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3.06.21
수정일
201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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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준 옮김, 〈중국 현대희극의 궤적〉, 陳白塵 董健 主編, 《中國現代戱劇史稿》, (北京 : 中國戱劇出版社, 1989.7), PP.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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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희극의 궤적

 

陳白塵 董健1)

 

 

 

1. 초기 및 1920년대의 현대희극

 

 

중국 현대희극의 발전은 사회 정치적 투쟁의 영향과 희극 자체의 예술적 법칙의 제약 탓으로 그 뚜렷한 역사적 단계성을 가지고 있다. 5·4 이전의 학생연극 2) 으로 부터 문명극 3) 까지를 현대희극의 맹아 시기라고 한다면, 5·4운동에서 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는 현대희극이 발전, 성숙, 번영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5·4 전야로 부터 20년대 말까지는 문명극이 몰락한 후 중국 현대희극이 더욱 대규모로 흥기한 시기다. 이 시기는 5·4운동에서 부터 제 1 차 국공합작 및 북벌전쟁의 승리에 이르기까지로, 민중의 반제반봉건 투쟁이 폭풍우처럼 거세게 일어나 전국을 휩쓸었다. 동시에 미증유의 규모와 기세로 구사상, 구도덕, 구문화를 반대하는 사상해방운동이 전체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충격을 주고 전민족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는 중국의 유사 이래 처음 출현한 사상과 개성의 대해방 시대였다. 또한 중국의 유사 이래 처음 출현한 민주와 과학 정신의 대발양 시대였다. 바로 이러한 시대 의식이 충만한 시대에 중국희극의 현대화가 점차 실현되었다.

20년대는 희극의 신사조, 신관념이 전례없이 활발해졌고, 연극운동과 연극창작의 성취는 이전의 학생연극과 문명극이 바라마지 않던 바였다. 모든 진보적인 극작가는, 사실주의 또는 인생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든지 아니면 낭만주의 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든지 간에, 전부가 다 구사물에 대한 과감한 회의와 단호한 비판 그리고 신사물에 대한 열정적 전진과 일관된 추구의 정신을 지니고서 사색과 창작을 행했다. 반식민지 반봉건적 사회의 부패한 정치가 혁명의 충격에 부닥치면서 역사의 진보와 관련된 갖가지 사회문제가 희극가의 관심의 표적이 됐고 이에 따라 이른바 「문제극」 4) 이 일시적으로 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郭沫若의 《三個反逆的女性》 5) , 田漢의 〈獲虎之夜〉, 歐陽予천의 〈潑婦〉, 熊佛西의 〈一片愛國心〉, 汪仲賢의 〈好兒子〉, 胡適의 〈終身大事〉, 陳大悲의 〈幽蘭女士〉 등은 혼인문제, 가정문제, 여성문제 등 갖가지 측면에서 봉건통치와 봉건도덕을 향해 공격을 가하고, 제국주의 침략 세력과 그 주구인 봉건군벌 및 그들의 통치하에서의 암흑적 사회에 대해 폭로와 비판을 가했다. 20년대의 희극창작 중 인도주의, 민주주의, 애국주의적 정신과 사상해방, 개성해방, 자유 평등의 요구는, 활기차고 생동적인 시대정신으로서 민중에 대해 적극적인 계몽 교육 작용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봉건도덕과 노예주의에 의해 마취되고 폐쇄됐던 사람들의 영혼이 신시대의 부름으로 깨어났다. 당시 「입센붐」이 일어났던 까닭은, 희극 자체의 변혁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서양식의 신극을 건설하고, 희극을 진정한 문학적 지위에 올려 놓고, 백화로써 산문극을 흥성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6) 20년대의 극작가는 대부분 소자산계급 지식인으로, 그들은 한편으로는 맨 먼저 각성한 흥분과 암흑을 꿰뚫고자 하는 용감함을 지니고서 사상해방의 제일선에서 굳세게 전투를 해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바위와 같은 구세력의 중압하에서 투쟁의 방향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광풍과 같은 돌진이 있었는가 하면 고민속에서의 방황도 있었다. 사회를 공격할 때 그들은 "구진영에 의해 포위된 고립된 군대와 같은 느낌이 상당해서" "비애를 느끼면서도 의기는 왕성했다" 7) . 이는 사상 정서면에서 20년대의 극작이 왕왕, 열정 속에 비애가 솟아나오고 호방한 가운데 감상이 끼어 있도록 만들었다. 이같은 정서는 田漢의 극작 가운데 가장 뚜렷하며, 이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렵사리 전진한 중국 역사가 예술에 남겨놓은 낙인이었던 것이다.

