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3.06.20
수정일
201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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袁良駿, 강하영 옮김, 〈緖論 二十世紀香港小說面面觀〉, 《香港小說史》 第1卷, (深?: 海天出版社, 1999), pp.1-24.

20세기 홍콩소설의 면모

 

 

袁  良  駿

 

 

20세기의 홍콩 소설은, 중국내륙과도 다르고 보도(??) 대만과도 다르며, 세계 어느 다른 지역과 나라와는 더욱 더 다른데, 그것은 완전히 독특한 문학 분야이다. 갖가지 이유들로, 이 분야는 지금에까지도 충분히 연구되지 못하고 있는데, 홍콩소설의 발생, 발전 및 그 독특한 면모는 아직까지 충분한 이해와 정확한 설명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무협의 대부 金庸, 梁羽生과 亦舒, 嚴沁, 岑凱倫, 梁鳳儀등 몇 명의 애정소설 여류작가 이외에, 홍콩소설에 대한 대륙의 독자가 가진 지식은 극히 적다. 홍콩, 마카오 독자(특히 젊은 독자)들의 홍콩소설에 대한 이해가 대륙 독자들에 비해 조금 낫다고는 하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90년대 이전, 필자는 “홍콩=문화사막”론자 여서 홍콩소설에 대해 조금의 고려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이래로 홍콩에 있는 친구의 도움아래 여러 번 홍콩을 방문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홍콩소설에 대한 비교적 체계적인 고찰을 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이 때, “문화사막론”은 산산조각 났고, 좋은 작품을 골라서《香港小說史》를 집필해야겠다는 강한 욕망이 생겼다. 아마 역량이 부족하여 이《香港小說史》는 결코 홍콩소설의 발전, 변화 및 그 독특한 면모를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거친 윤곽이나마 간단히 그려보는 것이 이 방면의 연구가 한걸음 더 나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1. “도시”와 “시골”

 

의심할 나위 없이, 20세기의 홍콩문학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도시 문학이다. 上海문학의 다채로움을 홍콩문학에서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쩐지 홍콩 신소설의 개척자중의 한 사람인 謝晨光의 단편소설집 《勝利的悲哀》가 1929년 上海현대출판사에서 출판될 때, 후기 창조사의 저명한 소설가 葉靈鳳이 그가 편집한 《現代小說》에서 이렇게 추천했었다.

무릇 계속해서 현대 소설을 읽는 사람은 대략 謝晨光군을 알 것이다. 작자는 홍콩에 얹혀살면서 도시생활을 사모하는 청년 작가이다. 문필은 매우 세심하고, 창작의 제재는 대부분 연애로 비극이다. 문장의 묘사는 비록 아주 많은 부분에서 치밀하지 못하지만, 마치 아침안개 속 풀잎의 이슬처럼 불시로 만족스러운 부분을 만나게 된다. 영화관, 무도장, 커피숍, 거의 다 작자가 즐겨 쓰는 배경들이다. 1)

《勝利的悲哀》안에 5편의 소설을 포함하여 대부분이 1927년에 쓰여 졌고 그것들은 홍콩신소설 맹아기의 특색을 매우 잘 대표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홍콩 신소설은 1928년 여름호《伴侶》잡지에서 그 싹이 텄다는 일종의 정형화된 견해가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재작년에 홍콩대학 도서관에서, 일찍이 1924년 여름에 창간된《英華靑年》계절 호에서 5편의 백화소설과 한편의 방언 극본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상내용면에서나 예술형식면에서나 어떤 면에서 살펴보던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홍콩신소설, 신문학의 맹아라고 일컫기에 부끄럽지 않았다. 다만《英華靑年》계절 호가 英華書院기독교청년회에서 주최한 내부 학생 간행물이었기 때문에 홍콩 학계와 문단의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2) 만약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일찍이 1921년에 창간된《雙聲》잡지에서 두 편집장의 두 편의 백화소설 - 黃昆侖의《毛羽》와 黃天石의《碎?》이 실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이 두 문장이 모두 원앙호접파(?蝴派)의 경향을 두드러지게 띄고 있지만, 소설의 선악과 옳고 그름 및 언어 형식은 그들이 바로 홍콩신소설의 최초 발원임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毛羽》,《碎?》에서《英華靑年》계절 호까지, 또 謝晨光 소설집《勝利的悲哀》및 동시대의 또 다른 소설작품, 또 다시 1928년의《伴侶》에 이르러서 비로소 홍콩소설 맹아기의 한 가닥 발전선(發展線)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발전선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도시 색채는 매우 선명하다. 주요 표현 면을 살펴보자. 첫째, 창작 제재에서 보면 도시 생활의 다양한 방면을 다루고 있다.《英華靑年》의《一個學徒》는 한 16살짜리 아동노동자이자 주단공장 학도 寶云의 굴욕적인 생활을 써내려 간다. 같은 시기 沈錫瑚의 《悔》에서는 한 벼락부자 외삼촌의 인색함, 무정함, 배은망덕함을 묘사하고, 그의 외종질이 파산한 뒤의 의지할 데 없는 상태를 그려낸다. 동시기 沈錫瑚의 또 다른 소설 《旣往不咎》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눈 빤히 뜨고 백지 시험지를 제출하는 견습공 伯貞의 조급함과 고민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謝晨光의《劇場裏》,《加藤洋食店》등의 소설은 제목만 봐도 도시생활의 묘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제 9호 《伴侶》와 동시기에 나타난《鐵馬》에 실린 30여 편의 소설 중에 도시생활은 또 다소간 확장되었다. 가령 稚子(바로《伴?》의 편집장 張稚?)의《春之曉》(제 7호)는 도시 노인의 재혼재가를 쓰고 있다. 이는 아마도 중국 현대 문학 중에 “황혼연애”의 기원일 것이다. 盈여사의《春三?秋九》(창간호)는 한 놀고먹고 오입질하고 도박하면서, 아내를 버리고 결국 때려죽이는 한 깡패 ?實을 고발하고 , 약자를 동정하고, 진실로 선량한 陸의사 부부를 찬양하고 있다. 한편 畵眉의《晩餐之前》(제 2호), 侶倫의 《爐邊》(《鐵馬》)등의 작품은 가장 일찍 홍콩 청년작가의 수지맞지 않는, 글로써 배고픔을 달래는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다. 孤燕의 중편소설《素馨自己的故事》(제 9호)는 더 넓은 사회의 면모를 펼쳐낸다. 인물들이 홍콩과 베트남을 오가는 중에 인물 사이의 관계 역시 더 복잡해진다.

도시 청년 남녀의 연애와 결혼이라는 제재는 더더욱 맹아기 홍콩소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伴?》32편의 소설 중, 연애를 소재로 삼은 것이 도합 21편이고 거의 70%를 차지한다. 가정생활을 소재로 다룬 6편의 작품에서도 애정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가지를 합하면 약 90%를 차지한다. 매우 재미있는 점은,《伴?》가 특별히 “첫 키스” 문예공모전을 열었는데 274명이나 응모했다는 것이다. 편집자는 이중 12편을 선별해서 “첫 키스” 특별 호(제 5호)를 내고 90元의 상금도 주었다.

둘째로, 사상경향에서 약자를 동정하고 난폭함을 폭로하는 인도주의노선을 걷는다. 위에서 얘기한《一個學徒》,《悔》,《春三?秋九》등을 제외하고, 黃穀柳(黃襄)는《換票》(《循環日報》)에서 “전당포”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를 쓰고 있고, ?倫의《殿薇》에서는 한 남자를 가지고 노는 ‘꽃뱀’을 풍자하며, 靈穀의《?蓮之死》(《鐵馬》)는 극단적 이기주의자의 추악한 영혼을 채찍질하고 있는데 이 모두가 훌륭한 예이다.

