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3.06.20
수정일
201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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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偉宗 王晋民 編著, 성영창 옮김, 〈臺灣文學〉, 《中華新文學史》(下), (廣州: 廣東高等敎育出版社, 1998), PP.421-452.

台  ?  문  학

 

黃偉宗  王晋民

 

제 1 장 台?문학의 총체적 풍모

 

제 1 절 中?문학의 한 지맥

 

台?문학은 中?문학의 중요구성부분이자 중요한 지맥이다. 台?문학은 台?省의 中?문학이며 中?문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발전된 모습이다. 台?문학의 성격, 즉 그 中?적 속성은 아래의 몇 가지 조건과 요소로써 결정될 수 있다.

1. 台?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中?의 영토로, 中?영토인 台?이라는 땅에서 발생한 台?문학은, 의심할 여지없는 中?문학이며 더욱 엄밀히 말해서 中?문학의 한 부분이다. 1980년 10월 24일, ‘台?省文?委??’ 주임위원 林衡道는 史蹟原流?究? 연회의 상에서 卑南 출토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卑南 거석문화유적에서 발굴된 암석관은 모두 대만 중앙산맥에서 채취된 것으로, 동해안 원주민의 이주 경로가 서부를 경유, 중앙산맥을 넘어 동부로 이동해 온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卑南에서 출토된 옥기, 석기, 도자기 파편 등의 문물은 卑南 거석문화의 원류가 중국대륙임을 설명하고 있다. 台? 원주민의 조상숭배와 족보, 문신, 부자간 성씨계승, 홍수 관련고사 등 문화적 특징들 역시 中?대륙 남방의 각 성의 고대 越?族과 유사하다. 이로 인해 台? 역사문화의 근원은 中?대륙에 있으며 台? 최초의 주민은 대륙에서 왔으며 그들은 中? 고대인의 자손으로, 中?민족과 혈연관계가 있는 한 핏줄임을 알 수 있다. 1987년 ?石?는 《台?文?史?》에서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하여, 지질시대 및 선사시대로부터 시작하여 台?은 지정학적, 혈연적, 역사적으로 中?대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였다. 지질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台?은 동해의 대륙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고생대 말기 대략 2억 2천만 년 전 해양융기에 의해 형성된 섬으로, 그 시기에 ?中, ?南지방은 바다였다. 중생기때 ?中, ?南지방은 이미 대륙으로 형성되어 台?과 서로 접하게 되었으며 빙하기에도 ?南지방과 서로 수 차례 접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 중 ?南지방의 동물 및 수렵채집을 목적으로 하던 구석기시대인류가 끊임없이 台?으로 이동해 왔다. 약 만 오 천년 전 臺???八仙洞에는 구석기 말기의 인류가 거주하였는데 이는 제4기 빙하기 때 台?과 대륙이 서로 연결되어있었음을 증명한다. 즉, 대륙의 구석기 인류는 台?에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台?이 고립된 섬이 된 후 일만 년부터 ?人이 台?으로 대거 이민 오기까지, 台?에 거주하던 인종은 구석기 시대의 ??人 혹은 左鎭人을 막론하고, 혹은 신석기 山地土着?族이나 平地土着?族을 막론하고 모두 대부분 대륙에서 건너 왔으며 대다수가 고대 越族에 속하는 인도네시아어족이었다. 이외에도 사료의 기록에 의하면 三??代 초기, 즉 기원 후 230년, ??이 장군 ??과 ?葛直으로 하여금 병사 만 명을 거느리고 夷州 즉 台?을 정벌하게 했으며, 隋부터 元까지 中?의 역대 통치자들은 모두 신하나 장수를 보내어 台?을 회유 또는 정벌하였다. 宋代 즉, 1297년부터 澎湖列?가 정식으로 中? 영역에 포함되었다. 또한 宋·元부터 대륙인들은 점차 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고 嘉靖, 万曆년간에 이르러 이주민은 점점 증가하여 점차 촌락을 형성하였다. 1661년 ?成功이 대만을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 네덜란드 등 모든 외세를 축출하여 대만을 ‘反??明’의 거점으로 개척하였으며, 동시에 귀순민이 되길 원치 않은 明말의 유신들 역시 속속 대만으로 건너왔다. 1683년 明 ?成功의 세력이 멸망한 후 台?은 ?의 통치를 받게되어 福建省의 일부가 되었다. 1885년 台?은 福建省에서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된 성이 되었다. 1895년 갑오전쟁의 패배로 인해, 中?은 강제적으로 日本과 《????》을 체결하여 台?을 日本에 할양하였다. 1945년 항일전쟁에 승리하자 국제적인 《카이로선언》의 ‘日本이 강탈한 中?영토, 예로 ?洲, 台? 澎湖列?가 中?에 반환한다.’에 근거해 台?은 다시금 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적 기록들은 모두 台?이 中?의 영토임을 설명하며 이로 인해 台?문학이 中?문학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의심이나 반박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2. 台?에서 생활하는 국민과 대륙에서 생활하는 인민은 모두 다 중국인이다. 그들은 모두 中?민족 炎?의 자손들이다. 그들은 공통된 역사와 공통된 사상 및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근대사에 있어서, 제국주의 및 봉건주의 압박과 착취에 반대하고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동고동락하며 서로 지원하며 분투하였다. 가령 항일전쟁시기에는 무수한 台? 동포들이 조국대륙의 항일전선에 분분히 뛰어들었다. 또한 대륙이나 台?작가를 막론하고 그들이 사용한 것은 같은 中?의 언어와 문자였고 그들이 묘사한 것들은 모두 대륙 중국인 혹은 台? 중국인의 생활과 투쟁 및 이상과 희망이었다. 일제치하라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 아래, 비록 일부 작가들이 강압적으로 일본어를 사용하여 문학활동을 영유하였지만 그들이 반영한 것은 똑같은, 대만인을 포함한 중국인의 생활과 사상이었기에 日本제국주의를 위한 日本문학과는 완전히 달랐다. 또한 광복이후 그들 대부분은 모두 중국어를 사용하여 문학활동을 재개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台?작가와 대륙작가는 같은 문자를 쓰는 같은 민족이며 동시에 중국인이며 또한 中?의 언어문자를 사용하며, 台?을 포함한 中?인민의 생활과 투쟁을 묘사하였기에 台?문학은 당연히 中?문학이며 中?문학의 한 부분이다.

3. 단순히 문학적 견지에서 봤을 때에도 台?문학은 직접적으로 中?문학의 영향 하에서 발생한 것 혹은 中?문학에서 전해져 온 것이기에 台?문학에는 中?문학의 전통정신이 선명하게 스며들어있다. 台?문학의 발전양상은 대체로 세 단계로 나뉠 수 있다. 첫 단계는 구문학시기이며 그 다음단계는 신문학시기, 세 번째는 광복이후의 신시기이다. 台? 구문학시기의 구문학이라 함은, 中?대륙의 구문학이 직접 이식된 것으로, 台?에는 과거 구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학사의 기록에 의하면 台? 최초의 구문학 전래자와 전파자는 明代 ??社의 沈光文이다. 그와 대륙출신 시인 13명은 ‘?吟?社’을 조직하여 구문학의 전파에 전력을 다했고 많은 시인들을 양성하였다. 明말?초의 유명한 시인과 문인들은 모두 대륙출신의 벼슬아치들이었으며 ?말까지 대만본토의 구시인 및 구문학자들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0년대 대만의 신문학운동역시 대륙의 ‘5·4’ 신문학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일어난 것이다. 당시 대만 신문학운동의 최선봉이었던 대만 청년 ?我?은 ‘5·4’운동의 세례를 받은 北京대 학생이었다. 그는 北京에서 다섯 편의 글을 台?으로 보내 문학혁명을 고취시켰는데 그 제목들은 각각 《台?을 위한 문예계의 一哭》, 《저 시든 풀숲의 낡은 전당을 허물자》, 《?有的??吟的意?》 등으로, 台? 구문학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台? 신문학운동의 과정은 신구문학논쟁에서부터 시작되어 백화문과 방언문에 대한 논쟁으로 전개되었으며 최후에야 비로소 신문학 창작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기본적으로 대륙 신문학운동 과정과 유사하며 이론과 관점에 있어서도 대륙문학과 아주 비슷하다. 그들은 또한 胡适, ?迅, ??秀 등의 인물들의 이론과 작품을 대량으로 소개하였다. 台? 신문학운동과 광복이후의 台?문학에는 반제반봉건사상 및 인민의 고통을 동정하는 정신이 충만 되어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台?문학이 농후한 ‘5·4’ 中?신문학의 색채를 띠게 하였다.