20년대의 희극은 예술상으로 문명극 시기에 비해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아마추어극」운동 8) 은 바로 쇠퇴기 문명극의 상업화 현상을 겨냥해 일어난 것으로 연극 예술의 발전을 촉진했다. 비록 당시 번역, 번안된 외국극이 창작과 공연면에서 중국 연극을 상회했지만, 그러나 연극이란 이 신형식은 기본적으로 이미 중국 희극계에 정착했으며 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첫째, 대본의 창작이 새로운 국면을 보였다. 이는 문학성이 결핍된 문명극과 비교해 볼 때 하나의 커다란 발전인 것이다. 특히 단막극 창작은 날로 성숙해지고 활성화됐으며 각기 풍격이 다른 수많은 작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막극 창작 역시 초보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다만 예술적인 면에서는 아직 거칠고 유치했다. 둘째, 희극 공연의 완정성과 예술성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연출 예술 부문이, 최초 南開新劇團의 초보적 실천과 北京大學 교수 宋春舫의 이론적 선도를 거쳐, 나중 上海戱劇協社의 洪深의 힘찬 추진과 영향력의 확대를 통해, 연극계의 중시를 받게 되었다. 이는 중국 연극 예술의 진일보 발전과 성숙에 대해 촉진 작용을 했다.

 

 

2. 1930년대의 현대희극

 

 

30년대는 중국 연극이 우여 곡절을 거치면서도 성숙해간 시기다. 이 시기는 사회 정치 투쟁과 문화운동이 앞 시기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지녔기 때문에 희극운동, 희극 사조 및 희극창작 역시 새로운 변화를 보였다.

중국공산당은 국공합작의 결렬과 대혁명의 실패로 국통구에서는 지하로 잠복했으며, 소비에트구에서는 홍색정권 건립, 토지혁명 전개, 무장투쟁 확산 등을 행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9)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소련 혁명희극 사조의 영향 및 중국내 계급투쟁의 추동하에 「무산계급희극」이란 구호가 제기됐고 「좌익희극운동」이 대두되었다. 1930년에 중국 좌익희극가 연맹이 결성되는 등과 같은 이러한 새로운 상황하에서 희극대오는 새로운 분화와 조합이 일어났다. 20년대에 희극계에 등장했던 일부 소자산계급 극작가가 세계관의 변화를 일으켜 좌익희극의 지도자 혹은 전체 희극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대부분의 자산계급 민주주의 극작가는, 계속해서 5·4 이래의 인도주의, 민주주의 및 애국주의적 정신을 발양해나가면서 희극예술의 모색과 어두운 현실에 대한 폭로에 치중해, 중국 현대희극의 발전에 커다란 작용을 했다. 한편으로 5·4정신을 옹호하던 인물들 중 일부는 「민족주의」를 제창하는가 하면 희극은 "일종의 독립적인 순수한 예술"이며 "대본속에는 어떠한 사상, 관념, 의식 따위의 것이 들어있지 않다" 10) 는 등등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희극창작의 특징은 우선 사상성, 전투성의 현저한 강화에서 나타난다. 적잖은 극작가들이 「감상」, 「퇴폐」, 「방황」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나아갈 바를 명백히 인식하고 새로운 전투적 모습으로 희극계에서 활약했다. 20년대 극작속의 그러한 열정적이면서도 비애스런 정서가, 이제 「비애」스런 것은 줄어들고 「열정」적인 것은 더욱 뚜렷해졌다. 20년대의 사상해방, 개성해방, 자유 평등의 부르짖음은 더 나아가 사회해방의 쟁취를 위한 투쟁으로 표현되었다. 구도덕, 구사상에 대한 비판은 더 나아가 반동적인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항으로 발전되었다. 혼인문제, 가정문제, 여성문제의 제재는 더욱더 깊이있게 파헤쳐졌고 복잡한 사회적 내용이 더욱더 풍부해졌으며, 또한 이같은 것은 왕왕 자본가의 수탈에 대한 노동자의 반항, 봉건계급의 박해에 대한 농민의 투쟁과 결합하기 시작해 인도주의, 민주주의에 새로운 내용이 부여되었다. 희극에서의 애국주의는 더욱 강렬해져서 만주사변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반항하는 투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서, 1936년에 이르러서는 「국방희극」의 열기를 형성했다. 소비에트구에서는, 희극은 환경적 한계 등으로 인해 예술적 추구면에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도, 광범위한 군중성과 강렬한 선전성을 보이면서, 현대희극사상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사물이자 후일 공통구 및 중화인민공화국 희극의 추형이 되었다.

