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3.06.20
수정일
201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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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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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

?天, 김현정 이혜진 황희정 백경희 나진선 옮김, 〈1997년 전후의 홍콩영화〉, 《后九七?香港?影》, (香港:香港?影????,2003),pp.71-197.

1997년 전후의 홍콩영화
?天,《后九七?香港?影》, (香港:香港?影????,2003),pp.71-197.

 

?    天

옮긴이

김현정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200101218 김현정

이혜진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200101219 이혜진

황희정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200101239 황희정

백경희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200101222 백경희

나진선 부산대 언어정보학과
200003313 나진선

 

1. 죽음에 직면하다

 

 (1) 위기의 도시와 불치병

 

홍콩을 위기가 도처에 직면하고 곳곳에 함정이 있는 곳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홍콩에서 만들어진 영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상으로 홍콩자체가 바로 일종의 정치적 피난처, 경제의 전환점, 이민의 발판으로서 이러한 장기간의 유랑은 불안정함을 바로 홍콩 본토의 주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콩을 본토에 귀환 시키는 문제가 80년대 초 중국과 영국의 외교 논의 상에서 공식적으로 일정이 논의된 이후에 홍콩 영화는 더욱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사고를 하고 영화에 반영하며 끊임없이 위기도시의 무드를 조성하였다.

예컨대 전문가가 지적하기를, ?鞍?의 《胡越的故事》(1981), 《投奔怒海》(1983)와 ?泰?의《?人同志》(1989), 徐克의《英雄本色之夕?之歌》(1989), ??森의《?血街?》(1990)등에 이르기까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공산당이 베트남을 통일 한 것에 빗대어 홍콩의 97년 후의 입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공포스러운 악몽은 사회의 홍콩의 본토반환 문제에 대한 우려를 반사하여 보여주고 있고, 게다가 ‘八九民?’이후 이러한 악몽은 더욱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게 되었다.

위기의 도시는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곳이지만 또한 영화인의 작업 세계 이기도 하다. 바로 李?桃가 지적한 것처럼 93년 이래로 홍콩에서 영화가 본토 시장에서 점점 패배하기 시작했고 공정에 없던 역경 중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97년 전후의 영화는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최후의 날에 대해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97년 홍콩반환’이라는 정치적 요소를 제외하고는 아마도 영화인들이 보편적으로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감과 더욱더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보자면, 홍콩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기 말은 99년 노스트라다무스의 대 예언이 들어맞는지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홍콩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기말은 더욱 이른 97년에 닥치게 되었다. 게다가 이 임박한 상황 하에서 이중의 불안감은 홍콩영화로 하여금 미친 스타일로 치우치게 하였고, 이것은 이미 홍콩 영화특색의 빠른 전개로 나타나게 되었고 공간상에 있어서의 압박감과 시간상에 있어서의 긴박함을 더욱더 나타내게 되었다.

압박감이라는 것은 시간이 늘 부족하므로 최대한 빨리 진행시키고, 공간 또한 항상 부족하므로 최대한 이용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시간은 이미 많지 않고 공간도 곧 사라져 버린다. 원래 우리에게 속해있던 것도 매우 빨리 사라져 버린다. 바로 이러한 위기에 직면했다는 의식이 위기의 도시를 더욱더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도시 현상 또한 강한 동적인 느낌과 합해져서 리듬이 극도로 빠른 형식으로 결합된다.

위기 상황은 죽음을 그 한계로 하는데 인생에 있어서의 한계는 바로 죽음이다. 97년의 위기상황의 의미를 의인법으로 표현하자면 홍콩은 97년 이후에 바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까닭에 위기도시의 정서 이외에도 ‘97년 전’홍콩 영화는 또 다른 정서를 자주 보이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그것은 바로 불치병 정서이다. 상징으로서 불치병 정서는 위기도시 정서보다 훨씬 분명하며 훨씬 통속적이다. 답례편지 형식의 연애소설 중에서 불치병은 위대한 사랑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유감으로 나타나며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지만, 회귀되는 유감은 필요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초월될 것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97년 전’불치병 정서의 홍콩영화의 적지않은 숫자는 모두 어떻게 불치병의 위협을 정면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 알리고 있는데 설령 강매에 이르더라도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일찍이 인간이 죽음에 대한 반응을 연구한 적이 있는데, 첫 번째 반응은 분노이고 뒤를 잇는 것은 부인이었다. 그 후에는 흥정, 우울이 따랐고, 마지막으로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단계론을 모방하여 말하자면, 홍콩영화의 '97년'불치병 정서는 대체로 흥정을 하는 단계에 와있다고 할수 있다.

홍콩과 ‘97년 위기상황’ 이 결합된 위기도시 영화와 불치병 영화는 많이 있지만 , 이 책에서는 《新??客?》, 《和平?店》과 《天涯海角》를 골라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고, 또한 이 영화들을 이야기 하는 중에 비슷한 종류의 영화를 아울러 다루도록 한다.


(2) 누가 북풍에 힘써 대항하는가? - 《新??客?》


《新??客?》(1992)

제작 : 徐克

감독 : 李惠民

배우 : 林?霞,?曼玉,梁家?,甄子丹,?洵

 

다음 의식은 일찍이 ?曼玉을 《新??客?》의 주인공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영화속에서 독창적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기 때문인데, 최후에 객잔을 불로 태우는 장면은 사람들로 하여금 홍콩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에 관중들이 徐克의 90년대 대표 작품들을 정치화 하여 해석하려 했다면, 만약에 우리가 예술적 특색이 있는 작품 중에서 일치성을 억지로 찾아 얘기하려 한다면, 만약 우리가 程小?,李惠民이 연출하고 촬영한 영화를 徐克의 이름 아래로 넣고자 한다면,.......... 이렇게 우리가 이상의 가설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新??客?》은 《???》시리즈를 계승한다고 할수 있고, 《妖?都市》(1992),《笑傲江湖之?方不?》(1992)후의 ‘97년 전’시기를 지난 후기에 또 한번 사람을 깊이 반성하게 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李?杰의 ???은 90년대 홍콩인의 영웅이다. 홍콩사람들이 중국과 화해를 하도록 중재시키고 세기말 기분을 푸는데 큰 역할을 했다. 《笑傲江湖之?方不?》(역시 李?杰이 주연이다.)는 원작을 빌려와서 끊임없이 ‘강호를 퇴출시키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것은 바로 홍콩사람들의 되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표출된 것이다. 또한 《妖?都市》는 홍콩을 유령의 도시로 만들면서(영화중에서 中?大厦는 이 유령의 근원으로 설명된다.) 히스테리적인 공포의 폭탄을 터뜨린다. 그리고 결국에는 《新??客?》에 이르게 된다. ?曼玉이 연기한 주인여자는 ‘이 무정하고 뜻 없는 곳에서 떠난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梁家?가 연기한 周淮安과 함께 떠난다. 마치 ‘스스로 유랑을 선택하는 것만이 비로소 진정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며 마음은 다시금 정착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주인여자인 金?玉는 이름이 정말 천하지만 그녀 같이 그렇게 경박하면서도 남자를 꾀는 여자에게는 꽤 어울린다. 그녀는 정말 방탕하면서 매력이 넘친다.그녀는 한 무리의 사방팔방에서 온 무리들을 데리고 있는데 사람을 살해하고 약탈하기도 하며 심지어 사람고기를 이용해 만두를 만들기도 한다. 그녀는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는데 국경 관문의 千?(영국과 친영세력을 의미한다.)와의 관계도 매우 좋고, 산적 떼와도 서로 이득을 본다는 원칙 아래 항상 협조하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용문객잔은 그녀의 관리 하에서 단지 이득만을 중시하고 인정과 의리는 논하지 않는 곳이며, 관리하는 왕이 없지만 스스로 헤쳐 나가는 정글의 법칙이 균형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용문객잔의 이러한 특색이 바로 홍콩의 형상이 아닌가?

홍콩이라는 이 기형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헛되이 돈을 낭비하였다. ‘자유경쟁’이라는 슬로건 하에서 약육강식이 행해졌고 ‘스스로 균형을 맞춘다’는 미명하에 다른 사람의 실패를 밟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동서양문화가 교류하는’ 도시에서 ‘절대간섭’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기조로 꿈속의 자유시장체제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술과 색과 돈과 노여움이 있는 곳이고, 타락했다고 하면 타락했고 사람을 끄는 곳이라고 하면 사람을 끄는 곳이다.

이것 또한 金?玉와 그녀의 용문객잔이 형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林?霞가 연기했던 邱莫言이 《新??客?》중에서 전투를해서 죽는 장면에서 의의를 찾고 싶다. 그녀는 전통적인 영웅상으로 충성스럽고 의리가 있어서 忠良을 구한 후에 위험을 겪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망은 틀림없이 전통의 소멸을 선포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신임과 의리와 정의감이 있었지만 타협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줄일수 없었고(그 예로 周淮安을 의심하는 것), 또한 이 용문객잔이라는 전통적으로 파산한 곳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에周淮安, 金?玉, 邱莫言이 세사람이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강적인 대태감 曹少欽(甄子丹연기)를 대면하는데, 격전중에 모래늪 송으로 몸이 빠진 뒤, 결국에는 邱莫言는 점점 가라 앉아, 단지 한 자루의 나무피리만 남게된다. 그리고 전투 후에 金?玉는 일시에 인생의 진정한 의미의 중요성을 깨닫고 홀연히 객잔을 버리고는 周淮安을 따라 길을 떠나는데, 흡사 한 명의 의사가 된 듯 해 보였다. 자본주의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 된 신참이지만, 전통의 몽둥이를 겪게 되는데, 이러한 배치는 徐克이 전통가치나 일반적 가치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은 :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모래위에서 진행된 것이고, 홍콩을 전통과 현대가 서로 만나는 교차점으로 보고 있으며, 결국은 역사상에 있어서 단지 우연히 생겨난 생산물으로, 홍콩사람들 역시 일찍이 ‘근본이 없는’ 혹은 ‘근본을 잃어버린’ 무리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金?玉는 아마도 정말로 邱莫言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결정은 반드시 이상성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마도 단지 일종의 패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미 그것까지 걱정할 틈은 주지 않는다. 바로 徐克의 다른 작품들처럼, 생동감과 영상이 비로소 작가가 애를 쓴 부분이다. 周淮安의 ‘나는 너 같은 용기가 없고, 나의 지조는 사막에 있다.’라는 한 마디는 더욱더 그가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분명치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정말로 周淮安이 金?玉보다 못한 것인가? 아니면 金?玉가 周淮安보다 못한 것인가? 우정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용기가 중요한 것인가? 이 무렵, 관중들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을 참지 못하게 된다. : 큰 시대를 맞이하려면 , 정말로 이 역정을 따라야 하는가?

《新??客?》의 결말은 상당히 뜻밖이며 속이 후련하게 하는 한 장면은 바로 정말 대태감을 죽인 것은 周淮安, 金?玉, 邱莫言 이 세 사람 중의 누구도 아니라는 점이다. ‘최후의 고수’는 뜻밖에도 단지 인육을 써는 칼 솜씨는 으뜸인 무술도 모르는 객잔의 한 타타르 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야만인의 도움으로 周淮安과 그 무리는 관외로 달아나게 되고 마침내는 중앙정권에 소극적이나마 대항의 표시를 보이게 된다. 간사한 권력자인 ?? 의 대답은 바로 군대를 남겨두고 천천히 후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었는데, 야만인들과 무리를 지어서 천민으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자연히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서 작품을 쓰고 다시 찍었는가? (원작은 胡金?의 《??客?》이다.) 왜 《???》이후로 일련의 시리즈가 모두 무협영화인가? 매표상황 및 徐克, 程小? 조합의 능숙한 무술장면을 제외하고도, 다른 설명으로 이 물음에 대답이 가능하다. 상상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무협세계이고, 가장 직접적으로 현실의 모든 정치 및 경제 세력의 분화와 음험함을 표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력은 인간과 동물이 가진 해결방법 중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며 인간 문명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 세력이다. 폭력은 그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며 그 자체로 무력에의 역정을 호소한다. 그러나, 무협영화의 형태를 빌어서 우리는 무력을 규범화, 미학화, 시각화 하였고, 그리하여 모종의 합리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은막상의 검술과 피는 아름다운 중국무술표현을 가져오며, 관중에게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중국인의 투쟁정신을 느끼게 하는데, 이 또한 중국인들의 비애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3) 누가 영웅을 팔아넘겼는가? - 《和平?店》


《和平?店》(1995)

제작 : 吳宇森

감독 ; ?家?

배우 ; 周??,?童,吳??


《新??客?》과 비교하자면, 《和平?店》은 비슷한 지역성을 가진다. - 역시 아무도 관할하지 않는 지역이 있는 것과,(여기서는 상해로 가정되어 있다.) 많은 갈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화평반점이 화평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유는 모두 강호의 규범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 주인은 절대 강호의 중대한 일을 과하게 묻지 않고, 절대로 도망자가 떠날 수 있도록 돕지않는다.

호텔이든 여관이든 간에, 모두 나그네가 머무르는 곳을 상징한다. 모두 빌려온 공간이다. 사람들이 여기를 들어오면 여기를 집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단지 머물기 위해서이며, 혹은 피난와서 남은 목숨을 겨우 부지해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和平?店이 홍콩에 비교되는 것이 ??客?보다 더 명철하게 드러난다. 불평등 조약으로 확보된 안정과 번영은 극도의 위기를 맞게되고(본토로의 귀속은 큰 위험으로 보인다.) - 호텔은 마적의 포위하에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최후의 고비에 주인과 손님들은 지배인을 팔아버리고, 연이서 밖으로 도망쳐 나온다(공황성이민을 상징한다.) 결국에는 주인과 관리자는 전쟁에서 죽게되고(식민종주국의철수를 상징), 아무도 보호하지 않는 호텔은 더 이상 和平?店이 아니고, 손님 대부분은 이전의 도적떼에게 발각되어,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이 모두가 명확히 ‘97년대공황’의 공포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和平?店》은 난을 피해 도망간 사람의 낙원의 기초가 이 정치화되지 않은 신임을 기반으로 지어졌다. 그것이 멸망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관리자가 스스로 이 신임을 어기기를 기다렸지만, 더 이상 정치화가 되지도, 문제거리가 되지도 않았으며,(심지어 우정을 위해서라고 연출자는 그 의미를 칭찬하고 있다.) 사리사욕을 챙기던 주인과 손님이 비로소 진정하게도 호텔을 종말로 이끈 사람이었다. 연출자는 홍콩에 대해서 순수한 경제적 도시로 만드는 것에 대해 다른 의견을 보이지 않았지만(만약 누군가 원했더라면), 홍콩 사람의 뿌리가 없는특징에 대한 채찍은 《新??客?》보다 더 강렬하다.

?家?는 호텔의 마지막 모습을 한명의 여자가 호텔로 들어와 다시 호텔을 시작하는 것으로 배치했다. 이것은 ?童이 연기한 불운한 交?花가 호텔을 들어오자마자 여주인인 척 행동을 했고, 사기 칠 기회를 노리면서, 술 마시고 도박하며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했다. 결국에는 周??가 연기한 화평반점의 주인이 人王을 죽이게 된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관중은 점차적으로 그녀는 단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으며,마적때의 두목이 고의로 그녀를 보내어 人王을 죽이고, 신임을 깨뜨리도록 시킨 것이라는 것, 그가 그녀를 돌려보내야만 마적때가 비로소 호텔을 피로 씻는다는 핑계를 댄다는 것을 알게된다.

《新??客?》의 金?玉와 비교한다면, ?童이 연기한 小曼혹은 南?은 바로 부정적인 형상을 갖추고있지만, 또한 바빌론 대음녀(사람이 타락하고자 하는)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고 할수도 있다. 그녀는 아마도 작가가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주의해서 홍콩의 타락과 치우침현상을 이끌어낸 형상일 것이다. 무엇이 한명의 여자를 위해 함락된 것보다 더 말기 도시의 운명을 상징해 낼 수 있겠는가?(누구나 모두 트로이의 목마를 생각해 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小曼또한 《新??客?》의 金?玉과 같이 우정의 존귀함을 느끼게 된다. 人王을 줄여서 인심을 잃어 완전히 고립되어 돌아올 때에는 그러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그녀가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화평반점의 석양속의 전쟁에 참가하고, 죽은 人王의 시체와 전기를 가지고 떠나는 것이다.

부득이하게 周??에게 부합된 의미를 찾지 않을 수가 없다. 吳宇森의 영화 중에서 周??은 이미 홍콩식 마피아 영웅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만약에 우리가 吳宇森과 周??이 대표하는 홍콩에서 생산된 황금시기의 영화를 자세히 살핀다면 그들은 훗날 이 때문에 ‘헐리웃으로 진군하는’ 기회를 잡게 되었고, 홍콩영화의 영웅으로 떠올랐다는 것을 알 것 이다. 그렇다.周??와 그 영화배우의 매력은, 고유한 이미지를 가지고 人王을 죽이는 배역을 해 내는것이, 마치 이전의 좋았던 날들의 가치를 내재 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和平?店》또한 역시 周??의 최후의 주연작품 중의 하나이다.(吳宇森연출과 더불어) 그의 떠남과(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상관없이) 그의 실종은, 홍콩식 귀재의 부재를 그리워하는 연출로서 명확하게 나타나며, 그리하여 미래의 날들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新??客?》에서 다른 영역으로 떠나는 것은 주동적으로 자신의 힘을 간직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89년이후’시대에서 ‘97년 이전’시대의 심리상태를 충분히 보여준다. : 《和平?店》에서의 떠남은 핍박으로 부득이하게 다른 사람에 의해 팔려가는 것이고( 재밌는점은, 전기를 가지고 떠나는 小曼이 원래는 판매 집단에 속했다는 것.) 이것은 ‘89년이후’시대의 감정이 기온이 하강하여 조수가 빠져나가듯 빠져나간 후의‘97년이전’시대 심리상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호텔의 사람들은 마지막 고비에 하나로 단결하지 못하고, 호텔의 주인과 연합하여 대항하지 못하고, 연출자가 귀재를 홍콩의 귀속감으로 여긴다는 것을 노출시켰다. 人王을 죽이고 심지어 盲公까지 그 곁을 떠나버린후,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그 눈빛, 그 표정을 빌려와 말하자면,사실상은 즉시 성불할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애석하게도, 군중들은 믿음을 가지지 못했고, 귀재조차도 단지 비극을 받아들아고 세상에 남길 전기를 남겼다. 화평반정은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에서 멸망하였고(《新??客?》중의 용문객잔과 마찬가지로), 예언을 남기고, 공포스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렸다고 간주된다.


 (4) 누가 마술을 연출하는가? - 《天涯海角


《天涯海角》(1996)

 제작 ; 李志毅

 감독 ; 李志毅

 배우 ; ?慧琳,金城武,王敏德


《天涯海角》의 那口?(金城武연기)을 보면, 나는 항상 《新??客?》의 ?不遇가 떠오른다. 영화중의 那口?은 ?琳(?慧琳연기)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성은 那가 아니고 또한 그의 성은 ?도 아니고, 그는 몽고인이며, 那口?은 그의 이름이라고, 마치 유창목은 유창목인 것처럼, 那口?은 바로 那口?라고 말했다.

타타르족과 몽고족과의 관계는 대체로 많은 관중들이 명확히 알지 못하고 단지 모두 북방의 소수민족이 변한 것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不遇은 항상 金?玉의 충실한 심부름꾼 이었고 줄곧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정직하게 한마음 한 뜻 바쳐서 인육과 양고기를 썰었다.) 그는 최후에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해내는 숨어있는 영웅으로 탄생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那口?은 비록 지위는 낮지만 인정만은 깊었는데,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줄곧 ?琳이 스코틀랜드 선원이었던 阿德(王敏德연기)를 찾는 것을 도와주고, 최후에 ?琳을 구하는 것을 결국 그가 된다.

야만인들의 세력에 대해서는, 북방에서 와서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한족의 권력과 같지 못하고 또한 북방오랑캐라고 폄하 당하는데, 비록 외국인의 정취가 있으면서도 또한 중국과 관계가 있다.