台?문학이 中?문학의 일부이며 台? 속에서의 中?문학이며 中?문학의 발전이자 연속이라는 이 견해는 이미 절대다수의 台?작가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다. 台?의 선배작가들인 ?逵, 王?琅, ?石?와 같은 이들이나 당대 유명 작가들인 ?映?, ?少廷, ?忠武 등은 모두 그러한 관점들을 명확히 나타내었다.

 

제 2 절 주요특색

 

선명한 민족성, 융합성 및 본토성은 台?문학의 주요특색이다.

소위 민족성이라는 것은 台?문학이 中?의 문화적 전통과 中?의 문학적 전통을 계승했음을 가리키며 민족의 혈연관계 및 中?본토와의 분리로 인해 생겨난 ‘향수’를 뜻한다. 즉, 台?문학은 中?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台?문학 중에서 각기 다른 정도로 구현된 中?전통의 철학사상(주로 유, 불, 도의 사상), 종교관념, 논리관념, 도덕관념, 민간풍속, 생활방식 등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台?문학은 中?의 문학적 전통 역시 계승하여, 台?문학이 계승한 中?문학사상과 심미적 의식 및 심미적 취미를 주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文以?道’의 문학사상이라든지 中?문학 중의 애국주의, 현실주의, 인도주의(소위 우국우민의 ?患의식)의 우수한 전통이다. 台?문학의 ‘향수’는 역사적 ‘향수’, 문화적 ‘향수’, 지역적 ‘향수’, 친근한 정과 우정에 대한 ‘향수’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러한 ‘향수’들의 실체는 모두 애국주의사상과 민족감정의 발로로서, 많은 국내외 학자 및 작가들의 소위 ‘中?정신’이자 ‘중국의식’이다.

明朝이래,  中?의 台?省은 끊임없이 식민주의자들의 침략을 받아왔다. 1895년 이후 일제는 또다시 台?을 반세기에 걸쳐 통치하였다. 그러나 台?은 옛부터 中?의 영토였으며 이 ??에서 생활하는 台?인들의 마음은 조국을 향해있었기에 이민족의 침략과 통치에 반대하는 불요불굴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台?문학은 中?문학의 일부로서 中?문화와 문학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강렬한 민족정신과 애국주의사상을 빛냈으며 中?문학의 선명한 민족적 풍격을 유지하였다. 이 점을 台?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색으로 꼽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한 가닥의 홍실처럼 台?문학의 전 역사와 台?의 신구 작가들의 작품을 꿰어 台?문학과 대륙문학을 연결하는 확고한 매개체가 되었으며 台?문학이 전체 中?문학 중에서 불가분의 구성성분이 되도록 하였다.

中?문학은 《??》, 《楚?》에서 시작하여 ‘5·4’운동, 30년대 문학에 이르기까지 강렬한 현실주의, 애국주의, 인도주의의 전통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데, 이 점이 바로 진실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시대와 사회의 면모를 반영한 것으로, 이를 통해 민중의 고통을 반영하고 외세침략에 반대하며 애국주의의 사상과 민족정신을 표현하고 찬양하였다. 台?문학은 中?문학의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약 60년 간 台?사회의 변천과 일제치하의 日本 제국주의가 台?에 가했던 혹독한 통치와 台?인들의 저항, 국민당의 台?이전 후 상류사회의 부패와 몰락, 외국자본주의의 침입이후 대만인민들에게 발생한 갖가지 문제들, 台?인들이 조국통일을 강렬히 염원하는 심리정서 등등이 台?문학 속에서 아주 생동적이고 진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台?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石?는, ‘台?의 작가들은 모두 전통적 사실주의 풍격을 계승하여, 끊임없이 힘쓰며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또한 이는 해협 양편의 中?작가들을 구분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5·4’운동이후의 전통이 좋거나 혹은 대만신문학운동의 전통이 좋음을 막론하고 台?작가들이 표현의 주류는 바로 시대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台?소설의 사회성은 매우 짙다. 이는 우리가 광복 30여 년 간의 수 차례의 문학풍격의 변화를 회고해본다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며, 이 사회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미 유럽의 현대문학의 정수를 흡수해야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文??志》나《?代文?》의 작가들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특히 《?代文?》파의 ?楚, 白先勇 및 ?勇曦 등 작가들은 결코 사회현실에서 유리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사실주의기법 중에 도입한 심리적, 잠재의식적, 색채적, 음악적 현대감각이 두드러진 것뿐이다. 그들 중 이단이라고 칭할만한 이는 아마도 王文?일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王文?의 유명 작품인 《家?》과 같은 경우, 비록 그것이 ‘역설’로써 소설을 전개한다고 할지라도 그 소설은 여전히 틀림없는 사실주의수법이다. (《1982년 台?小???序》) ?石?의 논설은, 대만문학이 중국 현실주의문학전통을 계승했음을 상세하게 개괄하는 중요특징이다.

대만문학이 중국문학의 우수한 전통과 민족풍격을 계승하고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중요 요인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中?동포이자 中?민족의 炎?의 자손이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대륙으로부터 이주해왔으며 대륙인들과 공통된 역사적 운명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들의 민족적 정서 민족의식과 애국주의사상은 문학 중에서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台?문학은 대륙문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5?4’시기 대만 신문학운동은 바로 대륙의 ‘5?4’신문학운동의 추진 아래에서 일어난 것이다.

소위 융합성이란 台?문학이 中?문학과 日本문학, 서구의 비판적 현실주의와 서양 현대주의 등 여러 종류의 문학을 융합했다는 특징이다. 일제시대, 일본침략자들은 식민노예화교육을 진행하기 위해 台?에서 한문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일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신문학운동에 투신한 앞 세대 작가들 역시 거의 일본유학생이었다. 후기의 日文작가들 역시 다수가 일본 식민지의 교육을 받았으며 그들은 일본문학에 모두다 상당히 익숙했기에 자연히 창작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일본문학의 특정사상과 표현 기교를 흡수하게 되었다. 明治?新이후 일본은 전력을 다하여 서방문명과 문화를 모방, 흡수하였으며 일본문학 역시 구 소련과 미 유럽 문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때, 台?의 선배작가들은 또다시 日文을 통해 서양문학, 특히 19세기 비판적 현실주의 작가들, 예를 들어 러시아의 톨스토이, 프랑스의 발자크, 영국의 디킨스 등을 자신들의 학습대상으로 삼았다. 台? 광복 후 50년대 초기에 이르러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원조로 미일상품이 台?으로 대량 유입됨에 따라 서방문화가 台? 도처에서 만연하게 되었다. 이때 台?대 서양어과 출신의 문학청년들과 몇몇 작가들은 다시금 서구 현대파의 전위문학을 모범으로 삼고 海明威, ?埃斯, 福克? 등의 작품과 현대주의 문학사조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하여 台?문학에 비교적 큰 영향을 끼쳤다. 台?문학이 서구문학을 학습할 시기에, 19세기 비판적 현실주의이외에도 일본문학과 서구 현대파 문학을 상당히 받아들였는데 이는 중국대륙문학과 상이한 부분이다. 또한 이러한 차이는 또한 양국의 사회 및 역사적 상황과 서로 연관되어있다.

소위 본토성이라 함은 台?문학의 농후한 ?土色彩를 가리킨다. 이러한 향토색채는 인물의 언어, 자연풍경과 민간풍속의 묘사에서 표현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물의 사상, 의식, 성격, 개성, 기질의 묘사에서도 표현된다. 지리, 역사, 정치적 환경 및 조건의 특수성으로 인해 台?문학의 향토색채는 대륙문학과는 다른 향토색채를 띄고 있다. 그러나 台?의 주민 대다수가 대륙, 특히 福建(?南)과 ??(客家)에서 이주해 왔기 때문에 台?문학에는 종종 ?南과 客家의 특색 또한 가득 차 있다.

