에 의해서 심미적인 경향들에 대한 제약이 수필 창작에 관심이 있는 문우들을 더욱 자극하였고, 문학 창작 영역 내의 변화도 갈수록 많아지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이미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되고 책으로 다시 출판되어 나오는 수필 작품들과, 인터넷 상에 널리 퍼져 있는 수많은 유사한 글들은, 그 수가 이미 하늘과 땅을 뒤덮을 만큼 실로 예사롭지 않은 분량에 달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여 어떤 비평가들은 흥분된 어조로 이는 실로 커다란 수확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비평가들은 겉으로는 성세가 대단한 듯 하나 진정한 가작은 그 수가 극히 적다는 날카로운 지적으로 비관적인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사정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문인들의 붓 아래에서 나온 대량의 문학작품들 또한 모두 이와 다르지 않다. 일반적인 수준의 작품들은 비교적 쉽게 나오고 또 비교적 쉽게 잊혀진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되며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작품은, 세월의 흐름을 타고 한 세대와 한 세대를 거쳐 내려 온 작품들 중에서 극소수의 몇몇만이 해당된다. 명말 청초의 대학자 꾸옌우가 지적한 바와 같이,“오늘날에는 저작은 많으나 그 양이 풍족할 뿐이고, 장정은 많으나 일을 할 줄 모른다. 설령 일을 한다 하여도 모두가 세상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또한 좋다고 할 수 없다.” (《日知? ? 文不?多》)

인류가 가진 문학사에서, 이러한 상황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처럼 방대한 수량의 작품들이 창작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히 더 많은 우수한 작품들이 생산되고 선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세기의 프랑스 문학 비평가 Ta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가는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몇 세기를 떨어져서 그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지만, 우리들의 귀는 주변에 울리는 이구동성의 합창 소리와 우렁찬 소리 아래에서, 나지막하지만 복잡한 거대한 굉음을 판별해 낼 수 있다. 예술가는 이러한 화음이 있어야만 진정 위대해질 수 있다.”(《??哲?》)

훌륭한 수필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감정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움직이고 철학으로 마음을 흔들 수 있어야 하며, 이미지나 언어, 예술적 기교와 함께 살아있는 듯한 생생함과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융합되어야 한다. 동서고금의 문학사를 통틀어 이러한 작품은 극히 드문데, 이는 수필이 매진했던 내재적인 규율에 완전 부합하는 사실이다.

사실 수필의 문체가 비교적 짧은 연유로, 수필이 쓰거나 다루기 쉽다는 오해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 그러나 수필 작품이 우아하고 고매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역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왕구어웨이는 《人???》에서 이와 같이 말한 바 있다. “수필은 배우기 쉬우나 쓰기는 어렵다.” 이야말로 그 어려움을 가장 잘 묘사한 말이 아니겠는가. 수필 창작의 과정은 확실히 어렵고도 힘든 길이다. 농후하고 왕성한 감정과 깊게 응집된 철리가 인생의 순간과 자연을 반복하여 사색하고 탐구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생겨나야 하며, 더불어 천의무봉의 솜씨로 이미지와 문자 속에 녹여내야만 한다.