셋째, 커다란 사회 변혁과 정치사건을 신속하게 반영할 때의 애국주의 경향이다.《英華靑年》5편의 백화소설 중의 수작《父親之?》(작자 鄧傑超)는 한 곡의 애국주의의 최강음악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문장 앞의 “서평”에서 “이것은 내 옛날 작품이다. 5?4운동의 분위기 로 인해 曹, 陸, 章 세 사람은 나라를 팔아서 만들었다.” 고 썼다. 소설 주인공 ‘나’는 열혈한 애국 청년이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악명이 자자한 매국노이다. 이렇게 일종의 특수한 신분이 그 성격의 복잡함과 내면의 고통을 결정했다. 소설의 격렬한 애국정서와 대의를 위해 사사로움을 끊는 광명정대한 포부는 독자를 매우 감동시킨다. 하지만 두 번째《偉影》(작자 譚劍卿)에서는 蔡鍔 구국군 단장의 용감무쌍하고 잘 싸우며 숭고한 인품을 노래한다. 이는 아마도 전체 중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먼저 역사 사건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

넷째, 예술적 기교면과 형식면에서 봤을 때 현대성이 상당히 두드러진다. 대다수의 소설은 전통적인 구도와 서술방식을 운용하는 동시에 어떤 것들은 대담하게 서방의 수법을 차용하여 시도하였다. ?吻?(望云)의《重逢》(《伴?》제 8호)에는 꽤 훌륭한 심리 묘사가 나타나고, 岑?云(平可)의《夜》(《伴?》제 9호)에서는 여자주인공이 조용히 애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의식의 흐름”이 전편을 꿰뚫고 있는데 매우 긴장감 있게 서술하였다. ??의《彭姑娘的婚事》(《伴?》제 6호)는 오히려 찬찬히 음미해 볼만한 풍자 문학이다.

맹아기의 홍콩소설의 이런 도시 문학의 특징은 이 이후의 홍콩소설 속에서 진일보하여 풍부해지고 발전, 향상하게 되며, 지금에 이르기 까지 홍콩소설의 이런 특징은 이미 홍콩의 빠른 현대화와 더불어 많은 새로운 형식을 갖춘다. 가령, 맹아기의 홍콩소설은 서양인들 외사(外事)의 보기 드문 일까지도 언급하고, 30년대 이후로 나날이 증가하여, 지금 바깥 소재를 다루는 것과 내부 소재(중국 본토)를 다루는 것은 그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홍콩소설의 “국제적”인 특징은 홍콩의 특수한 정치, 역사지위 및 세계각지의 문화 배경이 결정한 것으로, 이는 상해 당대 ???을 대표로 하는 “서양파” 작가들과 穆?英을 대표로 하는 “신감각파” 작가들에게 비교적 적은 것이다.

그러나 ???, 穆?英 등 상해 도시 문학의 더 큰 차이는 홍콩소설의 도시성 속에 그 “향토성”이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홍콩소설은 도시 문학이면서도 향토문학이다. 이점은 중국, 외국 문학에서 모두 극히 찾아보기 드문 것이다.

홍콩소설의 향토성은 그것이 맹아기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향토성은 일종의 “하층성”이나 “시정성(市井性)”으로 부를 수도 있다. 홍콩소설 중 70년대 이전까지《子夜》속의 ??甫, ?伯? 류의 상공업 거상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8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이런 인물이 홍콩소설 안에 대량으로 나타난다. 70년대 이전의 홍콩소설 속의 홍콩은 마치 호화로운 국제 대도시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기아와 곤경에 허덕이는 가난한 슬럼가처럼 보인다. ??의 소설은 바로 이 점을 아주 두드러지게 짚어 낸다. ??과 ?天石,?晨光,?吻?,岑?云,?谷柳 등은 모두가 홍콩신문학의 “개국공신”이다. 그는 2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쭉 써나왔는데 60년을 하루같이 지냈다고 말 할 수 있다. 일찍이 1920년대 말, 그의 단편 《伏?加船夫曲》는 상해《北新》반월호의 “신진작가특집호”에 발표되었고 영예로이 2등상을 받았다. 그의 또 다른 단편《黑?拉》는 영화《蓬?碧玉》로 먼저 만들어 진 뒤, 후에 또 다시 상해중국도서공사에서 출판되었다. 3) 그의 조기 대표작 두 편 중 하나는 회사직원의 “애정 풍랑”을 썼고, 다른 하나는 커피숍 웨이트리스(黑?拉)의 인생 비극을 써냈다. 두 편의 소설이 쓴 것은 부자 거상이 아니라 “시정 서민”이다. 특히 黑?拉 그녀의 비참한 운명은 독자를 매우 감동시키는데, 만약 “프롤레타리아 작가”의 붓 아래에서라면 아주 쉽게 고발성, 선동성이 풍부한 “혁명문학”작품으로 변했을 것이다. 1941년 말 홍콩이 일본 침략군에게 점령당하자 ??는 광동 농촌으로 도망가 글을 가르치며 일본 파시즘에 대한 혈루의 고발을 써낸다(중편《无?的?》). 소설의 여주인공 아리앤나는 결코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으로 이민 온 포르투갈계 소녀이다. 일본 침략자가 그녀의 어머니, 동생 그리고 약혼자를 죽이자, 원수 - 헌병대장 佐藤을 독살 한 뒤에 침착하게 목숨을 바친다. 그녀가 자신의 복수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역시 그녀의 가난한 중국 친구 - 빈곤한 작가, 가난한 회사원 들이다. 항전이 승리한 뒤 ??은 자신의 대표작《?巷》 4) 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홍콩소설사에서의 역작이다. 문자 그대로 이 소설의 “프롤레타리아” 색채는 《黑?拉》를 크게 뛰어 넘어 남양(南洋)에서 출판될 때 부득이《都市曲》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巷》=《都市曲》, 이는 아주 의미 있는 교묘한 일치이다. 홍콩의 특색을 가장 많이 가진 도시문학은 원래 언제나 “가난”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소설은 네 명의 가난한 친구들이 누추한 단칸방에 모여 사는 얘기이다. 한명은 넝마를 줍는 莫?, 한명은 실업한 항일 3급 장애이자 내륙에서 莫?에게 의지하러 온 杜全,또 다른 하나는 가솔들이 본토 농촌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 ?建,마지막 한명은 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작가 高?이다. 몇 평짜리 작은 방을 빌려 이 “네 사내”들은 비좁게 모여 살고, 이미 집이 아닌 “사람 우리”로 변하고 만다. 처음 시작에서부터 네 소설 인물들의 형편을 알 수 있다. 高?는 바다에 빠져 자살하려고 하는, 돌아갈 곳 없이 몰락한 여인 白枚를 굳이 구해내어 어쩔 수 없이 그녀 역시 그 좁은 누실에 끼어들게 된다. 이곳은 바로 소설 주인공들의 생존 공간이다. 특히나 심각한 사실은 바로 이 누실의 방세조차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巷》의 이런 예술 구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아는 독자들이 조금 과장된 감을 쉬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 빠지게 되면 이것이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巷》(《都市曲》)의 이런 예술적 구성은 바로 홍콩소설의 큰 특징이며, 명맥이기도 하다. 이는 바로 그것의 도시성과 향토성이 고도로 결합된 “시정성”인 것이다.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시정성”은 원래 명청 소설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즉 “三言”, “二拍”의 상징이 왜 20세기의 홍콩소설에 나타나는가? 이는 아마도 홍콩사회의 특수성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을 초기에는 낙후한 소도(小島)에 불과했다. 반세기 남짓한 식민 개발을 겪으면서 홍콩은 점점 황량한 소도에서 영국인의 “동방의 구슬”로 변화되었고 점차 번화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30년대 홍콩의 번화함은 근본적으로 “동방의 파리”인 상해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특히 九?,新界의 할양으로 홍콩의 번화함은 한 구석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넓은 九?,新界는 모두가 산촌벽지였다. 게다가 시의 거주민들은 8?90%가 본토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그 중 대다수는 “가난한 삶을 가까스로 꾸려 나가는” 사람들이었으며 부자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홍콩관원과 외국상인들의 숫자도 여전히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30년대 이전의 홍콩은 고속 경제 발전도 없었고 전체 사회 생산력 또한 비교적 낮았다. 이런 사회 현실은 문학에 반영되어 그 도시성이 향토성, 시장성을 덮지 않을 수 없었다.