《天涯海角》는 틀림없이 사람을 찾는 내용의 이야기이지만, 이 사람은 실제로 매우 상징성이 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번에 그것은 식민지 문화의 미련과 상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冠中는 중국문화를 분석하던중 누누이 본토가 혼혈 문화의 존귀함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半唐番城市??》에서 그가 언급하기를 : 「나는 일찍이 분명한 이치와 도리, 나의 중심과 원천에 대해서 추구한 적이 있다. 파농이 언급한 식민지 인재와 같다면, 우리문화가 상상하는 수도는 아마 서유럽이나 미국에 있을 것이다. ....... 20년 후에 나는 혼혈인이 홍콩에 있게 된 성과를 시인했다. 나는 결국에야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 곳이 바로 발원지이며, 단지 나의 정신만 소멸되지 않는다면 모두 어렵지 않게 홍콩을 받치고 있는 풍부한 혼혈잡종문화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곧 스스로 체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王敏德는 원래 혼혈인이다. 그는 항상 미국 액센트의 발음을 하지만 연출자는 끊임없이 그가 스코틀랜드 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현실성이 있으면서도 또한 가상의 요소를 가진 중국과 영국 혼혈인으로서의 그는, ‘97년’ 식민지 인재가 바라는 상상속의 또한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琳이 那口?에게 그녀를 대신해 잃어버린 희망을 찾아오도록 했지만, 이 희망은 阿德에게서만 실현 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남녀의 사랑은 억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근본을 찾는 확인을 포함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근본은 식민지 시대에 잠시 빌려온 것이 아니라, 소속감으로서 성립된 홍콩본토의 의식인 것이다. 이 희망은 비록 모호한 면이 있다 할지라도(?琳이 那口?의 사무실에서 ?小春이 연기한 아내를 찾는 남자인 朱仔坦에게 그녀도 사실은 무엇을 찾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것을 진실로 원했다. 혼혈 문화가 귀속된 후에는 부득이 하게 변화했는데, ‘근본을 찾는 것’ 은 스코틀랜드 고지까지 찾아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 하늘가 바다 끝 의 풍경을 보게 되지만, 결말에는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琳은 마지막에야 비로소 찾던 것이 바로 홍콩이고, 바로 홍콩의 那口?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那口?은 혼혈은 아니지만 혼혈인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이민족에 속한다고도, 중국인에 속한다고도 말할수 없기 대문이다. 그는 실제로는 혼혈인의 발전된 모습인 것이다. 那口?은 과거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이고, 미래일 수도 있다. 원본 책이 출간되어 있지만,李志毅는 아직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중들은 那口?의 노력이 결국에는 성공을 거뒀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당연히 우리는 李志毅의 친근한 전우 ?可辛의 새 작품 《三更之回家》,《金?》를 참고할수 있다.) 그러나, 李志毅의 마음속에 식민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본토로 귀속되는 것 모두 홍콩 사람들의 불치병을 치료할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天涯海角》는 의심할 여지 없는 불치병에 관한 영화이다. 그리고 이 불치병은 또한 매우 상징성이 있는데, 어떠한 사람도 모두 그것이 홍콩사람들이 대위기에 임박다는 비극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비극은 더 이상 간단한 재난이나 붕괴하여 흩어지는 등의 공포가 투사된 것 만이 아니라, 더 이상 《新??客?》, 《和平?店》 처럼이 아니라, 전 성에서의 예언이 불러온 위기의 분위기인 것이다. 혈액암을 앓고 있는 ?琳은 물론 죽음이라는 위협에 직면하게 되지만, 슬픔과 고통은 오히려 사망에서 오는게 아니라 사망하기 전에, 그녀가 여전히 실패한 인생이었다는 것과, 그녀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원본에서 는 ?毫가 연기한 남자친구가 잇는데, 그녀의 병실에서 위로의 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전화통화를 한다.), 생활에의 희망이나 열정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큰 위기에 직면한 각각의 홍콩사람들의 조상을 ?家?의 이기적임과는 다르게,李志毅는 클라이막스에서 은밀하게 홍콩사람들에게 비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이 공허하고 살아야할 이유에 의문을 가지고, 살아있지만 마치 죽은 것 같은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은 ‘병자’인 것이다.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안 초기에, ?琳은 마술을 할수 있는 사람을 알기를 원했는데, 그의 병을 없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마술사는 처음 시작할 당시는 阿德로 나타나는데 그는 그녀를 위해서 전해 내려오는 환상을 알려 준다. 阿德가 실종된 이후에 마술사는 바로 那口?이 되는데, 그녀는 그가 어린 꼬마아가씨를 위해 빨간부리오리를 찾아주는 것을 보고, 장미 화원에(이것 또한 홍콩을 상징한다.) 꽃을 피게 하는 ‘기적’을 본다. 그렇지만 잔혹한 현실의 폭로 앞에서 사람들은 더욱 자신이 무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어찌할 바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옛날의 홍콩을 상징하는 거리에서, ?琳은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마술이란 것이 없으며, 마술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중에 그녀는 스코틀랜드로 가고 돌아와 那口?과 결혼을 한다. 최후에 그녀 자신의 장례식 상에서 명백히 관중을 향해서 사실은 우리의 ‘곁에있는 하나하나가 모두 마술이며, 모든 사람이 다 마술사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상상이기 때문에, 부정되지만 새로이 긍정된다. 홍콩의 아름다움과 비애감은 일종의 마술이며 또한 마술이 아니며, 최후에는 모든 것이 일종의 마술이다. -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하늘가 바다끝은 세상의 가장자리이다. 李志毅의 하늘가 바다끝은 물론 곤궁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를 상징하지만 사람들이 그곳에가서 보는 것은 난류 즉, 희망이다. 마침 《天涯海角》의 중간 부분에서 ?冠杰가 부르는 옛 노래 《何??蓬?》에서 잘 보여준다. ‘마음의 소리가 봉래로 향하고, 몸도 봉래로 향하고 싶어, 고개를 들어 봉래가 있는 곳을 보니, 마치 눈에 덮혀 있는 듯 하고....... 비로소 원래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미 마음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봉래를 그리워 하지않는다. 봉래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那口?의 사랑과 홍콩의 사랑) ?琳으로 하여금 고향을 지키게 하였고, 고향에서 생을 마칠수 있게 하였다. 홍콩은 더 이상 용문객잔이나 화평반점이 아니라, 적절히 말하자면, 그 여관과 호텔을 뛰어넘는 것으로, 그것들을 바꿔놓았다. 이곳, 하늘가 바다끝은 중요한 지역 혹은 배역을 맡았는데, 王家?가 《春光乍泄》중에 사용한 세계 말기 현상과는 크게 다르다. 그것은 李志毅의 ‘97년 선언’ 에 대한 깊은 심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하여, 李志毅은 ?琳과 那口?이 딸을 낳고나서야 비로소 죽는 것으로 안배해 놓았는데, 흔히 사용되는 ‘희망은 다음세대로’라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상투적인 수법이라면 상투적인 수법이지만, 이치에 맞으면 저절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天涯海角》의 불치병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결론이 없는 시작이라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2. 기억상실 놀이


 (1) 진실한 실체를 회복함으로써 기억을 잃는다 - 《???之西域雄?》


《???之西域雄?》(1997)

제작 ; 徐克

감독 ; 洪金?

배우 ; 李?杰,?之琳,莫少?


기억은 그 자체로 역사이므로, 어떤 사람의 역사는 그나 그녀의 기억에 달려있다. 어떤 사람이 기억을 잃는다면 그는 병자로 취급되곤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잃었을 분 아니라, 역사가 또한 그나 그녀의 신분과 주체성을 구성하기 때문에 이리하여 그들은 동시에 자신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 어떤 의미상에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97년’전후의 홍콩에서는 홍콩인 스스로의 문화풍조를 찾고 건립하는 풍조가 세차게 일어났다. 식민통치 이후의 문화에 대해 예견한 평론이 비온 후에 새순이 돋듯 출현했다. 잃어버린 홍콩의 주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압력하에서 모든 사람들은 급하게 자신의 기억을 찾고 스스로의 역사를 건립하여, 대중원을 통괄해서 지배하는 변경 문화와 대립하기를 확실히 하였고 본토로 귀환된 이후에 생길수도 있는 문화의 동화와 멸망에 맞섰는데, 실제로는 스스로 자지자신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之西域雄?》안의 황비홍사부 또한 한번의 신분을 잃을 뻔한 위기에 놓인다. 이야기에서 그는 제자 牙擦?(??邦연기)의 요청에 따라 ?芝林이 가게를 여는 금산에 가지만 오히려 기차를 탔을 대 인디안 들에게 기습당하였고, 혼란중에 十三姨(?之琳연기)등의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고 게다가 기억까지 잃게 되어 인디안들과 일정기간 같이 생활하게 된다. 후에 신분을 회복했을때, 오히려 백인들에게 노상강도로 모함당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못할 뻔 했으나 위기의 순간에 인디안들이 나타나 구해주고 결국에는 간사한 이들을 굴복시키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영화는 1997년에 개봉되었으며 李?杰이 다시 연기한 이 홍콩인을 대표하는 90년대 영웅형상의 배역은,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徐克이 연출한 황비홍 영화(1991)에서부터 2편 《男??自强》(1992),3편《?王??》(1992)에 이르기까지 李?杰은 줄곧 이 민족의 존엄과 권리의지를 주체적으로 보여주는 대영웅을 연기했다. 제 4편 《王者之?》(1993)과 제 5편 《?城??》(1994)이 시작되면서 ?文卓가 대신하여 출연하였고 十三姨가 十四姨(王??연기)로 바뀌었다. 《西域雄?》의 1년 전에는 상하편으로 나누어 《???之理想年代》(1996)가 나왔는데 주연이 바로 ?文卓였다. 李?杰은 이 황비홍이 기억을 잃는 영화에 다시 출현하게 되는데 거의 진정한 실체를 회복하면서 기억을 잃는 모습을 보여준다.

90년대 초기에, 徐克은 李?杰으로 황비홍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고, 홍콩영화문화권에 크고 작은 자극을 가져와,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마치 바람과 같이 계속해서 반풍자적 작품을 야기시켰고, 문화평론도 계속해서 분석하고 서술하게 하는 등, 그 반응은 매우 활발했다. 《???笑?》(1992, 李力持연출,??麟,梁家?,曾志玲주연)과 《???????》(1993,李力持연출, ??麟,?裕玲주연 )이 대나한사부의 형상을 웃기게 풀어내면서 각성 혹은 우상파괴의 일을 할 때에, 사람들을 대체로 모두 홍콩사람들의 빠른 반응과 촉각의 예민함에 놀라고 감탄했다. 이는 단기간 내에 ‘황비홍현상’의 복잡하면서도 다원화된 발전가능성을 증가시키면서도 ‘황비홍’을 의심할 여지없이 홍콩문화창조와 분석의 풍운아로 보는 것을 한층 더 보여주었다.

徐克판 황비홍의 생명력은 바로 그가 옛 것에 얽매이지 않고, 대영웅의 이미지를 젊게 만들면서도 중국과 서양문화의 조화속에서 이상의 순진함과 사내아이같은 수줍음을 유지시켰고, 게다가 李?杰의 평범하지 않은 재능과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무술, 가장 중요한 것은 ‘97년후’ 대의가치가 신임을 받지 못하지만 기대의 여지는 있을 것이라는 모순된 감정과 상응했기 때문이다. 전통화를 아름다우면서도 복잡한 반 사상적 대상으로 승화시켰다. 十三姨의 영화촬영기는 현대화의 강림을 보여주며, 洋?의 지독함은 영웅 황비홍조차도 확실히 저항할 수 없었다.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 그는 단지 아름답고 ‘무적’인 拳脚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끊임없이 초조해 하고 스스로 강해지기를 인정해야 했다. 《?王??》중 광동회관 내의 사자머리는 일찍이 선배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후에 人??에 의해 부서졌지만, 후세 사람들은 여전히 버리기를 아까워하였다. ?麒英과 十三姨가 ?往?을 도망쳐 나올때 불에 타버린 사자머리가 흔들흔들하며 곧 무너질 것 같았는데, 마치 우리의 대미인을 다치게 한 것 같았다. 전통무술이 비록 높이 인정받게 되었으나 徐克은 어떠한 평형점을 찾기를 계속 갈구했다.

'황비홍현상'에 있어서의 ‘영웅’과 ‘반영웅’현상에 관하여 홍콩 특유의 문화환경이 대체로 관련되어 있다는 분석이 확실히 많지만, 여기서 다시 연급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 모든 사람이 활발히 창조하고 또 창조하고, 평론하고 또 평론하는 문화분위기 중에서 실제로 이미 ?德?과 황비홍이라는 이름(이미 더 이상 역사상의 황비홍과는 큰 관련이 없는), 李?杰, 중국무술(‘虎??形’,‘无影脚’등의 으뜸으로 불리는것의 대표적인 예 ), 광동어로 된 장편영화와 徐克식 무술영화가 결합하여 홍콩인들의 90년대 영웅관념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 영웅은 스스로 반영웅, 비영웅의 대립을 만들어 냈고, 진정한 모습과 변한모습간의 대립을 출현시켰다.

李?杰의 소위 말하는 황비홍의 진정한 모습은, 결국은 서극판의 진정한 모습일 뿐인것이다. 누가 황비홍의 최후의 진정한 모습을 말할 수 있는가? ?德?? 成?(80년대 해석판의 황비홍)? 당연히 ?文卓, ??麟,?裕玲은 아니겠지? 그렇다. 그들은 모두가 연기자이지만 우리가 관심있는 것은 그들이 연기했던 배경과 이 배역이 상징하는 의미이다. 《???????》의 후에 ‘모든사람은 다 황비홍이 될 수 있다’는 의식이 기본적으로집중된 의식의국면에 떠올랐다.

기억을 잃은 후의 황비홍은, 모두가 보는 것은 李?杰이었지만 실제로 그는 변한모습일 뿐이다. 황비홍에서 단지 ‘鴻’ 글자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객체가 된다.(기억을 상실한자는 스스로 이 ‘황비’라 불리는 무리를 찾아야 한다고 여긴다) 홍콩인이 진정한 신분을 잃고 또한 외부세계로 떨어지게 된 것은, 작가가 홍콩인이 ‘97년 이후’ 스스로 실의에 빠져 맥이 풀린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변화된 모습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객체는 결국에는 돌아가게 되있고, 다시 주체와 일체가 될 수 있다. 진실한 실체는 우리가 포옹할 수 있으며 일단 기억을 회복하기만 하면 바로 황사부의 초인적인 용기를 회복할 수 있으며, 가뿐하게 적을 섬멸할 수 있다. 게다가 한번 솜씨를 보이면 타국에도 널리 알려져서 나라와 민족을 널리 떨쳐 일으킨다. 진실한 실체 현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잃었는지 일깨워준다. 영화 속에서 계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메시지와 대단원의 결말이 이야기해 주듯이, 기억을 잃은자는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어떤이가 그의 진정한 신분을 눈치채고 또한 이 신분이 바로 기억상실을 깨닫게 해서 회복되는 이러한 과정은 더욱 견고하다. 영화는 사람들이 무엇을 잃었고, 이 잃은 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영웅의 면모를 회복함으로서, 나를 회복함으로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김현정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200101218 김현정
옮김

?天,《后九七?香港?影》,(香港:香港?影????,2003),pp.71-93.

 

  (2) 모체로의 반환 - 《我是?》와 《幻影特攻》


《我是?》(1998)

 제작:董??

 감독:成?

 배우:成?, 法拉美穗, 山本未?


《幻影特工》

 제작:??康

 감독:?志良

 배우:?伊健, ?慧琳, ?小春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짝이 있다, 成?의 《我是?》는 기억을 잃은 CIA 요원 ?奇(成?역)도 원주민 부락에 와서는 《???西域雄? 》 에서의 ???과 인디언 촌에 낙오된 것은 모두 위대한 영웅이 기억을 잃어버리고 ‘문명이 낙후된 지역’(혹은 변방지역)에서 휴식하고, 미친 듯이 자신에게 ‘Who am I’라 묻는다. 토착민의 귀에는 그가 ‘Who am I’라 외치는 것은 ?迪修斯(오디세우스, Oddyseus) 가 외눈거인의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했던 것처럼 거인은 바로 그를 ‘사람이 아니라’여겼던 것이다.

《我是?》를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 속에 ?奇가 작은 언덕의 꼭대기에 올라 두 발을 한 데 모으고 두 팔은 활짝 펴고서 크게 ‘Who am I’라 외치던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장면은 감독이 공중회전 카메라를 사용하여 천지의 거대함과 몸 둘 곳 없는 자의 고독함을 표현해 내었다. 본래의 각도로 바꾸면 신분이 없는, 곧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확실히 감독의 마음속에는 신분이 없고 사람들이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마음을 졸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영화 속에 ?奇는 마치 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미로속의 아이 같다. 그는 서둘러 기억을 되찾으려 애쓰고 극도로 농후한 아버지를 찾는 잠재의식을 감추어 버렸다. (CIA의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어머니라고 느끼게 하기는 어렵다. 또한 영화 속에는 환경보호에 관한 많은 정보가 있다. ?奇는 결국에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함을 밝히는데, 영화는 또한 어머니 대지로 회귀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원래 기억을 회복하지 않은 것이 더 자유로운 것 같다. 그러나 영화에는 이에 대해 많은 설명이나 언급이 없고, 감독은 마치 그것이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

같은 해 상영된 《幻影特攻》도 마찬가지로 CIA란 요소를 다루었다. 주연들(?伊健, ?小春, ?慧琳 이 연기한)은 CIA 연구원이며, 가상현실에서의 전투 훈련을 연구 개발한다. 3명은 함께 홍콩의 고아원에서 자랐고, 방치된 고아원에 돌아와 옛 일을 회고하는데, 명백한 것은 전조를 그리워하는 애수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기억을 상실한 사람은Tango(?伊健역)이지만, 그는 CIA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주동적으로 얼굴을 씻은 사람이다. 2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의 얽힘은 물론 사랑에 관한 것이지만, 97년 기억상실 놀이의 틀 속에 두면 그는 정말 ‘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은 또 실패했던 것이다. 기억을 던져버린 것은 그를 새 사람이 되게 하지는 못했다.

《我是?》의 영웅은 곤경에 빠져 비록 신분은 없지만 여전히 세상에 내세울 만한 능력에 의지할 수 있다 치자. 그래도 어떻게 부친이 없을 수 있는가? ?奇의 미국국적의 신분 때문에 그의 부친은 결국 미국, 중국, 또는 홍콩 등 대개 확정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동질감을 구하는 마음은 오히려 세상을 다 덮어버린다. 기억을 회복하는 장면은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奇의 기억은 아마도 평생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동질감으로 통하는 수단이나 절차이기 때문에 단지 ?奇가 결국 그를 안심시키는 동질감을 얻어야만(아프리카의 원주민, CIA에서부터 생겨나는), 기억을 회복하는 것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幻影特攻》은 반대로 그렇지가 않아서 기억상실은 Tango를 현실에 직면해 잘 갈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게 하고 아픔을 잊어버리게 한 연후에 새 사람이 되게 한다. 양자 모두 모체로 회귀하지만 ?奇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 하고 그 속에는 그를 안전하게 하는 위치가 있다. 하지만 Tango는 무의식속에 피해 잠시라도 비바람을 막는 것을 모색한다. 할지라도 . 기억상실은 한 변이된 틈을 열어주었고 기억을 회복하려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97년의 다른 태도에 대해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幻影特攻》의 홍콩식 특기는 이 영화가 사람들이 꾸짖는 부분 중 하나인데 개봉 시에 많은 평론이 모두 그것에 대해 단지 사랑에 대해 쓴 것에 지나지 않으나 ‘고도의 과학기술’을 사용해 스스로 드러낸 단점을 포장하려 한 것을 우매하다고 간주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치는 그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실패/실소의 허구보다 더 진실일 수 있는가? ‘50년 불변’의 미래의 약속, 아름다운 홍콩 전경 모습, 부모님이 있는 새 가정의 동경은 모두 가상현실인 것이다. 너는 유일한 진실은 사랑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나는 기억상실이 되는 것이 낫겠다. 새 사람이 되는 것은 가상현실에 투입되는 것을 의미하고 VR 효과는 관중을 투입하거나 믿게 하지는 못한다. 바로 ‘새 사람이 되는’것과 마찬가지로 믿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기억을 회복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기억상실만이 새 사람이 되게하는 것인가? 기억/기억상실 놀이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억을 회복한 나는 이전의 나인가? 기억을 회복하지 못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는가? 《我是?》의 ‘희극’적 결말과 《幻影特攻》의 ‘비극’적 결말은 결코 놀이의 끝이 아니다. 나는 도리어 그것들이 꼭 맞게 서로를 보충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 잃고 다시 기억할 수 없는 것은 비록 명백히 되찾고 싶다 할지라도 잃었으나 잃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히 기억하고 싶지 않을 지라도 사전에 예측하지 못했던 ‘출구’는 보이는 듯 하면서도 숨겨져 있고, 양자는 우연히도 일치하여 결국은 모두 ‘1997년 이후’의 상황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3) 심리치료 - 《?狼??》와 《去年烟花特?多》


《?狼??》(1997)

제작:彭玉琳

감독:?江?

배우:李若?, ?子?, 甄子丹, 梁?文


《去年烟花特?多》

제작:?德?

감독:??

배우:荷?超,李?森,谷租琳


병리심리학( abnormal psychology )에서 기억상실은 어떤 심리 보호기제가 주체가 상처나 타격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완정함에 해를 끼치는 것을 피하고 정신건강을 보장하여 기억상실이 도피방법이 되어 문학과 영화 원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1997년 이전’의 기억의 문제는 부분적으로 1989년 민중운동의 상처에서 온 것이다. 기억상실로 상처를 받는 것을 피하는 것은 당사자가 변할(중국으로 돌아갈) 방도가 없는 운명임을 쉽게 받아들이게 한다. 하지만 이것이 기왕 병인 이상 미래의 실제 생활을 위해 기억상실자는 부득불 기억을 회복해야 하고 무서운 꿈을 꾸게 하여 의식 층에 들어가게 한다. 상황은 바로 심리 분석과 같은 치료여서, 무의식까지 억압당한 마음을 의식으로 보낼 수 있게 하여 신경관에 잠재되어있는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 원기를 회복하게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에 일부 홍콩 사람들에 대해 발하자면, 기억상실의 의미는 과거를 잊고 새것을 받아들이는데 있다. 그렇다면, 다른 썩 달갑지 않은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기억을 회복한 후에 과거를 참고 견뎌 내야만 진정으로 오고가는 마음의 맺힌 것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준비를 잘 했다고 할 수 있다.