台?의 저명한 비평가 ?石?는 일찍이 台?문학의 향토색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한 적이 있다.

“台?의 원주민 대다수는 중국대륙에서 이주해 왔으며, 생존과 종족번식을 위해 역경을 극복하며 주야로 부지런히 일하면서, 개척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산림을 개간하여 정복된 적이 없는 대자연과 싸움을 시작했으며, 희생을 무릅쓰며 용감히 전진하여 이민족의 침략에 항거했다.”

台?은 지리적으로 아열대에 속하며 사면이 바다이고 기후는 온화하고 산림은 울창하고 높은 산은 우뚝 서 있고 강은 급히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토지는 비옥하다. 또한 ?族, 平?族, 山地族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그밖에도 台?은 비록 중국의 민족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나 외래문화 역시 건축, 촌락, 언어, 음악, 종교, 풍속 등 방면에서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이러한 특수한 역사와 자연환경은 모두 台?문학이 독특한 향토색체를 띄게 하였다. (《台?문학의 가야할 방향에 대해 논함》)

 

제 3 절 분기와 성취

 

‘5·4’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台?문학의 발전은 대체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5·4’부터 항일전쟁승리까지를 일제시대의 문학으로 칭하는데 즉, 우리가 통상 일컫는 현대문학이다. 또 1945년 항일전쟁승리로 台?이 중국의 품에 돌아온 때부터 현재까지를 광복이후의 문학, 곧 우리가 통상 일컫는 台?당대문학이다. 台?의 일제점령기문학은 또 20년대 요람기, 30년대 초의 성숙기와 항일전쟁발발후의 저조기로 나눌 수 있으며 광복이후의 문학 역시 대체로 50년대 反共??문학시기, 60년대 현대주의문학시기, 70년대 향토문학시기, 80년대 다원화문학시기로 나눌 수 있다.

‘5·4’부터 현재까지의 70여 년 간, 台?문학의 발전은 두드러진 성과를 거뒀는데 그 주요 지표는 다음과 같다.

1. ‘5·4’이래 힘있는 대규모의 작가연맹이 점차 형성되어 비교적 유명한 신구작가들이 등장하였다. 가령 소설에는 ?和, ?逵, ??流,?理和, 李?, ?映?, 王?和,?春明,王拓, ??矗, 宋??, 白先勇, ?若曦, 王文?, ??子, 七等生, 林?民, ???, 於梨?, ?係?, 施叔? 등이 있으며 시에는 余光中, 洛夫, ??, ?弦, ?愁予, ?弦, 白萩, ??, ?天?, ?默, ??廉, ?牧, ?晟, ??, 杜??, 非? 등이 있고 산문으로는 梁?秋, 柏?, 琦君, 徐中佩, ???, ??然, 郭? 등이 있다. 이 작가들의 작품들이 비록 어떠한 결점이나 부족한 면이 있더라 하더라도 그들이 거둔 성취는 모두 台?문학 발전에 있어서 자신들만의 공적을 남겼다. 그중 성과가 비교적 큰 몇몇 작가들은 필시 중국문학의 ?史에 기록될 것이다.

2. 台?의 현실생활과 역사적 생활을 반영한 비교적 훌륭한 몇몇 작품들, 혹은 비교적 영향력 있고 예술적 참신함과 탐구정신을 갖춘 일단의 작품들이 등장하였다. 소설로는 ?和의 《一杆秤仔》, ?逵의 《신문배달부》, ??流의 《아시아의 고아》, ?理和의 《笠山??》, ?映?의 《워싱턴빌딩》, 白先勇의 《大北人》, 王?和의 《한 수레의 혼수》, ??矗의 《직공》, 王拓의 《金水?》, ???의 《桑?과 桃?》, 於梨?의 《반갑구나 종려나무야》, 王文?의 《家?》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각기 다른 측면에서 台?의 사회면모와 시대변천을 반영하고 있으며, 많은 선명한 성격의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으며 예술의 표현, 형식적 측면에 있어서도 독특한 특색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이, 비록 台?현실생활에 대해 충분히 심각하게 반영하진 않았지만 그것들이 예술적으로 추구하는 점과 모색하는 바 역시 대중들이 본받을 만하다.

3. 문학창작의 제재, 체제, 풍격, 유파와 창작방법이 비교적 다양하다. 유파를 예로 들면, 비교적 다양하게 현대주의를 흡수한 표현방법으로써 台?상류사회와 지식계급 및 화교들의 생활에 대한 묘사를 위주로 한 현대파, 그리고 비판적 현실주의 창작방법을 가지고 농촌과 도시 하층민에 대한 묘사를 위주로 한 향토파가 있으며, 중국문학의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고수하여 대륙의 생활에 대한 묘사를 위주로 한 사실파 및 기타 각종각양의 문학 유파와 단체가 있다. 台?의 작가들은 상이한 유파들이 상이한 창작방법과 예술풍격, 예술형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유파의 작가들도 제재, 수법, 풍격 면에서 천차만별이다. 현대파를 예로 들자면, 白先勇은 台? 상류사회를 묘사하고 있으며 표현방법 면에서는 서구 현대주의와 중국의 전통적 사실주의를 한데 융합하여 풍격이 세밀하고 우아하다. 또 於梨?는 주로 화교들의 생활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녀는 사실서정과 심리묘사를 융합하여 자세하고 유창한 서정체 풍격을 형성하였다. 또 ???은 주로 대륙에서 유랑하다 台?으로 건너온 소시민, 하급 공무원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녀의 예술적 중요 특징은 ??과 상징의 결합, 구상과 구조의 정교함이다. 한 편 王文?은 주로 台?의 지식계급을 그려내면서 구조와 언어상의 독창성과 기발함을 추구하고 있으며 풍격이 독특하다. ?若曦는 주로 台?, 대륙 및 해외 중하층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풍격이 소박하다. ??子는 주로 가정의 일상생활상의 제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인물의 심리묘사에 치중하고 있고 문자가 세밀하고 밝으며 아름답기 때문에 ‘심리소설가’로 불린다. 향토파 작가들의 제재 및 풍격 역시 다양하다. 우리는 73년대의 향토문학을 소개할 때 이에 대해 다시 자세히 분석하려 한다.

 

제 2 장 台?문학의 발전과정

 

제 1 절 정치문학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북경에서 수립 선포되었다. 아름다운 오성홍기가 천안문 상공으로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중국역사가 인민이 주인이 되는 새 시대에 진입했음을 예시하였다.

40년대 말과 50년대 초는, 台?으로 국민당 정권이 막 물러갔을 시기로, 안 밖으로 곤경에 빠진 사면초가의 국면에서 상황은 극도로 불리하고 위험하였다. 경제, 정치, 군사, 외교, 사상문화 모든 분야가 전면적인 붕괴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台? 정권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국민당은 몰락과 멸망의 상황에서 벗어나 台?을 견고한 반공기지로 만들어 국토수복의 반격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台? 섬 내의 혼란상황을 해결키 위한 엄격한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 반공사상체계를 강화하여 반공의 기풍을 일으켜 세우고 엄격한 사상통제를 실시하였다. 둘째, 국민당이 시행하는 ‘개조’운동에 대하여 엄격한 조직통제를 실시하였다. 셋째, 첩보기구를 재 설립하고 ‘계엄령’을 선포, 첩보기구중심통치와 군사통치를 실시하였다. 넷째, 미국 台?간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반공국제연맹을 강화하였다. 다섯째, 공산당 인사들과 진보적 민주인사들을 대거 체포, 감금 및 살해하였다.