홍콩소설의 이런 향토성은  ??, 黃穀柳 이후로 유명한 향토작가, 즉 舒巷成,夏易(여),海辛,金依,?莎 등의 작가들에서 대표성을 가진다. 그들의 많은 소설작품은 모두 홍콩소설사상의 가작(佳作)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1985년에 이르러 海辛은 또 명작《最后古俗迎?》을 써서 홍콩소설의 향토성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2. “통속”과 “엄숙”

 

중국본토와 보도(寶島)대만에서 “통속문학” “엄숙문학”의 첨예한 대립은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문학비평계에서도 “통속”과 “엄숙”이란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小二黑結婚》,《李有才?話》,《呂梁英雄傳》,《新兒女英雄傳》,《靑春之歌》,《紅旗譜》및 8?90년대 일련의 소설 작품들은 도대체 “통속”인가 “엄숙”인가? 누가 시원하게 말해줄 수 있는가? 누가 주의했었던가? 게다가 무엇을 “통속”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엄숙”이라고 부르나? 구분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홍콩소설과 홍콩문학계에서 “통속문학”과 “엄숙문학”은 오히려 양립할 수 없는 모순 세력이 되어 홍콩문학연구에서 피할 수 없는 개념이 되었다.

나는 홍콩의 몇 “엄숙문학”파의 친구들을 방문했었다. 그들이 볼 때 무협소설, 애정소설, SF소설 과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대로 꾸며낸 역사소설, 그리고 대량의 도색소설은 모두 “통속문학”이었다. 나는 홍콩의 몇 “통속문학”파의 친구들도 방문했는데 그들은 “통속문학”이란 바로 통속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며 찬찬히 음미해 볼만 하게 쓴 것이고, 소위 말하는 “엄숙문학”이란 바로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비어있고, 개념을 가지고 놀며, 악성으로 “서구화”시켜 사람들이 못 알아보게 만들어 보기 싫게 만드는, 그러나 자신들 혼자서 감상하고, 혼자 고상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애정소설가 亦舒의 말에 의하면 “모두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엄숙문학이고, 모두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통속문학”이다. 확연하게도 두 파의 주장은 모두 매우 감정적이고 과학적이지 못하며 치밀하지 못하다. 확실히 우리는 “통속”이나 “엄숙”이라는 개념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진지하게 홍콩소설의 실제 상황을 고찰해야 한다.

먼저 사람들이 직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五?四”시기 신문학이 파죽의 기세로 “원앙호접파”와 옛 무협소설을 소탕한 뒤, 홍콩은 한번에 두 파의 문학의 은신처가 되었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하면 1907년에 이르러 비로소 홍콩에 첫 번째 문예 간행물(소설 간행물이기도 하다)《小說世界》가 출현했다. 같은 해 말 번역을 위주로 한《新小說叢》또한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4년 후 11년(1925년 까지) 동안 지속 된《妙?小說》이 창간된다. 지금 《妙?小說》제 4호만 보더라도 그것의 창작 소설은 모두가 문언문이고 게다가 봉건윤리도덕과 저질색정의 외설스러운 묘사로 가득 차 있다. 몇 편의 장편 연재물에서 쓴 것은 미인박명 등의 “원앙호접파”에서 자주 보이는 주제이다. “五?四”운동 이후,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1921년에 두 편의 백화소설이 나타났다. 1924년에는《英華靑年》계절호가 출간되었지만 당시 좌우 홍콩문단은, 이런 유약한 신문학, 신소설의 맹아가 물론 아니었고 여전히 그 케케묵은 사상의 문언 시문과 “원앙호접파”가 주가 되는 문언소설이었다. 현존하는《妙?小說》제 4호, 《雙聲》창간호,《小說星期刊》제 1호,《小說旬報》제 1호 중에서 맑음 일색인 것은 모두 “원앙호접파”의 작품이다. 또한 다수를 압도한 것은 북경상해의 유명한 “원앙호접파” 대가, 예를 들어 徐枕?, 李定夷, 許?父, 吳雙熱, 徐天嘯 등의 작품이다. 그러나 어떤 소위 “무협애정소설”(가령《小說星期刊》제 1호의《盲目鴛鴦》)로 불리는 것은 오히려 “원앙호접(?蝴)”과 무협과의 결합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小說旬報》(주 편집 梁騷雅)가 1929년에 창간되었고, 또 “五?四”운동 10년 뒤, 북경상해 등지의 문언 “원앙호접파”소설은 이미 찾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홍콩의 백화《伴侶》잡지 또한 1928년 창간되어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그러나 이《小說旬報》는 하나도 바꾸지 않고 모두 문언을 사용하여 백화에 대해 일종의 양립할 수 없는 완강한 태도를 나타냈다. 내용을 언급하자면 더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일화소설”《雌雄婆》에서는 한 무리의 방적공장 여직공의 동성애를 썼고, “경세소설”《淫伶?果》에서는 한 남자주인공이 어떻게 청중을 유인하는지를 쓰는데, 이는 마치 오늘날 어떤 나라의 “요괴”같다. 몇 편의 “포 르노 소설”은 실제로 “오입질 지남”이다.

문언 “원앙호접파”가 홍콩에서 인기를 끌고 마지막까지 완강히 버틴 것은, 당시 그것이 상해에서의 흥기에서 사회 배경과 문화 사조와 크게 일치 되는 바가 있음은 명확하다. 고관과 귀인, 부인과 아가씨, 귀공자나리와 광대한 소시민층은 당년 상해 “원앙호접파” 흥기의 사회적 기초였다. 그들의 문학이 나아고자 하는 방향은 바로 “원앙호접파”가 영광을 빛내고 그 맛을 오랜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溫床)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초”와 “온상”은 홍콩이 당대의 상해를 따라 오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역시나 그 차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역량이 미치지 못하고 또 특수한 정치 원인으로 인해 신문화운동이 홍콩에 미친 영향은 상대적으로 박약했으며 신문학의 역량 역시 내륙의 강대함에 크게 미치지 못했으니 “원앙호접파”가 홍콩을 그의 마지막 근거지로 삼은 것은 이상할 것이 못된다.

30년대 이후, 문언 “원앙호접파”는 마침내 문예 무대에서 쫓겨난다.《島上》,《齒輪》,《紅豆》등의 신문예 발간의 한걸음 더 나아간 노력을 통해 마침내 신문학, 신소설은 홍콩에서 그 발꿈치를 디밀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옛 “문학생태환경”은 근본적으로 바뀔 도리가 없었고 “원앙호접파”의 음영도 흩어지지 않고 있어서 그 세력은 겉모양만 바꿔서 다시 쳐들어왔다. 또 홍콩상품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장 규율 역시 나날이 첨예하게 문예작품을 향해 제약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문장은 모두 우량 볍씨로 꾀해야한다”는 시인, 작가들은 독자의 입맛과 시장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숙하고, 진지하며, 머리를 쥐어짜게 하는 순수한 문예 창작은 독자의 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그 몇몇 양을 탈을 다시 뒤집어쓰고 돌아온 “원앙호접파”나 “원앙호접”과 무협이 결합한 “무협포 르노 소설”종류는 독자들에게 매우 쉽게 파고들어 환영받을 준비가 갖추어져 있는 인기상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런 두 파의 협력 작용 아래 30년대 말, 40년대 초, 한 “홍콩전기”소설의 창작열풍이 바로 홍콩에서 나타났다. ??은 일찍이 이를 아주 이상하게 여기고, 또 손을 놀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썼다.