《?狼??》의 ?狼(甄子丹역)은 죄책감을 짊어지고(두목을 죽임), 기억을 잃어버렸고 新人(梁?文역)의 추적 하에 그가 영웅임이 드러나니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탄식한다.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것은, 영화 속에서 적막한 슬픈 감정은 1997년 이후에 대한 선입견임인 것과, 처음으로 돌아와 ‘97년 전’과 ‘1989년 이후’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狼은 고향으로 되돌아와 기억을 회복하려 했고 큰 용기를 품었고 사람이 진실을 믿는데서 진실을 포용하는 데까지의 결심을 표현해 냈다. 하지만 기괴한 것은 ?狼이 정말 기억을 회복했는지 관중은 사실 확정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각종 과거와 관련된 것들이 재현되는 것은 어쩌면 기억의 단편이 다시 떠오른 것일지도 모르고 더욱이 다른 사람(부두목)이 제공한 것과 같은 것은 허와 실 상호간에 끼여진 판본을 피할 수 없다. 진실은 설명 중에 드러나는데 이 때문에 모든 진실은 왜곡된 ‘진실’이고 설사 정말로 기억을 ‘회복’한다 해도 자신의 기억이 언제 겹겹의 왜곡이 아니었던 적이 있는가? 선택을 경험한 후에 저장해 둔 것이 아닌가? 사건이 발생하고, 증발해버리고, 무로 돌아오고, 남은 것은 단지 왜곡이고 하나에서 여럿까지의 재현을 막을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을 ‘회복’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기만의 시작이고, 다른 심리 보호 제의 시동이다.

《?狼??》는 한 편의 영웅 중심의 영화이지만 그 중에 영웅의 이미지는 《???之西域雄?》의 ???과 사실 함께 논할 수 없는 것이다. 徐克판 ???은 만인이 앙모하고 전통 민족 존엄과 홍콩 본위 의식과 결합하였다. 비록 약점이 있다 해도 그런 약점들은 오히려 그의 인성을 강화시켜 줄 뿐이다. 하지만 徐克의 많은 작품 속에서 악역을 맡은 甄子丹은 자신이 만들어낸 ?狼이 비록 한 전력과 형상과 풍격으로 세워낸 숭배대상일 뿐이다. 그의 전통 무인 도덕관은 사람들을 ?家良을 생각나게 하지만, 그 중에 덕과 힘의 평형은 오히려 추상적인 것과는 멀다. 까놓고 말하면, ?狼은 단지 세상에 남겨지고 또 세상에 버려진 또 다른 고아에 불과하다. 그도 《幻影特攻》의 Tango와 같을 수 없다. 그는 더욱 ‘진실’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天煞孤星의 자기연민이 있기에 기억을 회복하는 것을 자신이 저녁놀 희미한 색채를 닦아버린 것으로 삼고 영웅적 기개를 자신이 세운 비석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狼??》는 완전히 한 편의 자신이 곤경에 빠진 영화로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런 종류의 곤경에 빠지고 또 일찍이 할 수 없었던 것은 일종의 치료이며, 마치 최면과 같이, 어떤 심리 치료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果가 찍은 《去年烟花特?多》를 보았을 때, 이면에 계속 흘러나오는 히스테리는 치료과정 중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결국은 영화가 버려둔 것은 단지 하나의 狼이 아니라 5명의 중국인 영국군이다. 일은 이렇게나 복잡하다.

?果는 근본적으로 부호나 우언으로 그의 97년 이야기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97년 3편의 시나리오’의 제 2편 (남은 두 편은 아마도 다음 한 절에 상론할 것이다) 《去年烟花特?多》에서 반은 실제사건의 보도 방식을 채택하였고, 주인공의 신분과 상황은 물론 진실이다. 1997년 그 해에 또 확실히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총 6차례 있었다) 영화 중에 어떤 장면(??大? 옆에서 해방군이 입성하는 것을 보는 것 같은)은 더욱 실제 상황의 기록 부분이다. 중국국적 영국군의 위기는 홍콩만 가진 것이었지만, 영화 전체에 가득한 분노(5명의 늙은이 냄새가 나는 퇴역 영국군이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중지를 하늘로 향해 보인다. 개봉한 후 120분의 정서의 폭격을 열어주었다)는 오히려 더욱 보편적인 기초가 있다 - 인격 성장 과정의 중년의 위기로 간주하든지, 혹은 버려지고 자기 보호 반응으로 보던지 - 《去年烟花特?多》은 사실 더욱 훌륭한 병리심리학의 교재를 제공해 주었다.

영화 속에 阿珍(谷祖琳역)은 지하세계의 대부다. 마음속의 아픔이 자신을 방종하게 한다. 영국의 대모가 돌아와 그녀를 데리고 갔다가 과도기 후에 돌아와 도시의 대학에 입학하고 老?와 화해를 했다. 다시 만난 남자 주인공 家?(何?超 역)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예전과는 달라(아주 생동적으로 설명하면서). 家?은 동생 家?의 조직에 가입하여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은행털이 계획에 말려들었는데 돈을 가져오는 것이 모두들 조금도 후회가 없고 잃어버렸던 물건을 되찾아오는 것에 불과한 것이 많았다.(심리 태도는 《高度戒?》의 ?坤과 같다, 다음 장에서 논하겠다) 길을 잃어버린 家?은 거울 앞에서 크게 ‘나는 누구인가’ 외치고는 거울을 부숴서 얼굴이 갈라져 보이게 하였다.(《我是?》보다 더 我是?하다) 家?는 의협심을 이야기하며 동지들을 모아 죽은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겠다고 한다. 하지만 옛날의 형제들은 오히려 그에게 말한다. ‘시대는 변했어, 나도 변했지. 두목이 나를 초청했는데 널 초청하지 않은 것만 봐도 너는 반성해야해.’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이 구절이 떠올랐다. ‘너는 영웅이 되고 싶은가?’(사람들에게 《?狼??》에서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간주되었던 전통 영웅관을 떠올리게 한다)

시대의 변화와 무거운 압력, 각종 불만에 직면해서 《去年烟花特?多》는 최고로 ‘지혜’를 갖춘 자가 결국은 그 늙은이의 士기사가 될 수 있다. ‘불초’한 젊은 여성(?果는 홍콩의 새 세대의 젊은이들을 결코 신임하지 않았다, 다음 장에서 논하겠다)은 생리대를 그의 차에 남겨두었고 그는 줄곧 그녀들이 교훈으로 준 것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家?이 훔친 돈을 가지고 달아나자 家?은 마음이 불타듯이 조마조마해서 그를 찾아 이 士기사의 차를 탔을 때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돌아온 大典(세차게 내리는 폭우 속에서)을 만나고, 교통이 복잡해지자 老人家가 家?에게 ‘훈시’를 한다. ‘나를 좀 배워, 나는 이제껏 포기한 적이 없어’ 마지막에는 (1년 후) 그는 과연 ‘진짜 흉악한 놈’을 찾았고 그녀를 향해 휴지를 던지며 이전 것을 설욕했다.

5명의 중국인 영국군 고아는 한명은 지하세계의 청년이고 최후의 한 명은 살해당하고 두 명은 실종되고 한명은 ‘기억상실’에 빠지며 두 명은 뜻을 잃고 의기소침해진다. 이 ?果식의 고아 구조는 기본적으로 《香港制造》의 부친을 읽은 젊은이 무리와 같다. ‘97’년 이것과의 관계는 모두 원래 지날 수 없는 것이었다. 변질되고 좋지 않게 변하고 싶지 않으면 유일한 길은 죽는 것이다(게다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는 젊은이를 미혹시키는 수중에서 죽는 것이다, 만약 젊은이가 미래를 대표한다면 홍콩은 어떤 미래가 있겠는가? ?果의 눈 속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 죽지 못하면 기억을 상실해 버린다. 家?은 총에 맞은 후 阿珍조차 알아보지 못했고 성실히 물건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정말 기억을 잃은 것인가?

영화의 최후의 한 장면은 阿珍의 부친이 딸에게 묻는 장면이다 ‘홍콩의 거리가 얼마나 깨끗하다고 생각하느냐?’ 阿珍을 알아보지 못하는 家?은 士기사가 성공적으로 여학생에게 교훈을 한 후에 얼굴에 웃음을 띠며 그는 본래 기억을 잃지 않았었다고 말하는 것을 목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위장이 아니며 기억할 수 있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기억상실 후의 무형의 자기 배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도 과거의 짐을 놓을 수 없어 압력이 쌓여진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평형의 예술은 士기사의 ‘견지’와 결합하여 원래는 홍콩의 변화(깨끗해진 것)에 직면해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果은 명백히 지금까지 ‘50년 불변’을 믿지 않았다) ?果이 관중에게 보내는 ‘충고’이며 또한 자신에게 보내는 치료이다. 실의 정서는 비록 영화 끝에서야 비로소 출현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기억상실 영화’중에 가장 복잡한 ‘기억상실’한 하나다.

그러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之西域雄?》의 기억상실은 기억을 회복하고자 하나 잃어버린 것이고 최후에는 홍콩 주체의식을 회복해 미래를 맞아들인다.

《我是?》의 기억상실의 의미는 동질감을 찾는 것을 표현하는데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걱정 없이 생활하는 것이고 기억을 회복하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幻影特攻》의 기억상실은 상처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잃었으나 잃은 것이 아니고 운명의 비정함을 극복하는 것이 어렵고 과거와 미래는 모두 가상현실 속에 녹아 들어감을 표현하였다.

《?狼??》의 기억상실도 본래 상처에서 도피하는 것이지만 기억을 회복하는 것은 상처의 극복과 초월에 직면해야 하고 앞의 길이 어떠했든 간에 진짜 인생으로 돌아가기를 구하는 것이다.

《去年烟花特?多》의 기억상실은 오히려 허 속의 실이고 실속에 허가 있는 기억상실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 본래의 방향 맞이할 것을 지시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억상실 놀이는 확실히 다양한 방법이 있고 다채롭다. 바로 몇 년 후의 《?度空?》의 출현으로 직행하면 이 놀이는 또 새로운 시사점이 있다.

 

(4)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度空?》


《?度空?》(2002)

 제작: ?冬升

 감독: ?志良

 배우: ???,林嘉欣,潘美琪, 徐少强


《?狼??》을 《去年烟花特?多》와 비교하면, 마찬가지로 기억상실 정서를 구비한 《?度空?》은 마치 더욱 한편의 심리 치료 영화같이 다가오는 것 같다. 영화 안과 밖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치료와 관련이 있으며 한 개인의 심령의 상처의 치료와 관련이 있고 또한 홍콩 사람 집단의 심령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과정은 당연히 영화 제작 시에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표면상으로 《?度空?》은 괴이한 영화다, 전반부에는 공포의 외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후반부에는 오히려 귀신 영화로 변한다. 양자를 서로 포함하여 촬영했다. (마음의 공포를 귀신으로 해석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지만, 귀신이 공포 요소를 포함하게 하는 것이 더 쉽다.), 또한 설명에서, 그것은 또한 자신의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치료 과정이라 할 수도 있다.

처음에 《?度空?》을 보았을 때 계속 생각했다. 이것은 《?脂?》(1987,??감독, ???, 梅 ? 芳 주연)의 심리 공포판이 될 수 있을까? 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동시에 남의 심정을 자신과 공감하게 하는(transference) 이야기는 귀신이 얽힌 동급의 원본을 완전히 덮어서 관중들은 十二小(《?脂?》의 남자 주인공, ???역)을 현대판 阿占(마찬가지로 ???이 연기한)으로, 어떻게 《天使追魂(Angel's Heart)》(1987) 식의 심리 보호 기제를 사용하는지, 小?(花?판, 潘文琪역)를 심령의 암각 속에 가두었는지, ???감독이 가볍게 사랑을 내버리는 기제를 사용했는지 견문을 넓히게 된다. 이 때는 다른 애인(万梓良과 朱?意 역)에 대해 옛일을 들추어 낼 필요는 없고, 十二小 자신이 새 유혹자 ?昕(林嘉欣 역, 그녀의 《男人四十》에서의 배역은 작품은 다르지만 교묘한 솜씨는 똑같다)의 테스트를 받아들인다. 각종 공포감과 죄책감을 끌어내어 새로 작품을 쓰고 대한다. 끝으로 그는 더 이상 귀신에 홀리지 않고 속죄함을 얻는다. 도덕의 천칭은 평형을 회복한다.

환자의 심경 변화는 줄곧 심리 의사들의 악몽이었다. 영화에서 여 환자 ?昕는 심리 치료 중에 환자가 얼마나 의사에게 의지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보이고, 양자의 관계를 친밀한 위기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귀신의 야기’(모종의 바이러스라 볼 수 있는)의 전염과 전이에 대한 책임을 진다. 阿占은 그녀의 감정 문제를 짊어지고 그녀를 다 ‘치료’하지만 체내에서 기회를 엿보아 움직이는 마귀가 나타나 그를 사로잡아버린다. 어떤 의미상에서는 ?昕는 근본적으로도 小?의 환생이며 꽃과 같으며 게다가 ?子(《牛夜凶?》,1997)이며, 원한을 지니고 있지만 여전히 집착을 없애는 주관적인 가능성이 있다. 이것 때문에 영화에서 앞부분의 뇌리에 번쩍 떠오르는 장면은 관중을 결국 阿占이고 또한 ?昕의 마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분간할 수 없게 하는데 걱정 외에 결코 다른 이유는 없다. 결국 그녀가 대표하는 小?은 阿占을 옥상 가에서 끌어내리고 그녀가 비로소 진정으로 영웅이고 구세주임을 드러내 보인다. 바로 《?脂?》 와 같이 관용으로 일체의 죄책감을 씻어내 버리고 귀신, 혹은 마귀는 서로 눈물어린 눈에 스며들어 나온다.

만약에 영화가 97년 기억상실 놀이의 틀의 고려 속에 놓여졌다면 관중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억상실과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이미 새로운 깨달음의 희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阿占은 겉으로는 강해 보이나 속은 텅 비었으며 앞은 강하나 뒤는 약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데에서 급히 다른 사람이 구원하는 것을 기다리는 데까지, 홍콩 사람들이 과도 전후의 사조와 같지 않은가? 《去年烟花特?多》가 사전에 남겨준 ‘견지’(사실 농후한 부권 교훈이나 지도 의식이 있다)는 철저히 실패해버리고 다만 사람들에게 실소를 제공할 뿐이다.

그렇다, 《?度空?》이 모두에게 지시하는 것은 관용하고, 용서하라는 것.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것도 한계가 있다. 만약에 상황이 계속 악해져만 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아름답게 변해야 하나(林嘉欣이 상징하는 것?), 단지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영화 말미에 阿占은 여 귀신에게 끌려 옥상 끝으로 와서 눈물이 얼굴에 흘러내리고, 진심으로 참호하고 스스로 뛰어내리고 완전히 끝난다. 영화 중에 ?昕가 뛰어내리지만, 현실에서는 ???이 오히려..

2003년 4월 1일 홍콩 시장 상황은 전후로 두 가지 소식이 떠돌고 있었다. 하나는 홍콩관련 당국이 이미 홍콩을 SARS의 전염병 지역으로 선포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특별행정구 수장인 董建?와 재정국 국장인 梁?松이 SARS처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중앙에서 면직되고 행정장관으로 ??이, 정무국 국장으로 曾??이 직무를 인계받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소식은 시민들을 거대한 초대형 광장과 시장에 가서 앞 다투어 음식물과 일용품을 사도록 했고 얼마 후에 정부관원이 그런 일이 없다고 해명을 했을 때에야 이 날이 만우절임을 기억해냈다.

연후에 ???이 ?文? 주점 옥상의 가운데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시민들은 그것도 만우절의 짓궂은 장난이라 여겼을 때, 이번은 틀림이 없는 사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80,90년대 홍콩 문화의 중요 구성 부분이며 많은 홍콩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존재한 가수이며 영화배우인 톱스타가 왜 갑자기 자신의 생명을 끝낼 수 있는가? 비록 ???이 유서를 남겼지만 여전히 많은 억측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그가 《?度空?》에 출연한 전후에 귀신이 주는 재앙을 당했다는 것이다. 빌딩에서 뛰어내려 죽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되는 것이기에!

???의 죽음은 ‘97년 한참 뒤’의 홍콩에서 가장 큰 상징 의의가 나타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돌림병의 원인이 폭발과 어디도 갈 수 없는 느낌이 집단의 의식이 되었다. 게다가 죽음의 그림자가 사람들의 마음을 뒤덮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느꼈다. 도대체 홍콩은 정말 ‘끝장난’ 것인가? 라고 말이다.

원래 기억상실 놀이는 최후의 홍콩 사람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3. 그들은 이렇게 과도기를 겪었다

 

 (1) 작자선언

 

홍콩영화는‘97년 이전’ 죽음이 임박한 위태로운 성이었고 불치병의 분위기가 만연해있었고 기억상실 놀이가 도처에 있는 상황이었다. ‘97년 이후’의 과도기를 지나온 사람은 기억에 매달리고 시간을 질질 끄는 상태였고 다시 ‘97년 한참 후’의 먼지가 떨어질 때에 이르러 수년간 마치 이미 세상이 변한 듯 하늘과 땅을 뒤바꿔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97년 이전’과 ‘97년 이후’의 사이는 분명하고 명확한 경계선을 그을 수 없지만 ‘97년’이라는 부호의 뒤덮임 아래에서 작자론을 연구하는 홍콩 영화감독이 ‘97년’을 주제로 작품을 찍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작품에서 작품계열까지 이르면 대체로 이런 종류의 과도를 드러냈고 동시에 과도의 모호성을 표현해내었다.

林??의 《高度戒?》(1997)과 《目露凶光》(1999)는 ‘97년 이전’의 ?力와 압박감 및 ‘97년 한참 뒤’의 절망과 슬프고 처량함으로 구별해서 말할 수 있다. 두 편 사이에 林감독은 한 편의 ‘97년’과 무관한 《?度重犯》(1998)을 찍었고 ‘97년 이후’에는 마치 공백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려 하는 것 같다. 그러나 《目露凶光》는 엄격히 말하면 결코 완전히 일체의 이미 정해진 국면이 되어버린 ‘97년 한참 후’의 상징이라 할 수 없고 그것의 부정적 정서는 부분적으로 ‘97년 이전’의 나머지 실마리에서 왔고 부분적으로는 현실 사회의 마음 졸임이 증폭된 데서 온 것이다.

만약 ?大?처럼 지적한다면 과도 이후에 ‘97년 한참 후’의 홍콩 사회는 ‘97년 이전’의 예언이 들어맞았다. 1997년 직후의 홍콩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서 고루 곤경과 우울함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예측의 추론은 잘못된 추리 상에서 세워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홍콩 몰락의 요소는 결코 ‘간담자’가 말하던 중국 사회주의의 특색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전에 홍콩의 뛰어난 사회기제라 여긴 것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홍콩 사람들은 여태껏 香 ? 英와 본지 엘리트들이 다년간 건립한 사회 제도가 - 소위 효율, 이성, 개방을 강조하는-제도의 안배와 연결되어 결국은 이렇게 취약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환경과 인간사의 변화는 짧은 2-3년의 시간 내에 원래의 제도적 안배를 ‘바짝 말라버릴’ 수 있다. 우리는 민주화의 정치체제가 아직 완전하지 않다고 여겼고, 다년간의 전통과 계속된 공개유지 및 시민에게 해야 할 바를 다 한 것 때문에 누구도 1997년 직후 그것이 거대한 전환을 가져오게 될지 몰랐고 정부와 시민 사이의 관계는 70년대 이전의 식민지 봉쇄 관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일찍이 일방적인 바람으로 생각하기를 정치중립의 공무원 체제는 불완전한 민주화의 정치제도 속에 가장 권위적 관치를 제한하고 행정 이성적 사회 제도 요소를 유지하는 것이라 여겼기에 누구도 반환 이후 우리가 결국 고위 관리 무리가 공개적으로 특별행정구 수장이 좋은 말들을 하고 그의 영명함과 지도방향을 찬양하게 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1997년 이전 홍콩 시민이 가장 보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전환의 원인은 결코 중국사회주의 이 큰 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홍콩사회 자신이 남에게 좌지우지 되어서 이전의 생활 중에 표현된 의지를 잃었기 때문인 듯 하다.

