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1.06.09
수정일
2021.06.09
작성자
진윤정
조회수
180

[비평문 2] 보르네오 섬의 노스탤지어 (Nostalgia)

철학에서 실재론에 입각하자면 경험하지 않아도, 경험해보지 못해도 실재하는 현실이 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현실이든, 크고 무거운 현실이든 그러하다. 이러한 실재론을 형형히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 李永平의 『望?』이었다.

작품을 읽기 전까지, 나는 보르네오 섬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화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도, 그곳에서 고향을 상상하며 정서적으로 방랑하는 李永平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 작품이 일깨워준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일상이 다망(多忙)하다는 이유로 잊고 살아왔던, 그러나 잊어서는 안되는 무거운 현실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이 작품을 읽고 다시금 자각하고 문제의식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천진난만하고 어린 여자애 朱?과 청년의 여로(旅路)로써 전개되는 이 작품은, “어린 소녀야, (···중략···) 제일 처음으로 돌팔매질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朱?, 나는 지금 너에게 자백하고 있단다. (···중략···) 나는 사람도 아니야, 나는 마귀야. ···(후략)” 이라는 대사를 통해, 결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어갈 것임이 아님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윽고 청년, ‘나’는 보르네오 쿠칭(kuching)성 밖 폐철도 옆 황무지에 있던 타이완 숙소에 사는 月?과 두 자매에 대해 고해하기 시작한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그곳 현지 사람들과 다르게 하얀 피부에 厦? 말투를 쓰는 이 세 여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 곳 화인사회와의 왕래 없이 외따로 고립되어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동네 사람들과 왕래는 없지만 그들의 관음적인 시선을 받곤 하는데, ‘나’ 역시도 그렇게 그들과 만나게 된다. ‘나’는 자매 중 한 사람인 菊子가 마당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다 들킨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과 다르게, 자매들과 같이 하얀 피부를 가진 ‘나’였기에 자매들은 ‘나’를 혼내지 않고 오히려 밥을 차려주고 수발을 들어주는 등, 귀여워해준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과의 교류로 ‘나’는 그녀들에 대해 하나 둘 알게 된다. 그녀들이 ‘검은색 송코(songkok) 모자를 쓰고, 몸에는 하와이 셔츠를 입고 허리에는 날염한 사롱(sarong) 치마를 두른’, ‘온몸에서는 샤워 코롱 냄새를 풍기는’ 말레이시아 부자들을 상대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는 것과, 그녀들이 고향인 타이완을 떠나게 된 이유가 취업 알선을 미끼로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갔기 때문이라는 것까지도 알게 된다.

한편 이 대목에서 그녀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는 과정은 ‘나’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는 것임에도 끔찍하고 참담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군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줄 알고 돈을 받는 그녀들의 가족들이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들이 비단 조선인과 중국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인, 영국인, 필리핀 인등까지도 있었다는 사실은 경악스러움을 불러일으켰다. 동아시아는 유기적인 결합 속에서 예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는 연대와 화합의 역사도 있었을 것이나, 이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극명히 그리고 호연히 나눠지는 일에 있어서는 확실하고 정당한 사과와 뉘우침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묘사는 이뿐만이 아니었는데, 공포와 한, 두려움 등으로 버티다 못해 결국 우물에 빠져 자살한 조선인 아가씨와 그녀를 가둔 우물에 대한 언급, 月?의 팔뚝에 남겨진 ‘위(慰)’라는 문신은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은유적인 방식이었음에도 형형하게 당시 피해자 여성들의 아픔과 참담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月?의 팔뚝에 남아있는 문신은, 그녀 스스로가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낙인이 아니라, 일본이 반성해야 할 제국주의라는 오점이자 주홍글씨라고 생각하였다.

단지 그녀들을 만나고 행복한 시절을 보내는데 그쳤다면 이 작품이 이렇게 성찰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이완 숙소에 사는 이 세 여인은 ‘나’에게 모성애를 아낌없이 드러내주었지만 결국 ‘나’의 철없고 끔찍한 행동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그녀들은 ‘나’에 의해 간통죄로 신고당하고, 화인들의 멸시와 경멸에 휩싸이며 결국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지독한 방식으로 결말을 맺은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현대 중문소설 작가 22인』에 따르면, 이는 李永平의 현 단계의 정서를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세 명의 타이완 여성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보르네오 고향을 되돌아보고 있으며, 또한 보르네오로부터 타이완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보르네오로부터 타이완을 되돌아보는’지 정확히 짐작할 수 는 없으나, 그는 마냥 고향을 따뜻하고 먹먹한 느낌으로 되돌아보지는 않은 것 같다. 그곳 마을 사람들이 그녀들을 향해 침을 퉤퉤 뱉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는 식의 묘사를 통해서 이를 느꼈는데, 모르긴 몰라도 고향을 아련하게 되돌아본다면 이런 묘사를 했을 것 같지 않았다. 깊이 알 수는 없으나 짐작컨대 아마 작가는 보르네오 섬의 화인 사회에게 역사적으로 어떤 성찰적 메시지를 남기고자 이렇게 표현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 생각에 근거를 보탠 것은 작가의 신분인데, 작가 역시도 작중의 인물들처럼 ? 중국 대륙인과 타이완인, 그리고 말레이 화인이라는 신분 사이에서 문자로써 방랑하고 있는 -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현대 중문소설 작가 22인』 에도 이러한 작가의 내력이 확실히 서술되고 있는데, ‘보르네오 섬에서 타이완 섬으로, 타이완에서 북미로 다시 타이완으로, (···중략···) 그의 꿈의 나라는 중국이지만 그럼에도 반생을 타이완에서 보내고 있다.’ 는 표현을 통해, 그가 여러 곳을 맴돌며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여러 곳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이러한 서사가 이른바 디아스포라 서사(diaspora narrative)를 행한다는 것까지도 알 수 있었다.

특이하다면 특이할 이러한 작가의 내력은, 작품과 더불어 나를 조금 더 복잡한 사유와 이입을 하게끔 만들었다. 어쩌면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부정당할 수 있고, 그 스스로도 어느 곳에 방점을 두고 정체성을 생각해야 할지 고민스럽겠다고 짐작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경계인’의 신분에 있기 때문에 외려 더욱 거시적이고 객관적인 시점에서 중국 대륙과 타이완, 말레이 화인 사회를 그려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는 작품을 감상하고 이국적인 이질감과 동시에 동질감을 느낀 나의 감상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본 작품인 『望?』과 더불어 그의 전체 작품인 『雨雪??:婆?洲童年?事』에서도 폭넓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가 그려낸 역사적 사건이 기존에 접했던 시선과는 보다 다른 시선에 있다는 것을 느껴, 더 효과적인 방식으로 알지 못했던 옛 역사를 주목하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의 작품을 통해 실재의 관찰자와 증인으로써 역할할수 있는 문학의 힘을 다시금 내밀히 인지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王德威 지음. 김혜준 옮김, 《현대 중문소설 작가 22인》, (서울:학고방, 2014)
黃?? 等 지음. 고운선/고혜림 옮김. 《물고기 뼈: 말레이시아 화인 소설선 ?骸》 (서울 : 지식을만드는지식, 2015) 중 《望?》-『雨雪??:婆?洲童年?事』 (台?,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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