30년대의 신흥의 연극은 예술 발전면에서 상당히 복잡한 국면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국공합작 결렬 후의 냉엄한 형세로 인해 희극에 대한 정치적인 요구가 그에 대한 예술적인 요구를 압도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일단의 극작가들은 계급적 의분과 정치적 격정에 의거해 희극을 창작할 뿐, 미처 냉정하게 인생을 관조할 여유도 없고 잠시 예술적 조탁을 고려할 만한 짬도 없었다. 대혁명 시기에 사람들은 "모두 목전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기교는 원숙해도 내용이 퇴폐적인 그러한 희극에 대해서는 전혀 유념할 만한 틈이 없었다". 11) 30년대 초에 이같은 경향은 더욱더 강해졌다. 그리고 이제 막 좌익으로 전향한 많은 극작가들은, 그들이 표현하고자 애썼던 계급투쟁이라는 새로운 제재에 대해 충분히 익숙하지도 못했고 깊이있는 파악도 결여돼 있었다. 이는 창작에서 한 때, 「이지」가 「감정」보다 우세하고, 주제가 형상보다 과중하며, 사상과 예술이 불균형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의 연극은 어쨌든 2,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으로 끊임없이 발전되고 나날이 향상되었다. 극작가들은 서로 노력해가면서 다같이 희극예술의 탐색과 창작 수준의 향상을 위해 노력해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 주요한 표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각색, 연출, 공연 등 모든 방면에서 연극 예술은 이미 기본적으로 중국 특유의 민족적 토양속에 뿌리를 내려 중국 희극무대에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하면서 전체 희극운동속에서 주도적인 작용을 했다. 둘째, 일군의 희극 창작 대오가 형성돼, 현대희극사상 대표성과 역사성을 가진 일련의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함과 동시에 갖가지 상이한 예술 풍격을 드러냈다. 좌익으로 전향한 이후 田漢은 노동자계급의 삶과 학생운동을 반영하는 방면에서 새로운 공헌을 했다. 그는 신속하게 사상과 예술의 불균형 상태를 극복해 〈回春之曲〉 등 뛰어난 예술적 특성을 발휘하면서도 혁명낭만주의적 색채를 지닌 성공작을 창작했다. 曹우의 〈雷雨〉는, 구사회의 암흑적 현실을 폭로한 심도와 예술적 완정성 면에서 20년대 유사한 제재의 작품을 훨씬 뛰어넘어, 강렬한 현실주의 정신으로 희극계를 진동시켰다. 李健吾의 〈這不過是春天〉은 인정, 인성, 인물 영혼의 자연스런 해부로 사상, 예술상으로 「佳構劇」을 혁신한 작품으로, 독특한 낭만주의적 색채를 지녔다. 夏衍의 〈上海屋첨下〉는 사회 풍속도에 대한 치밀한 묘사로 중국 현대희극사상 「산문화」의 풍격을 확립했으며, 현실주의적 창작 방법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발전시켰다. 田漢의 「열렬함」, 曹우의 「엄숙함」, 李健吾의 「온유함」, 夏衍의 「청신함」 등등은 현대희극 문학에 각자 독특한 풍격이 형성됐음을 설명해 준다. 그밖에 30년대 역사극의 창작에서도, 20년대의 단순히 현대사상을 역사라는 껍데기 속으로 밀어넣는 그러한 주관서정극의 방법을 벗어나서, 역사적 진실, 예술적 진실 및 현실 경향성과의 상호 통일이라는 현실주의 사극 미학에 대한 추구로 바뀌었다. 세째, 연극 예술 형식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보아 비단 단막극에도 진일보한 향상이 있었을 뿐 아니라, 다막극 역시 30년대 장편소설 및 영화예술의 번영과 호응해 구성, 언어, 인물 형상의 창조 증 제 방면에서 예술적 성숙을 이루었는데, 〈雷雨〉 등의 극이 바로 이러한 성숙의 지표였다.