나는 이런 ‘남에게 좌지우지 되고 이전 생활 중에 표현된 의지를 잃어버린’ 것은 부분적으로 ‘97년 이후’의 지체와 내막을 모르는 것과 공허 등에서 왔다. 하지만 더욱 관련 있는 것은 특별행정부의 활동과 관원의 능력과 태도가 막 방학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돌연히 깨우친 것이어서 이미 쏠 힘도 없고, 행할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상황은 바로 여덟 신선의 이야기 중에 李、?、拐처럼 으뜸인 신선이 밖으로 나가 바깥세상을 둘러보러 가니 가족들은 그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여 그의 시체를 불태워버리고 그가 돌아오니 이미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나이 많은 못생긴 절름발이에게 대신 들어간 것이다. 《目露凶光》은 사실 실제 신체를 상실한 외로운 넋의 참상은 아니며 귀신이 떠도는 것도 아니고(그중에 한 판본의 줄거리는 다음에 상론하겠다) 결코 머물 곳이 없는 것도 아니며 사람의 관점에서는 ‘사악함에 맞서는’ 것으로 보이고 영혼의 관점에서는 출입이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그래서 《目露凶光》의 비장하고 고통스러움은 단지 작자가 직관에 의지하거나 희극 효과의 필요에 의지한 것에 불과하며 당시의 마음 졸임을 방대하게 묘사한 것에 불과하여 결과적으로는 결국 의미가 있든 없든 모종의 예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비교해보면 杜琪峰의 《暗花》(1997)에서 《?火》(1999)를 찍기까지 관중은 비교적 분명하게 그 속의 과도를 보았다. 《暗花》의 《非常突然》(1998)의 ‘?尾香’, ‘一?熟’에서 《?火》의 각각의 인연, 삶에서의 도피이다. 그 사이에 또한 《?心英雄》(1998)과 《再?阿?》(1999, ?家? 시나리오 담당)같은 이런 의미 있는 작품들은 완전히 어떤 작자가 ‘97’년(의미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에 순응해서 기지의 노정을 펼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과 같이, ?果의 ‘97년 3부작’과 ‘기녀 3부작’(본서에서는 그 중에 두 편만 선택하였다) 또한 명백히 어떤 과도기를 보여준다. 《홍콩制造》(1997)과 《去年烟花特?多》(1998)에서는 ‘97년 이전’의 많은 근심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홍콩制造》의 젊은이들의 극도의 기쁨과 《去年烟花特?多》의 중년의 분노, 《?路祥》(1999)에서 나타나는 ‘뿌리를 찾는’ 것을 거쳐서 《榴???》(2000)까지, 결국 다시 어떤 북쪽 아녀자의 생애로 파생되어 나가고 아예 吉林에 가서 하반부를 다 찍어 버린다. 《홍콩有?荷里活》(2002)에서 크게 나부끼는 백기의 ‘走' 글자와, 정보는 더욱 인물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여, 마치 감독 자신이 홍콩 속으로 들어간 듯 하고, 여러 번 국제 영화제에서 신분과 지위의 현실적 호응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설령 杜, ? 두 감독의 작품이 변하고, 관중도 그 속에서 명확하게 어느 영화가 완전히 ‘97년 이전’에 속하고, 어느 것이 ‘97년 이후’에 속하는지 지적해내지 못한다. 두 요소는 물론 서로 관련이 있지만, 흥미 있는 것은 바로 표면상에 비교적 명백한 과도기적 변화가 있다는 것이고, ‘97년 이후’는 바로 어떤 변장이 있다는 것이다. 杜가 흙먼지 속으로 들어간 것이나 ?果이 따로 분가하기 시작한 것이나, 서둘러 ‘각성’하려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베테랑의 탈을 쓰고 과도기의 모습을 만들어내었고 공교롭게도 부득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말 못할 고충을 감추었다. 우선 미래가 구체적으로 어떠할 것인지를 알지 못했고 강력한 의지와 창조력으로 어떤 초연함을 만들어 내어도 무방했다. 설사 조금은 고의로 쇄락하게 한 것으로 보일지라도(杜), 또는 설사 어떤 때는 과도하게 어색하게 꾸며낸 것으로 보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고 보는 눈이 세심한 관중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97년 이전’ 작품 중에 흘러나오는 불안이, ‘97년 이후’작품 중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을, 단지 표면의 과도기를 통하여 방치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火》이후 杜琪峰은 계속 《?火》이래의 자신의 창작을 할 수 없다고 명백히 말했다. 그것은 당연히 시장에서의 이유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대체로 그의 무의식(?)의 방임이었다. 그러나 ?果는 ‘기녀’를 사용해 ‘97년’을 내버려두었고 더욱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수단이었다.

‘97년’이 불러일으킨 신분 문제는 이러한 작자 영화 중에 모두 언급되었다. 가장 명확한 것은 당연히 ?果이며, 그의 ‘97년 3부작’이다. 일찍이 이 과제의 영화 교재로는 그의 풀뿌리 정신과 상대적이며, ?婉?의 《?璃之城》(1998)이 있고, 그녀의 식민지 시대 영웅으로의 추세는 한편의 과도 후에 방영된 작품 중에 놓여서 다시 본토의 기억/신분의 기도와 얽혀 일정한 현실의 시련을 받게 된다.

아마도 ?鞍?가 비로소 정면으로 ‘97년 이후’의 심리 상태를 보여준 감독일 것이다. 그녀의 《千言万?》(1999)는 가장 홍콩 귀속감을 드러낼 수 있는 년대나 사건을 재현해내는 것을 임무로 하였지만 각종 원인 때문에 다만 한 폭의 분위기와 정서가 있는 화면을 제공해주었고 그런 까닭에 자기도 모르게 완전히 ‘97년 이후’의 그 내팽겨진 감성에 대응했다.

《千言万?》 또한 정면으로 ‘97년 이후’와 ‘89년 이후’의 관계에 대해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6?4 학살’을 직접적으로 줄거리로 구성하여 영화 장면을 직접적으로 관중으로 하여금 보도록 하였다. 기억상실은 다만 시작일 뿐이다. 기억상실자는 일찍 한 슬픈 노래 중에 기억을 회복하고 다시 부득불 존재하는 추악한 현실에 직면하여, 《去年烟花特?多》과 함께 ‘기억상실’을 결론으로 삼아 일체의 분개와 난폭함을 깨끗이 씻어내고 강렬한 대비를 만들어 내었다.


 (2)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오기 -《 高度戒?》


《高度戒?》(1997)

제작:林??

감독:林??

배우:??云,??宇,李惠敏, ?法?


우리는 당연히 《高度戒?》속에서 《?火?(Heats)》(1996)가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다. 두 영웅이 대치하는 것(가장 고전적인 장면은 ??云이 연기한 包蛇가 ??宇가 연기한 ?坤이 감옥에서 유리를 사이에 두고 살인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각자 실력을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길에서의 위기 분위기, 고조와 반고조의 처리 등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高度戒?를 ?火?영향을 받은 홍콩판이라 말한다면 林??에게, 또한 영화 자체에도 믿음 또한 공평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高度戒?》는 적어도 두 부분의 처리는 독특하게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 첫째가 여주인공 鍾??(李蕙敏역)이 없는 듯 하면서도 있고,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것이다. 둘째는 林??의 경찰에 대한 이미지 재구성이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火?》에서, ?拔迪尼路의 역할은 여성과 처음에는 가깝고(친근하다) 나중에는 내버려 버리며, 활짝 드러내서 남성의 세상 속에서 여성의 철저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高度戒?》와 비교해보면 ?坤은 오히려 ‘여자의 사랑을 이겨내지 못한다’. 영화 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鍾??의 안전, 행복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만약에 《O???》중에 ?秋生과 ?童?가 창작한 것이 나쁜 부부의 낭만도시 동화라고 한다면 그러면 《高度戒?》는 ???라 할 수 있다. 단지 ?坤이 두 차례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다. 즉, 남성의 각도로 자신에게 돌아온 애정 찬양이다. 노래는 결코 진실이 아니지만(현실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결코 분수에 지나치는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鍾?? 이 배역은 입체적이기에 충분하지 않고, 결국은 타인을 돋보이게 하는 인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오히려 ?坤의 행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정절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은 낭만적인 여성의 형상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관중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보다도 모두의 욕망을 이끌어 내고 고명하게 다가온다.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의 영화에서 높이 사지지 않으나 처리상에서는 시종 고저의 구별이 있다.

林??이 경찰의 이미지에 대한 해석은 《高度戒?》는 더욱 함축적인 효과가 있다. 包蛇는 표면상으로 영화 정면에서 형상화되는 남자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경솔하게 일을 보며, 자기중심이며, 번화가에서도 낯선 이가 총을 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전심을 다해 추격하여 체포할 것을 명령하지만 상대방의 소재를 알아내는 요긴한 부분은 경찰력을 24시간 선발하여 배치하여서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는데 배치하고, 그 신변의 사람들로 하여금(부하와 가족 및 시민을 포함해서) 균등하게 그에게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法蓉은 그의 부인을 연기했는데 ‘현명하고 정숙함’은 단지 그의 온유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특권을 남용하는 것을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영화 말미에 고조되는 부분에서 그는 다시 ?坤에게 살인의 동기에 대해 질문하는데 어느새 이미 잔인하게 크게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鍾??을 쏴 죽인다. (그녀는 사람들에 의해 총구를 겨누고 살려달라고 소리 친 것이 아니라 그녀는 총으로 包蛇를 겨냥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에 의해 점점앞으로 다가왔을 때 살려달라고 소리치게 했고, 미처 살인자는 살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총을 가져가는 것을 막아서 더 소용없게 되었다.) ?坤은 이미 살아도 사랑할 수 없고 그는 총을 가슴에 품고 상대의 은혜를 원수로 갚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랑과 생명의 감정에 대해 영원히 그의 대상을 보지 못했다.

《高度戒?》는 경마장을 털고 ?坤이 스스로 죽으려 하는 줄거리에 도적에 대한 동정이 여전히 있다. 이전에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나누어 준 적이 없으면서도, 돈벌이를 위해 온갖 나쁜 짓을 다하는 현실 속에서 뜻밖에 이미 인정을 얻었다. 더군다나, ?坤은 시작하자마자 칙사를 매우 잔학하게 죽이고 경마장 금고로 들어갔을 때 총을 가지고 없애지 못하고도 대만의 두목 '?士'(高 역)를 죽이려고 기도한다. 包蛇는 이렇게 나쁘게 써졌는데 ?坤은 '승천'을 알린다.

당연히 《高度戒?》는 ‘97년 영화’라 할 수 있고 더 진일보한 해석을 할 공간이 있다.

?坤은 경마 도박에 져서 재산과 미래를 잃은 까닭에 경마장을 털려고 하고, 죄인지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오려 할 따름이다. 반환으로 상실감을 느낀 ‘외로운 신하, 서자’는 누구에게 독촉하며 물어 볼 수 있을 것인가?

위기감과 계속되는 좌절의 압력 하에 包蛇는 답답하고 초조하고 자신은 망가지고 진지의 최전방에 섰는데도 林??은 그 때 홍콩인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는 것인가? 상상속의 큰 사건을 경계하기 위해서 包蛇는 대규모 요원을 동원해서 고도로 경계하지만 결과는 헛수고였다. 사람과 말이 지치고 일어나리라 예측했던 것은 일어나지 않고 진정한 재난은 오히려 방비할 수 없었다. 마치 97년 반환과 같이 이전에 모든 홍콩과 관련된 것들은 공산당에 함락되고 자금은 하룻밤에 철수되고... 각종 두려워하던 일들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지만 진정한 몰락(조류독감에서 SARS까지, 금융 복발에서 구조성 혁명까지) 오히려 미리 두려워 할 수 없는(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 경마장은 수장 杯?이 가져온 돈을 결과적으로 몽땅 약탈당하는데 6년 후의 오늘, 특별 행정 수장 영도 하의 정부는 돈과 군인이 비었으니, 어떻게 한탄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화 속에 경찰의 어두운 면에 대한 묘사와 폭로는 대체로 원래 심리 방면에 치중되어 있지만 반환 후에 악법이 복원되고 공안법과 24개 조 입법이 각종 풍파를 일으키니 경찰 신화의 구조는 마치 정치 예언 같다. 包蛇의 장관은 그에게 말한다. “우리는 97년 이교 직전에 목표는 두 자 밖에 없어. 안정!” 오늘 보면 실제로 작자도 그 의미가 강렬한 비웃음임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高度戒?》는 반환 전에 찍은 것이다. 반환 후, 林??은 《目露凶光》을 찍었고 더욱 격렬한 고발과 예언을 만들어 냈다.

 

이혜진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200101219 이혜진 옮김
?天,《后九七?香港?影》,(香港:香港?影????,2003),pp.94-127.

 

  (3)모든 것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하다-《目露凶光》

 

《目露凶光》(1999)

 제작:??豪

 감독:林??

 배우:??云, 梁家?, 郭葛明


《目露凶光》의 결말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文信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 감독의 의견에 따르면 전자는 文信의 행위는 영혼 때문이나 여기서는 후자를 기준으로 한다.

만약 《目露凶光》이 《高度戒?》의 후속작이라 한다해도 별다른 이의는 없을 것이다. 두 편은 줄거리상 관련이 없지만 《高度戒?》의 위기의식은 《目露凶光》에서 한층 심화되었다 할 수 있다. 여기서 남자주인공은 실질적인 사회문제(아시아 금융위기)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것이 그가 타락하는 배경이 된다. 지폐 위조 등의 고지능범죄는 그가 지능으로써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려는 것이다. 文信이 한 "모든 것들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다."는 말은 97년 전의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갈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50년의 세월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 없고 점차 영화속의 일련의 비극 사건이 생겨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 두 편 모두 ??云을 주인공으로 하였는데 《高度戒?》에서 그는 어두운 면을 지닌 탐정이었고 ?坤의 "사실 너와 나는 모두 정상인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람들을 깊이 생각하게 했다.《目露凶光》에서 그는 완전히 반대역할을 했었고 탐정의 역할도 梁家?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름이 개 품종과 같이 특이한 이 탐정은《高度戒?》의 包蛇와 같이 겉으로는 강하나 실속 없는 캐릭터였다. 관중은 Pit라는 인물이 사실은 包蛇의 재현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文信은 ?坤보다 잔꾀를 잘 부렸다. 《目露凶光》은 그래서 경찰과 도둑이 총출동하고, 무서운 귀신 영화 등등을 하나로 소화한 것이다. 이 방면에서 성공할 것인지에 대해 논하는 것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중요한 것은 林??은 이것을 빌어 97년 이후의 홍콩 사람들의 심리를 공포의 상태로 완전히 표현했다는 것이며 홍콩 사람들이 처해 있는 환경을 아마 자신의 주관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귀신이 사는 곳"으로써 《高度戒?》속의 ?坤과 ???의 친밀함을 나타냈으며 《目露凶光》에서는 文信과 Amy는 서로 질투한다. 결국 文信은 Amy를 해치고 2년 후에 작자의 현실 도피처인 애정과 가정도 빛을 잃고 만다. 사실상, 부자산계급의 위기는 바로 가정에 충격을 주며, 가정의 가치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가족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도 더 이상 난관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재난의 씨앗이 되어버렸다. 《目露凶光》에서의 비관은 97년 이전의 영화에서처럼 추상적이거나 상상 속에서의 지구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영화에서의 山景酒店에서 1967년 7월 참사극이 일어나는데 마치 ??玲이 말한 것처럼 《??(Shining)》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왜 하필 1967년인가? 그 해 5월 홍콩에서는 좌파운동의 궐기대회가 있었고 "6.7폭동"의 서막을 열었다. 7월에 사회의 정세는 어느 때보다 어지러워진다. 연출가는 일부러 모 연월을 꺼내어 97년 이후의 영화 이야기와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영화 속의 주인공과 같이 사람은 모두 위험하며 죄악에서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目露凶光》의 영문제목은 Victim인데 관중은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누가 피해자인가? 文信인가? Amy인가? Pit인가? 아니면 모두인가?

사스가 발생한 오늘날, 홍콩의 관중들은 무덤으로써 결말을 짓는 영화를 보면서 놀랍게도 林??의 《高度戒?》은 또 한 번 무의식중에 "정확한" 예언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영화의 미묘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4) We are the best!-《?璃之城》

 

《?璃之城》(1998)

제작:???

감독:?婉?

배우:黎明, 舒淇, ???, ???


港生(黎明분)과 ?文(舒淇분) 은 1997년 제야에 함께 런던에서 차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내가 처음 생각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후에 《프라하의 봄》이란 영화로 나왔다.)의 토마스와 테레사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여 이 세계를 떠날 때엔 시간도 멈춰 버렸으니 이것보다 더 영원불변한 것이 있겠는가?

당연히, 관중은 ?婉?과??? 가 무심결에 또 다른 "가을의 동화"식의 애정소설을 짓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영화는 홍콩대학의 利??남학생 기숙사와何?女 여학생 기숙사의 생활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의 노랫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97년 이전의 홍콩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牛??에 나오는 ?嫂나 打?口에 나오는 B仔의 기억이 절대 아니다. 영화가 97년 이전부터 홍콩을 대표해온 중산의식의 ?影人公司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치 ?天云의 다음 말과 같다:

"낭만애정은 단지 핑계일 뿐이고 그 뒤에 중년 지식인의 옛날을 그리워하는 심정이야 말로 이 영화의 본질이다. 홍콩대학은 항상 높아서 오를 수 없는 기개가 있었고 그 기개는 학술상의 성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주의에서 이루어진 신화이다. 옛날을 회고하는 것은 역사진술이 아니기에말하는 사람의 기분은 여러 가지의 아이콘을 가지고 있다. 그 왕성하고 낭만적인 시대에 대해 회상함으로써 다시 관중에게 "우리가 최고다"라는 것을 인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최고다!"는 港生과 ?文이 만날 때면 손짓을 한 후 항상 하는 한마디이다. 《?璃之城》의 何?여학생 기숙사는 바깥은 ?佐堂이고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여러 가지 건물이 복잡하게 서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현재의 풍경과 영화 속의 70년대 배경이 맞지 않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지만 더 큰 의미가 있는데 최대한 식민지 건축 특색의 영상을 망라하여 남녀주인공이 살던 시대를 그리고, 그 시대의 엘리트를 묘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세는 사람보다 강하다, 그들의 이러한 식민지 엘리트가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것은 질이 떨어지는 사회이다. 《?璃之城》중에 "세대가 거듭될수록 달라진다."라는 한탄은 그 해에 성장을 하고 참가해야 했던 고급 만찬은 오늘날에 이미 운동화를 신은 손님들로 가득 찬 것이 되었다. 그 때 당시 인사와 선배들은 정의를 위해 거리를 나섰지만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작은 기숙사방에서 그 전날 밤 잠자리 상대에 대해 시시콜콜한 대화나 나눈다. ??(?蓉?분)이 大?(??祖분)에게 여자친구를 찾아줄 때 홍콩은 현재 8개 대학이 있는데질이 이처럼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녀는 大?와 각자 선인들의 혁명에 대해 얘기하며 결국에는 한탄하며 "우리 세대가 무엇을 한 적이 있던가?"라고 말한다.

지금 세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앞 세대의 유골을 불꽃에 넣어 하늘로 보낸 후 존경스럽게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앞 세대가 완성하지 못했던 사랑과 꿈을 그들로 하여금 완성하게 하는 것도 무방하다. 港生의 아들 大?는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홍콩의 거리를 밟을 때 솔직히 홍콩이 싫고 ?文의 딸(??)이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속은 빈게 홍콩과 닮았다고, 그래서 싫다고 말한다. 그는 그녀를 "추악한 홍콩 사람이며 예의도 없고 돈만 밝힌다"고 욕하고는 그들은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히 똑같은 족속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港生과 ?文의 사연을 알게 되고 점점 눈앞의 여자를 좋아하게 된다. 영화는 분명히 그들이 이후에 함께 할 것이며 그들 부모의 불후한 사랑을 이어갈 것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뒷 세대는 앞 세대의 연속일 뿐이다, 앞 세대의 위대한 업적이 그들의 앞길을 비춘다. 앞 세대는 영원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서 97년 전에 쉼표를 찍었다. 大?와 ??의 중국어 이름이 똑같이 康?라는 것, 港生과 ?文이 죽더라도 식민종주국의 수도에서 죽겠다고 하는 것에서 작가의 눈에는 앞 세대가 아름다고 영리하기 때문에 그 기준이 여전히 이어져 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璃之城》은 표면적으로 홍콩에 가득 퍼져 있는 유리벽을 가리키지만 영화 속 유리와 같이 빛나는 사랑을 비유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유리는 깨어지기 쉽고 우리는 연출자의 정서적으로 홍콩을 기억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는 메시지를 부인할 수 없다. 관중은 이것이 ?婉?과 ???가 97년에 선언한 것은 그들의 상상과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여전히 자신이 홍콩 사람이라고 인정한다면 깨지기 쉽더라도 아름답고 희망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5) 고개 돌아봐도 여전히 쓸쓸한 그 곳-《千言万?》


《千言万?》(1999)

제작: ?鞍?

감독: ?鞍?

배우: ?秋生, 李康生, 李?珍, ?君豪, 莫昭如

 

《?璃之城》에서 나온 홍콩대학 교정생활과 영화 마지막에 불꽃을 터뜨리는 장면은 자연스레 ?鞍?과 그녀의《今夜星光??》이라는 영화를 떠올린다. 사실, ?鞍?는 이후에 자신의 "97년 이후" 영화 《千言万?》를 썼다.

《半生?》에서 ?鞍?는 ??玲의 원작을 자신의 정서에 따라 각색했는데 특히 대충 결말을 낸 후반부와 너무나 자세히 묘사된 전반부를 각색했다. 이리하여 가능한 감독의 유유한 가운데 즐거움을 얻는 풍격을 구현하려고 했으며 ?苦芷의 말을 인용하여 97년의 느긋한 상황을 체현했다. 느긋함이란 근심걱정이 없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것이다. 《千言万?》에서는 이러한 마음이 더욱더 잘 나타나 있다.

《千言万?》의 발단부는 기억의 상실에 관한 것이지만 이 영화의 야망은 앞에 서술한 "기억 상실의 영화"보다는 크다. ??(李?珍분)이 잊으려는 것은 고통스러운 교제뿐만 아니고 단순히 홍콩의 주체와 관련 있는 신분과 의식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은 아주 중요한 홍콩의 역사라는 것을 기억한다, 莫昭如의 《?仲?의 이야기》는 주요한 사건 실마리로 삽입되어 있다. 반면 ?君豪가 분한 邱明?의원은 더욱 민간운동투사의 분투과정을 나타내고 있고 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성장은 변질되었다.

??, 邱明?과 줄곧 몰래 사랑하는 阿冬은 모두 허구의 인물이나 영화 속에서는 크고 작은 인물을 맡는데 실존인물인 《甘仔》의 甘浩望이다. 甘浩望이란 이탈리아에서 온 신부는 70년대 이후로 줄곧 적극적으로 가두시위운동에 참가했으며 여러 차례 절식하고 여러 차례 싸우고 패했다. ?秋生이 甘浩望로 분했는데 그의 분위기를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입법회 문 앞에서 단식투쟁을 하며 "주여! 왜 우리는 항상 이렇게 나약합니까?"라고 혼잣말을 한다. 李康生은 그를 부축해 遮打道의 공중화장실에서 끝내 참지 못해 구토를 한다. 배우의 정서와 연기에 사람들은 뜨거운 눈물을 글썽거린다. 이 장면은 ?鞍?가 8,90년대 시위에 참가했던 기억을 되돌려 유사한 장면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분위기로 한 영웅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했고 그의 이미지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감독의 장점은 동시에 그녀의 결점이다. 현실 속의 甘浩望은 복잡한 인물인데 그의 정치와 종교 이상은 상충하기도 부합하기도 하니 삼일 밤을 새워 토론하고 생각해야 할만한 과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신화화했다. 자신의 시각이 뚜렷하고 사상적인 훈련이 된 감독은 홍콩의 시대역사의 창작 맥락중 소위 "미몽에서 깨어나게 함"을 다룬다. 하지만, ?安?는 이 방면에서의 요구를 의식하지 못한 듯 보편적인 영웅의 형상을 그리고 있으며 구체적인 인물을 확대해 낭만화한다. 결국 "甘仔"는?安?의 렌즈 속에서 위대한 인격을 갖추게 되나 그의 좌익 이상은 웃음거리가 된다.