위와 같은 사회배경에 대한 소개 중 눈여겨볼 만 한 것은, 50년대 등장한 반공문예사조는 완전한 官方문예사상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민당의 반공정치의 산물이자 국민당이 만들어낸 반공사상체계사슬의 중요한 고리였다. 또한 그 목적은 바로 공산주의사상의 영향에 대항하고, 台?을 당시의 위기 국면 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견고한 반공기지로 건설함으로써 국토수복의 반격이라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이러한 반공문예사조는 당시의 국내정세 및 국제적인 반공사조와 밀접히 관련돼 있는 것이다.

1949년 10월 13일 台?의 《新生?》에는 巴人의 《수수방관론》이 발표되어 많은 작가들의, ‘방관’하면서 ‘수수’하지 않고, ‘수수’하면서 ‘방관’하지 않는 주의(표면상 수수방관하면서 사실상 여전히 국민당의 편에 서있는 것)를 비판하였다. 《수수방관론》이 《新生》의 문화면에 발표된 후, 《民族?》의 초빙에 막 응하려던 우익작가 ?陵은 즉시 《民族?》의 문화면 창간호에서 《문예종사자계급의 눈앞에 닥친 임무―전투 전개와 적에 반격》이란 제목의 창간사를 발표하면서 巴人과 국민당 편에 서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자유주의자들을 강렬히 비판하였다. 문장의 끝머리에는 ‘전투에 동참하자! 건설에 동참하자! 혁명에 동참하자! 우리는 마땅히 전사들을 찬양해야한다! 영웅을 찬양하자! 첩자를 색출하자! 전방의 영웅 전사들과 함께 하자! 후방의 자유전사들과 합세하자! 전사문학을 창조하자! 반공문학을 창조하자! 진정 자유를 인식하고 자유를 수호하는 자유주의 문학을 창조하자!’라는 말로 문예종사자들을 고무시키고 있다. 台?문학계에서 ?陵은 맨 처음 공개적으로 ‘반공문학’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이어서1949년 11월 17일자 《中?日?》에는 《수수방관만 할 것인가?》라는 논설이 발표되어 소위 자유주의자와 방관자들을 계속해서 맹렬히 공격했으며 《民族?》, 《中?日?》를 뒤이어 《???》, 《全民日?》도 계속해서 서로 호응하며 巴人의 《수수방관론》을 말과 글로써 맹공격하였다. 台?의 많은 작가들은 자의든 타의든 부지불식간에 모두 《수수방관론》을 공격하는 행렬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반공문예사조와 문예운동은 일시에 台? 전역에 만연하게 되었다.

반공문학사조는 국민당의 반공정치의 영향과 정책 하에 등장한 것이며 이후 국민당은 또다시 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 편, 각종 문학단체와 문예장려금위원회를 통해 반공문학사조를 반공문예운동으로 바꾸어 반공사상을 작가와 독자들에게 주입시켰다.

1950년 초봄, ?介石은 국민당 문예운동위원회 주요 위원들과 台?문화계의 지도자 ?道藩에게 ‘중국문예장려금위원회를 창설한다면 부유한 시대적 성향을 지닌 문예창작을 장려함으로써 민심, 사기를 진작시키고 반공항전의 정신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고 지시하였다. ?介石의의 지시이후 ‘문예장려금위원회’가 1950년 3월 초 설립되었고 1950년 5월 4일에는 ‘중국문예협회’가, 1953년 8월 2일에는 ‘중국청년문예협회’가 臺北市에서 창설되었으며 1955년 5월 5일에는 국민당의 고무 아래, ‘台?성여성문예협회’가 臺北市 台?省 민중사무처에 창설되어 1969년 ‘중화민국 여성문예협회’로 개명되었다.

台?의 ‘중국문예협회’, ‘중국청년문예협회’, ‘중화민국여성문예협회’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바로 ‘반공’을 협회의 중심사상으로 하여 국민당의 반공정치에 봉사하는 것이다. 이 단체들은 50년대 반공문학전개에 온 힘을 쏟아 부으면서 정치로써 문학계에 관여하여 매우 부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특별히 ‘중국청년문예협회’는 ‘반공구국단’이라는 배후세력으로 인해 반공의식이 매우 투철했기 때문에 그것이 도대체 문예단체인지 아니면 반공정치단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러한 협회들은 대대적인 문예 보급 활동을 벌였다. 가령 문예연습반, 문예통신학교, 문예순회강습 등의 활동을 통해 청년작가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육성시키고 사회청년들의 문예지식과 문예소양을 강화시켜 여전히 그 적극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50년대 국민당은 문학단체 조직을 꾀하여 반공사상을 문학단체들의 주지와 행동으로 삼음으로써 작가들의 창작과 사상을 통제하는 것 외에도, 소위 ‘청결문화운동’을 일으키고 ‘전투문예’운동을 제창하였다.

1954년 7월부터 臺北에서는 소위 청결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바로 소위 三害를 척결하는 운동으로서, 여기서 ‘三害’라 함은 적색, 황색, 흑색 세 종류의 해독을 말한다. 이 중 ‘적색의 독’은 공산주의 서적을 전파하는 것이며 ‘황색의 해’는 선정적인 성문학과 성문화를 퍼뜨리는 것이고 ‘흑색의 죄’는 내막과 흑막을 파헤치는데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소식지와 문예를 가리킨다. 그들은 ‘적색의 독’을 제거하자 그 결과와 위험은 매우 심각해졌다. 왜냐하면 台?당국이 제거하고자 했던 것은 ?克思, 恩格斯, 列?, 毛??의 저작들뿐 만 아니라 ‘5·4’와 30년대 현대주의문학까지 없애고 금지시키려 했기 때문에, 台?당국은 중국현대문학의 거장인 ?迅, 茅盾, 巴金, 郭沫若, 老舍와 같은 이들의 작품들을 포함한 저작들을 ‘적색의 독’으로 간주하여 일률적으로 금지시켰다. 이러한 금지와 정리작업은 중국이 ‘5·4’이래 유지해 온 현실주의문학의 전통을 돌연 단절시켜 台?에 문학의 단층이 형성되었으며 台?문학과 중국문학 전통과의 계승관계를 약화시켰다. 이는 台?의 많은 젊은 작가들로 하여금 그들이 의지하고 자라며 양분을 흡수하던 중국 현실주의문학의 토양을 상실케 하였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서구로 눈을 돌려 서구현대주의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으며 각자 중국문학의 전통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台?의 많은 작가들은 후에 그러한 방식의 위해성을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70년대에 이르러 台? 문예계에서는 30년대의 문학 개방여부에 관한 논쟁이 격렬해졌다. 많은 台?의 의식 있는 작가들 모두는 30년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개방하여 중국문학이 台?의 단층 가운데에서 융합되고 이어짐으로써 台?문학이 더욱 알차게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화청결운동에 뒤이어 1955년 봄, ?介石은 또다시 ‘전투문예’의 구호를 제창하였다. 전투문예와 반공문학 사이에는 유사한 점도 있으나 상이한 점도 있다. 유사한 점은 전투문예의 핵심이 바로 반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반공 이외에는 전투문예의 내용과 제재는 반공문예와 비교했을 때 그 범위가 다소 확장되어있다. ‘대개 교육적 의의를 지닌 것’, 반퇴폐적, 반여가적, 반보수적, 반허무적, 반기계적, 반맹목적‘문예작품들은 모두 전투문예의 범주에 들어갔는데 이는 편협하고 교조주의적인 반공문학과 다소 다른 점이다.

50년대 台?당국의 제창과 고무로 인해, 반공문학 및 전투문예 관련 작품들은 시가, 소설, 산문, 희극 등을 포함하여 모두 그저 그런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술적 측면에서 진정 성취가 있는 작품들은 군계일학의 빼어난 것들로 불릴 수 있다. 그 원인은 위에서 밝힌, 현실생활에서 탈피된 주관적인 것이라는 측면에 있다. 때문에 완전히 台? 당국의 반공사상에 근거해 설명되는 작품들은 반공의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문장과 추종자로 전락하였다. 반공문학의 대표작은 ??瀅의 《荻村?》, 姜?의 《重?》과 《旋?》, 潘人木의 《??表妹》 등이다.

 

제 2 절 현대주의문학

 

현대주의는 50년대 중?후반기에 등장하여 발전시기를 거친 후 60년대에 최고조에 달해 台?문학의 주류가 되어 50년대 반공문학이 차지했던 지배적 지위를 바꾸게 되었다.