 

 

3. 1940년대의 현대희극

 

 

40년대는 중국인이 항일전쟁 및 국공내전 가운데 피와 불의 시련을 이겨낸 시대로, 중국 현대희극사상 황금 시대이기도 했다. 전민족의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서, 1927년에 결렬되었던 국공합작이 항전 초기에 재차 이루어졌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하에 희극 대오 속에는 각기 다른 계급, 다른 유파에 속하는 인물들, 「급진」적 혁명파든 「온건」적 민주파든간에 ; 남방파든 북방파든간에 ; 투쟁 실천을 중시하는 「운동파」든 학술 연구를 중시하는 「학원파」든간에 ; 예술적으로 전투적 요구에 충실한 「돌격파」든 예술적으로 절차탁마하는 「절차탁마파」든 간에 모두가 일치 단결했다. 이는 현대희극사상 미증유의 대집결이었으며, 동시에 당시의 희극이 번영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바탕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희극은 좌절과 위기를 겪었다. 특히 항일전쟁후 3년간 국통구 희극의 위기는 더욱 심각했다. 그러나 40년대 희극을 종합해 볼 때, 대본 창작의 수와 질, 희극운동의 심화와 보급, 희극 대오의 발전과 확산 및 희극 이론 수준의 향상 등 이 몇 가지 점에서 그 성취는 5·4 이래의 어느 시기보다도 크게 뛰어난 것이었다. 전선과 후방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국통구와 공통구와 일본 점령구에서, 광대한 노농병과 지식인 속에서, 신흥의 연극은 전례없는 보급이 이루어졌고 전통희극의 개혁은 현저한 성취를 보였다. 희극의 제재는 더한층 풍부해지고 다양해졌으며, 주제 역시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20년대 희극에서의 사상해방, 개성해방 주제, 30년대 희극에서의 계급투쟁, 사회해방의 주제는 40년대의 민족해방이라는 총 주제하에 모두 더욱 깊이있는 표현을 획득했다. 희극은 민족의 정기를 노래하고 매국세력에 투항함을 폭로하고 부패한 통치를 비판하는 등 모든 방면에서 막대한 작용을 했다. 전체 항일전쟁시기 동안 희극은 문학예술 가운데 그 성취가 가장 뛰어나고 사회적 영향이 가장 광범위했던 분야였다.