심지어 연출가는 줄거리의 전개와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邱明?과 甘浩望을 양극화시켜 강렬한 대비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甘仔"가 성인처럼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邱明?이 거의 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邱明?이라는 인물을 표현하는데 조소와 풍자로써 "민주투사"에 대한 혐오를 넌지시 암시하고, ?仲?의 이야기를 삽입해 대비시킴으로써 ?仲?은 또 다른 신화화된 영웅이 된다. 甘浩望과 邱明?, ?仲? 이 세 인물의 복잡함은 동시에 희생되었다.

영화가 풍자하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甘仔"가 신부의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교회로 가는 것인데 마치 보편적인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가 상영될 때 홍콩의 사생아들의 권리 신장으로 떠들썩했기에 사실상 甘浩望은 다시 홍콩의 조직으로 들어간다. 이 때 대부분의 홍콩인의 이익과 그들의 내륙에 대한 경계심을 이야기하며 "甘仔"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시대는 여전히 진보하지 못했다.

원래, 연출가는 번성하던 시대를 촬영대상으로 하여 관중은 곧 그녀에게 어떻게 운동권 배후의 이념과 원동력을 이해해야 할지 설명하기를 요구한다. 안타깝게도 ?鞍?는 다시 관중에게 그녀는 한 시대의 정서를 장악했지만 정치의식이 어떠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영화의 세 번째 부분은 "不?忘?"라는 제목으로 "6.4사건"후의 "떠오르지는 않지만 감히 잊지는 못한" 기억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애정의 상처로 "6.4의 상흔"을 나타내었다. 정치적인 의미를 덜어내고 보편적인 인성이나 인도, 인문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연출자의 의도였다. ?鞍?는 97년 이후의 매우 많은 말들에 대해 정치투쟁에 대한 불신임으로 가득 채웠다. 97년부터 기억을 회상해 보면 그녀 자신이 만족한다는 작품을 통해 ?鞍?는 마치 관중에게 "봄바람이 불면 술이 깬다. 비바람이 없으면 날씨도 맑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과도 같다.


 (6)남성성에 대해 쓰다-《九七三部曲》


《香港制造》(1997)

제작: ?德?

감독: ??

배우: 李?森,??慈,李?泉


《?路祥》

 제작: ?紫明, 上田信

 감독: ??

 배우: 姚月明, ?惠芬


??의 처녀작은 《大??昌隆》이지만 대부분의 관중에게 ??이 진정 이름을 날리게 된 작품은 대개 ?德?의 이름을 내건 《香港制造》이다.

《香港制造》와 《大??昌隆》은 모두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발단이 된다. 《香港制造》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영화의 건물을 뛰어내리는 데에 대한 집착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은 주인공 中秋가 여러 번 건물에서 뛰어내리려는 소녀 ??珊와 꿈속에서 만나고 관계를 맺은 후 유정을 하는 것 외에도 다른 각도와 거리의 렌즈로 다시 관중에서 건물에서 뛰어내린 전후의 모든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 기억과 시공이 교차하는 렌즈 속에 주요 실마리를 삽입하고 《香港制造》라는 영화 전체에 "자살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소년 ??珊가 건물에서 뛰어 내리는 것은 영화 줄거리 전개의 관건이 된다.

《香港制造》의 "雄性??"는 상당히 뚜렷하다. ??珊가 땅으로 떨어진 후 시체에서 정액과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 이것은 원시의 남성성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년의 생명은 무참히 버려지고 놓여질 곳도 없다. 백치 아이 阿? 이 역할의 설정은 단지 간단한 길을 다시 가고자 하는 갈구에 지나지 않고 "순진"이라는 구호를 또 가지고 있다. 中秋는 최수에 그의 백치 동생을 돌보지 못하고 "순진함"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묻히고 그 자신은 죽음이 머지않았다.

아름다운 소녀의 다리를 보고는 코피를 흘리는 것은 꿈속에서 한 대씩 머리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처럼 우습지만 남성의 경험에 아주 가깝다. 자위를 한다는 것에는 환상 속의 격추의쾌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의 목표를 격추시켜야만 욕망이 비로소 실현될 곳이 있는 것이다.

일찍이 어떤 사람은 남성이 보는 경향을 관찰하면서 남성이 왜 항상 거시적인 각도에서만 바라보는 지 연구하였다. 후에 심리 분석가가 자신의 성기관을 보고는 남성의 성기는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머리만 숙이면 한눈에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신을 가련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여기서 출발해 확대대어 나가는 것이며 자신에게 관련된 모든 일은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中秋가 총을 가지고 놀 때 총구를 월병에 끼워 넣는데 이것은 남성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珊이 근육질의 체육 선생님을 좋아하고 십자가를 향해 몸을 던진다. 십자가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남자의 다리 옆에 떨어지는 자태이며 그것이 바로 남성의 오르 가즘이라는 것이다.

??이 ??珊을 죽인 후 세 명의 소년에게 그녀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세 명은 그녀의 무덤에서 그녀를 찾고 결국 모두 함께 죽게 된다. 이러한 성애에서 사망까지의 과정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에 이미 나타나 있는 것이다.

또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줄거리로 하는 영화로《月未老》가 있는데 결말에 주인공 美美가 다른 여자가 높은 곳에 위험하게 앉아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달려 올라가 그녀와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추락하게 된다. 피도 없고, 어떤 상세한 설명도 없다. 카메라 렌즈가 본 것은 그녀가 기어 올라간 순간과 이미 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다음 순간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죽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이것이 남성의 오르 가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고 여성의 부드러움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의 남성이 서술하는 사실은 97년을 설명하는 테두리 안에 넣어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저예산으로 직접 현지의 비주류 청년의 인생을 나타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청년들은 洛?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두 "아비가 없는 자식들"이다. 97년의 정치적 비유에 따르면 홍콩 또한 아버지가 없는 사회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 아버지를 찾는 대부분의 영화와는 달리 ??은 작품을 통해 외재적인 동정의 대상을 탐색한 것이 아니라 주체를 강조하고 그의 신분을 확립했다. 아버지를 찾을 필요가 없으니 작가가 바로 부권을 주장하는 주체인 것이다.

《香港制造》의 阿?은 불치병을 앓는데 ??珊과 中秋는 차례대로 자살하는데 영화의 끝에 홍콩 사람들은 毛??이 청년들에게 한 말을 방송하나홍콩의 청년들은 모두 죽고 죽기 전에도 미래가 없었다. 97년의 아이들은 마치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것과 같았다.

만약 《香港制造》가 이미 청년들에게 사형선고를 했다면 《去年烟花特?多》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징벌하는 것이다. 청년들이 어찌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묻는 것은 청년들을 적대시한다는 사람들과 같지 않다. 그게 아니라 그는 청년들을 너무 사랑하고 그들을 교화시키고 그들에게 출구를 찾아줄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去年烟花特?多》전차소녀는 처음 무대에 나올 때 퇴역한 영국군인들이 홍콩반환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들의 나날이 왔다. 10월 1일은 中?아버지의 10월 10일은 台?아버지의, 7월 1일은 홍콩이라는 고아의 날이다." 홍콩은 본래 미래가 없고 "해가 갈수록 떨어지는" 청년들뿐이고 이러한 판단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무수한 폭력과 윤리질서의 장면 배경이다. 부권과 남성은 근본적으로 ??이 이 영화 두 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요 논조인 것이다.

《?路祥》은 표면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바람과 비가 작은 골목의 온정이 된다. 앞의 두 작품은 신분위기와 존재압력을 드러냈지만 찻집 안팎에서 보는 홍콩의 祥哥의 재산싸움에서 이러한 긴장감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하지만 세심한 관중들은 어렵지 않게 영화는 사실 남성에 대해 여전히 쓰고 있으며 포장 형식만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路祥》의 "생혈차"(탐폰을 빠뜨린 차) 는 다시 洛?의 말을 빌려서 여성의 생리에 대한 남성의 야유를 나타낸다. 《?路祥》의 주인공 祥仔도 남성이지만(그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오줌을 마시게 하는 악역도 남성성의 표현이다) 중요한 것은 카메라 렌즈 앞에서 그의 순진한 모습은 성인의 마음에 있는 동심의 표현이다. 사실 ??이 "?路祥"을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으로 한 것은 사람들에게 ?峰 감독의 李小?이 주연한 동명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것 외에도 영화 속에 나오는 新??曾(원래 이름은 登永祥이나 홍콩사람들은 모두 그를 祥哥라 부른다)과 그의 재산분쟁을 취재하면서 마치 실제 사건처럼 이야기의 배경으로 설정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祥哥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철저히 부권을 상징하고 있고 재산분쟁의 배후에는 여러 가지 봉건적인 사상과 관습이 내재되어 있다. 비속에서 祥仔는 아버지의 벌로 바지를 벗고 한편으로는 오줌을 싸면서 한편으로는 "万?淫?首" 라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는데 그는 또 다른 아버지의 형상으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항한다. 그것은 마치 홍콩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등씨가족의 재산분쟁을 주목하면서 홍콩 반환이라는 거사에는 무덤덤한 것과도 같다.

<九七三部曲>에서는 앞의 두 부는 작가의 97년에 대한 관점을 잘 묘사했다. 《?路祥》에서는 아이의 눈으로 홍콩의 과도기를 바라보면서 또 다른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해 주려는 것이다. 홍콩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돈에만 집중되어 있고(초반부 祥仔의 독백에서 알 수 있다) 조국이 반환되는 백년의 설욕을 씻는데도 여전히 祥歌의 재산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 한편으로는 홍콩문화의 얕음을 비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소위 대사(大事)라는 것의 황당무계함을 말하고 있다.

《香港制造》의 주인공은 과도기를 대면하지 않았다. 《去年烟花特?多》의 주인공은 "기억의 상실"에 의존하여 새로이 시작하려고 했다. 《?路祥》은 "과도"라는 것을 평범하게 나타내어 《妓女三部曲》에 대한 복선을 그렸다. 《?路祥》중의 小芬 역할은 "小人蛇"(내륙에서 온 불법체류자)인데 그녀는 홍콩에 거주하고 있으나 다리를 다친 장애인처럼 완벽한 홍콩사람은 아니다. 관중이 그녀와 祥仔가 "홍콩이 누구 것인지"를 尖?海에서 외칠 때 아마도 97년 이후의 《妓女三部曲》가 여기서 시작되리라고는 생각 못할 것이다. 이 장면은 몇몇 평론가들이 ??이 앞의 두 영화의 비극적인 상황을 전환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았고 "홍콩은 우리집이다"라고 구체화된다. 하지만 후에 홍콩을 포기하는 것이 ??의 답이 된다. 《?路祥》의 시점은 후반부에 祥仔에서 小芬이 되는데 처음에는 시국의 변화를 지켜보고 후에 원래 작가의 의도는 영화의 주체들이 점차 홍콩을 나가는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만약 홍콩의 97년 문제를 남성의 중년위기라 표현한다면 아마도 ??이 가장 이러한 문제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감독이라 하겠다. 《去年烟花特?多》의 중년의 불만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홍콩의 중년남성은 97년 전후로 北姑(내륙에서 와 창녀로 전락한 아가씨들)과 包二?(정실부인 이외에 첩을 두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九七三部曲》에서 《妓女三部曲》에 이르기까지는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이어나간다.

 

 (7) 가!-《妓女三部曲


《榴???》(2000)

제작: ?紫明

감독: ??

배우: 秦海?, ?惠芬


《香港有?荷里活》(2001)

제작: ?紫明,春明?

감독: ??

배우: 周迅, ?英明,?又南


《九七三部曲》가 97년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단정해 말하긴 어렵지만 편의를 위해 이러한 경계선을 긋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路祥》의 이야기는 비교적 자질구레하고 서술관점에서 전환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표현하는 불확정적이고 허구적이고 익살스러운 97년 이후에 대한 묘사는 처음으로 97년 이후에 대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榴???》와《香港有?荷里活》는 작가의 97년 이후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人民公?》는 97년에 대한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路祥》은 아이의 관점으로 남성을 포장했고 《榴???》는 여성의 각도로 포장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路祥》끝부분의 小芬의 시점을 이어받아 《?路祥》의 관중들이 보지 못한 어두운 골목의 풍경을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小芬을 "북에서 온 아가씨" 小燕으로 전환시키는데 그녀는 관중을 홍콩 밖으로 데리고 나가며 그녀의 고향 牡丹江에서 이야기는 계속된다.

《榴???》는 사회의 약자층(내륙에서 온 이민자)에 주목하지만 영화는 매음이라는 여자의 신체를 착취하는 것을 빌지 않고 서정적으로 서술했으며 남성의 기개를 낮추었다. (그러나 매음의 현실에 대해 사실적으로 촬영하지 않은 데에 대해서는 창녀의 고된 삶에 대해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榴???》의 중점은 사실 과도기 전후의 中?과 홍콩의 관계에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어떠한 관계인가? 小芬과 小燕는 모두 홍콩에서 잠시 머무는 사람들일 뿐이니 결국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중에 관객들은 그들이 북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만약 ??이 정말 《榴???》를 통해 홍콩 반환 이후의 변화에 대해 나타내고 싶었다면 주체성 이외의 내용은 아주 선명해진다. 홍콩은 단지 돈 버는 것이라 돈을 벌면 떠날 수 있다고!?

영화는 小芬과 小燕 두 부분으로 나누었고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표류하는 삶을 나타낸다. 두리안이 물에 따라 표류하는 것과 일반적인 표류 또는 유목은 다르다. 집단적으로 유목하는 것과 개인의 유랑 모두 고향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지만(주동과 수동의 차이는 있다) 小芬의 마음속에서 갈망하는 것은 집이다 . 영화 끝에 小燕은 동년배들과 남쪽으로 돈벌이를 하러 가는데 경극배우가 되려는 꿈을 이루려는 것이다. 또한 모두가 떠도는 것은 물질에 대한 동경 때문에 떠도는 것이지만 그녀가 이 길을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마음속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황희정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200101239 황희정 옮김
?天,《后九七?香港?影》,(香港:香港?影????,2003),pp.128-146.

 

사실상, ?果는 97년 이후의 홍콩인은 내지인의 충격으로 방황하고 만약에 달아나서 잃어버리거나 압류되어 죽는다면 아무 방법 없이 그저 이주할 뿐이라고 화면에 담았다.《香港有?荷里活》의 촬영은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香港有?荷里活》영화 제목 속에는 은근히 홍콩 영화계의 헐리우드를 풍자하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영화 속의 헐리우드는 강렬한 본 고장의 맛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헐리우드 문화가 동양으로 들어오는 진정한 교두보도 아니었다. ?果는 ?石山지하철역 부근의 헐리우드 광장을 선택했다.왜냐하면 그 곳은 홍콩 평민 거주 문화를 대표하는 大?村 과 마주하고 있고 그는 이번을 97년 이후에 분해된 운명을 맞는 것을大?村을 배경으로 그의 지나친 불신과 외주자의 결심을 마음껏 이야기 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이전의 것을 분해하고 다시 짓고 언제나 옛일을 생각하는 마음과 변화하는 감상들이쉽게 결합한다.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으로 이름을 떨친 ?果의 예전 작품 중에《香港有?荷里活》에서 만들어진 大?村의 분위기는 오히려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이제 곧 사라질97이후의 홍콩을 넌지시 암시하고 낱낱이 드러내었다. 내지 기자들의 인터뷰에서 ?果는《香港有?荷里活》에는 환상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실사영화가 아닐뿐더러 홍콩인의 잃어버린 것에 관한 자신의 속마음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속의 ??은 많은 가명과 진실과 거짓들을 가지고 있고 일부러 그녀의 배경을 설명하지 않는 연출로 그녀를 단지 홍콩 남자의 성욕의 대상이고 유혹을 해서 함정에 빠트리는 모습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홍콩은 바로 삼대 바보와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젊은이로 대표한다. 이야기는 猪仔가 실종된 것을 기록한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97년 이후의 홍콩은 경제적 곤경에 빠지는 상황이 특징이 되지는 않을까?

《榴???》과는 달리 《香港有?荷里活》의 서사 주체는 기녀나 다른 여자들이 아니고 ?果는 그의 남성 주도적인 특징을 다시 회복하였다. 극 중의 위기는 대부분 남성이 쉽게 위기를 느낀다 곧 사라질 국가와 갑자기 다가온 한 명의 아리따운 아가씨 ,그녀는중장년층들을 모조리 매혹시키고 그들을 어쩔 줄 모르고 방향을 분별 못하게끔 가지고 논다. 내지의 위협은 그녀들의 몸으로 정과 돈을 기만하고 게다가 인정사정 봐 주지도 않는다 . 그러나 바보같은 홍콩 남자들은 반이 거짓이고 번번히 자신을 저버리는 여자를 위해서 결국은 목숨을 내던지거나 재산을 잃게 되는데 너무나 가련할 뿐이다.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답은 당연히 권력을 잃는 것이다. 영화의 원작에는 팔이 끊어지는 것을 권력을 잃는 것의 상징이라 했다. 이러한 예는 무협 작품의 곳곳에 자주 드러난다. 다시 돌아보면 손을 끊는 것은 중장년층과 대조되는 瘦骨仙古惑仔 (?又南 역)였다. 오른손을 짤리고 반박하다가 오히려 왼손은 연이어 부러져 버린다. 원래의 문신과 잘린 손이 합쳐져서 용두사미의 꼴로 변하게 된다. 작가는 여전히 관중들이 이해 못할까 염려되어阿? (梁仕平역) 이 백기를 들면 커다랗게 ‘가라’는 한 글자를??에게 써서 올리고 실제로 그것은 머무르길 원하지 않는 중국인들을 향한 경종을 울린 것이다.

만약《九七三部曲》이 남자가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자기 연민을 지닌 남자들을 쓴 이야기라 한다면 《妓女三部曲》은 바로 남자가 여자들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榴???》나 《香港有?荷里活》의 남자들은 모두 불완전한 사람(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이고 《榴???》의 절름발이 아버지는 여전히가족과 모여서 살고 《香港有?荷里活》의 大?村의 남자는 오히려 어느 곳이든지갈 수가 없다. 헐리우드 광장의 윗편은 극 속에서 여래불의 거처로 묘사된 곳이다. ??은 거기에 살고 있는데 원래는 돈과 권력을 가진 홍콩의 남자가 그녀를 헐리우드로 데려가길 기다리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복을 찾아간다.五脂山이 누르고 있는 孫悟空(瘦骨仙古惑仔)은 그와 猪八戒가족들은 97년이후의 가위에 눌려서 압류되어 떠날 수가 없다. 五脂山은 蜘蛛요괴를 누르지 못하고 그 곳의 여자들은 정말로 헐리우드로 가고 게다가 남자들의 욕망과 몽상을 가지고 간다.

?果는 중국인을 비웃고 젊은이들을 믿지 못했지만 결국은 한 쪽의 팔을 남겨두고 아이들에게 여전히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路祥》에는 祥仔와 小芬,《榴???》에는 小芬이 있지만 ,《香港有?荷里活》에는阿?이 있는데 그는 유일한 ??과 진정한 우애를 나눈 남자이고 가장 이상적으로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홍콩인이다

《人民公?》의 ??은 화장실에서 버려진 고아로 변하였고 《香港有?荷里活》 후반부의 황당함과 괴이함은 나중에 홍콩이 겪을 사스의 힘든 혼란기의 사건의 의미 없는 대응을 드러내고 이것은 林??의2 편의 97년 작품속의 예언과 아주 흡사하다.

 

 (8) 어두운 마음-《暗花》

 

제작: 杜琪峰, ?家?

감독: 司徒?源,游乃海

배우: 梁家?,??云,邵美琪


나는 1998년 설날에 보았던《暗花》를 기억한다. 당시는 아시아의 금융 위기가 막 발생했지만 홍콩의 전망은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좋게 보고 영화속의 암울한 분위기에는 이르지 않았다.

杜琪峰、?家?는 ?河영상을 만들어서 《??只能活一?》(游?志감독 ,1997)《一?字?的?生》(?家?감독 ,1997)와《恐怖?》(曾瑾昌감독 ,1997)과 같은 전작들을 촬영했고 97년을 냉담함과 나쁜 시각을 보였다.97년3월 가장 먼저찍은 《一?字?的?生》은 숙명적인 블랙유모와 한 무리의 북상하기 직전에 군영을 넘겨주는 것이 그들이 전쟁후의 운명에 영향을 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한 데 섞여 있다. 만약 넘겨주지 않는다면 결과는 대륙의 전군이 전멸하게 되고 넘겨주면 여러 곳을 거쳐 대만에 도착하게 되지만 오히려 그들의 머리글자를 세우게 된다.북으로 돌아가려는 죽음의 길의 비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5월《??只能活一?》이 되면 金城武 의 필사적인 임무는 오히려 유일한 출로가 되고 영화는 그가 건물로 뛰어 들어 엉키는 끝맺음을 통해 여전히 한줄기 생명의 기대를 말하고 있다.11월에는《恐怖?》은 ? ? ?이 맡은 역할은 남쪽에서 와서 홍콩인의 신분을 절취한 대륙의 냉혈 살인자이다. 불행히도 그녀에게 선택되어져서 잔혹하게 학대받는 士司机(黎耀祥 연기)은 대륙에 동화되기 두려워하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暗花》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리 배치된 함정과 경찰이기도 하고 도둑이기도 한 마카오의 사립 경찰인 阿?(梁朝偉연기)로 하여금 차츰차츰 빠져들게 하고 스스로 나올 수 없게 만든다. 배후를 조종하는 사장인 洪선생은 일찍 어떻게 그를 잘 이용할 것인지를 짜놓고 말을 듣지 않는 두목을 제거했다. 그의 운명은 이미 다 짜여졌다. 기관은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면한 것을 목숨을 건 한 판 승부로 여기고 결과는 서로가 엇갈리고 상대방에게 총을 겨누고 그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전에 없던 길은 푸른 하늘이 사람을 흔드는 비관적인 정서가화면 전체를 꽉 채우는 걸 외면할 방법이 없다. 마치 작가가 홍콩의 앞날을 대하는 것과 같은 암울한 마음이 관중들에게 보여 지기에 충분했다.