진정 뛰어난 문학예술 창작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동적인 이미지를 창조해내야 하며, 그 속에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감정과 사상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전자가 없으면 감정과 사상은 어디에 의존할 것인가? 기민한 이미지가 되려 천박한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수필 창작의 우수성은 주관의 인상과 깨달음의 적극적인 반영에 있다. 세상만물이 뿜어내는 감정과 철학을 세심히 살피고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 속에 융합시켜 표현해 낼 때, 자연히 독자들에게 의미 있고 영향력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명말 청초의 대학자 후앙종시는 특히 감정적 요인을 중시하고 강조했다. 그는 “고금을 막론하고 일의 크고 작음은 문제되지 않는다. 오직 찬양하고 탄복하게 하는 정신만이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母?孺人墓志?》)라 하였다. 이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미지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진지한 감정이 상실되거나 그 주제를 벗어난다면 글은 분명 활기 없고 무미건조한 지경에 빠지고 말 것이며, 자연히 독자들의 주의와 관심을 끌 방법이 없어지게 된다. 즉 충분한 감정을 갖추었을 때에만 독자들의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수필 작품을 써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문학 창작 중의 철학과 관련한 문제 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이를 강조하여 지적하기를, “정(情)은 리(理)의 벽을 넘지 못한다”(《?文管?》)고 하였다. 감정적인 요인은 어떻게든 사상적 이론과 함께 어우러져야 하며, 설령 이로 인해 성공적으로 감정을 토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철학적 사상은 당연히 독창적인 개성이 있어야 하며, 완전히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부단히 감정과 부딪히며 간절히 사색하여 탐구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시종 감정과 결합하여 공진할 수 있게 되며, 진실로 사람들 감동시키며 심오한 힘으로 영원히 독자들의 영혼을 움직이고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내심에서 우러나온 사상이 아니고, 감정과 결합하여 공진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영혼의 깊은 곳에 숨겨진 격정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면, 이는 그저 평범한 외부적인 활동이나, 이제껏 있어왔던 이야기의 모방이나,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의 반복, 방대한 전고의 퇴적일 뿐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엮어냈다 하더라도 자신의 독창적인 개성의 토로가 상실되었다면, 높고 깊은 철학 논문에 견줄만한 풍채와 엄격한 경서의 해석과 같은 모양을 지녔다 한들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며, 수박 겉핥기 식의 얕은 지식 전달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감정과 철학이 완벽하게 융합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수다스럽고 공허한 설교만이 넘치는 글들을 제외하고 나면, 남은 글은 더욱 적고 귀할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수필의 편폭이 제한되어 있으며 간결한 문체를 요하는 특성에서 기인한다. 만약 군소리가 많고 주제에서 벗어나 횡설수설하며 자질구레한 소재들을 지나치게 많이 나열한다면, 글은 그 농도가 희석되고 희멀건 국처럼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방점을 찍어가며 읽고 낭독하고 노래하고 울 수 있는 빼어난 내용은 자연히 흔적을 감추어 버리지 않겠는가? 어떤 수필 작가들은 장편의 수필을 쓰는 것을 좋아하여 걸핏하면 몇 만 자에 이르는 글을 써내곤 한다. 그리고는 길수록 값진 것이라 여기며 스스로 우쭐해 하지만 이야 말로 수필 창작의 규율에 위배하여 알맹이는 없고 길기만 한 작법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후앙종시는 또한 이미 이러한 뜻을 밝힌 바 있다. “세상에는 강대한 진지와 반듯한 깃발이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이를 넓은 문학적 안목으로 보았을 때, 그 속에는 사람을 움직일 만한 감정 서려있지 않다. 이것이야 말로 속 빈 강정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文管?》)