이상한 현상이 홍콩의 신문예에 나타나서 이미 뿌리를 내린 시기에, 사정은 오히려 전환점을 맞고 있다. 특히 항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부의 신문예사업을 위해 힘쓰던 작가들이 독자의 “입맛”의 변화에 따라 바뀌었다. 신문예사업의 자리를 떠나 필명을 바꾸어 장회체(章回體)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傑克(黃天石)이《紅巾誤》를, 望雲(張吻?)이《黑俠》을, 平可(岑?云)가《山長水遠》등의 단행본을 각각 각자의 새 노선에 맞춰 문호를 열었고 독자를 확보했다. 5)

사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소위 말하는 “이상한 현상”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은 이곳에서 3권의 소설을 드는데 확실히 모두 당시 홍콩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아주 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紅巾誤》는 1939년 처음으로 당시 홍콩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던《無光報》에 연재되었는데, 내용은 아주 “날카롭고 예리”한, 매우 혁명적인 항일 지하투쟁을 다룬 것이다. 주인공 甛아가씨는 원래 시골 처녀인데 집이 가난해서 홍콩으로 와 고모에게 몸을 기탁하게 된다. 처음에는 매우 소박했지만 한걸음씩 수렁에 빠져들면서 “유람아가씨”가 되고, 이는 바로 당대 홍콩의 변형된 기녀이다. “유람”활동 중, 항일 지하 공작원을 알게 되고, 특수한 사명을 받게 되는데 운 좋게도 매국노 梁濟天의 기밀문서를 얻어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소설이 시작할 때 인물과 약간의 생활의 향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점점 갈수록 괴이해 지면서 동으로 서로 아무렇게나 끌어 붙이고 끝을 찾을 수 없이 마음대로 꾸며댔다. 소설이 신기한건 신기하다 치더라도 온갖 허점이 다 드러나면서 조금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인물 또한 특정한 캐릭터 없이 작가 마음대로 배치해놓은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다.

《黑俠》역시 신문에 먼저 연재되고,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건 심지어《紅巾誤》보다 더 잘 팔렸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먼저 영화화되었기 때문이다. “黑俠”은 이름 그대로 무협소설인데 “포 르노”와 형사물이 함께 결합되어 무협, 애정, 탐정의 삼위일체가 되었다. 주인공 黑俠(본명 雷孟君)은 작가가 고집스레 이상화하는 현대 의적이다. 그는 지붕을 날아다니고 벽을 걸어 다니면서 종횡무진하고, 착취를 통해 부를 쌓은 부자거상과 고관벼슬아치들을 전문적으로 골라 도둑질한다. 그가 의를 실천하는데 쓰는 무협 수단은 고도로 현대화 되어있는데, 그는 쏘면 무조건 백발백중인 신의 손이다. 상해의 쌀 사업 대왕 嚴昌禮의 생일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아래, 그는 嚴씨 집안의 소장품인 8만여元의 가치가 나가는 진주목걸이를 훔쳐 달아난다. 이로서 전 상해를 뒤흔들고 경찰국과 형사계를 휘저어 밤낮으로 불안하게 한다. 흑협 盜寶가 위기일발의 순간에 “물에서 피어난 연꽃”같은 아름다운 아가씨 李靑薇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원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영웅은 미인의 도움으로 더욱 신출귀몰해진다.

《紅巾誤》,《黑俠》이 인기를 얻은 것은 모두가 소시민들의 입맛에 부합한 결과이다. 이들의 성공은 확실히 홍콩신소설창작의 퇴보를 상징한다.《紅巾誤》에서 일찍이 글을 아무렇게나 꾸며대는 영화 편집장 兪士元을 이렇게 풍자했었다. “유명해진 이유는 정제된 데 있지 않고 마구잡이식으로 쓴 데에 있다. 이는 자본제도 아래의 예술가의 일반적 비애이다.” 작가 傑克선생은 다른 사람을 풍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비꼬는 것인지 모르겠다. 비교해서 얘기하자면 平可의《山長水遠》이 비록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고, 임의로 지어 낸 작품이기는 하나 다소간 생활의 향기가 조금은 묻어나고, 인물 역시 일정한 성격을 가지므로 약 2배 정도 낫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런 작품을 “홍콩전기”라고 부르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 이미 홍콩신소설이 생활을 반영하고 인물을 묘사하는 궤적에서 벗어나, 놀랍고 기괴하며, 염정적이기만 하면 능사라고 여기는데 있다. 그것들이 걸은 것은 실제로 신 “원앙호접파”의 길이다. 3편의 “전기”가 막 울리기 시작할 때 홍콩은 일본 침략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전기”작품은 중단된다. 하지만 일본이 투항한 뒤에 이런 “전기”작품은 곧 홍콩 소설 창작의 주류가 되고, 순식간에 물밀듯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1949년에서 1953년에 이르는 수년간 傑克 혼자서《選擇》,《改造太太》,《一曲秋心》,《名女人別傳》등 약 20부를 창작해 낸다. 傑克이외에 望雲도 신작을 냈는데 적지 않은 “신생역량”이 가담하였고, 남 작가에 俊人, 碧侶, 司空明, 여 작가에 孟君, 鄭慧(바로 이후의 岑凱倫)등이 있다. 高雄(三甦, 史得)의《經紀拉日記》이외의 소설 작품은 대부분 “홍콩전기”의 대열에 넣을 수밖에 없다.

“홍콩전기”가 범람하는 동시에 옛 무협, 옛 “원앙호접”소설 역시 고여 있다 흘러넘쳐서 다시 한번 활약하기 시작했다. 馮玉奇 한 사람 만이 50년대 초에 이르도록《綠楊紅杏》,《一縷情絲》,《玉女懷春》,《蕩女心》,《一刻春宵》등 약 40여 편을 써 냈다.

홍콩 “통속문학”과 “엄숙문학”의 영역과 대립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위에서 말한 “통속문학”의 강력한 압박 아래 엄숙하고 진지한 “순문학”창작은 거의 짓밟혔었다. “순문학”창작을 견지하던 소설가는 50년대 초에 ??, 劉以?, 徐許, 徐速, 李輝英, 路易士, 徐巷城 등뿐이었다. 그중에 劉以?, 李輝英 등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몇몇 “통속문학”작품을 몰래 쓰기도 했다.

50년대 중반 金庸, 梁羽生을 대표로 하는 신무협소설의 흥기는 홍콩소설의 신국면을 열었다. 홍콩의 일부 “순문학”작가들의 그들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낮기는 했으나 무협소설의 영역에서 그들은 확실히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金, 粱 등의 무협작품은 무협소설의 면모를 쇄신했고, 무협소설의 풍격을 끌어 올렸으며 무협소설에 농후한 문화 역사 내한을 주입했고, 또 “순문학”창작의 어떤 예술 경험(가령 인물성격의 묘사)을 열심히 배웠다. 무릇 각 분야마다 모두 긍정할 만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 무협소설은 근본적으로 얘기하자면 여전히 인간세상의 연화를 잡아먹지 않는 일종의 여가 문학이며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홍콩문학이 모두 신 무협으로 바뀌고 홍콩소설가들이 모두 金庸, 梁羽生처럼 바뀌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梁羽生선생은 자신의《三????》에서 일찍이 유사한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지금에 이르러 홍콩의 “순문예” 창작(곧 홍콩친구가 말하던 “엄숙문학”이다)과 신 무협, 신 애정을 포함한 “통속문학”은 각자의 궤도 위에서 바삐 전진하고 있다. 그 모습은 더욱 커지고 다른 것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며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피력하는 것은 응당 “엄숙”과 “통속” 사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통속문학”은 저속한 문학이 아니며, 간음, 절도 등을 가르치는 “문학 쓰레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똑같이 고아하고, 건전하며, 아름답고 엄숙할 수 있다. “엄숙문학”은 자기 폐쇄적이 아니며 엄숙하고 안하고는 창작실천을 보아야 한다. “엄숙문학”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보고 싶지 않아 하는 “독선적”인 문학이 더더욱 아니다. “순문학”창작은 자신의 고품격을 유지하는 전제 아래에서 “통속문학”의 생동감과 가독성을 배워야 한다. 맹목적으로 “엄숙문학의 통속화, 통속문학의 엄숙화”를 제창해서는 안 되며, 각자 상대방의 좋은 점, 장점을 흡수하여 풍부히 하고, 제창하며 자신을 발전시켜야 한다.