희극의 이 새로운 고조는 역사가 촉진한 것이자 또한 좌익희극계의 역할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40년대의 희극운동과 30년대의 희극운동은 역사적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30년대 좌익희극 진영의 일부 지도적 인물들이 항전 희극 운동 중에서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했다. 둘째, 국통구나 「孤島」 및 일본 점령구의 上海에서 조차 희극 예술의 기본적 역량(극작가, 연출가, 배우 및 기타 무대 종사자)의 대부분이 좌익계 인물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국민당은 시종 문화 부문, 희극 부문에서 지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프로그램을 「조사 금지」할 수는 있었지만 무언가를 「창조」할 능력은 없었다. 일찍이 「전국파」 극작가들이 좌익계 희극운동에 대항했지만 결국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이는 부패, 몰락한 대지주와 관료자산계급이 정치적으로 인심을 얻지 못했으며 문화적 창조면에서 빈약했음을 설명한다. 셋째, 40년대 공통구의 희극운동은 20-30년대 소비에트구 및 국통구 무산계급 희극운동의 경험을 가지고서, 희극과 민중의 연계면에서 전국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40년대의 희극창작은 예술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새로운 특징을 보였다.

첫째, 30년대의 이미 성숙한 토대 위에 풍부성, 다양성 방면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항전 초기의 애국적 정열이 충만한 시사 선전극은, 活報劇 12) , 廣場劇, 街頭劇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각지에서 공연되면서 민심을 고무하는 막대한 작용을 했다. 항전 중기로 부터 항전 후기까지는 항일 및 민주라는 이 두 정신의 지휘하에 희극의 사상성과 전투력이 부단히 강화됐고, 예술 수법 역시 더욱더 다양화되었다. 특히 희극이 대도시를 떠나 항일 투쟁의 드넓은 전장으로 파고듦에 따라 예술적 시각이 크게 확대돼, 20년대와 30년대 희극의 소위 「응접실 배경客廳背景」이 보다 광활한 사회 배경에 자리를 내주도록 만들면서, 대본 창작과 무대예술의 새로운 변화를 촉진했다. 田漢, 夏衍, 于伶, 陳白塵 등의 다막극은 더 한층 자유롭고 개방적인 구성 형식과 표현 수법을 추구해 더욱 광활한 삶의 단면을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갖가지 소재, 체재의 극작에 모두 신선한 성취가 있었다. 먼저, 국통구, 孤島 및 일본점령구의 특수한 투쟁 환경하에서 역사극의 창작이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이는 희극무대에서의 하나의 교묘한 「돌파구」였다. 郭沫若의 〈屈原〉 등 戰國史劇, 阿英의 〈碧血花〉 등 南明史劇 그리고 陽翰笙의 〈天國春秋〉, 陳白塵의 〈大渡河〉, 姚克의 〈淸宮怨〉, 楊村彬의 〈淸宮外史〉 등은 각기 다른 사상과 예술 풍격으로 당시 역사극의 성과를 대표했다. 항전 시기 역사극의 창작 수준은, 비록 일부 극작에는 아직 20년대의 그러한 서정사극적인 흔적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역사적 인물의 창조나 역사적 진실성, 예술적 진실성과 현실 경향성의 결합 면에서 그 이전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밖에, 항전 승리를 전후하여 喜劇 창작이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陳白塵의 〈升官圖〉의 출현은 관료정치에 대한 그 신랄한 풍자로 20년대, 30년대의 부드럽고 담담한 유머적 풍격을 돌파해 직접적으로 중대한 사회 문제를 언급하는 정치풍자 喜劇의 역사적 지위를 확립했다. 끝으로, 항일과 민주 투쟁의 현실에서 소재를 취한 극작이 항전 초기의 선전극적 방법을 극복해, 사회 인생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과 인물 형상에 대한 창조에 주목하게 되었다. 田漢의 〈秋聲賦〉, 〈麗人行〉, 夏衍의 〈法西斯細菌〉, 〈芳草天涯〉, 于伶의 〈夜上海〉, 〈長夜行〉, 宋之的의 〈霧重慶〉, 〈祖國在呼喚〉 그리고 陳白塵의 〈歲寒圖〉, 茅盾의 〈淸明前後〉, 老舍의 〈殘舞〉와 〈歸去來兮〉, 袁俊의 〈萬世師表〉 등은 모두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이밖에 일부 대본은 비록 목전의 투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지는 않았지만 구사회의 암흑상을 폭로하고 인간의 각성과 반항을 표현한 방면에서 비교적 높은 예술 수준에 도달했다. 曹우의 〈北京人〉, 〈家〉(巴金의 동명 소설을 각색), 李健吾의 〈靑春〉과 吳祖光의 〈風雪夜歸人〉 등은 바로 이런 작품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吳祖光의 神話劇 역시 독특한 풍격을 지녔는데, 깊이있는 현실성이 풍부했다. 공통구의 연극과 신가극은 현실 투쟁과 긴밀하게 호응해 사상과 예술면에서 모두 면모를 일신했다. 특히 노농병의 생활을 표현하는 방면에서는 국통구의 연극이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