현대주의문예사조는 台?에서 등장하였지만 이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닌, 당시 台?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조건 아래서 만들어진 산물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台?은 자본주의방위선의 전진기지와 중국 및 사회주의진영에 대항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미국의 경제 원조가 강화됨에 따라 미국과 서방의 정치, 사상 및 문화관념 역시 연이어 台?에 유입되었다. 문학상의 현대주의사조는 바로 서구정치문화사상의 충돌로 인해 생긴 결과이다.

50년대 초, 台?의 토지개혁과 공업의 중흥으로 인해 台?에서는 방대한 신생 중?소 자산계급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봉건전제독재를 반대했고 사상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했다. 이는 당시 자유민주주의사회 사조와 현대주의문예사조가 만들어낸 사회계급의 기초이자 그것의 내부적 조건이었다.

국민당 정권은 台? 이전이후, 台?청년들의 대륙 서적 탐독을 대대적으로 금지시켰는데 여기에는 30년대 좌익문예와 현대주의의 우수 작품들도 포함되어, 중국 현대문학사상 문학계 저명인사로 공인되어 있는 ?迅, 茅盾, 巴金, 郭沫若 등의 작품들도 불온서적목록에 올라 금서조치 되었다. 민족문화와 민족문학의 전통은 단절되어 台?문학이 중국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있어서 단층을 형성했으며 많은 문학청년들은 서구현대문학에 눈을 돌려 그 속에서 사상과 기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50년대 台?의 문학청년들은 대다수가 국민당의 반공문학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에서 은연중에 반골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가령 당시 청년작가였던 白先勇은 일찍이 “국민당은 台?이전 이후 우렁찬 ‘反共??’의 구호를 제창하여 기차역에서 기름병의 겉표지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는데 실로 무소부재라 할 만 했다.” 라고 언급했다. 또한 일부 작가들도 ‘충분한 안목과 용기 없이 복잡 혼란한 새 국면을 보고자 했기 때문에, 정부가 선전하는 반공신화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라고 서술했다. 반공문학이 지닌 台? 현실사회 생활과의 유리화와 공식화, 개념화, 표어?구호화의 경향은 도리어 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반공문학에 대한 혐오와 서구현대주의 문학으로의 전향을 야기하였다.

당시 台?의 문학청년들은 주로 두 부류로 구성되었는데, 한 부류는 군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들은 참혹한 전화를 겪고서 台?으로 오게 되었다. 전쟁의 죽음, 공포 그리고 잔인함은 그들의 정신을 위축시켰다. 다른 한 부류는 학원파 청년들로, 그들은 台?이라는 폐쇄적 사회에 대해 심한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감히 직접 현실의 모순을 폭로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단지 마음속에서만 서구현대문학의 비교적 모호한 기법을 사용하여 마음 속 고뇌와 번민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예로 台?의 현대주의에 관한 몇몇 평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대상에 대한 묘사를 어렵게 느낀 나머지 부득이하게 현대주의의 형형색색의 풍자예술을 사용하여 그들이 지닌 폐쇄적 환경의 공포, 불안한 감정 및 선조들의 죄악을 떠 안은 곤혹감을 표현하고 있다.”

台? 현대주의의 흥기의 또 다른 원인은 대륙문학으로부터 받은 직, 간접적인 영향이다. 이러한 영향은 한편으로는 台?청년들이 계승한 ‘5·4’정신과 반전통, 반보수 및 변화를 추구하는 참신한 혁신정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륙 현대주의를 직접 수용하면서 얻게 된 반향을 표현하고 있다. 台? 현대시의 기수인 ?弦은 30년대 대륙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현대시인이었는데 일찍이 ?望舒 등과 《新?》를 공동 편집한 적이 있었다. 20여 년 후 그는 다시 台?에서 현대시의 불길을 지펴 台?에서 현대시 동인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廉과 같은 그의 차세대 시인들 역시 대륙의 40년대 후반기 현대시인들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여겼다. 그러므로 台?의 현대시 역시 실제로 대륙 현대시의 연장이자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台? 현대주의사조는 우선 시가영역에서 일기 시작했다. 1953년 2월 1일, 台? 현대주의 시가의 기수이며 台? 시단의 노장인 대륙출신의 현대시인 ?弦은 대륙에서 가져온 현대시의 불씨로 台? 현대시 혁명의 불길을 일으켰다. 또한 다른 이들과 함께 《?代?》잡지를 창간하여 많은 台? 현대시인들의 주요 작품들을 발표했다. 1956년 1월 15일 ?弦은 다시 臺北에서 시 모임인 ‘?代’를 결성하였는데 참여한 이들은 83명이었다가 후에 19명이 늘어났다. 주요 성원은 시인인 ?泥, ?愁予, 羊令野, ??, ?元?, 林冷, 小英, 李?, 林享泰 등이었다. ‘?代’가 결성될 당시 채택된 강령과 구호는 ‘신시의 재 혁명을 이끌고 신시의 현대화를 추진 한다’였으며 또한 이를 통해 육대신조를 작성했다.

1. 우리는 보들레르로부터 전해져 온 일체의 신흥시파의 정신과 요소를 지양 및 발양함으로써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현대파 집단이다.

2. 우리는 신시를 종적인 계승으로 여기지 않고 횡적인 이식으로 간주한다. 이는 총체적인 견해이며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이론의 확립과 창작의 실천을 막론한다.

3. 시의 신대륙의 탐색, 시의 처녀지 개척, 새로운 내용의 표현, 새로운 형식의 창조, 새로운 수단의 발견, 새로운 기법의 발명을 꾀한다.

4. 지성의 강화를 추구한다.

5. 시의 순수를 추구한다.

6. 애국반공사상과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

‘?代’가 台? 현대시 발전에 끼친 계몽과 추진작용 및 그 ‘육대신조’는 특정 현대시 단체의 한 강령일 뿐만 아니라 거의 台?의 전체 현대파 시인들의 구호이며 그것의 ‘육대신조’ 중 제 1, 제 3, 제 4 조는 台?의 전통시와 격률시에 있어서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 제 2 조가 제창하는 ‘종적인 계승이 아닌 횡적인 이식’은 일부 현대시인들을 민족문학의 전통에서 탈피된 그릇된 길로 이끌었으며 台? 시단에서 전체 台? 문단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제 5 조가 제창한 ‘시의 순수성 추구’는 일부 시인들을 오해에 빠뜨려 현실에서 탈피된 모호한 길로 빠지게 하였고 예술의 상아탑으로 도피하게 하였다. 또 제 6 조에서 제창한 ‘애국반공’은 초기 현대주의가 결코 완전히 반공문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설명하고 있으며 ‘애국반공’과 제 5 조의 ‘시의 순수성 추구’표방은 일종의 모순과 반목을 야기하였다.

台? 시단에서 두 번째로 현대주의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집단은 초현실주의를 제창한 시 모임 ‘?世?’였다. 이 모임은 ?弦, 洛夫, ?默로 구성되어 1954년 10월 10일 高雄市 左?에서 결성되었다. 《?世?》가 초기에 제창한 것은 ‘신민족 시형식’이었으며 그 창간호 발간사 《창세기의 방향》 중에서 3가지 주장을 내세웠다.

1. 신시의 민족 전선을 구축하고 신시의 시대사조를 일으킨다.

2. 강철같이 굳건한 시 진영을 구축하고 상호공격을 절대 금함으로써 파벌을 형성한다.

3. 청년시인들을 육성하고 적?황색류의 독소를 철저히 숙청한다.