 

3. “월남파”와 “본지파”

 

자료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지금 50세 이상의 홍콩 작가 중에 “월남작가”는 대략 70%를 차지하고 “본지작가”는 약 30%를 차지한다. 소위 말하는 “본지작가”는 곧 홍콩에서 나서 홍콩에서 성장한 작가이다. 비록 그들이 주로 ??,福建이 본적이고 내륙 본토와 이리저리 얽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심지어 본토에서 여러 해 동안 생활한 경력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소위 말하는 “월남작가”는 내지에서 생활하고 자라고 작품을 쓰고 이름을 날려서 후에 홍콩에 체류하게 된 작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구분은 대략적인 것으로 절대화시키기 어렵다. 예를 들어 ??,夏易,舒巷城,金依는 비교적 전형적인 “본지작가”이지만, 그러면 海辛은? 그는 ??中山에서 태어나 18살에 홍콩에 도착해 견습공, 점원, 영화관 선전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고, 홍콩에서 반세기를 뒹굴었다. 그는 도대체 “본지파”인가 아니면 “월남파”인가? 정말로 구분하기 어렵다. 또 林?,??? 등은 홍콩에서 태어났거나 ?州에서 태어났지만 ??에서 대학을 나오고 졸업한 뒤 홍콩에 직업을 구하거나(林?)  내륙에서 일을 했다. “문혁”이후에 다시 홍콩으로 건너와 정착했다(???). 그들은 또 “월남파”인가 “본지파”인가? 우리들은 “하나를 둘로 나눌”수밖에 없다. 林?을 “본지파”로 ???을 “월남파”로 말이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분류를 위해서만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문학현상, 곧 홍콩문학과 내륙본토문학의 혈육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위에서 인용한《英??年》계절 호에 실린 애국주의 소설《父?之?》는 내용면에서 확실히 “五?四” 애국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기교와 필치에 있어서 또한 郁?夫의 저명한 단편소설《??》의 계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27년 2월 18일, ?? 中山대학교에 재직하던  ?迅선생은 홍콩기독교청년회의 요청에 응해 홍콩으로 가서 두 차례의 강연을 했다. 6) 두 차례의 강연은 구 도덕, 구문화의 경향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이었는데 홍콩의 문예 청년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제 1호에 실린 것은 玉霞의《第一?的?喊》이었는데, 이는 격렬할 정도로 ?迅 연설에 호응 하고 있다. 문장에서 이렇게 밝혔다.

비록 홍콩은 이미 신문예의 작가가 생겼지만, 이미 몇몇 잡지가 나타났지만, 결국은 개혁의 기치를 확실히 올리지 못했고 끝내 뿌리까지 파고드는 골동 보수파들에 의해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그들은 시대의 낙오자들이고 인간세상의 악마이며 문학의 마귀이다.......

그리고 玉霞가 격토한 문장은《?者按》의 두터운 긍정을 얻었다. “홍콩 이곳의 문단은 아직도 옛날의 부식해가는 문학의 색조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문학의 몰락 상황이다. 이후에 우리들은 玉霞군이 희망한 골동 보수파의 제거와 우리들의 신문학 건설을 더욱 원하게 될 것이다.”

맹아기의 홍콩문학과 내륙문학의 관계는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伴?》제1호에 실린 玉?의《中?新文?的?位女作家》에서 당대 전국으로 이름을 떨치던 ?心, ??, 沅君,?昭,??,白薇 등 10여명의 여류작가들 소개하였다. 소개는 비록 정확하진 않았으나 생동감 있게 작가와 편집자의 국내 문단에 있어서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었다.《伴?》는 일찍이 내륙의 몇몇 지명도 있는 작가들에게 원고를 청탁하여 沈?文,胡也?,?鼎洛등의 소설, 산문작품을 잇달아 기고했다. 20년대 말, ??과 상해의 유명 소설가 ???의 우정은 홍콩문단의 미담이 되었다. 30년대에 접어들어 홍콩은 상해 “좌익”문학의 영향을 현저히 받게 되는데《春雷》,《小??》,《?豆》,《文?漫?》등의 간행물은 잇달아 蒲?,?幸之,?适夷 등 좌익작가의 시가, 소설작품을 실었다. “좌익”외의 작품도 몇 편 게재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豆》제 4군 제 1기의 “시 특집호”(1936.1.15)에서는 내륙의 “삼대 시인” 林庚,李?之,?露薇을 게재했다.

항일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 문학연구회의 저명한 소설가, 산문가, 연경대학교수 ?之山선생이 먼저 남하하여 홍콩대학 문학원 원장을 맡아 홍콩문화교육과 문예창작에 큰 공헌을 했다.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특히 상해, ?州가 잇달아 함락되고 내륙작가들이 홍콩으로 대량 남하하였다. 그 총 수가 120여명을 웃돌고 이는 홍콩문단에서 흔히 말하는 “제 1대 월남 작가”이다. 그중 저명한 소설가, 茅盾,巴金,??,端木?良,??基,?适夷,??山,??云,路易士(?弦),卜少夫,施?存 등의 수십 인이 있다. 그들의 월남은 홍콩이 한때 상해의 지위를 대신하여 전시 문화 중심 중의 하나가 되게 하였는데 홍콩문화사업과 문예창작의 번영을 크게 촉진했고, 적지 않은 소설가, 예를 들어 ?之山, ??,??基, 茅盾,端木?良 등이 모두 홍콩에서 글을 쓰고 소설작품을 발표했다. 7)

1941년 말 홍콩이 함락한 후에 대량의 “월남작가”들이 분분히 대륙으로 돌아갔고 항일 전쟁이라는 대업에 참여했다. 1945년 항전 승리 후에 특히 제 3차 국내 혁명전쟁시기에 다시 한번 작가의 홍콩 남하 열풍이 불었고 이들이 “제 2기 월남 작가”들이다. 이번 무리는 그 수가 더 많았는데 모두 150여명보다 적지 않았다. 郭沫若, 茅盾, 柳?子, ??陶, ?振?, 夏衍, 胡風, 臧克家등이 모두 이 안에 있다. 이번은 홍콩에 머문 시간이 짧은 까닭에(대부분 신 중국이 성립되자마자 북으로 돌아갔다.) 창작 성적은 1기만큼 좋지 않았으나 “남방학원”, “撻德학원” 등의 단과대학을 개설하여 홍콩에 대량의 청년 작가들을 키워냈다.