둘째, 희극 예술의 모색에 있어, 5·4 이래 서방으로 부터의 학습만 강조하고 중국희극의 전통은 소홀히 한 편향에 대해 시정을 행해서, 희극의 민족화 문제가 보편적인 중시를 받았다. 5·4 시기 당시, 서방으로 부터의 학습은 소리높여 외치면서 전통희극에 대해서는 맹렬한 공격을 가한 것은 역사적 필연으로서, 희극사조와 희극관념의 현대화를 향한 추진 면에서 커다란 진보적 작용을 했다. 이같은 「충격파」가 없었다면 신흥의 연극이 중국에서 새로운 극면을 타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문화운동의 심화 발전에 따라 희극 예술의 모색이란 시야가 부단히 확대됐고, 사람들은 갈수록 절박하게 한 가지 문제 어떻게 새로운 희극 관념과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중국 민중의 심미 습관을 결합할 것이며, 어떻게 신흥의 연극을 민중속에 보급시킬 것인가? 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항일시기 민족정신이 대대적으로 발양되고 희극운동이 대대적으로 보급된 시대에 이르자 이 문제의 중요성이 더욱더 뚜렷해졌다. 전통극에 대한 개혁, 연극 민족형식에 대한 토론, 이 양자의 출발점은 일치하는 것이었다. 즉 전통적 희극 미학을 새로운 생활 현실, 새로운 희극관념의 면전에다 위치시키고서 「단련」을 가해 이로써 희극중국화의 길을 찾는 것이었다. 전통극에 대한 개혁은, 국통구에서는 田漢이 그 대표자인데, 〈江漢漁歌〉 등 그의 전통극 작품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공통구에서는 延安平劇院을 대표로 하는데, 〈逼山梁山〉 등의 작품이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연극 민족형식의 토론 가운데 연극 관념면에서 고전극으로 퇴보하는 경향이 존재해 전통극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민족화」로 여기기도 했는데, 이는 5·4 시기에 「국수」의 보존을 소리높이 외친 수구파와 흡사했다. 그러나 중국 희극 현대화의 길은 가로막을 수 없었다. 현대화를 떠난 「민족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희극 종사자는 신흥의 연극이 걸어온 길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 그 성과를 충분히 긍정함과 동시에 민족화, 대중화 방면에서의 부족하고 개선해야 할 점을 지적했다. 田漢은 전통극 개혁을 적극적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고전극의 일부 예술적 「유전자」를 창조적으로 연극 문학의 창작에 흡수해서 연극의 민족적 특색을 대대적으로 증가시켰다. 延安 공통구의 신가극 〈白毛女〉는 가극 민족화의 탐색이라는 길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 성취를 이루었다. 40년대의 연극을 총괄해 보면, 20년대 30년대 연극에 비해 「중국미」가 훨씬 농후해졌다. 금세기 초의 문명극은 「중국미」는 농후했지만 그것은 신극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구극이란 모체를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일종의 저급한 표현일 뿐이었다. 그러나 40년대 연극의 「중국미」는, 부정의 부정이란 나선형식 상승을 거친 후인, 신극의 전통희극 미학에 대한 비교적 고급한 형태의 비판적 흡수였다. 이는 서방의 새로운 희극 관념이 중국에 전해진 후, 한편으로는 중국 희극이 고전적 형태로 부터 현대적 형태로 전화하도록 촉진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자신도 중국 희극 창작의 실천 가운데 부단히 발전해 동방적 색채를 지니게 됐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1) 《中國現代戱劇史稿》, 陳白塵 董健 主編, 中國戱劇出版社, 1989.7, PP.10-20. 일부 귀절은 임의로 손질을 가했으며, 이 글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임을 유의하기 바란다.