1956년 2월 출판된 제 5 호에서 《‘新民族?型’의 의견 확립》이란 논평을 발표하여 ‘신민족시형’의 기본요소가 첫째, 예술적―이성적인 해명이나 ?情적?단도직입적 진술이 아닌 정서적― 표현과 이미지 제일주의 및 정서 지상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며, 둘째, 중국풍의 동양적 풍미―중국문자의 특이성―를 활용하여 동양민족의 생활의 특별한 정취를 표현하는 것임을 밝혔다. 즉, 창간호부터 제 10 호까지, 발간사와 창세기가 제기한 ‘신민족시형’확립이란 근거 및 주장이 대체로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제 11 호를 시작으로 《?世?》는 오히려 180도로 입장을 바꾸어 현대주의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어 올렸으며 ?出於?의 면모를 보이며 공개적으로 초현실주의를 제창하고 이끌어 갔다. 제 11 호부터는 영국의 시인 시트웰의 시론《시인의 시점》, 프랑스 시인 앙드레 지드의 《凡?德?抄》(?泥 ?), 보들레르의 산문시 및 ?用, 余光中, ??, ?珊, 李? 등의 현대시 작품을 선보였으며, 책 앞표지를 한 청년화가의 소품으로 디자인하여 출판 후 시단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또한 《?世?》의 새로운 창작사상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은 이후 등장한 洛夫의 시론인 《초현실주의와 중국현대시》가 설명한 초현실주의 시의 특징이다.

洛夫는 서구에서 등장한 각 국의 초현실주의는 아래와 같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1. 초현실주의는 전통 중세사회, 도덕, 문학 등 낡은 규범들에 반대하며 잠재의식의 참됨을 깨달음으로써 현대시인의 사상과 경험의 신예술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2. 초현실주의는 인류에게 존재하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태도로, 문학과 예술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의 정신이 초월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므로 그것은 일종의 새로운 철학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3. 표현방법상 자동주의(automatism)를 주장한다.

상술한 세 가지에 대해, 洛夫는 진일보된 설명과 수정을 가하여 초현실주의를 서서히 중국화하였다.

《?世?》가 台? 시단에서 차지하는 주요 의의는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代’가 제창한 현대주의사조가 조금씩 쇠퇴하여 몰락할 처지에 처했을 때, 심지어는 일부 젊은 현대파 시인들이 점점 멀리 떨어져나가 ?代?社의 ?弦이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그들이 ‘자유시’로 돌아오도록 큰 소리로 부를 지경에 처했을 그 때에,《?世?》는 초현실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려 현대주의사조를 앞을 향해 단호히 이끌어 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世?’는 台?시단의 가장 용감하고, 가장 확고부동하며 가장 철저한 현대주의 ?社이다. 동시에 ?世?는 서구 초현실주의를 台?에 들여옴과 동시에 한층 더 수정을 가하여 중국식 초현실주의로 만들었다. 이는 台?시단이 일종의 선구적인 사업이며 그 시는 감동과 창조성을 가장 풍부히 지니고 있었다. 그것에 얼마나 많은 결점이 있는가와는 상관없이, 그러한 실험정신은 모두 사람들이 찬양하고 본받을 만 하다. 또한 ‘?世?’는 또한 이론과 ?作이 가장 풍부한 ?社이다. 통계에 의하면 《?世?》는 29호까지 간행되다 경제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정간되어 1972년 9월에 다시 간행된, 台?에서 출판기간이 가장 긴 시 간행물 중 하나이다. 이외에도 ?世?에서 출판한 《?世???》은 모두 20 여 종에 이르며, 각종 시 관련 활동을 거행하고 각종 시집을 편집 선별하였으며 세 차례의 상을 수여하여, 그 풍부한 성과는 台? 시단에서 정말 보기 드문 것이다. 그러나 이 ?社가 서구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그 구성원들이 많은 난해한 시들을 창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비난받는 ?社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시사 구성원들의 창작실천이 洛夫가 수정한 초현실주의의 이론과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이점은 그들이 마땅히 바로잡아야할 부분이다.

台? 현대주의의 두 번째 조류는 소설분야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중 현대주의의 영향을 가장 깊이 받은 이들은 《文??志》와 《?代文?》의 작가들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 초기의 《文?季刊》 및 공개적으로 서구 현대주의문예를 장려한 《前?》, 《?一代》 등이다.

1960년 3월 白先勇, 王文?, ?若曦, ??子 등이 창간한 《?代文?》의 출현은 대체로 다음의 몇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5?4’ 가 전통적인 금기들을 타파한 회의정신과 변혁을 추구하는 개혁의 날카로움이 그들에게는 줄곧 격려가 되었으며, 둘째, 젊은 세대들이 ‘위기와 기회를 동일시하는 관념’을 만들어내었으며, 셋째, 당시 台?사회가 역사발전의 전환기에 놓여 문화변혁의 갈림길에 있었고, 넷째, 서구 현대주의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代文?》이 台?문학사에서 지니는 주요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잡지는 台? 소설계 내부에서 최초로 현대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린 문학잡지이자 작가집단이다. 《?代文?》이 창간되자, 台?소설에서는 비로소 심각하고 광범위한 예술혁명이 발생할 수 있었으며 台?현대소설의 예술을 최정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둘째, 《?代文?》은 서구 현대소설의 거장들과 그 대표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번역하는 데 있어서도 공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당시 소개되고 번역된 서구 현대주의 작가와 대표작은 몇 십 명 이상이었는데, 그중 중요한 서구현대주의작가들에 대해서는 특집호가 발행되었다. 셋째, 창작력이 뛰어난 현대주의 소설작가 집단을 단결시키고 육성하였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代文?》에서 집필한 작가들은 모두 70 여 명인데 60년대 두각을 나타낸 소설가들은 이 잡지와 모두 많거나 적게 관련되어 있다. 넷째, 현대소설의 역작들을 창작하였다. 白先勇의 유명한 소설집 《臺北人》 중 14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모두 《?代文?》에서 발표된 것들이다.

《?代文?》의 결점은, 일부 작가와 작품들이 예술의 진실성을 추구하기 위해 객관주의와 자연주의에 치중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 것과 일부 작품들이 현실생활과 거리가 비교적 멀어져 순수예술이란 구렁 속으로 깊이 빠져든 것이다.

台? 현실주의문학 사조는 台?에서 등장한 일종의 역사현상이다. 우리는 전면적인 부정도 전면적인 긍정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세한 분석을 통해 台? 현실주의에 대해 어떠한 역사적 지위를 부여해야하며 동시에 그것의 존재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台? 현대주의의 긍정적인 의의는 아래와 같다.

1. 현대주의는 광범위하고 심각한 예술혁명으로, 그것은 台?문학, 특히 시가와 소설의 예술 표현형식과 표현기교 및 표현력을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였다. 실제로 현대파의 많은 우수작들이 서구주의의 기교를 활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향토파의 우수작품들, 가령 ?映?, 王?和, 王拓 등의 작품들 속에서도 역시 상징, 암시, 의식의 흐름 등의 수법활용을 빈번히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서구적 기법이 전통에 유입되어 단순한 전통적 활용기법보다 台?문학에 있어서 더욱 더 찬란히 돋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2. 현대주의의 작가들은 점점 반공문학의 족쇄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개인주의, 存在主?, 개성, 인권, 人道主? 등의 사상을 台?에 대담하게 소개하고 퍼뜨려, 부지불식간에 50년대 봉건적, 보수적 台?사회 및 그 봉건 독재통치에 대해 충격을 주게 되었다.

3. 젊은 현대주의 작가들은 서구현대주의를 학습하는 것을 주장하여, 인물, 인성 및 인간의 내부 심리세계 묘사를 중시하였다.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이는 모두 당시 쓰러져 죽어 버린 반공문학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자 문학상의 진보였다. 또한 그러한 흐름은, 台?당국의 문학에 대한 간섭과 이용에서 애써 벗어나고자 하거나 혹은 그것들을 축소시킴으로써 台?문학의 순수문학을 향한 발전을 이끌게 되었다.