《暗花》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서이 이야기이다. 사건은 홍콩보다 더 작은 ?丸의 곳에서 어느 날 하루 발생한다. 왜 하필이면 마카오일까? 홍콩은 반환되었고 마카오는 아직 1999년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인가? 여전히杜감독은 본인이 마카오에서는 손님이라는 것에 근거한 것일까? 왜 하루 동안이라고 시간을 한정해 놓은 것일까? 희극의 압박감을 더한 것 외에 ‘오늘 밤이 지나면 모두들 더 잠을 잘 잘 것이다’이라고 정치적 우의를 부르짖는다. 오늘 밤이 지나면 먼지들이 사라진다. 오늘 밤이 지나면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다. 문제는 사건의 관계자들은 내일의 일출을 보는 걸 막을 수 있을 런지이다.

영화에는 관중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주게 하는 두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耀? (??云 연기)과 阿? 가 감옥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로 맞서게 되고 강렬한 빛 아래에서 공기 미립자가 눈발처럼 흩날리고 대화를 하면서 耀? 은 벽을 행해 탄알을 던졌다가 받았다가 한다.

처음에우월하던阿?를 앞질러서 이 부분부터 이야기의 형세는 역전되고 타고난 총명함은 원래가耀?이었다. 두 번째 막에서는 당연히 阿?가 대머리로 밀고 출장 갔던 阿?를 암실과 옥상으로 쫓아낸다. 총성은 사방에 울리고 방 안에 가득한 거울은 산산이 깨진다. 두 머리의 거울에 겹겹이 반영되어 서로가 겹쳐지고 진짜와 가짜, 누가 나인지를 구분하기가 힘들게 된다.

?宇森 의《Face Off》에는 경찰과 범죄자가 얼굴과 신분을 바꾸고 똑같이 두 사람이 쫓아내고 거울이 깨지는 장면이 있지만 그러나 《暗花》는 여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실제로 서로를 그림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가면을 쓴 인격으로 여기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耀?은 물론 阿?의 자아의 그림자이기도 하지만 역시 그의 거짓된 인격이기도 하다. 사립 경찰은 그 당시에 계약해 놓은 배까지 버리면서 살인마로 변장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阿?는 마찬가지로 역시耀?의 자아의 그림자이고( 耀?에게 사립경찰의 기회를 주었다면 어떻게 여길 것인가?)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의 분별은 《Face Off》보다 더 작고 부족하다, 빛과 그림자 , 안과 밖, 정과 반이 뒤바뀌어 양면을 분별하기가 힘들다. 쇳조각을 날려서 한 명의 대머리를 없애버린다. 그는 누구인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그러므로 《暗花》에서 서로를 쫓는 장면은 가면을 쓴 인격을 타파하는 것을 언급하고 이러한 타파는 진정한 복제를 통해 완성된다. 이른바 자아와 그림자의 관계 , 자아와 가면을 쓴 인격은 원래 오히려 서로를 보충하며 대하는 것을 근거로 한다. 두 사람의 분별이 갈수록 적어질 때 이러한 관계는 또 다시 존재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당신이 정면으로 충돌해서 위장을 벗겨냈을 때 적의 얼굴을 뜯어냈다면 그러나 단지 다른 하나의 위장을 걸치고 있는 것에 이른다면 혹은 뒤바꾸어 말하면 필사적으로 다 벗겨버리기 위해서 다른 분장을 찾아야만 한다. 나중에는 그 분장이 원래는 자신임을 발견하게 되어또 다시 바꾸어서 마지막에는 운명이 변하지않게 된다.《Face Off》와 비교해 보면 더욱 복잡하고 심오하다.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왜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정말로 바깥의 통제(洪선생, 북방에서 온 배후의 조종자를 상징) 가 이렇게나 강대한 것인가? 개인은 조금도 반격할 힘이 없는 건가? 아니면 마귀가 이제야 개인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관건이 되는 것인가? 耀?든 阿?든 막론하고 모두가 믿음이 높은 자들이 아니었지 않은가?阿?는 처음에 洪선생을 무시했었는데 나중에는 날이 갈수록 당황하고 처음에 거만하던 것이 긴장으로 바뀌면서 심리적인 장애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제일 마지막에 부두로 갔던 것이 耀?이었고 그가 멸구당하기 전이라면 그렇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처음의 무지와 자신감과 후의 의심이 많아진 것이 그들을 해친 것인가? 스스로 홍콩인이라고 여기며 결국엔 뜻밖에 나타난 비상사태로 인해 전군이 멸망하기에 이르는 이러한 소식은 《非常突然》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된다.

 

 (9) 깨끗이 씻어낸 후-《非常突然》


《非常突然》(1998)

 제작: 杜琪峰

 감독: 司徒?源,游乃海,周燕?

 배우: ??云,任??,?卓菱, 蒙嘉慧, 林雪


《非常突然》의 대부분의 이야기의 줄거리는 비 오는 날 발생한다. 많은 이들은 그것이 David Fincher의 《Seven》을 바탕으로 하여 심지어 홍콩 반환의 그 날을 연상시키고 역시 끊임없이 비가 내려 사람들로 하여금 날이 맑게 개이기를 기대하게끔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으로 물이 가지고 있는 광활함을 드러내어 공간의 사고의 기점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다고 여겨진다.

湖北省의 무덤 속에서 고대 죽간이 발견 되었는데 ‘천지의 근원은 물이고 물은 반대로 태일을 도와서 하늘을 이룬다,’ 는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물과 하늘은 하나의 색이고 물과 물의 관계는 간단하지가 않다. 그래서 중국의 신화에서는 물의 신이 하늘을 지탱하는 것이 산에 미치지 않아 붕괴하려고 하자홍수를 하늘을 따라 넘어지게 해서 그것이 인간의 큰 수재를 만들었다.

하늘과 물은 서로 태어났고 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력의 표현이다. 그러나 물은 괴멸시키는 사자이고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 당연히 살아 있는 것과 썩는 것은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옛 것은 파멸되어 없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것이 자랄 것인가? 그러므로 적절히 표현하자면 물은 예 것을 씻어 버리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씻어 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성과 파멸은 한 곳에 모으며 생사의 신비성은 아마도 더 물에게 연관될 것이다. 물과 신비는 관계의 깊이를 잴 수 없고 가장 두려운 것은 원인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인생에서 너무나도 두려운 것은 무한한 자에 대한 경외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사망은 물론 사람과 무한한 자(동시에 불사신이다)의 최대의 분야는 역시 유한한 것의 동기를 넘어 선다. 물은 이 중요한 요점에서 하나의 시종일관 서로가 원호를 걸어 설명한다. 그것은 갓난애의 영양액이며 저승을 통과하는 황천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재생하게 하는 모체이고 환생하기 전에 마셔야 하는 잊어버리는 약이라는 것이다.

《非常突然》의 모든 화면에서 영화의 서술은 거의 빗물을 부각시키면서 진행되어 간다. 영화속의 민완 형사는 악당을 추적하여 붙잡는 것도 좋고阿森 (??云연기), ?蛇( 任??연기)과 Mandy ( 蒙家慧연기)의 감정이 뒤따르는 것도 좋은데 모두에 물이 있다. 여기 물을 부각시킨 것은 처해진 환경(경찰이든 범죄자든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의 변화와 관계의 무상함을 예고한다. 이러한 의의아래 물은 단지 영화의 배경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 전개의 의미의 기초 조직에 이른다.

흥미 있는 것은 물과 죽음 , 화합과 와해의 관계가 영화 속에서는 직접적이지 않고 일방성을 띄고 있다.올바른 면의 가치는 (만약에 우리의 문화 습관 속에서 올바른 면으로 여겨지는 것이 생성 된다면 )그것이 실현될 수 없음을 통해 더 돋보이게 한다. 나쁜 면(죽음은 새로 태어나는 시작으로 여겨 나쁜 면으로 여기지 않고 악을 깨끗이 씻어내어 아주 올바른 면으로 만든다. 이러한 원인은 올바른 면의 사용이 순간이며 상대적이기 때문이다)을 알리어 맑은 하늘의 화면을 통해 완성시킨다. 화면 전체의 암울한 분위기는 영화의 끝부분에 전환되지만 죽음의 신은 때마침 이 시기에 문을 두드리게 된다.

《非常突然》의 결말은 관중들의 예측 밖으로 감정이 발전되어 간다. 주인공이 갖은 고생을 다 겪고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후에 성공을 축하할 준비를 하지만 무의식중에 어리석은 도둑이 발견되고 한 바탕 저격으로 결말은 전패가 된다. 이는 갱 영화의 전형적인 유형과 감정전개의 흐름이 상반되어 전복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 각도로부터 전의 되어 비 오는 날에서 맑은 날을 넣고 주요한 것들을 새로운 사고에 호응하는 방법을 만들어 생각지도 못한 것(영화는 흐린 날은 주인공의 마음이 악렬함을 맑은 날은 주인공의 기분이 좋은 것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을가리켜서 무상의 주제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른바 뜻밖의 생각이라는 그 자체와 물과의 같은 구조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은 흘러도 머물지 않고 사람은 단지 다른 용기에 고정적인 형상을 사용해서 다른 시설(운하에서 댐까지)이 흐르는 방향을 억제하지만 특정한 임계점에 도달하면 그것은 언제나 놀랍고도 기이한 재능을 가지고 온다. 칼을 뽑아 물을 자르면 물은 더 세차게 흐르고 잔을 들어 우울함을 털어버리려 하면 더 우울해진다. 물을 뿌려 깨끗이 위장을 씻어내면 자체가 근심을 가지고 오고 애석한 것은 억제할 수 없고예측할 수 없는 사람의 불안과 애태움을 증거로 만들어 내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갱 영화가 상영되는 중에는 신경이 한차례 곤두서게 되고 영화의 끝이 되면 한번의 긴장을 풀게 하고 고조된 후에는 당연히 말할 필요가 없다. 주류를 이루는 영화는 일반적으로 악인의 최후의 반전이 있고 죽어가면서도 일격을 가하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늘 관중들을 당기는 주인공이다. 《非常突然》은 정말 오히려 클라이맥스가물이 흐르는 것이 멈추고 마른 상태에서 나타나는데 어째서 물이 흐르지 않을까? 흐르지 않는 물은 아마도 단지 환상, 꿈, 투영된 것이다. 마치 사장인 Mandy의 미래에 대한 동경과 같고 상점 진열대에 비치는 물의 그림자와도 같다. 고대그리그 미남은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사랑해서 결국에는 수선화로 변했다는 신화는 단지 물은 이렇게나 환상일 뿐이기에 자아는 이렇게나 허황된 것이다

사람은 심지어 물과 모든 비친 사물의 구별이 어려워진다. 객체는 사라지고 어떤 것은 영상일 뿐이다. 흐르지 않는 물은 만들어진 몽환적 영상의 필름 속에서 양조의 허위와 서로 중첩된 공허이다. 환상은 무한의 가능성을 제공하고기존의 고정 불변의 법칙을 이용해서 예측해서는 안 된다.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이론상 영화속에서의 여러 가능은 마지막에는 여전히 실제로 죽음으로 변화한다. 물이 흐르는 목적은 달성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흐르는 물의 사용은 시체를 떠내려 보내고 차안에서 다시는 확실한 물건을 가지고 피안으로 가야만 한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차안의 신분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 물은 가지고 가고 가지고와야 하는 책임이 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이 바른 길로 돌아설 때 사람은 그를 더는 이전의 선이 없고 이전의 악이 있을 수 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깨끗하게 씻겨지는 의의는 여기에 있다. 《非常突然》에서 궂은비가 흩날리는 것은 온통 물의 배경 하에 이야기가 진행이 되고 관중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와중에 하나하나의 고정 관념이 씻겨진다. 사람들이 영화 끝의 갑작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 힘이 더해진다. 이러한 힘은 거의 모든 주인고의 합리적인 존재로 가져가고 새로운 감상방법과 새로운 존재의 은유도 가능하게 한다.

《暗花》와 비교해 봤을 때 《非常突然》은 ?蛇의 무리가간악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돌보고 화기애애한 일가족처럼 보여 지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게 함축되어 있다.(홍콩은 한 가족인가?)그러나 최후에는 여전히 도망갈 수 없고 가족과 재산도 잃게 되는 비극일 뿐이다. 죽음의 신은 내지의 어리석은 도둑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였다. 정말 그를 어리석다 여겼다면 당신은 정말로 어리석은 것이고 스스로 홍콩인이라 여긴다면 뺨을 한 대 때려라. 홍콩은 물로 포위된 섬이고 97년의 여러 가지 과거들이 갑자기 다가 온 말로와 깨끗이 씻어내어지는 걸 따르고 있다. 가져와 진 것은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오늘 해야 할 일은 바로 하자! 내일을 누가 알 수 있으랴......?’라는 영화의 광고 문구를 돌아만 볼 것인가?

 

4. 출구, 왜 출구가 있어야 하는가?

 

 (1) 다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小?》


《小?》(1997)

제작: 徐克

감독: 徐克

성우: 林海峰,袁永?, 葛民?, ?沾, 徐克


80년대의 대표작 《?女幽魂》시리즈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小?》은 1997년(제작과 구상에 5년이나 걸렸다.)에 개봉 되었는데, ‘귀신이 사람이 되는 것 보다 낫다’는 소식을 알렸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회상하기를 피할 수 없게 하였다.

徐克은 8,90년대 홍콩영화의 전성기 시대의 중요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가 새로이 창조했던(동시에 촬영하고 동시에 방영된) 주류영화는 모두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일반적으로 모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女幽魂》이 그러하고, 《???》이 그러하며, 《笑傲江湖之?方不?》(林?震와 대역현상)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小?》은 결코 이 세편 영화의 인물이 한데 모인 것이 아니고,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새로 서술하면서 그 성적을 돌이켜보면서 단순히 스스로 만족한 작품인데, 왜냐하면 실제인 물판의 원조는 소식이 있으며, 10년간의 일과 사람이 있으며(1편은 1989년에 방영되었다), 만화에 이르기까지, 이미 중요한 전환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 1편 《?女幽魂》중에서, ?采臣(???연기)은 燕赤霞(午?연기)의 도움 하에서, 지하로 가서 ?小?(王祖?연기)을 구해오고, 게다가 그녀가 사람으로 환생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小?》에 이르면, 小?은 천신만고 끝에 윤회의 초기 단계로 들어가지만 최후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서 계속해서 귀신으로 살기위해 돌아가고,?采臣과 함께 사람과 귀신 연인이 된다.

사람과 귀신의 특별한 앞날은 전통적인 관념이다. 속성이 다른 두 가지 가 존재한다는 것은 감정이 발생하더라고 단지 인연만 있고 연인이 될 수는 없으며 필연적으로 그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 1편 《?女幽魂》에서 小?은 환생하지만, ?采臣은 비로소 제 2편 《?女幽魂之人?道》(1990)중에서 小?과 용모가 흡사한 여자인 ??(계속 王祖?이 연기)을 사랑의 대리인으로 만나게 된다. 《人?道》의 분장한 귀신은 忠臣(靑?의 아버지 天仇, ?招?연기)을 구하는데, 분명한 것은 ‘64사변’후 ‘黃崔행동’에서 민군인사를 구했던 것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나 인간의 새 애인과 새 임무는 정말로 ?采臣이 자신의 귀신 여자친구 小?을 잊을 수 있는가?

徐克의 많은 작품이 모두 이거한 ‘전97년’의 가슴 태우는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간신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오염된 연기와 독기 하에서, 인간세상과 귀신의 영역은, 인간세상과 마도의 영역은,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97년 대위기’가 점점 임박함에 따라, 인간세상은 점점 그것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는 일을 야기하고, 또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97년’의 ‘기억상실영화’에 관해서, 영원히 기억을 상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을 회복하는 것인지 불구하고, 모두 새로이 사람이 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세계의 의미를 직면하는 것이다. 《小?》에서의 小?은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자 한다. 실제적으로 그녀와 ?采臣은 영화 속에서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사실 모두 만화영화의 생산물이고, 모든 사람이 이미 사람이 아닌 것 이다. 또한 영화중에서는 귀신의 귀여움과 아주 괴상한 요괴의 조형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데, 만화영화화 한 후에 괴상함과 두려움의 정도는 크게 감소하여, 원본의 大奸角??와 黑山老?조차도 크게 악기를 받아, 黑山老?는 더욱 더 쿨한 유행가수가 되고 많은 팬들이 생긴다. 그러나 한번에 요괴를 죽이는 白云和?의 줄어든 도덕주의는 사람으로 하여금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요괴는 두렵지 않으나 요괴를 죽이는 것이 오히려 더 겁이 난다. 徐克은 앞의 작품에서 자주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과 그의 중국에 대한 열정은 《笑傲江湖之?方不?》와 《?方不?之?云再起》과 관련이 있고(중국역사는 바로 큰소리로 고상함과 도덕을 외치는 것이 가득하고, 이치로써 사람을 죽이는 사례가 있는가?), ?方不?는 언제 ‘요괴’가 아닌 적이 있었는가?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싶었고, 영화중에서 늘 이러한 그녀는 끔찍한 악역을 맏아왔다. (예를 들면 ?方不?를 죽이고 싶어 하던 任我行은 더욱 두렵고 한이 많은 악당두목이다.) 《?蛇 》(1993) 중에서 法海(?文卓)가 전심하여 요괴를 물리치고 스스로 그 힘의 사악함에 빠지게 된다. (李碧?원작의 法海는 완전히 간신배이지만, 徐克이 새로 바꾼 후 ?仙은 法海보다 더욱 잔인하다.) 보통사람은 주인공으로 하여 선택한다면, 매우 쉽게 요괴의 편으로 치우칠 수 있다.

그러나 추세는 추세일 뿐, 사람은 시종일관 사람이다. 사람과 요괴, 혹은 사람과 귀신의 거리는 비극 감을 조성하고, 더욱 희극을 촉진시킨다. 《?蛇》중에서 ??(?曼玉연기)은 항상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인간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배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에 가서야 사람은 그렇게 좋은 가치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것은 대체로 《小?》에서 小?이 선택한 기원과 같다. (제작한 시기상 《?蛇》과 《小?》이 동일 시기인가?) 비극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미래를 바라거나 정복하기위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눈앞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 못하다 ’는 사실을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실은 작가를 압박하여 반응을 만들어내게 하지만(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관중이 잣대가 되든지 말든지 간에) 예술적인 경영이 더 중요한 것이다! 徐克은 자신을 《小?》중의 고양이나 혹은 개의 더빙을 했는데, 정은 금보다 소중하다는 것, 사랑으로 시대의 변화를 맞서는 것이 목은 쉬고 힘이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사랑은 반드시 남녀 간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또한 영화에 대한 열정도 포함한 것이다.

?采臣이 많은 사람 속에서 그녀를 찾는데(小?을 찾다가 결국 어떤 집에 몸을 던지는데, 그것이 小?을 찾는 출구이다.) 小?은 여전히 그의 우산 속에 머물기를 원한다. 만약에 환생해서 다시 사람이 되는 것이 귀신세계를 빠져나와 인간세상으로 가는 출구를 만드는 것에 이른다고 한다면, 인간세계는 더욱 더 개혁될 가치가 없고, 小?은 정말로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왜 출구를 찾으려 하는가? (다시 적자하게 말하자면 : 무엇에 의거하여 다시 돌아오는 것이 출구라고 여겨지는가?)

?采臣의 우산은 폐쇄되었고, 이렇게 간격을 두고서야, 小?을 보호하는데, 그의 우산은 출구가 있다고도, 출구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2) 너와는 오지 않는다 - 《春光乍 洩》


《春光 乍?》

제작:王家?

감독:王家?

편집:???,梁朝?,?震


何??(???연기) 는 매번 黎耀?(梁朝?연기)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 라고 한다.黎耀?는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한번 또 한번 투항하지만.....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첫 번째 사랑의 상처의 예고가 된다. 한번, 또 한 번의 상처는 없지만 또한 어떻게 누적되고 또 중상이 된다. 또한 중상은 언제나 결국은 벗어날 날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 오늘黎耀?이 아마도 예전대로 맹하게 희롱을 당할 것이고, 결국에는 아직 예정된 시각이 되지 않았고, 도달하지 못한 반통의 최저한도는 어떠한가?

만약에, 王家?가 《 春光乍 洩》을 로드무비로 찍었더라면, 영화는 매 시작과 끝이 아마도 숨김없이 ‘ 현묘한 이치’를 드러냈을 것이다. 경계는 폭포전의 관계를 끊는 연극이고(흑백으로 돌아가야 하는), 축 전의 폭포는 보다 기이하다. - 사람은 비현실과 포옹하고, 다른 사람은 오히려 물방울로서 역사를 씻어낸다. 허와 실은 서로가 서로를 부각시키고, 끝없는 도로는 마음의 길이다. 폭포의 정서는 놀랍고도 애처롭고, 마침 이러한 전환을 맡고 있다.