신 중국 건립 전의 말기에서 건립 초에 이르기까지 몇몇 “친 장개석파”의 문인, 작가들이 홍콩에 운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제 3기 월남 작가”이다. 이 중에는 저명한 ??玲, 徐?,李?英,易君左,?滋藩,?述?(?桓),?思?,卜少夫,司???,?雷遐 등이 있고,  曹聚仁,?以?등 중간파 작가까지 합하면 그 총 합은 4?50명을 웃돌 것이다. 홍콩에 넘어 온 초기, 이런 문인, 작가들은 “난민”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떤 이들은 마치 먹고 자는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당시의 미국 정부가 신 중국을 뒤엎기 위해 홍콩을 교두보로 삼아 크게 문화전을 일으켰다. 홍콩주재 미국 신문사의 통일된 배치와 지도 아래, 기금을 모아 구제총회(후에 아시아기금회로 바뀜), 孟씨 기금회, 友聯 연구소 등의 정보기구가 잇달아 성립되었고, 또 일련의 신문, 잡지, 출판사가 창립되었다. 8) “친 장개석파”작가를 모두 그물 안으로 몰아넣었고, 강력한 “달러 문화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반공소설”로 얘기하자면 수년간 200여부가 출판되었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은 ??玲의《秧歌》와《赤地之?》, 林适存의《?朝魔影》와《无字无?》, ?滋藩의《半下流社?》, 李行?의《太湖女??行曲》, 任??의《夜香港》등이 있다. 이런 소설이 달러의 지지 하에 여전히 써지고, 달러가 녹색의 배면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이런 소설들은 “녹배소설(綠背小說)” 즉 “달러소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종합하여 보면 이런 소설은, 특히 소설은 “반공 선전품”이라고 얘기하느니만 못하다. 단지 허구적인 얘기와 인물로 “반공 문화전”을 치렀을 뿐이다. ??玲의《秧歌》와《赤地之?》역시 미국의 새 의도 아래에서 쓰여 진 것이다. 특히 후자는 미국이 대강을 미리 던져주고 ?으로 하여금 완성하게 한 것이다. 작가는 “칼을 차고서 춤을 출”수 밖에 없었다. 물론 몇 편의 “달러소설”(가령《半下流社?》와 石泓여사의《?多利?的迷?》등)이 “반공”의 틀 안에서 실제로 주로 쓴 것은 “난민”들 자신의 곤경, 바둥거림, 심지어는 내분과 내적 소모이고, 난민 자신 인성에서의 갖가지 약점들을 폭로했다. 이런 작품들은, 특히 “반공”을 얘기하는, “반 장개석”을 얘기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그들의 구체적인 묘사는 어떤 정도에서의 생동감과 세밀한 묘사를 가진다. ??玲의《秧歌》를 포함해 강남 농촌에 대한 묘사를 시작한 것은 아직 어떠한 진실성이 있는 것이다. 단지 뒤에 “양식을 빼앗고 폭동을 일으키는” 결말을 끼워 넣음으로써 “반공의 팔고문” 속으로 빠져들었다.

“달러소설”의 맹렬한 공격은 소수의, 역시 홍콩으로 월남한 “좌파”소설가들을 격노시켰고, 그들은 “반 장개석 소설”로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쓰고 영향력도 가장 큰  이가 ??澍(唐人, 洛?, 阮朗)이다. 1950년 그는 처음으로 기록을 남겼다. 홍콩의 《新晩?》에《某公官散?》(단행본으로 인쇄되었을 때《人渣》로 이름을 바꿈)를 연재하였는데 소설 주인공 “아무개씨”가 본토에 있을 때 장개석 정부의 고위 일급 군사, 정부 관원을 지냈는데, 모 성의 성장, 모군의 군단장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홍콩에 흘러들어온 후 마치 “호랑이가 평지에 나온”것처럼 일전의 위세를 잃어버리고, 그 패거리들은 “공관”이란 이름만 있을 뿐 실속은 없었다. 의기투합하여 동업으로 경영하던 장사가 망하자 첩은 빼앗겨버리고, 공자는 건달 두목이 되었지만 “적”에게 맞아 장애인이 되었다. 아가씨는 다른 사람과 눈 맞아 도망갔다가 희롱거리만 되고 무녀가 된다.......“아무개씨” 본인 역시 “공관”을 팔아 나무 집 동네(빈민굴)로 옮겨 온다.《某公官散?》는 “거리 계몽 선전극”의 필치로 조롱의 수완을 극도로 해학화 하는데 예술적 수준은 결코 높지 않다. 그러나 장개석파 인물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좌파 독자들의 높은 환영을 받고 이 단 한번의 성공은 매우 빨리 일본까지 번역되어 건너간다. 9) 《散?》의 성공은 ?씨의 창작 욕망을 크게 자극했는데 1952년 11월 3일부터 그는 唐人이란 필명으로 《新晩?》에《金陵春?》을 연재한다. 1958년 10월 4일에 막을 내리니 6년간이나 오랫동안 연재한 것이다. 소설은 모두 8권으로, 전체적으로 장개석이 유년시절에서 권력을 장악했다가 패하여 대만으로 도망간 일생을 엮었다. 70%는 진짜고 30%는 허구이니 진짜가 가짜 같고 가짜가 진짜 같다. 하지만 소설의 기세는 평범하지 않은데 마치 한 편의 “민국사(民國史)”를 쓴 듯 하다. 《春?》이후로 ?씨는 또 8권짜리 《草山??》을 펴내는데,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간 뒤의 8년간의 세월을 엮었다. 3권《蔣后主秘?》에서는 장개석이 나라를 경영하는 내용을 그렸고, 1부《宋美?的大半生》에서는 宋美?을 설명했다. ?씨 이외에 저명한 좌파소설가로 宋?가 또 있다. 그의 대표작은《侍?官??》이다. 10) 소설은 장개석의 시위관의 단편 일기를 빌려 그의 이간, 분열 정책 및 저질 정객의 수단을 폭로하고, 항전후기부터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가기 전까지인 5?60년간에 있었던 일련의 중대한 정치, 군사 사건을 다루고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달러소설”과 “좌파소설” 모두가 정치실용주의의 산물이며 둘 다 얼마간의 예술 가치도 없다. 그들이 홍콩문단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 역시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두 파가 대치하는 기간 동안 열심히 문학청년을 길러 낸 것을 보지 않을 수도 없다. 현재 홍콩 문단에서 활약하는 西西, 也斯,覇魂,古?梧, 柯振中, 林? 등 중?청년 작가들은 당년에 모두 일직이 두 파의 문단 선배의 장려와 발탁을 받았다. 정치 분야를 초월한 뒤에 이런 중?청년 작가들은 이미 홍콩 본지 작가의 핵심이 되었다. 서로 양립할 수 없고, 서도 뺏으려고 다투는 대치는 없어졌는데 이는 아마도 이런 본지 작가의 새싹이 오히려 적합한 토양과 수분을 얻지 못해 말라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역사상의 십자군 동정대가 문화의 대 융합을 이끌어 낸 것처럼 이 역시 아마도 당대 “좌”,우의 대치가 “모로 쳐도 바로 맞은” 적극적인 성과일 것이다! 또한 “좌”, 우 두 파간에 모두 적지 않은 작가들(가령 ?孚,夏果,?桓,慕容羽? 등)이 홍콩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월남작가”가 “본지작가”로 변해 몇 십년간 홍콩 문예사업에 걸출한 공헌을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혁”후기, 귀국한 화교들이 홍콩이나 해외로 이주 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홍콩의 새 이민자가 되었다. 그 사이, 대략 10~20명의 사람이 시인이나 작가가 되었다. 陶然, ?瑞,白洛,王璞,?娟,??? 등 그들을 대표한다. 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이민작가”로 불렸는데 “제4기 월남작가”로 불러도 된다. 이 작가 무리는 본래 바쁘게 지나가 버리는 길손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자마자 홍콩 사회의 인사가 되었다. 그들은 비록 동년배의 본지 작가들이 홍콩에 대해 아는 것만큼 잘 알지는 못했지만, 동년배의 본지 작가들이 부족한 창작에서의 우세를 가졌다. 예를 들면, 첫째로 그들은 대부분 대륙에서 완전한 초?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았고, 문화 바탕이 비교적 풍부하고 충실했다. 둘째, 그들은 대다수가 과학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아 교조주의와 간단화의 방해를 제거한 후에, 분분하고 복잡하게 해부된 홍콩 사회를 종종 더 깊게 잘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문학 장작의 사장 내한을 더욱 심화시켰다. 셋째, 그들은 대부분 대륙 문학의 교육적 감화를 받아, 대륙소설의 넓고 깊음은 종종 홍콩소설의 섬세하고 유약한 결점을 보완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륙문학과 홍콩문학의 두 가지 장점과, 그들의 고질적인 약점을 제거하여 가장 잘 융합할 수 있었고, 한층 더 높은 수준에서 새로운 문학예술의 창작을 일구어 낼 수 있었다.