4. 台?현대주의 작가들의 창작성취를 과소 평가할 수 없다. 향토파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삼십 여 년 동안, 현대파 작가들은 다수의 비교적 훌륭한 작품들을 창작해 내었다. 특히 장편소설과 상류사회의 지식계급 묘사를 제재로 삼은 작품 가운데에서, 그들이 거둔 성과는 향토파 작가들의 것들을 확연히 뛰어넘었다. 그러한 작품들은 향토파의 무수히 많은 우수작들과 함께 台? 당대문학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5. 台? 현대파가 서구적 기교를 흡수할 때, 완전히 서구의 것만을 답습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구문학의 기교를 토착화하는 데에 있어서 여러 차례의 노력과 탐색을 거듭함으로써 몇 가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데, 白先勇과 於梨?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台? 현대주의 문학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의 ‘종적인 계승이 아닌 횡적인 이식’이란 구호이다. 이러한 잘못된 구호는 일부 台?작가들을 민족 고유의 문학전통과 台?의 사회현실에서 탈피하고 서구문학을 답습하도록 한다. 그들은 내용상으로는 서구문학의 허무주의, 비관주의, 퇴폐주의를 널리 선전하는데 주력하였고, 형식상으로는 서구문학의 애매모호하고 난해한 문학적 기질을 모방하는데 전념했다. 일부 현대주의 작가들의 또 다른 문제점은 현대주의와 현실주의를 대립시켜 현실주의를 낡은 창작방법으로 간주하여 폄하시킨 것이다.

 

제 3 절 향토문학

 

60년대에는 현대주의문학이 台?에서 한때 성행하였다. 그러나 70년대에 이르러 향토문학사조가 다시금 부활하기 시작하여 현대주의문학과 자리를 맞바꾸면서 台?문학의 주류로 부상하였다.

향토문학이 등장한 세 가지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새로운 국제정치의 질서와 맞닥뜨린 충격, 특히 ‘保?’사건으로 말미암아 台?민중들, 특히 청년학생들과 지식계층은 美日제국주의의 실상과 台?당국의 부패를 직시하게 되었으며, 국가와 민족이 강성해지기 위해서는 제국주의는 물론 台?당국에 의지해서는 안되며 민중에 의지해야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중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둘째, 台?의 식민경제, 매판경제 및 그에 따른 불합리한 사회제도가 빈부 불균형의 현상을 더욱 가중시켰으며 하층노동자 특히 농민의 생활을 더욱더 고되게 만들었다. 셋째, 60년대 일부 현대주의 문학사조가 台?사회현실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서구화 된 사실에 대한 불만과 반발이 일어났다.

향토문학의 작가들은 대부분 台? 본토출신으로 그들 중 대다수는 台?의 시골 마을에서 자라나, 台?의 사회생활에 비교적 익숙했으며 하층노동자들이 제국주의와 자본가들에게 받은 압박과 착취를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향토문학의 제창자와 실천자들인 ?石?, ?映?, 尉天?, ?肇政, 王拓 등의 문장과 향토작품들을 살펴보면, 초기향토문학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비교적 명확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첫째, 강렬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사상이다. 그들이 비판하고 폭로한 것은 주로 제국주의 지배하의 台? 식민 경제제도와 자본주의의 썩은 사상, 문화 및 도덕으로 인한 台? 민중들의 타락과 그로 인한 친외세주의 사상 및 사회풍조이다. 둘째, 창작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중국 현실주의의 문학적 전통을 계승하여, 문학과 사회생활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으며 작품의 현실성 또한 대체로 강하다. 台? 향토파 작가들의 작품들은 약 육십여 년 간의 台?의 변천과 사회 면모를 우리에게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셋째, 향토파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선명한 경향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어서, 압제자, 착취자들에 대하여는 증오를 표출하고 있으며 台? 하층 노동자들에게는 깊은 동정을 보이고 있다. 넷째, 그들의 작품들은 대체로 비교적 선명한 台?의 향토색채를 띠고 있다.

광복이후, 台?의 당대 향토작가들 중에는 이미 삼, 사십대인 이들도 있었다. 제 일대 작가들은 廖?秀, 李?春, ??流, ?理和, ?火泉, ?肇政, ?石?, ?逵 등 일제시대의 노작가들로, 그들은 일제 점령기에 대다수가 일본어 교육을 받고 일본어로써 집필을 하였다. 광복이후 모국어 학습에 노력하여 5, 60년대에 이르자 중국어 작문능력을 기본적으로 구비할 수 있게 되었고 계속 작문활동을 시작하였다. 연령과 경험으로 인해 그들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일본통치하의 台?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생활과 50년대 농민들의 빈곤을 묘사하고 있으며, 예술 표현적 측면에 있어서 주로 중국의 민족문학과 일제시대 향토문학의 특색을 계승하고 유지하였으며, 문자는 소박하고 향토적 색채가 짙다. 제 이대 향토작가들은 ?映?, ?春明, 李?, 王?和, 王拓, ??矗 등이다. 이 세대의 작가들이 앞 세대 향토작가들과 다른 점은 모국어 교육 속에서 성장했다는 것으로, 문자기교가 비교적 숙련되어있다. 또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다양한 서구문학을 접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작품들은 앞 세대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작품의 제재는 대부분 육, 칠십 년대의 농촌사회에서 工商사회로 전환하고 있던 台?의 농촌 및 도시생활로, 자본주의이념 및 물질문명과 중국 전통문화의 충돌, 그리고 그로 인한 갖가지 비극들을 표현하였다. 표현 기교적 측면에 있어서는 민족전통과 향토색채의 계승이라는 기초 위에서, 제 일대의 작가들보다 훨씬 더 많이 서구문학의 기교를 흡수하는데 치중하여 예술표현형식과 표현방법을 더욱 다양화하였다. 제 삼, 사대 향토작가들은 宋??, 洪醒夫, ?念?, 廖雷夫, ?凡 등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다. 그들이 창작에 있어서 제 일, 이대 작가들과의 차이는, 작품의 제재가 대부분 칠, 팔십 년대 외국자본의 침탈로 인한 台?농촌의 파탄과 외국자본상인이 농촌과 농민에게 가한 수탈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과 예술적인 면에서 다원화된 경향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구세대 작가들은 연령과 문자능력의 관계로 인해 창작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신세대 작가들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향토파의 삼대 작가들 중 성과가 비교적 크고 창작이 비교적 활발했던 세대는 제 이대 작가들이다. 그들의 작품은 공통된 선명한 시대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작가들 역시 자신들만의 독특한 창작개성이 있었다. ?映?은 일찍이 자신을 ‘마을의 지식인’으로 칭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지식인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으며 사실주의 속에서 이상주의를 빛내고 있다. 그는 예술적 측면에서 비교적 다양하게 현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상징, 암시, 의식의 흐름 등의 예술적 기법을 잘 활용하였다. 王?和는 주로 농촌과 작은 마을에서 업신여김 당하고 손해보는 보잘 것 없는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물들은 종종 우매하고 신체적 결함이 있으며 현실생활과 타협한다. 후기 작품의 인물들의 성격에는 변화가 있어서 강건하며 반항적으로 바뀌었으며, 예술적으로는 선의의 풍자를 활용하여 약자들에 대한 선의의 풍자와 반동세력에 대한 조소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실험적으로 서구문학의 기교와 台?방언를 활용하여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였다. ?春明의 작품 역시 종종 농촌과 마을의 일상적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인물들의 성격은 王?和가 그려낸 인물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春明의 인물들의 지위는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굳건하며 확신에 차 있다. 저명한 향토작가인 王拓은, ?春明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활의 압박감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또 향토작가 ??은, ?春明이 묘사한 인물들은 ‘台? 곳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일상적 인물들을 위해,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쉽사리 동정과 조롱을 허락하지 않는 대상을 설정하였다.’라고 논했으며 평론가 何欣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기개 있고 낙관적인 ?春明이라는 한 인물을 보았다. 그는 항상 그러한 인물들에게서 한 인간으로서의 사랑스럽고 경애할 만한 성격을 발견하였다. 그는 비애를 지니고 있으며 이상, 분노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들을 결코 시달려 죽게 하지 않으며 그들이 생활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에 적응할 방법을 모색하며 결코 도피하지 않는다.”