관중의 각도에서 볼 때, 영화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도로’의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 두 홍콩남자는 아르헨티나로 달려가 스스로를 찾고 역시 스스로를 피하고 있다. 대폭포의 여행은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돌아온다. : 대만의 大男孩(?辰연기)는 세계의 끝에 가서王家?의 목소리를 남기고 싶어 한다. 도로는 동시에 사람과 배역의 마음의 도로이다. 이러한 감정, 생각, 관점들은 연장되고, 공간화 되며, 여정하의 몇 몇 현상으로 투사되어 나타나게 되는데, 소외라고도 할 수 있고, 초월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잠재의식은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데 출구를 찾지 못하다가 열리게 되면, 도로의 바람과 빛으로 변하고, 얼마든지 항상 느낄 수 있지만, 또한 막다른 곳에서도 새로운 희망이 생기고, 방출될 수도 있다.

당연히,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이 있어야 비로소 로드무비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하기 어렵게도, 이러한 ‘도로가 끝이 없이 먼’ 장면이 가장 쉽게 ‘도로’의 느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康城영화발전의 가장 아름다운 연출자는 마치 WimWenders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고, 《In a Year of Thirteen Moons》(1978), 《Love is Colder Than Death》(1969)의 요소인 연인의 맨 먼저 공격을 받거나 재난을 당함을 통해 Fassbinder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작은 방에서의 애정욕구가 서로 경쟁하는 것을 집중에서 촬영하기 위해,聯淑은 맨 먼저 공격을 받는 ‘수해인’을 정하였다.黎耀?는 매번 何??에게 속임을 당하고, 고열이나 는 그에게 밥을 먹이는 그는, 그가 아편을 빌리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거의 집을 옮긴다. 何??의 답례는 노발대발하는 것이었고 그에게 도련님이 성깔을 내는 것이라고 소리 지른다.

스스로 고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열려진 허상의 방향은 과거로 돌아가고, 악인의 힘을 빌려 양단을 한 곳으로 모으고, 또한 끊임없이 압박하는데 마치 한차례 ‘작은 방 시험’으로 조만간 폭발할 것처럼 보인다.다시 말하면, 두 사람은 길고 오랜 휴일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 휴일을 통해서 이미 시간을 보내고 또한 각색 연출된 처리방법을 통해서 오히려 그들 관계의 연소를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로드무비를 촬영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侯孝賢은 확실히 王家?를 능가한다. 《南?再?,南?》(1997)중에서 林强,伊能?의 배역이 종려루에서 천천히 여행하는 것이 물론 제일이지만, ‘台北-嘉義-台北’의 여행 중에, 도시의 혼란스러움은 결국에 농촌에서 완전히 실패한 계획이 비록 깊은 사념이고, 안색을 볼 수 있다. 만약 오늘날 《 春光乍 洩》가 두 사람의 관계를 길에서 처리하지 않았다면은, 좁은 지척을 우회하고 배회했다면은, 그것은 王家?가 또 한 번 정밀하지만, 실패가 없는 선택을 한 것일 것이다. 그가 없으면, (???이 내정되지 않았다면, 원래는 그러한 감정의 중압을 견뎌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발이 없는 참새’가 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은 맑음으로 해석되지만, 육신의 이원적 힘이 간절할 때가 되면, 연기자는 더욱 힘을 내게 되는 것이다. 梁朝?는 산꼭대기 에서도 있는 힘을 다하지만 임무를 완수해내지 못한다. ‘작은 방 시험’은 정말 어렵다!

어쨌든 간에, Fassbinder의 상처는 작은 착오일 뿐이고, 영원히 해방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黎耀?가 직접 느끼지만, 시작하면, 암묵적으로 그는 저항한다.

그중의 하나의 원인은, 작용과 반작용인데, 작가가 응집력을 강조하고, 내렸다가 다시 오르는 것의 가능성과 희망을 증가시킨다. 다른 원인은, 梁朝?의 신체가 팔리게 되는데, 그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何??을 깊이 믿는다고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몸은 여전히 ???에게서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극본에 씌여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정말로 발생하는 것이다. 관중이 黎耀?, 너는 떠나버려라! 라며 희망을 가질 때‘97년’암호의 포위 하에서 미묘한 공영시각에서 곧 이상한 감각을 만들어 낸다.

홍콩의 그 당시의 답답한 정치는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두 사람의 관계와 얽여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黎耀?의 그 상황을 보노라면, 관중은 그가 더 이상 何??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다. 원래 떠남은 떠남이지만, 영화 후에서의 정치적 암시장치(예를 들면 ?小平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 )는 우리로 하여금 ‘97년’을 연상하게 하고, 黎耀?이 대만으로 가서 둘러본 후,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가 何??을 떠난 가장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홍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는 거슬 말해준다.즉, 결국 중요한 것은 ‘97년 이후’였던 것이다.!

 

백경희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200101222 백경희 옮김
?天,《后九七?香港?影》,(香港:香港?影????,2003),pp.147-175.

 

 (3)진실도 아니다 - 《花?年?》


《花?年?》(2000)

 제작: 王家?

 감독: 王家?

 배우: 梁朝?,?曼玉, 潘迪?


周慕云(梁朝?역)??珍에게 '한번 해보는 것 뿐, 사실도 아닌데..' 라며 말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필자는 《花?年?》가 보다 더 '97이후' 영화답다고 본다.

1960년의 ??珍은 南?에서 旭仔(???역)을 만난다.(《阿?正?)의 줄거리) 1962년의 ??珍은 ?太(潘迪?역)와 ?太가 있는 곳에서 周慕云를 만난다. 이전에 분명 어디선가 그녀의 배우자인 ?씨(?耀? 음성)를 만났었다. 그리고 대운동장에서 빈 전화 부스로 전화를 걸던 그 순간 그녀는 이미 新加坡에서 周慕云에게 전화를 걸어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阿?正?》(1991)의 연장으로서 《花?年?》는 기교에 있어 더욱 세련되어졌고(모든 신에서 미적 감각을 더욱 중시함), 내용이 더욱 순수해졌다. 영화는 王家?가 대체로 인식하는 60년대(1967년 폭동전의 분수령)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邪西毒》의 ??友,《?落天使》(1995)의 金成武 혹은《花?年?》의 ?震과 대조되게 '방해'이라는 것이 없다. 활로가 필요한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 또한 없다. 王家?는 이미 스스로 만족하는 미학계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그는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치 수립을 위해서라는 하나의 상표를 만들었다.

왜 활로가 있어야 하는가? 활로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말이 가장 적절하겠다.

《阿?正?》의 '다리 없는 새'는 60년대 미학의 상징으로 인격표현과 줄거리의 '방해'를 받아 무척이나 제멋대로였다. 이 때 잠시 모든 서사기교를 써서 60년대의 이름을 빌어 어떤 사람이 속한 세계를 철저하게 드러내었다. 제목의 의미를 중복했으나 역점을 둔 것은 중국미학으로의 회귀였으며 의외로 모든 전작들보다 한 단계 발전하게 되었다.

중국미학은 신기하고 혁명적인 것이 아닌 경지에의 도달과 표현을 추구한다. 《花?年?》는 王家?가 심취한 함축, 처량미, 미래가 불투명한 듯한 소비적인 구조를 전에 없이 순수하게 나타내었다.

생명은 원래가 소모적인 것이다. 끊임없는 소모를 거쳐 미적 감각이 표출되는 것이다. 어떤 탄식을 막론하고 군더더기나 주석처럼 되어버린다. 《花?年?》의 ??珍과 周慕云은 旭子,《阿?正?》의 ??珍 보다 더 박진감 있는 사람이 아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분위기나 미적 요소에 가깝다. 그리하여, 이러한 '60년대'의 느낌은 '97이후' 의 '지체'와 '연장' 그리고 '던짐/흘려보내기'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왔다. 柏拉?의 동굴 학설을 적용하면 '후97'은 필시 '60년대'의 그림자이다. 후자는 유형이고, 전자는 현상/가상/환상이다. 후자가 있다면 전자의 장식성이 드러나게 된다. 周慕云은 차례차례 자신의 감정을 치장한다. 해보는 건 상관없다. 몰래 정을 통한 것처럼 위장해 그 쾌감을 즐기고도 도덕적인 심판은 피해간다. 우선 갖가지 감언이설을 늘어놓고 본다. 해보는 것이라 책임질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사건이 드러내려는 것은 우선 시도이고, 거짓말인지의 여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엇이 기호의 고수보다 더욱 자유롭고 가뿐한가? 무엇이 거짓말을 초월한 것보다 더 진정한 방탕아다울 수 있겠는가?결코 방탕하지 않고 우세를 누리는 것이다.이런 '방탕아'는 물론 카메라의 초점이 될 수 없거니와 인격표현에 있어서도, 활로가 있는지 없는지 정말 상관없다.

마지막 ?哥窟 부분은 많은 관중들이 무슨 내막인지를 도저히 알 수 없게 한다. 직접 ?哥窟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대개 왜 그 곳이 《花?年?》의 마지막 배경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哥왕조의 이전은 번성했으며, 원시 숲에 매장되었다. 굳은 나무뿌리는 세계문명7대기적이라 찬양되던 건축마저 눌러버렸다. 한 때의 태평성세와 아주 감동적인 자태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평범하고 꿋꿋한 생명인 것이다.

60년대의 柬?寨는 泰?大?보다 발달했었다. 70년대 정변과 赤柬의 시련을 거치면서 모든 것이 수십 년을 뒷걸음질친다. 金?에는 아직도 전국 인구를 반쯤 죽여 놓은 후유증을 찾아 볼 수 있다. 미래에 희망을 품고 있는 자가 없으며 하루하루가 그저 그렇게 흘러간다. 그들은 게으르지만 성실하다고 한다. 실제로 포기를 모르고, 진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포기하지 않지만 간신히 살아가는 눈빛이다.

王家?가 정말로 홍콩에 ?哥窟식의 은유/예언을 하고 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누군가의 구성 때문에 고개를 젓는다면, 태평성세의 홍콩신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구성과 이러한 편집이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春光乍泄》는 '무'를 세계의 가장자리에 남겨 두었다면 《花?年?》는 비밀을 타국 사원의 동굴에 남겨 두었다. 梁朝?는 이전 작품에서 해보지 못했던 일을 직접 경험했다. 村上春?의 이야기로 그는 일생동안 가장 중요하고 가장 완벽하다 할 수 있는 증거를 '그 곳'에 남겼다. '이 곳'의 자신은 세월에 따라 쉬지 않고 벗겨지고 침식되어 아무것도 없이 시들어 갈 수 밖에 없다.

 

(4)게임만이 존재한다. - 暗?시리즈


《暗?》(1999)

제작: 杜琪峰

감독: 杜琪峰

배우: ?德?, ??云, 蒙嘉慧, ?卓菱


《暗?2》(2001)

제작: 杜琪峰

감독: 杜琪峰,?永昌

배우: ?伊健, ??云,林熙?, 林雪,?卓菱


두 편의《暗?》모두 병사와 도둑 두 사람이 머리싸움을 하는 구조이다. 《暗?》?皮德(?德?역)는 불치병에 걸려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 그러나 매번 엄청난 선혈을 토해내면서도 여전히 태연자약하며 예전처럼 지혜롭고 매력이 넘친다. 영어 제목은 Running Out of Time인데, 시간이 없다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에게 숨 가쁘게 핍박 받는 협상 전문가인 상급 감찰자 何?生(??云역)이다.

何?生은 97년 반환 이후 何?을 위해 생존했을까? 해답은 대체로 ?皮德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 그는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러나 두 영웅의 두뇌게임을 즐기며 쫓고 쫓는 양상이 진행됨에 따라 관중들은 복수는 아마도 단지 하나의 구실(최소한 각색의 구실)이었음을 문득 알아차린다. ?皮德은 많은 탐정 중에서 何?生을 그의 상대로 삼는다. 사람의 장래의 죽음이 하나도 슬프지 않고 어디서나 침착하다. 그리고 적당한 선에서 그침으로써 ?(蒙嘉慧역)과 그의 미니버스에서의 인연이 지속되지 못하게 한다. 서서히 관중들도 복수 역시 단지 게임이고 모든 게 다 게임이었다는 것까지도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인생은 놀이와 같고 극도 놀이가 아닌가?그러나 반환 이후의 상황에서 중요한 일(만약 또 있다면)을 지체하면 놀이가 시간을 차지해 버리고 '중요한 일'도 놀이가 되어버린다.

게임 중에는 긴장할 만한 것이 없다. 게임에서는 대단한 것을 잃을 것도 없다. 처음으로 돌아가려면 단지 다시 한번 시작하면 그만이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진지하지 않다.

놀이 태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성질로 변했다. 《暗?》을 보고 다시 《花?年?》를 보면 周慕云이 감정을 끌어 ??珍과 시험한 것이 바로 참혹한 게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게임은 시험판 정도이며 태도 또한 ?皮德만큼 침착하지 못하다.

王家?가 아주 자유롭고 그럴 듯 하다면 杜琪峰은 오히려 자유를 묻어둔다. 그가 없다면 《花?年?》전에《春光乍泄》만 있었을 것이다. : 《暗?》이전에는 반대로《暗花》에서《?火》,《暗?》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발전 공간과 시간이 있었다.

《暗?2》에서 ?德?의 배역이 伊健(?伊健역)으로 바뀐다. 그는 ?皮德보다 더 신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何?生은 the chosen one이다. 그러나 두 남자의 두뇌싸움은 표면적인 구성일 뿐이며 실제로 두 사람은 현격하게 다르다. 伊健은 何?生과 암투극을 벌인 것보다 그를 인도하며 어디서나 앞서 나간다. 그가 기르는 아메리칸 매는 자유의 상징이면서 주인의 군주의 기상을 더욱 드러내 준다. 후반부에 伊健은 매를 何?生에게 전해주는데 그의 학예를 대대로 전수한다는 의미가 크다. 何?生은 갑자기 암시를 받아들인 제자가 되고 만다.

?皮德와 伊健 모두 협객과 도둑의 태도를 지녔다. 그러나 ?皮德는 사적인 은혜와 원한에도 연루되어 있었고 伊健은 오로지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준다든지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구해주는 등 공적인 것을 추구했다. 何?生은 천신만고 끝에 伊健의 소굴을 추적해 식의 마술사 형상으로 何에게 훈시한다. 《天涯海角》중 ?琳의 마음 속 마술사를 여기서 찾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暗?》의 ?皮德는 '반환 이후'의 침착한 태도를 선보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伊健이 바로 '반환이후'의 잠재적 구세주이다. 이 구세주는 예수 같이 성대하게 시대상을 탄식하는 한 종교의 주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 중 정보지식전파를 주관하던 赫米斯 墨丘利(Hermes/Mercury)와 닮았다. 그는 장난이 심해서 간혹 어떤 물질 속에 숨어 수도사가 그와 얼굴을 마주하기를 유도해 상대의 정신단계를 높은 단계로 올려놓고 그에게 한두 번 구해준다. 그는 연금술사의 하나님이자 마법사의 힘의 원천이다. Running Out of Time을 보면 상편의 '이왕 시간이 없는데 어찌 게임 한판 하지 않느냐? '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편의 태도는 '시간이 없지만 시간의 끝에서 당신의 생명을 변화시킬 지도자를 만나게 된다.' 는 것이다.

두 편의 《暗?》에서 何?生의 상사 ??法(??雄역)는 두 남자 주인공의 악역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러나 그의 책임전가는 권위를 과시하고 장부에 따라서만 일을 처리하여 반환 이후 특별행정구역 관리의 신분을 풍자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갱스터 액션 영화에서 종종 이런 역이 출현하지만 '반환 이후'와 '반환이 한참 지난 후'의 배경에 하에서 하찮은 관리와 잘못된 홍콩의 증표는 정말로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나중에 《????新年?》(?德?,??云,梁永琪,?文慧주연)의 ?德?가 재차 지도자의 역을 연기하는데, 이때는 마작을 가르친다. 이른바 '패를 다루는 품격이 있으면 인품이 있는 것이다', '역경을 아는자에게는 자연히 패운이 따른다' 라는 이러한 도리에 관중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暗?》에서 계승되어 온 침착함과 '한판의 게임에는 반드시 승패가 있다'는 상대적으로 초월한 태도는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火》로부터 프로의식을 계승하여, 설령 3개의 단체에 의해 누명을 쓰고 강탈당하는 상황일지라도 여전히 흔들림 없이 꿋꿋이 싸워 나간다.

《?火》의 연속으로 《PTU》(任??,林雪,邵美琪,?卓菱주연)는 계속해서 배우들의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杜식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 말고도 배태랑의 팀워크/남자의 의협심/프로정신을 계속해서 홍보한다. 나는 또 영화속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의 클라이맥스에서 극이 발생한 시간이 이른 새벽 4시라는 것에 주의했다. 《暗?》중 동쪽 벌판에 빛이 비쳐 배에 올라야 하는 시간도 4시이다. 결국은 그로 가장 阿?가 배에 타기 전에는 벗어날 방법이 없다. 각 지역 일꾼들이 이 때 ??道로 한결같이 모인다. 총탄이 지나거나 쓰러진 것은 모두 악당들이다. 이것이 정말로 가장 명확한 종지부라 할 만하다.

 

 (5) 97년 반환이 한참 지난 후의 상황으로 들어서다 - 《少林足球》


《少林足球》(2001)

제작: ???

감독: 周星?, 曾?昌

배우: 周星?,?薇, ?孟?,??,?一?


《????新年?》의 마지막에 모래사장에 마작판이 줄줄이 벌어지는데, 徐克의 《???》의 '??令' (林子祥판) 이 다시금 연주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장면과 《???》과 관계가 있다고 하기 보다는 《少林足球》의 후반부와 형태는 다르지만 의미상으로 유사하다고 하는 것이 낫겠다. 《少林足球》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는 武林연인(周星?가 연기한 阿星과 ?薇가 연기한 阿梅)를 통해 功夫의 열풍을 일으켰다. 양복을 입은 무리들이 백화점 앞 광장에서 싸울 때 ?功의 방법으로 빠르게 차에 올라 underdog 의 스스로 노력하여 이루어 낸 자취를 남기는 것은 《????新年?》와 마찬가지로 역경 속에서도 의지를 북돋우는 동작이었다.

《少林足球》는 홍콩경제의 침체와 대륙과의 경쟁에 대한 위협의 단계에 처해있음을 반영했다고 할 만하다. 영화의 주요 촬영지는 上海와 深?이며 少林寺의 스승과 제자로 이루어진 구단(줄곧 中?의 전국리그에 가입하고 싶었던 '少林兵' 로 불리우는 홍콩축구팀 南?를 떠올리게 한다)과 대륙의 ?旅魔鬼팀(上海申花팀을 생각나게 한다)의 대항을 통해 결국 온갖 난관을 뚫고 우승을 차지하고 또한 각자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어찌 구장 안에서의 포지션뿐이겠는가?) 의도는 매우 생생한 표현이었으나 지역 사람들의 푸대접을 받은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전작의 《食神》에서 周星?는 훌륭하게 관중들을 곤경에 빠뜨렸다가 마지막에 다시 돌아오게 만들고 더욱 명성을 떨친다. 이러한 과정은 자기 구제와 속죄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단순히 결과만 말하자면 자신을 이전보다 더욱 신처럼 만들었을 뿐이다. 《喜?之王》에서 그가 자조하는 한 무더기의 똥오줌이 바로 관중들로 하여금 일찌감치 훗날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전부터 유지해 왔던 자기신념과 프로의식을 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프로의식은 喜?之王을 정말로 코미디의 왕이 가능하게 해 주었다. 사람들이 보는 눈 없이 그것을 '똥'으로 보는 것은 단지 찬스를 놓친 것, 용이 되어 하늘을 날 수 없었던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마침내 성공을 이룬다.

만약 《食神》의 史提芬周는 이미 성공을 거두어 조리가 없는 것에 대해 자기 경계이다. 자신이 일을 떠벌린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다면, 《喜?之王》의 尹天仇는 바로 周星?가 명성을 얻기 전의 자신이며, 관중들에게 '한방면의 최고'가 성공한다는 도리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그 강한 의지와 득의양양한 태도는 《食神》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食神》는 반환 전인 1996년에 만들어졌고, 《喜?之王》은 이미 ?洲의 금융폭락을 거친 1999년에 나왔으며, 《少林足球》는 9.11테러 전야에 완성되었다. 홍콩사람들의 자아에 대한 수년간의 평가가 갑자기 여지없이 떨어졌다. 《少林足球》의 스승과 제자들 무리와 코치인 ?孟?가 최저 한계에서 다시 오르는 것은 분명히 港식의 코미디 방정식과 周星?의 자기 긍정의 의의 갖는 전작에서의 자조와 근신을 훨씬 초월한다. 그러므로 《少林足球》에서 발가락이 드러나는 낡은 운동화는 결코 단순하게《喜?之王》이 《演?的修?》을 베낀 것만은 아니다.

《少林足球》는 周星? 작품 속에 계속 존재하는 중요한 요소인 만화와 무협소설 요소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전자오락의 특수기술지원 하에, 《少林足球》는 만화와 무협 원형을 나타내었고, 잇달아 전자오락 속의 인물과 줄거리를 대응시켜 상호 호응의 효과를 냈다. 익숙한 전자오락세계의 젊은 관중들을 영화로 불러 모으는데도 크게 일조했다. 영화 속의 인물은 물론 아주 만화화(나쁜 놈 ??은 《???》속의 악역을 생각나게 하는데, ?孟?의 복수자 '?金右脚' 는 자주 IQ 박사식을 만지작거리고 충성을 가장한 간사한 표정을 짓는다.)하고, 사람들이 모두 알 수 있는 《少林足球》의 문화조차 미치광이 슈팅 게임으로 바꾸고, 단순화 한다.