이 3백년 전의 이야기는 현재의 수필 작가들이 겉만 화려할 뿐 쓸모없는 문풍을 추구하는 것을 날카롭게 훈계하며, 진실로 자신의 내면의 것을 표현해 낼 것을 강조한다. 참으로 흥미로우면서도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필이란 문장을 가장 중시하는 글로, 수수하고 우아하면서도 정취와 운치가 가득한 문장으로 다듬어 내야 하니, 진정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야 말로 일생을 노력하고 탐색해야만 수필의 풍부한 광채와 우아한 정취를 음미하고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면, 독창적인 예술적 품격이 자연히 갖추어지고,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트이게 하고,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어 탄복하게 할 수 있으며, 부지불식간에 그 정신과 정서를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지와 감정, 사상, 재능이 잘 융합되기 위해서는 수필의 구성이 완벽한 외관을 갖추어야 하며, 경솔한 마음가짐으로 붓을 대어서는 결코 높은 경지에 도달 할 수 없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가는 정신으로 성실하게 나아갈 때, 진(晋)대의 시인 리우지가《文?》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금의 세월이 순식간에 흐르고, 눈깜짝할 사이에 사면이 바다가 된다.”, “하늘과 땅이 형상 안에 담기고, 만물이 붓 아래 꺾인다.”고 할 만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천하의 일과 중생들의 고통을 살피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미래의 이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일생을 바쳐 관찰하고, 체험하고, 느끼고, 독서하고, 사색하는 중에 반복하여 쓰고 또 수정하는 데 공을 들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영혼을 흔드는 작품을 써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수필 창작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적으로 새로운 경지를 추구하여 수필 자신의 존재 좌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때 반드시 세속에 떠도는 저속한 잡념들을 경계 주시하여, 가무여색 따위에 빠지거나 폭력을 선양하고 독재 군주 찬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작품들은 엄격하게 구분하고 반성해야 한다. 주변의 수많은 문인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충분히 진정한 사회적 양심을 구현하고 악습을 단호히 배제할 것을 다짐한다면, 순수한 독자들과 관중들을 오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아가 전체 인류사회가 다 함께 건강하고 아름다운 경지로 나아가는데 협조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시해야 할 것은 늘 자기 민족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광대한 저소득층의 고단한 생활 환경을 염려하며, 전체 인류가 어떻게 여러 가지 힘든 위기들을 벗어날 수 있을 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격한 빈부 격차는 사회에 혼란과 재앙을 초래한 가장 중대한 원인이며, 오랜 기간 동안 무차별적으로 훼손한 자연 환경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생존 환경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자신의 소신을 가진 수필 작가들이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체험하고 사색하여 창작해야 할 과제들이다.

더불어 수필 창작의 심미예술의 추구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평범함과 보수를 초월하고 전통 중의 정수를 거울로 삼아 발양해야 할 뿐 아니라, 끊임없는 개혁과 창조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최근 들어 몇몇 신문과 잡지에서 ‘신수필’과 관련한 구호를 제안하고 있다. 새로움을 추고하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일은 분명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가치 있는 일은 그 ‘새로움’이 모든 옛 것의 기초에서 완전히 탈바꿈하여 나온 것이어야 하며, 그것이 가진 모든 장점은 계승하되 약점은 수정하고 풀어내는 대담한 개혁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이 때 장구한 세월 동안 힘들게 쌓아온 가치들을 경솔하게 훼손하게 된다면, 오히려 수필의 발전을 저해하거나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의 모더니즘 문학예술의 창작은, 신기하고 다변적인 것들과 의식의 흐름 및 상징의 수법을 추구하고 빛과 색의 순간적인 변화의 인상주의 등을 강조하여, 문학예술의 역사의 전진과 돌진을 표현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문제는 그들이 사력을 다하여 새로운 것을 추구한 반면에, 선인들이 이미 이룩해 놓은 여러 가지 고도의 예술적 기교를 흡수하는 데는 느슨해지고 태만해 지고 말아서, 이와 같은 충분한 발양과 창조적인 혁신이 애석하게도 그 빛을 충분히 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서양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한 극심한 빈부격차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질주의의 농염한 자극과 기형적인 정신적 분위기에 심취한 가운데, 사치와 쾌락을 추구하는 향락주의와 성적 방종, 폭력의 범람, 그리고 심각한 사회적 고질병들을 야기하였다. 이는 민감한 문학예술가들에게 매우 심각한 압박과 번뇌를 줄 수밖에 없으며, 놀라움과 두려움, 분노, 위축으로 자아가 끊임없이 고통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자신의 고독을 부추겨, 뜻을 알기 어렵고, 신비함이 극에 달하여 헤아릴 수 없으며, 소리 내어 읽기 어렵고, 황당무계함만을 추구하는 문장들에 쉽게 도취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예술 표현들이 어느 틈에 일종의 자폐적인 병증을 형성하여 많은 독자들로부터 격리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이는 분명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문제일 것이다.