본지작가와 월남작가 이외에 홍콩에는 대만과 해외에서 건너온 작가가 소량 있다. 예를 들면 시인 戴天,여류 소설가 施叔?,蔣芸,?沁 등이 있다. 그들은 일찍이 홍콩 사회에 녹아들어와 홍콩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대량으로 발표했다. 그들은 지금 본지작가, 신이민작가와 함께 21세기 홍콩문학의 전성기를 만들고 있다.    

 

4. “현대”와 “현실”

 

홍콩의 신소설은 20년대 맹아기에서부터 50년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창작방법에서 말하자면 기본적인 것이 현실주의이다. 몇몇 비교적 성공적인 소설작품들, 예컨대 ??의《黑?拉》,《无?的?》,《?巷》,?谷柳의《?球?》,?以?의《天堂?地?》,曹聚仁의 《酒店》,夏易의《香港小姐日?》,《??》,舒巷城의《???的?》등이 성공을 거둔 것들이다. 근본적으로 이것들은 현실주의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徐?의 《彼岸》,徐速의 《星星?月亮?太?》등은 낭만주의의 창작방식을 비교적 많이 활용했는데 각각 특색과 취할 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의 허점이 바로 사회현실이 충분히 진실 되고 힘 있게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홍콩전기”를 주류로 하는 “원앙호접파"가 실패한 것은 바로 그들이 현실주의의 창작 원칙을 위반하고 이치에 맞지 않게 아무렇게나 날조하였으며, 마음대로 짜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현실주의 창작방법 또한 당연히 허점과 한계가 있다. 그것은 문학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 종종 인물의 복잡하고 깊고 신비로운 속마음을 탐색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압도한다. 지난 세기말과 이번 세기 초, 현실주의는 조이스와 카프카 등이 대표하는 현대주의문학의 첨예한 도전을 받았다. 후자는 인류의 “내재하고 있는 진실”을 강조하여, 개성의 발굴과 사람들의 심리, 욕망, 잠재의식에서 변태심리, 변태적인 성심리 등의 묘사로 확실하게 전통현실주의를 크게 타파하여 문학창작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렸다. 중국에서 현대주의의 신속한 전파를 말하자면 바로 "五?四" 문학이 가지고 있는 뚜렷한 영향력을 들 수 있는데 ?迅의《狂人日?》,《野草》등의 작품으로 증명할 수 있다. 30년대의 문학에서 현실주의의 영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李金?,戴望舒 등의 시와 ???,穆?英,???,施?存 등의 소설은 사람들의 안목을 몰라보게 변하게 만들었다. 30년대 중국문학의 발전은, 한 방면에서는 소련의 사회주의 현실주의의 발전에서 왔는데 “좌익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흥성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방면에서는 유럽대륙에서의 현대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것인데 위에서 말한 시가 중의 상징파, 인상파 그리고 소설 중의 “신감각파”의 활약으로 드러난다. 50년대 중기 이전, 현대파는 홍콩문학에 대한 영향이 비교적 작았는데 이것의 원인은 우선 홍콩문학 자체의 발전에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현대주의는 모두 현실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기초위에 이루어진다(예컨대, 영국과 프랑스). 반대로 말해, 현실주의가 아직 매우 미숙하기 때문에, 현대주의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음으로 첫 번째, 두 번째 “월남작가”들은 대체로 “좌파작가”에 속하는데 ??은 사회주의 현실주의 인데 연대주의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달러소설(달러를 등에 업은 소설)”과 “좌파소설”의 교전으로 이 둘은 모두 창작방법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달러문화공세”가 부흥하였다 쇠락하면서 몇몇 “달러소설”가들이 잇달아 대만이나 미국으로 간 후에, 두 파의 소설의 교전은 잠잠해졌고, 홍콩문학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현대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몇몇 시인과 작가 그리고 문학청년들은 곧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현대주의문학의 깃발을 내걸었다. 이것이 바로 1956년 3월 18일에 창간된 《文?新潮》 11) 이었다.《人??魂的工程?,到我?旗下?》라는 “발간사(?)”에서 현대주의 경향이 매우 분명하였고, 제 7기(1956. 11.25)에 발간된 李?陵의 《?代人??代生活??代文?》이라는 글은 “홍콩판” 현대주의를 선언한 글로 볼 수 있다. 문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철저히 현대주의를 표방한 시인, 소설가, 화가 그리고 음악가들은 19세기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가 가지는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객관적 묘사에 불만을 가지고 반대하기 위해 주관을 표현하는 희극성에 빠져들어 열광하고 있다. 그들은 나타나자 바로 구세계의 혈통을 잘라내 버리고 전통적인 문학예술 형식을 버렸다. 그리고 감각세계의 탐색에 힘썼다. 동시에 신흥 철학과 과학, 그리고 심리학은 직, 간접적으로 그들의 모험을 격려하였다. 프로이드 학설과 Borgersen의 이론과 각양각색의, 마치 유행하는 물질주의에 의해 짓눌려버린 관념론의 범주에 속한 자아주의는 이런 현대주의 문학예술운동은 개념상의 지지와 근거를 갖도록 하였다. 19세기의 맨 마지막 10년부터 시작해서 이 젊은 문학 예술가들의 끓어오르는 영혼의 열병이 유포되어졌다. 그 보급이 아주 빨라, 마침내 반세기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당대 문학예술을 주도하는 역량과 조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개인의 심리 과정을 묘사하고 줄거리와 구조가 없는 소설, 신비로운 느낌과 순수한 감각적 경험이 짙은 시, 화음을 이루지 않는 음악과 과장되게 직감과 환상을 표현한 회화, 비록 그것들은 기괴하고 극단적이나 이미 확실히 현대인의 좁은 관념과 시야를 넓혔다…

작가는 이렇게 온 힘을 다해 현대주의의 주장과 성취를 칭찬하였는데, 아주 분명한 것은 바로 홍콩의 문예가들에게 목적 달성을 위해 분투하는 모범을 세워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李?陵과 그의《文?新潮》의 문우들은 바로 이렇게 하였다. 비록 15기의《文?新潮》가 거대한 흐름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현대주의의 충격파를 형성하였다.《文?新潮》에서부터 현대주의가 이미 현실주의와 함께 홍콩에서 상보대립하면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文?新潮》의 창간에서부터 60년대 초까지, 비록 몇 개의  현실주의 단편은 나쁘지 않았지만, 홍콩문단을 흔들 만큼 충분한 역량을 가진 소설작품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1963년 ?以?의 장편소설《酒徒》 12) 의 출판은 홍콩의 현대주의 문예운동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酒徒》는 한편의 현대주의 역작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데 소설 전체가 주인공 “나”의 끊임없는 의식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진지한 작가로서 “뜻이 있기에 일자리를 구하지 않았다.”으나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매우 싫어하고 경시했던 무협소설, 포 르노 소설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극도의 고민을 하면서 그 역시 조금씩 퇴폐와 타락을 향하게 된다(만취하여 여자를 데리고 노는 것에 이른다). 그의 모순과 괴로워하는 마음의 여정과 곡절은 당시 홍콩사회가“좋은 것을 나쁘게 만들어” 엄숙 문학을 키워주지 않는 냉혹한 현실을 반영한다.

《酒店》이후에 홍콩의 현대주의문예는 장족의 발전을 하여, 西西(???)、也斯(梁秉?)、辛其氏、?煦斌、??彬 등의 매우 실력 있는 시인, 작가가 나왔고,《我城》、《剪?》등의 매우 독특한 풍격을 가진 작품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시 젊은 세대의 현대주의 작가들은 곤경에 빠진 듯하였다. 그 첫 번째가 몇몇 작품들이 단순하고 현대주의 기법을 가지고 놀아나 심지어 일부러 허황되게 하여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적어서 단지 문우들끼리 서로를 치켜세웠다.

