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1.06.09
수정일
2021.06.09
작성자
이혜주
조회수
145

[비평문 2] 은은한 향기

“정말 모든 것이 ‘과거’가 되어 버렸을까? 후기 자본주의 문화는 더욱 문명적이고 더욱 정밀한 방법으로 머리를 쫓고 사냥을 하는 것은 아닌가?” 앞서 나온 이 문장은 《현대 중문 소설 작가 22인》에 따른 것으로 《余生》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머리 사냥에 대해 필자의 생각을 정리시켜주었다. 70년 전 하나의 의식으로 행해졌던 머리 사냥이 지금은 다른 모습과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풍습이 남기고 간 상처와 함께 진정한 여생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의문의 고리를 풀기 전 소설 속 舞?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규모 항일 운동인 ?社 사건의 정당성과 진실을 찾아 사건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타이야 부락과 川中?를 머물며 추적의 여정을 떠난다.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결여되어 있고 비교적 복잡한 서술을 가진 사료 속 역사보다 실제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장소를 직접 찾아 나서서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머리 사냥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이로 인한 상처들에 대해 들으며 ‘진짜 역사’를 알아가는 그의 여정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때 만난 장로, 巴干, ?那夫 등은 ?社 사건을 이끈 莫那 ?道를 ‘반항적 존엄’과 원시에서 출발한 ‘머리 사냥 의식’이라는 명분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舞?는 《현대 중문 소설 작가 22인》에서 언급하듯이 “수많은 낯설게 하기의 언어와 불안정한 어조를 결합하여 ‘이질’적인 서술체를 만들어내면서, 정신적으로 폐허가 된 사회의 기형, 허무, 퇴폐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독특한 방식을 통해 역사의 상흔을 추념하고 있다. 따로 단락의 구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도록 표현한 그의 방식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주어 필자는 단락을 나누거나 소주제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이는 ?社 사건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社 사건의 머리 사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원시적 관점으로 머리 사냥을 일종의 축제이자 애장품으로 보며 부락 단지 공동체의 풍속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명의 관점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당시 필연적으로 일어났으며 정치적인 성격에 속하지만 야만적인 풍습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바이고, 이 풍습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들이 생겨났으며 직, 간접적인 상처를 남겼다. 머리 사냥과 같은 습속은 ?迅이 말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머리 사냥이라는 풍습이 남긴 상처에서 나아가 타이완의 역사에 남겨진 상처까지 상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상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생각한 소설에서 표현된 상처는 ‘동화’의 측면에서 이해해 볼 수 있었다. 타이완은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한족 이주의 증가와 개간, 일본 식민 지배, 국민당 정부의 통치 등을 겪었고 이들에게 동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서 일종의 상처를 받게 된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社 사건은 일본의 지배를 받던 때에 莫那 ?道가 동화에 반항과 거부를 하기 위하여 일어난 것이고, 머리 사냥도 이 시기에 함께 일어났으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계기로 시작된 일이었으나 이 또한 하나의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결국 상처가 상처를 이끌게 된 셈이다.

상처는 아물 수는 있어도 그 흉터와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그리고 점점 희미해질 수는 있지만 글을 통해 후손을 통해 연하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이어지게 된다. 어쩌면 이는 우리에게 이 상처를 있지 않고 기억하라는 의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 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했던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처럼 역사의 상처를 아프지만 후손에게 전해 남기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 중문 소설 작가 22인》에서 “여생의 기억이란 사건이 흘러가 버리고 사정이 달라진 것에 대한 기억이다. 죽은 자는 이미 가버렸지만 산 자는 또 어찌 견디랴, 추억이란 헛수고이기는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추모의 형식인 것이다. 여생의 글쓰기란 고통이 가라앉은 후에 그 고통을 되새기는 글쓰기다. 천 마디 만 마디를 말하더라도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는 그 상처를 되풀이해서 새기고 헤아리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말하듯이 상처를 받고 나서 생기는 고통과 아픔을 작가가 여생과 연결 지어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후손들이 과거 상처를 잊지 않고 여생에서 기억함으로써 당시를 기리는 존엄성을 가진 추모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여생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였고, 진정한 여생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는 ?社 사건과 관련된 후손들을 직접 만나 역사적 사건을 통해 상처의 흉터를 가지게 된 인물의 후손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남아 있는 자들의 여생을 보여주고 있다. 남은 자들은 여생에서 이 상처를 보존하고 잊지 않고서 상처 그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하기보다는 ‘추모’의 모습에서 존중하고 기억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여생 속에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이러한 상처 속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작가가 말하는 인생이자 여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현대 중문 소설 작가 22인》에서 언급하고 있는 “절박하게 그는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사물 속에서 굳어져 버린 생명을 일깨우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우언이 그러했듯이-더 나아가서 살아있는 사물을 아득한 옛날의, 태초의 역사로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의미를 활짝 펼쳐내고자 했다.”라는 말도 작품 속에서 말하는 여생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었다.

과거에 존재했던 머리 사냥이라는 풍습 그 자체는 현재 사라졌지만 다른 모양과 색깔로 오히려 더 강력하게 사회에 모습을 보이고 있고, 해마다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를 가진 채로 유지해 나갈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는 타락과 진화의 반복을 하고 있고, 그 속에 우리들이 꼭 기억하고 세대를 거듭하여 이어져야 하는 일들이 있다. 남은 사람들은 이 조명되어야 하는 일들을 일종의 숙명처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게 진하지 않더라도 당시와 똑같지 않더라도 은은하게나마 그 향기를 전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여생이지 않을까?


[참고문헌]
왕더웨이(王德威) 지음, 김혜준 옮김, 《현대 중문 소설 작가 22인》, (서울 : 학고방, 2014)
우허(舞?)지음, 문희경 옮김, 《여생(余生)》, (서울 :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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