모더니즘의 아름다움을 살려낸 20세기 영국 시인 Elliott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일종의 새로운 예술 작품의 탄생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예술 작품들이 변화하고 부활한 것이다.” (《????人的才能》). 예술 창작에 있어서 새 것과 옛 것은 사실 반드시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이란 모든 전통의 진행과 변화를 포괄할 수 있어야만, 참신한 창조가 충분히 진행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수필 이론에 관한 연구도 그 근본적인 목적은 창작의 건강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인류가 그 동안 쌓아 온 모든 문화와 예술적 기초를 벗어나거나 포기하고도, 감히 발전적인 미래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수필을 좋아하는 광범위한 독자와 벗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읊조리고,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독자들은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새 것이나 옛 것, 규모의 장대함이나 소소함 따위를 가리지는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누구나 즐길 수 있고 그 감동이 영혼을 더 높은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 입각하여 설명하자면, 수필 발전에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작가가 창작할 때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생동적인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모사하고, 격앙되고 농후한 감정을 토로하여, 광막하고 심오한 철리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더불어 이 세 가지는 갖가지 자태의 문장 속에 녹아 들 수 있어야 한다. 창작 방법과 예술 품격과 관련해서는, 작가는 자신의 사상과 예술적 개성에 근거하여 리얼리즘의 명확함과 깊이, 로맨티시즘의 분위기와 정서, 모더니즘의 과장과 의식의 흐름, 순간적인 인상이나 빛과 색채 등을 분별적으로 구현해내야 한다.

이처럼 성실한 자세로 탐색하고 탐구해 나간다면 분명 웅장하거나 온유하고, 투박하거나 정교하고, 온화하거나 표일하고, 명랑하거나 함축적이고, 엄격하거나 익살스러운 등의 각양각색의 훌륭한 작품들을 창작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다양한 스타일은 작품 속에 시의적절하게 결합하여 다양한 매력을 가진 황홀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작가는 현재의 수필 창작의 상황이 얼마나 희망적이냐에 관계없이, 풍부한 스타일과 다양한 상황을 가진 각양각색의 독자들의 서로 다른 요구들을 만족시키고 전체 민족의 사상과 정신적 수준을 높이는데 중대한 공헌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미래를 추구하고 실현시키는 것은 비할 바 없이 힘든 과정일 것이다. 사실 외관이 아름답고 영혼을 흔들만한 걸출한 문장이 대량 창작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감히 묻건데, 쓰마치엔은 몇 편이나 써 낼 수 있었겠는가? 지캉과 루안지는 몇 편이나 써 낼 수 있었겠는가? 한위와 리우종위엔은 몇 편이나 써 낼 수 있었겠는가? 판쫑엔과 쑤시우는 몇 편이나 써 낼 수 있었겠는가? 꾸이요우꾸앙과 후앙종시는 몇 편이나 써 낼 수 있었겠는가? 웨이시와 꽁바이쯔언은 몇 편이나 쓸 수 있었겠는가? 루쉰과 쭈즈칭은 또 몇 편이나 써 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그야 말로 괴로운 여정이 아니겠는가!

수필 창작의 길 위에서 고달픈 여정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굳은 결심을 세우고, 평생을 이러한 괴로운 탐구와 의문 중에 몸을 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열심히 탐색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세상만사의 소소한 이야기들과 세상을 보는 정확하고 투철한 생각들을 써낼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치 독일의 대 작곡가 베토벤이 곡을 창작하면서 “이는 고통과 바꾼 쾌락이다.”(1815년10월10일 Al Trudy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말한 것처럼, 결국에는 알찬 수확과 함께 커다란 즐거움까지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21세기의 중국 수필 창작은 분명 더 넓고 높고, 심오하고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향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이 때 모든 작가와 비평가, 독자의 세 주체가, 그들간에 상호적인 피드백과 자극을 통해 공동으로 노력해 나간다면 우리 수필 창작의 미래는 분명 충분히 휘황찬란한 풍격과 면모를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석사과정 (중국현대문학)
문 희 정 MOON Heejoung( missmoon@empal.com )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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