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0.06.17
수정일
2020.06.17
작성자
박솔잎
조회수
263

[보고서 6] 舞鶴, 《餘生》 : 삶을 대하는 자세

우허(舞鶴)의 《여생(餘生)》은 1930년 타이완 난터우현(南投縣) 우서(霧社)에서 발생한 원주민 타이야 족의 반일 투쟁에 대해 작가가 우서 사건의 생존자와 후손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기록하였다. 그뿐 아니라 작가는 우서 사건의 정당성과 적절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당대’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려고 한다.
이 속에서 작가는 그들의 여생을 이야기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우허 작가의 ‘여생의 글쓰기’와 이 사건의 핵심인 우서 사건의 ‘정당성과 적절성’에 대한 역사 평가, 마지막으로 ‘여생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우허의 ‘여생의 글쓰기’
《현대 중문소설 작가 22인》에서 우허는 1990년대 타이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허가 언제나 타이완 사람과 사회의 애매한 처지에 대해 조용히 탐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처지란, 그의 최신 장편소설의 제목인 일종의 ‘여생’의 기억과 글쓰기이다.”(p418) 실제로 《여생》이라는 소설 속에서 우허의 타이완에 대한 애정과 타이완인의 주체성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우허의 창작 특징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살펴보면 “그는 개인?가족?역사 기념비 아래에서 잔해를 줍고 조각을 나열하고 역사의 폭력을 기억하며(분열된) 주체를 다시 정의하고자 하는 이런 시도는 그로 하여금 20세기 말 화문 상흔 글쓰기의 중요한 대표자가 되도록 만든다. 우허의 작품은 근래 타이완 비애 문학이라는 전통 아래에 자리매김해 볼 수 있다.”(p439) 이러한 우허의 창작 특징은 《여생》이라는 작품에서 더욱더 뚜렷이 나타난다.

2. 우서사건의 ‘정당성과 적절성’
소설의 핵심 사건인 우서 사건은 일본제국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과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박해로 타이야 족의 추장 ‘모나 루다오’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항일 투쟁이다. 일본군의 진압 과정에서 700여 명의 원주민들이 학살되고 자살로 내몰렸던 사건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일본에 투항하여 수용된 564명의 ‘보호 지역’이 적대적 부족의 머리 사냥 공격을 받는다.
살아남은 자는 298명에 불과하고 이들은 촨중다오로 강제 이주 당한다. 이것이 제 2차 우서사건이다. 머리사냥의 원래의 의미는 타이완 고산족 풍요기원 의식이다. 하지만 이 행위는 우서 사건에서 수용소에 있던 아이들이나 부녀자의 머리를 잘라오면 이를 돈으로 교환하게 해 주었다. 소설 속에서 ‘나’는 우서 사건의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부락의 인물들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중 어떤 이는 머리사냥은 우서 사건의 수단일 뿐 동기고 아니고 목적도 아니다. 우서 사건은 머리사냥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반항이자 정치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아무 의미도 없는 야만적 행위하고 말하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당대’는 ‘머리사냥’에 반대한다. ‘당대’는 머리사냥 의식의 정당성을 부정한다. 이는 특히 제 2차 우서 사건을 규탄한 것이다. 나는 역사적 평가는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 2차 우서 사건의 머리사냥은 일본인이 배후에서 선동했다고 했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행위를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남겼다.
정치적 반항이었다는 명목아래 머리사냥이라는 사건이 정당성과 적절성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1930년도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머리사냥으로 사건의 정당성을 부정하면 안 된다고 말하겠지만 사건의 자료를 찾아보면서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았으나 폭력이고 살인일 뿐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3. 여생의 의미
소설 속에서 ‘여생’이라는 단어가 자주 출현한다. 소설의 제목 또한 여생이다. 여생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말하면 ‘앞으로 남은 인생’이다.
소설 속에서의 여생의 의미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생은 단지 살아 있는 동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우서에서 두 차례 살육이 지나간 뒤 살아남은 생존자를 뜻하는 동시에, 사건의 당사자와 희생자뿐 아니라 그 후손들이 감당해야 했던 사건 이후의 시간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작가가 말한 여생의 의미는 단순한 여생이 아니다. 《현대 중문소설 작가 22인》에서는 “내가 우연히 촨중다오에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전히 ‘여생’이라는 두 글자가 나를 남도록 만들었으며 나는 진실로 재난 후의 여생을 체험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의 상처로 자신의 응어리를 다스리는 것이다.”(p448)라고 말한다. 나는 우허가 남겨진 자들의 여생을 통해 자신의 삶과 대입하여 자신 또한 남은 여생에 대한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처음에는 우서 사건 ‘사건’ 그 자체에만 집중을 하여 이 사건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 나갈수록 작가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여생, 즉 우리들의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생존자들과 후손들의 삶을 통하여 삶은 늘 불안정하고, 불안정한 삶의 연속이며 누구나 미완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에게 남은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소설 속의 생존자와 후손들의 삶처럼 나의 삶 또한 늘 불안정함의 연속이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현재를 망치기도 하였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한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과거 때문에 현재를 파괴하고 미래를 파괴할 생각을 할 리도 없지, 여생은 이렇게 보내고 있다네, 무념무상으로 침대 위에서 말일세.” 그렇다. 과거의 과오들을 모두 잊을 수는 없겠지만 지난 일에 얽매여 현재와 미래를 망 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완전한 삶은 없지만 최선의 삶은 있다고 생각된다.
삶이 힘들지라도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고, 나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나의 남은 여생이 얼마만큼 인지는 모르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 참고문헌
《여생(餘生)》, 舞?지음, 문희정 옮김, (서울: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현대 중문소설 작가 22인 (跨世紀風華: 當代小說20家)》, 왕더웨이(王德威) 지음, 김혜준 옮김, (서울: 학고방,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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