그의 문필은 해학적이면서 활발하며 작품 속에서 사람을 미혹시키는 순박하고 인정스러운 토양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또한 중국 전통의 서술방법을 비교적 잘 계승하여 선명한 민족적 기질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그는 대표적이며 순수한 향토파로 불리는 것이다. ??矗은, 그의 작품이 주로 노동자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유명한 노동 작가이다. 그의 전기 작품들은 노동자의 생활의 고됨과 자본가에 대한 피눈물 맺힌 규탄과 고발을 묘사하고 있으며 후기 작품들은 주로 노동자의 단결과 각성을 표현해 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소박하고 진실하며, 감정이 순박하다. 王拓은 시야가 넓은 향토작가로, 지식인, 농민, 노동자, 학교, 시골과 어촌, 도시의 공장 모두가 그의 묘사 대상이다. 王拓의 작품들의 주요 특징은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많은  노동자 중의 진보적 인물을 형상화하고 있다. ?勳의 말을 빌리자면 王拓의 작품 중에는 ‘70년대의 윤리 도덕적 역량’이 드러나 있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台? 사회에 대한 강렬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다. 예술적인 면에서,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모색하여 전통적 서술방법, 의식의 흐름, 상징주의 등의 기법들을 모두 시험하였다.

향토파의 많은 문학 간행물 중에서, 《台?文?》와 《文?季刊》, 《葡萄?》, 《笠》은 비교적 대표성을 띠고 있으며 향토파의 문학사상을 가장 크게 반영한 것들이다.

《台?文?》는 1964년 4월에 창간되었는데 노작가 ??流가 단독으로 출자하여 창간되었으며 그가 타계한 후 台?의 유명 작가인 ?肇政에 의해 발행되었다가 1983년 1월, 비평가이자 의사인 ?永?이 ?肇政의 자리를 이어갔다. 《台?文?》는 일찍이 일제시대 신문학 운동 중에 여러 번 간행되었다. ??流 등 향토파 작가들이 이 잡지를 재 창간한 목적은 일제시대 신문학운동의 기본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문학이 인생을 반영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특히 향토적 색채에 주목하여 현실주의 문학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台?文?》는 台?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민중의 토양 속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文?季刊》은 1966년 10월 10일 창간되었는데, 창간인은 尉天?이다. 1972년에 정간되었다가 1973년 8월 10일 재창간되어 《文季》로 개칭되었다. 1983년 4월 제 3호가 발행되었으며 명칭은 그대로 《文季》였다.

台?의 저명 비평가 ?石?의 분석에 따르면 《文?季刊》의 탄생은 白先勇이 주편집자인 《?代文?》의 지나친 현실유리와 서구화로 말미암은 것이다. 《台?文?》의 사회관찰에 대한 중시와 지나친 지역성의 표현은 60년대 지식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어, 그들은 절충과 통합의 노선을 찾는데 주력하였으며 민족적 풍격을 그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또한 미 유럽의 참신한 현대소설기교를 도입하여 본토 문제의 난관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분석은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시 잡지 《葡萄?》은 1962년 7월 15일에 간행되었는데, 그 창간호의 창간사와 그 이후 여러 차례의 논설에서 현대시가 응당 명랑화의 길을 가야한다고 제기했다. 주 편집인 文?村은 《건전함, 명랑함과 중국―현대시의 세 가지 기본관념을 논함》이란 제목의 논문 중에서 ‘중국의 현대시는 마땅히 건전한 내용과 명랑한 풍격 그리고 중국문화사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말은 《葡萄?》의 강령과 시가창작 실천의 지침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현대주의 가운데 흐르고 있는 애매모호함, 허무주의 등 건전하지 못한 작풍에 대해 반대하고 있으며, 현대시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 1992년 출판된 《葡萄?30周年??》은 그 성과 중 하나이다.

역시 시 잡지인 《笠》은 1964년에 창간되었으며, 창간인과 그 주요 성원은 ???, 詹?, 林享泰, ??, ?彦勳, ?夫, 白秋, ?天?, 杜?? 등이다. 이들은 대체로 모두 台?省에 본적을 두고 있는 시인들이다. 이 잡지에 발표된 시들은 선명한 향토의식과 강렬한 사회비판정신을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잡지를 통해 새로운 시 관련 사료들과 台?시인들의 작품평가를 발표하며 ‘台?? 시’를 싣는 등 선명한 본토적 특색을 띠고 있다. 지금까지 출판된 수는 백 여 호에 이르며, 또한 출판된 시인시가 ??는 수 십 권에 이르러, 향토문학창작의 태동기에 있어 일정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시인들의 시야가 충분히 넓지 못하고 적잖은 시인들이 시의 지역성에 편중된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의 대륙과 台?의 숱한 문학평론은 台?의 향토문학평가에 대해 대체로 높은 점수를 주었다. 특히 대륙 초기의 연구문헌은 향토파의 문학이론이 현실주의를 강조하여 대륙의 문학이론과 대체로 비슷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거의 향토문학을 완전무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결여된 것이다. 사실 향토문학사조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작용도 지니고 있었지만, 부족한 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 긍정적인 작용은 주로 다음과 같다.

1. 향토문학사조는 台?현실주의문학의 우수한 전통을 회복시키고 발전시켰다. 육, 칠십 년대의 台? 향토문학운동은 台? 당대의 현실주의문학과 대륙 및 일제시대 台?의 현실주의 의 우수한 전통을 접목시켜 새롭게 발전시켰다. 이는 台?향토문학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향토문학사조의 이론가들은, 오, 육십 년대 台?의 일부 현대주의작가들이 지닌, 민족문학전통에서 탈피하여 台?의 사회현실생활과 유리되어 완전히 서구화된 그릇된 경향을 정확히 비평했으며, 그들의 퇴폐주의, 허무주의, 형식주의의 해악을 지적하여 일부 현대파 작가들이 훗날 전통으로 돌아와 台?문학이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3. 향토파 작가들은 문학의 토지 위에서 부지런함과 각고의 노력으로 창작하여, 일단의 우수한 작가들의 작품이 등장했다. ?映?, ?春明, 王?和 등의 우수 작품들은 장차 台?문학사뿐만 아니라 中?문학사에서 영원히 찬란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러나 향토문학사조 역시 아래와 같이 부족한 점을 드러내고 있다.

1. 향토파는 台?현대주의를 비판할 때 과학적, 전면적, 구체적인 분석이 결핍되어, 간략화, 부분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고, 현대주의의 적극적 의의와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폄하했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그들은 서구의 현대주의와 台?의 현대주의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台?의 현대주의작가들의 작품과 서구 현대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구별하지 않았다. 또한 구체적인 분석과 장단점에 대한 구별을 하지 않고 막연하게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2. 일부 향토문학작가들과 그 작품들은 정치적 색채와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지나치게 짙었다. 향토문학이 등장할 당시에는 현실주의정신이 비교적 가득 차 있었으며, 작품 속에서도 생활의 기운과 짙은 지방색채가 가득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를수록 台? 정치운동의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심지어는 당파집단의 무기로 전락하였다. 이는 모두가 경계해야 할 문제이다.

3. 향토문학은 지나치게 ‘본토성’, ‘향토성’, ‘특수성’, ‘台?사회에 대한 경험’. ‘台?의식’ 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것들과 ‘민족성’을 갈라놓아 대립시켰다. 이는 곧 台? 독립주의자들의 ‘台?문학은 中?문학이 아니다’, ‘台?문화는 中?문화가 아니다’, ‘台?독립국을 건설하자’라는 구호를 만들어내게 한 이론적 근거 및 그들의 정치적인 이용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台?문학의 시야를 협소하게 만들고 거시적인 성격을 부족하게 만들어 일종의 지방문학, 통속문학 및 지방지와 같은 비문학적인 한낱 읽을거리로 전락시켜, 결국 台?문학의 쇠퇴와 상실을 초래할 것이다.

4. 향토문학사조는 문학의 사상적 내용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예술적 기교를 등한시하였으며, 대중화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고차원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소홀하였으며, 전통계승에 치중한 나머지 창조와 혁신을 간과하였다. 이 때문에, 향토파 작가들 중에는 진정으로 사상적 내용과 예술적 성취라는 측면에 있어서 획기적인 작품이 많지 않다. 이는 그들의 창작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대 중문과 199701322 성영창  옮김
  黃偉宗 王晋民 編著, 《中華新文學史》(下), (廣州: 廣東高等敎育出版社, 1998), pp.42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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