2) 1899년 上海聖約翰書院의 〈官場丑史〉를 필두로 일단의 교회학교의 학생들이 외국어를 사용하여 공연한 연극. 중국 전통극이 변화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자 일부 선진적 인물들이 서양의 희극에서 새로운 희극사조와 희극관념을 도입하고자 한 결과로, 문명극의 선도라 할 수 있다.

3) 新劇. 文明劇. 文明新戱. 신해혁명 전 일본 신파극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중국의 초기 연극. 1910년 이후 上海, 武漢 등지에서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대본에 의거해 공연했으나 후기에는 등장인물의 이름과 극의 내용을 설명하는 줄거리로 이루어진 편목만 가지고 즉흥적으로 공연했다. 신해혁명 실패 후 점차 상업화하여 작품의 수준에 소홀했던 데다가 배우들의 방탕한 사생활이 문제가 되어 결국 초기의 생동성을 잃고 쇠퇴했다. 주요 극단으로는 春柳社·春陽社·進化團 등이 있으며, 春柳社의 〈茶花女〉가 최초의 작품이다.

4) 일반적으로 신문학운동 초기에 서방의 인도주의적 사조의 영향으로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연극을 말한다.

5) 〈卓文君〉 〈王昭君〉 〈섭앵〉의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6) 魯迅,〈集外集·《奔流》編校後記三〉,《魯迅全集》 第7卷, 人民文學出版社, 1981.

7) 魯迅,〈集外集·《奔流》編校後記三〉,《魯迅全集》 第7卷, 人民文學出版社, 1981.

8) 愛美劇運動. 1920년대 民衆戱劇社 등이 주도한 중국의 연극개혁운동. 19세기말의 유럽 소극장운동에 영향을 받은 일단의 아마추어극 종사자들이 비직업적인 소형의 연극 공연을 제창하면서 대본에 의한 공연 및 엄격한 배우 제도를 주장했다. 문명극의 상업화, 저속화 경향을 시정하고 연극의 예술적 수준 및 교육적 작용의 제고에 공헌했다.

9) 중앙소비에트구에서는 八一劇團, 勞農劇社, 藍杉劇團 등 많은 극단이 잇달아 창립됐다. 특히 1934년 2월 上海에서 옮겨온 瞿秋白은 직접 희극운동을 지도하고 고리끼희극학교를 세웠으며 소비에트구의 희극집 《號匍集》을 편집하기도 했다. 소비에트구의 중요 작품으로는 〈年關鬪爭〉, 〈父與子〉, 〈戰鬪的夏天〉(李伯釗), 〈我 紅軍〉(沙可夫) 등을 들 수 있다.

10) 向培良,〈落月·附記〉,《矛盾》 第3卷 第1期, 1934.3.

11) 洪深, 〈現代戱劇導論〉,《中國新文學大系 戱劇集·導言》

12) 活報.'活的報紙'라는 의미. 시사적인 사건을 스케치와 같은 수법을 사용하여 신속하게 반영한 희극의 한 종류로, 대체로 부정적 인물에 대해 희화적 묘사를 통한 비판을 가하는데, 길이가 잛고 형식이 간단하며 보통 거리나 광장에서 공연한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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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준 옮김, 〈중국 현대소설의 발전 개관〉, 田仲濟 孫昌熙 主編, 《中國現代小說史》, (濟南 : 山東文藝出版社,1984.1), PP. 547-579.
총관리자 2013-06-21 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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