이리하여 관중(특히 영화 후반에)들은 공포를 없애주는 복합적 오락을 경험했다. 그 공포는 대륙에 대한 잠재 혹은 드러난 공포, 인생 투쟁의 단계에서 발버둥치며 왔다 갔다 하는 망설임(이것은 周星?작품에 오랫동안 존재하는 과제이고, 《少林足球》는 가장 대표적으로 웃음 속에 감동이 있는 구성이다. 바로 스승과 제자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러 少林功夫를 널리 퍼뜨리는 장면을 말한다), 소외권력에 대한 공포.. 가장 중요한 것은 광란의 슈팅 중에 직접 드러나는 폭력적인 경향과 공격성이다. 이는 점점 관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심지어 무술 연습 시에 신체적 능력이 극에 달했을 때의 정신상태로 들어가 마지막에는 오히려 더 이상 폭력을 행할 수 없도록 한다.

폭력 오락 현실에서의 폭력사건에 미치는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심리학과 의학계에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폭력을 조장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폭력을 줄여준다는 사람도 있다. 영화 마지막에서 모두가 무술로서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기대, 슈팅게임 중에서 접하고 사용하는 폭력은 마치 무술경지의 이해로 넘어가는 준비인 듯하다.

《????新年?》와 《少林足球》모두 사회 하층민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만약에 보다가 피가 솟고 의지가 충만해져서 정말로 영화관에서 나와 무언가를 시작하고 곤경의 상황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少林足球》는 효과가 더 클 거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春光乍泄》의 '돌아와서 마주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작품의 특색/예술 구성/계급의식 방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주로 전자는 이미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당신을 현실 상황에 돌아오지 않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반환이 한참 지난 후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6) 실망과 실망속의 희망 - 《?兜故事》


《?兜故事》(2001)

원작: ?立文, ?家碧

감독: 袁建滔

성우: 李晋?, 林海峰,?君如, ?秋生


1996년, 李?珊이 올림픽에서 서프보드 금메달을 따내면서 '홍콩 운동선수는 쓰레기가 아니다'는 말을 증명했는데, 마치 홍콩의 의식이 전에 없는 절정에 올랐음을 말해주는 듯 했다. 97로 회귀한 낙관주의는 당시 결코 퇴색되지 않았다. : 홍콩이 건재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李?珊의 잡초 같은 분투가 성공한 것이 전파 매체를 통해 더욱 확대되어 홍콩 경제의 기적에 날개를 달아준 또 다른 신화가 되었다.

사실 李?珊이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기 전에 이미 국제대회에서 누차 승리한 바 있다. 그러나 줄곧 통속적인 '큰 상' (영화는 ?斯?, 운동은 올림픽, 학술은 ???상)만을 중시한 홍콩 사람들이 오히려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의 탄생으로 인해 '李?珊현상' 을 집단적으로 만들어 냈고, 이 현상이 《?兜故事》속의 결과를 괴이한 배경과 비유로 만들었다.

?兜현상은 ??보다 나중에 만들어졌다. 아기돼지 ??는 이미 90년대 그 지방의 중산층 기호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兜는 ??보다우둔했고, ?과 완전히 생사를 함께 했지만 이미지상으로 홍콩의 중,하층 계급에 더욱 가까웠다. 먹고 살만한 상황에서 몰락한 사회에서는 ?兜가 더욱 쉽게 동일시 되어졌던 것 같다.

영화 《?兜故事》의 자기 표방은 백프로 홍콩에서 만든 만화 영화에 있다. 21세기에 들어홍콩 사람들은 점점 역경에 빠져들었음을 자각하고, 홍콩의 창조력이 떨어져가는 상황에서 백프로의 소시민 우화로 본토 창조력을 펼쳐야 함을 깨달았다.

반환 후 홍콩은 여러 가지 상황 변화(밀입국 미성년자, 아시아 금융 위기, 조류독감, 적조현상, 공안악법환원, 8만5천 건설정책 실패 , 홍콩거주권/인민대표대회 법률 해석 분쟁, 무선 전신 주가폭락, 9.11사건의 영향, 기본법 23개조입법, 梁?松 차량구입에서 사스 파동에 이르기까지) 시민의 자아현상은 일찌감치 李?珊이 딴 금메달의 절정에서 미끄러져, 마이너스 자산이 되어버렸다. 《?兜故事》중 ‘??代夫’혹은 ‘??黎根’의 줄거리를 막론하고, 감동적이며 자조적이다. 친근하면서도 진부하지 않은 결말에 홍콩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자는 ?兜를《阿甘正?》중의 阿甘과 비교한다. 둘 다 '융통성 없고 우둔한' 성격을 지녔다. 다른 점은 阿甘은 종종 화로 인해 복을 얻어 美? 역사와 문화의 발전을 입증하는 요술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兜는 불완전한 세계에 얹혀 살면서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심지어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阿甘의 막강한 체력은 그의 어리석음을 보완하며, 이는 미국이 숭배하는 힘의 문화를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兜는 이러한 활로가 없다. 李?珊의 스승 黎根으로부터, 그의 굵은 두 다리를 믿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힘의 숭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쓸모없는 기술 '?包山手'는 끝까지 어리석은 ?兜에게 어리석은 행복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에 실제 인물이 출현하여 ?兜의 이야기를 더욱 현실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그리하여 이내 관중의 곁에 그 어렴풋한 애수(가장 강렬한 것은 화재 사건)를 자아낸다. ?兜의 실망 그리고 실망중의 희망은 실제로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 실물 촬영에 3차원의 컴퓨터 효과를 주었고, 아주 정교한 大角咀사회를 도는 장면과 익숙한 특유의 문화를 담아내었다. 차 식당, 蛋?,광고 간판에서 광고 전단지 등으로 (?秋生의 더빙이 특히 훌륭하다) 하나의 허구지만 현실을 담은 세계를 만들어 냈다. ?兜는 이미 허구의 인물이 아닌 홍콩의 처지에 대한 상징이요, '반환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홍콩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7) 죽음보다 못한 삶 - 回家


《三更之回家》(2002)

제작: ?可辛

감독: ?可辛

배우: 黎明,曾志?, 原?淇


이야기는 3일내에 발생한다. 방치된 경찰 기숙사는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흡사 폐허와도 같다. 과거에는 귀신의 영역이었으며, 이미 인간이 아니다.

남자 于?(黎明역)는 부인(原?淇역)을 위해 3년간 시체를 씻는다. 신기한 한약의 효능으로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서로의 애정을 되살린다. 관중은 처음에 영화속에서 아들의 행방을 쫓는 스파이(曾志?역)처럼 약간 터무니없으면서도 동정 어린 마음으로 미치광이와 사랑에 눈먼 자 사이에서 서로를 위해 잘못에 대한 그 성질을 규정하는데 급급한다. 사람들은 아내가 되기 3년전에 같은 방법으로 남자를 구해냈다는 것을 마지막에 다다르기 전까지도 알지못한다. 그러나 스파이가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상하고 과이하다고 해도 좋다. 경험자는 바로 한 눈에 알아챌 수 있다. ?可辛이 만든 것이 어디 한 차례의 황당무계한 사건, 한 바탕의 환각 뿐이던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히 일이 성공하려다 실패한 것, 살려낸 것이 죽음으로 변하는, 누가 봐도 정말로 안타까운 것에 대한 유감이다. 그러나 어떤 관중이 진정으로 黎明나原?淇의 역을 대신해 그 3년에 또 3년의 고독을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반응할 수 없는 상대를 대해야 하고, 신념을 고수하며 이해해 주는 자가 없다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지나긴 기다림 속에서 실제로 의혹이나 동요가 일어나는 순간이 있고, 상대가 깨어나지 못할까봐 두려워한 시간도 있을 것이다. 지치고 침울하면 한 사람을 지탱해 줄 것이 분명 필요했다. 曾志?의 역은 응당 남자의 부름이다. 고독은 위험한 것(군자는 고독을 조심하라)이며, 친구 혹은 적은 결국 방치된 경찰 기숙사 안에서 편하게 지내다가 말없이 사라진다.

그렇다. 확실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나날, 3년에 또 3년(남자는 불치병에 걸려 있었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3년간 시체를 씻는다. 또 여자가 병에 감염되어 남자가 여자를 위해 3년을 바친다.)을 보낸다. ?阿辛이 설정해 낸 상황은 무척 이상하다. 관중들은 왜 한 사람 한 사람 불치병에 걸리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자.'불치병'이 그 해 97년 과도기를 맞아 스스로 판단한 사형이라면 실로 경계를 뛰어넘은 것이며, 눈을 떠보면 여전히 그러한 홍콩이다. 감독은 자연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복숭아 꽃은 여전한데 사람은 모두 변한다. 하물며 복숭아 꽃도 실로 변하기 마련이다. 살아있는 송장이요, 걸어다니는 고깃덩이라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다. 《三更之回家》가 바로 그 생생한 예이다.

3년 또 3년, 반환 이후 영화가 개봉될 때는 마침 6년째 해였다. 마찬가지의 비유도 같은 해 개봉한 《无?道》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분명 우연이 아니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신념을 지키고 죽을 때까지도 변함이 없다. 남자가 총에 맞는 그 순간 관중들은 일제히 감동받는다. 소극적인 관점에서는 남자가 인을 구해야 할진데, 무의식 중에 한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만다.적극적 관점은 弗洛依德의 里比多(사랑하고자 하는 본능)로 설명할 수 있고 소극적 관점 또한 弗老의 사망본능이 반영된 것이다. 그들이 사망을 끌어안는 순간 나는 갑자기 《天涯海角》에서 ?琳의 살아있을 적 사진을 움켜쥐던 그 벌레가 떠올랐다. 만약 그가 시체를 쓰는 비방에 정통했다면 그가 于?로 변했을까? 曾志?의 탐정의 영향으로 黎明의 남자가 불꽃처럼 벚꽃처럼 처량하게 죽었다. 그런데 그 벌레는 어떤가? 그의 딸도 만약 于?의 네 살짜리 딸처럼 요절했다면 《天涯海角》의 '희망'은 허망해 졌을 것인가 아니면 한번의 죽음으로 여전히 계속뚜렷했을까?

죽지 않을 수는 없다. 부인이 깨어나면 남편이 또 병에 걸려야 하는가? 이러한 순환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다음세대는 이미 귀신의 영역에 들어왔다. 바꿔 말해서 두 사람의 미래는 이미 정해졌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어라. 두 사람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행복하고 즐거운 부부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 가능하다 해도 분명 홍콩에서는 아닐 것이다. ?可辛은 전작 《?蜜蜜》(역시 黎明이 남자주인공이며, 曾志?가 개입자이다)에서 해외의 화려한 무역항에서 ??君를 가세해 아직도 뜻하지 않은 연분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당연히 사람들이 병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당시에는 사스가 발생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曾志?가 《?蜜蜜》에서 연기한 貌哥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지막에 모두 남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없다면 ?曼玉은 계속 홍콩에서 黎明과 의지하며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홍콩에 남는 것은 분명 재앙이지 복이 아니다. 그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여러 과정을 거쳐 홍콩을 떠난다. 97년 반환의 악몽을 떠나 기대했던 타지에서 새롭게 살아간다. 우리는 《回家》의 커플이 97년에 도망칠 수 없었던 天津남자와 ?州여자라 상상할 수 있다. 여기서도 曾志?가 그들에게 사망으로 고통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조국에서 아버지를 찾는 정취와 비교해 曾志?는 영화 속에서 아들을 찾는 것을 실마리로 영화를 이어가게 한다. 아들이 실종되고 미래도 사라져간다. 마지막에 한약으로 정말로 부활할 수 있다는 남자가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괴로움과 실망, 유감과 후회의 정서는 자연히 죽음보다 더욱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阿辛은 曾志?가 《?蜜蜜》에서 죽어서 남을 돕도록 하고, 《三更之回家》에서는 오히려 살아서 견뎌나간다. 잠 시 후에 나올 《金?》에서 관중들은 그가 어떻게 고통스러운지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8) 천진난만한 홍콩 구제 방법 -《 ?精先生》과《 金?》


《?精先生》(2002)

제작: ?大?

감독:?心?

배우:?奕?,?欣桐,?巧音


《金?》(2002)

제작: ?可辛

감독: ?良?

배우: ?君如,曾志?,?德?,梁家?,胡?


《?精先生》이라는 영화제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王晶감독 스타일의 통속적인 멜로영화일 거라 생각한다. 기대를 가지고 영화관에 입장하든지 선입견을 가지고 입장하든지 간에 대부분 의외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영화가 뒷부분으로 가면서 뜻밖에 스스로를 격려하는 내용이라는 것! 더구나 홍콩 사람의 인격과 홍콩 문화를 반성하는 것을 주제로 한 속죄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개봉한 때가 97년 반환이 한참 지나고 나서의 시점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精先生》은 21세기 홍콩 영화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한편의 영화에서 여러 개의 유형을 포함하고 있지만 유형과 유형간의 관계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사랑이야기의 로맨틱 코미디의 요소도 있고 사무실에서의 경쟁, 사업 간의 경쟁으로 인해 폭소를 터뜨릴 만한 장면도 있다. 사람과 자신을 괴롭히고 사람과 자신을 조롱한다. 심지어 시공을 초월한 성인동화도 있고, 초능력을 이용하여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감독 ?信?가 각종 요소를 결합시켜 완전한 서술 구조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 중에서 제작자 ?木?이 UFO 촬영 시에 사용했던 기술을 사용했고, 중요한 장면에 환상적인 무술을 사용하여 관중들이 몰입하기 어려운 위치에서 관중들로 하여금 잠시 심취될 수 있도록 했다. 자신도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을 그럴 듯한 천진함으로 속여 넘긴다. 영화에서 이름이 적힌 돌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유형의 결합은 정합의 논리가 필요하다. 때로는 갑작스러운 것도 하나의 논리가 된다. 예를 들어 《?出?黎明》은 경찰과 깡패이야기를 갑작스러움을 이용하여 성공적으로 결합시켜 후 현대적인 전환효과를 만들어 냈다. 《?精先生》가 다소 산만한 것은 편집자가 이 문제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른바 ‘?精先生’은 극히 품위 없이 이익과 효율만 추구하며 남을 이용하는, 극도로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도시의 '지독한 남자'를 뜻한다. 편집자는 분명 이것을 홍콩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주인공이 이렇게 성공했지만, 성공과 동시에 실패의 복선을 깔고 있다. 운이 바뀌면 실패의 길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 ?奕迅이 연기한 ?俊?란 인물이 바로 이렇게 '성공'한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다. 진종일 돈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하고, 주위 사람들을 놀리는 게 취미이고, 친구와 가족도 그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수단에 불과하다. 영화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행동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홍콩 사람들의 몇 년간의 후퇴는 지나친 자기중심주의에 있다고 편집자는 말한다.

그러나 ?精의 본성이 원래 나쁜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 그도 자신의 꿈이 있었다. 전형적으로 사람을 구하고 세계를 구하는 사람인 소방대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 꿈은 그의 죽마고우의 애인 阿?(?欣桐역)까지도 감동시켰다. 阿?가 ?精이 되었을 때 그녀가 그를 대신하여 소방 팀원이 되었다. '청순'한 阿?는 阿?의 또 다른 자신이고 이미 지나간 행복한 날들을 대표하며, 이타주의가 영화가 말하는 '홍콩 구제책'이라는 것도 나타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원래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 를 배우도록 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俊?가 한번의 교통사고로 이후 자신이 일종의 신비한 힘을 얻었다는 것을 뜻밖에 알게 된다. 그가 다친 손으로 다른 사람을 접촉할 때마다 그 사람의 기분과 느낌,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을 해칠 때마다 자기도 상처를 입고, 잘해줄 때마다 자신도 즐거워졌다. 그리하여 줄곧 이기적인 홍콩 사람이 설사 남을 위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영화의 두 문장의 중심 문구가 있다.'앞은 막힌 이기다. 희망은 길모퉁이에 있다.' 이 말은 97반환 이후로 희망을 잃은 홍콩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앞날에의 희망과 희망을 나타내기 위해, ?俊?는 마지막에 정말로 불길 속에서 사람을 구해 그에게 실망한 阿?의 마음을 다시 얻게 될 뿐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布宜?斯艾利斯로 떠날 수 있게 된다. 영화의 낙관주의를 표현하기 위해 阿?는 원수인 '哥??'(?巧音역)을 더욱 돕는다. 비유는 분명 오늘날의 고통은 행복한 미래를 위한 고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낙관적인 정신은 ?可辛의 《金?》라는 작품에 더욱 잘 나타나 있으며 서사적 표현으로 잘 반영되어 있다.

만약 《三更之回家》가 ?可辛의 정서와 생명정서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면, 《金?》는 '반환이 오래 지난 후'의 상황에 대해 직접적으로 명확히 답해주는 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첫 부분에 곤궁해진 남자(曾志?역)가 阿金(?君如역)의 재물을 약탈하는데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현금자동입출기의 공간에 갇히게 된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가장 빈곤하면 불운하다고 한다. 그러나 阿金은 낙관적인 반면에 남자는 의기소침하다. (필자는 이 남자가 '《三更之回家)중 曾志?의 역할 확장으로 본다.강한 압박과 주관적인 실의에 빠지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다)

梁家?가 연기한, 사람을 놀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교수, ?日?가 연기한 金山?伯는 모두 홍콩의 어떤 계층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阿金이 美?에 살고 있는 어머니와 만나지 못하는 것은, 외국으로 이민간 많은 홍콩인들의 끊으려 해도 끊지 못하는 혼란스런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可辛역시 美?로 이민을 갔다. 우연인가 아님 의도적인가?) 영화에서 간혹 유명한 영화('?中人'과 '新??兄')와 다큐멘터리(地??用, 六四事件, 董建?등)의 장면을 삽입하여 애써 사회에 가까이 하려는 것이며,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어디에서나 뜻을 밝힌다. -《金?》는 홍콩을 위한 전기일 뿐만 아니라 홍콩을 구하는 선전 영화이기도 하다.

편집자는 일부러 阿金이 20세기 70년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의 피땀 흘리며 살아온 경험(부식가계, 나이트클럽, 묘지에서 '一?一’(매춘)에 이르기까지)으로 홍콩 사회의 변천을 입증한다. 그녀의 기복은 홍콩의 기복이기도 하다. 창녀로 홍콩을 상징하는 일은 이미 여러 번 있어왔다.(최소한 《新??客?》의 金?玉는 아직 기억하시겠죠?) 많은 문학적인 비유에서 홍콩 사람 모두가 오로지 돈만 바라보고 무엇도 바꿀 수 있다는 상업지상주의는 늘 존엄성마저 파는 창녀와 마찬가지다.

편집자는 阿金역시 홍콩 에서 가장 '힘'있는 무리를 대표하도록 설정했다.영원히 묵묵히 일하고, 성공 했을 때도 자신이 많이 얻지 못했다고 남을 질투하지 않으며, '쓴 맛을 보게 될 때'에도 자신을 원망하거나 누구를 탓하지 않으며, 재물을 약탈당했을 때도 상대를 위로 하며 앞날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君如 본인의 수년간의 연기 생애는 관중을 즐겁게 하는 것을 임무로 삼음으로써 주위를 즐겁게 하는 형상을 띤다. 그녀가 연기한 阿金은 편집자가 의도적으로 만든 하나의 이상적 형상이다. 총명할 필요도 없고(홍콩 사람들의 잔재주와는 구별된다), 이기적이지도 않으며, 역경 속에서도 전문 업종을 고수하고, 일을 즐기며, 추한 지를 따지지도 않고 정성껏 남을 위해 봉사하며 낙천적인 성격을 지켜가며 위기를 전환시킬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다.

?德?는 한편 그의 생명 지도자 역(《暗?》)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君如?》(2001, ??强감독, 留德?,?君如,梅?芳주연)에서 ?君如(이 역할도 阿金이다)에 대한 유혹과 서로에 대한 감동을 연장시켜 직업에 대한 간절한 태도가 자신을 구하고 홍콩을 구한 좋은 방범을 영화 속의 阿金(모든 홍콩이기도 한)에 널리 퍼뜨리고 있다. ?德? 자신이 비슷한 정보를 강조하는 홍콩관광협회 전단물을 찍었고, 영화가 그를 브라운관의 선전물을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 阿金에게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현실 《?精先生》과 《金?》를 보고 나서 관중들은 아마 다음과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 홍콩의 상황이 정말 극도로 열악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러한 스스로를 격려하는 막강한 영화로 시계추처럼 다시 오른다. 《金?》의 마지막에는 ???을 모델로 하는 대륙 남자(胡?역)가 그녀에게 거액을 갚음으로써, 그녀에게 '?山再起’(단지 희망이 있다는 것 뿐이다)의 희망을 갖게 한다. 예전의 홍콩이 조국을 성하게 했다면 오늘날은 오히려 대륙의 도움을 기다리는 상황을 제대로 구현한 것이다. 바꿔 말해서, 阿金의 자신감과 낙관주의가 현실을 기초로 할 때 단지 또 다른 본전에 불과하다. (만약 이를 풍수는 돌고 도는 것이라 하지 않는다면) 한 동안 홍콩 시민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위협했던 사나운 강도, 도적들이 뜻밖에 잠재적 구세주가 되었고, 실제로도 사람들을 어안이 벙벙하여 꿀먹은 벙어리가 되게 하였다.

 

나진선


부산대 언어정보학과 200003313 나진선
옮김
?天,《后九七?香港?影》,(香港:香港?影????,2003),pp.175-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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