두 번째로 그들은 역사가 유구한 현실주의 전통에 대해 매우 경솔하게 전부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쭉정이의 영양은 청년을 채우지 못 한다”는 것은 현실주의의 배양이 이뤄지지 못한 채 홍콩의 현대주의문예는 사실상 이미 생사가 걸린 매우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현실주의의 부정에 대해 말하자면《酒徒》에서 시작한다고 봐야 한다. 주인공 “나”는 일찍이 이렇게 “박식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문학은 일종의 창작이면서도, 전통 속의 오래된 예술 형식과 이론을 추구하고자 한다. 얼마나 열정적이냐에 상관없이 현저한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현실주의는 이미 낙오하였다…현실주의가 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결코 전반적인 생활의 발전을 파악할 수 없다.현실주의는 마땅히 죽어야 하며, 현대소설가들은 반드시 인류에 내재해 있는 진실을 탐구해야한다.

이 단락의 말이 단지 한 소설인물이 취해서 한 실언이라면 당연히 문제 삼을 만한 것이 못된다. 아쉬운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대표하는 것은 바로《酒徒》의 작가  ?以?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以?와 같은 것이 아니지만 “내”가 위에서 말한 관점은 ?씨가 후에 쓴 한편의 논문에서 다시 보이는데 특히 제목이《?代中?段片小?的????》인 장편 논문 속에 있다. ?씨가 당시 예리하게 지적한 중국현대소설발전중의 문제는 앞을 멀리 내려다 본 것으로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그가 현실주의에 대해 한 몇 가지 비평 또한 예리하면서 깊이가 있다. 그러나 극단으로 치달아 정도가 지나쳤다. 사실 60년대에 현실주의는 죽지 않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실주의는 여전히 살아있을뿐더러, 게다가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다. 다른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홍콩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의 많은 작가(특히“신이민작가”)들의 작품은 아직까지도 현실주의가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씨를 포함하여“9?7”로 돌아가는 것을 제재로 한 소설작품들도 똑같이 현실주의가 주도하지 않던가? 그래서“현실주의는 이미 죽었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사실 현실주의도 좋고, 현대주의도 좋다. 모두 일종의 창작방법이니, 높고 낮음을 가를 수 없고 누가 누구를 대치한다는 문제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생산도구가 만능일 수 없듯이, 어떠한 창작방식도 만능일 수 없고 모두 사람이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 낫으로 도끼를 부정해서 안 되고 도끼로 낫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도끼와 낫은 각자의 쓰임이 있고, 각자의 장점이 있으니 여러분은 잘 다루려면 그 단점을 피해 장점을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한계를 말하자면 어찌 현실주의만 한계가 있고 현대주의는 없겠는가? 바로 상반적인 것이다. 단지 인물의 내부를 탐색하는 것만 강조하고 문학작품의 사회성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로 인물은 협소한 시야에 구애받거나 심지어 자질구레한 생활 테두리 속에 있는 것은 똑같이 편면적인 것이 아닌가? 하물며 현대주의가 아주 강조하는“비이성”은 그 자체에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가 초래한 근친상간, 하극상, 살인을 즐기는 것, 괴벽 등 각종 비 인성, 비 인도주의적 묘사는 문학 그 자체나 사회적 효과에서 보자면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창작방법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단지 전부 받아들여 좋은 것은 취해야 하고, 인위적으로 좋고 나쁨을 평가하고 심지어 어떤 창작방법을 사지로 내모는 짓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창작방법들은 예로부터 절대 배척하지 않고 서로 어울리고 흡수하였다는 점이다. 진정한 우수 문학작품은 결코 편애하지 않고 다양한 방면의 영양을 잘 흡수한 것이다. 몇 십 년 동안 현실주의는 줄곧 낡고 좋지 않은 것은 버리고 새롭고 좋은 것을 골고루 받아 들려 열심히 자신의 길을 넓혀왔다. 그 중 중요한 방면이 바로 현대주의 합리적인 요소와 힘 있는 수단을 충분히 흡수하여 스스로 현대색채를 풍부하게 하려고 노력하였고 신속한 발전과 나날이 복잡해지는 사회생활에 적응하고 인물의 마음상태를  반영하기 위하여 19세기의 현실주의와 비교하여 매우 많은 새로운 특징들을 갖추었다. 예를 들어, 환타지 현실주의가 바로 현실주의와 황당(荒唐)주의의 유기적인 결합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핵심은 여전히 현실주의에 있다. 현실주의가 이러한데, 현대주의는 마땅히 더욱 더 이처럼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홍콩의 현대주의문예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하나의 관건은 “현실주의사망론”을 완전히 버리고 그것의 성공적인 경험과 풍부한 영양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홍콩은 백년의 굴욕을 겪었지만 반세기의 번영을 누렸다. 영국왕국에 속해 있던 이 밝게 빛나는 “동방의 진주”가 이제 중국으로 돌아왔다. 홍콩은 앞으로도 계속 그 “동방의 진주”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홍콩 동포는 조국의 품에서 새로운 번영을 창조할 것이다. 사람들이 홍콩문학계에 두터운 기대를 거는 이유는 사람들은 홍콩사람들이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더럽히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홍콩 백년의 상전벽해를 충분히 반영하는 위대한 작품을 써낼 수 있고, 우수하고 뛰어나며 위대하기까지 한 홍콩작가를 배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5월 14일 ?行?에서

 

강하영


부산대 중문과 200001203 강하영 옮김
袁良駿, 〈緖論 二十世紀香港小說面面觀〉, 《香港小說史》 第1卷, (深?: 海天出版社, 1999), p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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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現代小說》 제3권 제1호 (1929년 10월 15일 출판)

2) 상세내용은 《<英華靑年>과 “第一燕”―홍콩신문학원류고》, 《文學批評》1997년 제3호 참고. 인쇄 시 표제 오류가 있고, 본문 역시 10여 곳의 잘못된 부분이 있으니 양해바람.

3) 《黑?拉》단편집을 포함하여 기타 작품을 모아 《迷?》,《??衫》,《鬼火》,《西班牙小姐》,《永久之歌》및《母??的故事》로 편찬했다.

4) 1948년 홍콩《?商?》에 연재되었고, 1952년 홍콩문원서점에서 상, 하 따로 초판 하였다. 남양판에서는《都市曲》로 이름을 바꾸었다.

5) 《寂寞地來去的人》,《向水屋筆語》를 포함한다. 홍콩 삼련(三聯)서점에서 1985년 7월에 초판 되었다.

6) 첫 번째는《无?的中?》이란 제목이었고《三?集》(《?迅全集》제 4권, 북경인민문학출판사, 1981년 초판)을 포함한다. 두 번째는《老?子已?唱完》이란 제목이었고《集外集拾?》(《?迅全集》제 7권)을 포함한다.

7) 이중, 비교적 유명한 것은 茅盾의《?往?里??》(즉《第一段的故事》)와 《腐?》, ?之山의《玉官》과《??的?》, ??의《呼?河?》과《?伯?》, 그리고 유명한 극작가 夏衍 의 장편소설《春寒》등이 있다.

8) 가령 《香港??》,《人人文?》,《中??生周?》,《今日世界》 및 自由, 高原, 人人, 友聯 등의 출판사.

9) 《某公官散?》가 1950년 《新晩?》에 연재되었을 때 “본관관사(本?管事)로 유명해졌다. 1951년 홍콩 求?출판사에서 초판을 찍었을 때 《人渣》으로 이름을 바꾸고 洛?으로 이름을 알린다. 같은 해 일본 번역본이 岩波출판사에서《香港斜?物?》로 출판된다.

10) 역시《新晩?》에 먼저 연재하였고 1960년 6월에 홍콩求?출판사에서 초판을 찍었다. 宋?, 본명은 周?瑞이고 홍콩《大公?》의 영문 비서였고, 후에 영국으로 망명한다.

11) “文?新潮사”가 주최하여 월간한 것으로, 주요 구성원은 ??、李?陵、昆南、?因 등이 있다. 다 합쳐서 2권 15기가 나왔는데 1959년 5월 1일 발행을 중단하였다.

12) 香港海??室에서 1963년 첫 출판하였다. 中?文?出版公司에서 1985년 내륙판을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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