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0.06.18
수정일
2020.06.18
작성자
차수빈
조회수
249

[보고서 6] 施叔靑, 《?名叫蝴蝶》 : 19C 말 홍콩 역사를 담은 소설

《그녀의 이름은 나비(?名叫蝴蝶)》는 施叔靑 창작 생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홍콩 3부작’ -《그녀의 이름은 나비》, 《온 산에 가득 핀 자형화》, 《적막한 저택》-의 장막을 여는 그 첫 번째 이야기이다. 施叔靑은 웡딱완이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흑사병이 창궐했던 1894년 전후부터 20세기 초중반에 이르기까지의 홍콩을 서술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나비(?名叫蝴蝶)》는 인신매매꾼에게 납치되어 홍콩에 오게 된 후 창부의 삶을 살아가는 젊은 여성 웡딱완과 동양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홍콩에 오게 된 영국인 관료 애덤 스미스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쥐가 인간을 통치하던 상황적 배경과 100년 전 홍콩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묘사하는 데 있어 施叔靑은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착수하기 전에 관련 사료와 민속 풍정에 관한 기록을 두루 읽었다고 하는데, 과연 당시 홍콩의 거리 풍경이나, 빅토리아풍 실내장식, 창부집의 가구 및 구조, 영국 함대 등이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고 작중 인물 에밀리가 설명하는 홍콩의 식물·조류·곤충에 관한 내용 역시 상당히 전문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 하나 이 작품의 특징적인 서술 방식으로는 앞 장의 주요한 사건을 뒷 장에도 중복으로 배치하여 장면 간 연결고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은 여음을 길게 늘이면서 눈 앞에서 그 특정 장면을 다시금 아른거리게 하는 듯 한 효과를 준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생국 대리 국장인 애덤 스미스가 전염병 발생 구역을 폐쇄하려던 중에 웡딱완이 있던 창부집에 잘못 들어가게 되고, 둘은 육체적 만남을 이어간다. 그러나 창부와 보내는 나날이 기독교적 종교 윤리와 사회 신분적 행동윤리에 어긋남을 자각하한 애덤 스미스는 이내 갈등하고 번뇌한다. 그의 고뇌는 비정상적 인종 차별·성차별 관념과 폭력적 성향을 통해 드러나며 그는 결국 웡딱완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둘 간의 이야기를 주된 줄거리로 하면서 施叔靑은 그들 사이사이에 1892년~1896년 홍콩의 사회 모습과 분위기를 적절히 배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웡딱완의 비극적 스토리와 맞물려 독자로 하여금 그녀의 이국적인 사련과 홍콩 개항 아래 최대의 역병이 서로 상동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창부로서의 과거를 청산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고자 겨우 남당관을 벗어난 웡딱완이지만 이국의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후 그녀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강렬하게 그 시절 죄악을 씻고자하면서도 다시 무력하게 자신의 운명을 창부로서 한계 짓는 그녀 모습에 동정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 연민의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작가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종교적 울타리 안에서 펼쳐지는 영국인들의 모순적 행태였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그 필치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식민 지배를 일삼았던 서구 열강의 정서적·정신적 근간 ‘기독교’와 ‘기독교인’을 향한 작가의 은근한 조소가 비춰진다. 施叔靑의 종교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작품 속 기독교 신자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이중적인 모습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와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징벌하기 시작했으며,…”라며 전쟁 같은 상황을 반기고, ‘우상을 숭배하고 돌멩이·태양·달을 떠받드는 벌거벗은 인디언 토착민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었으며, 그런 놈들의 머리는 칼로 베어 버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톰스 신부, 성령 앞에서 회개하고 구원받길 원하면서 이상(異常)적 폭력성을 드러내며 웡딱완을 죽일 듯 하는 스미스, 예배를 마친 뒤 남 험담을 즐기는 영국인 부인들,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위생국 국장 윈저 등이 바로 그러하다. 이를 통해 施叔靑의 반(反)기독교적 성향이 드러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의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인용하여 패권주의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세속의 구원자나 절대적 권위자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오만방자함을 꼬집으려 한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혹자는 《그녀의 이름은 나비(?名叫蝴蝶)》에 페미니즘 사상이 녹아들어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나는 王德威선생의 의견에 동의한다. 王德威선생은 “그녀(施叔靑)는 도대체 여성을 위해 불평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또 한 번 여성 신체의 착취를 의도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하고, 갖은 모욕을 당했음에도 연인의 정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봉건주의적 남성주의 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여성과 많이 닮아있다. 그러나 웡딱완을 그렇게 만든 것이 정말 ‘남성’때문인지, 식민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화인 여자들이 강구한 ‘생존법’일 뿐인지, 제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한 그녀의 태도에서 비롯한 것인지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비록 강제성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웡딱완이라는 인물이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창부’라는 점에서도 과연 이 작품이 여성 권리와 주체성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나비(?名叫蝴蝶)》이 페미니즘을 은근히 건드리고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를 표하지 않는 바이다.


《그녀의 이름은 나비(?名叫蝴蝶)》는 1892년에서 1896년, 약 4년간의 홍콩만 담고 있기 때문에 施叔靑 창작 인생의 정수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선 ‘홍콩 3부작’의 나머지 두 편도 읽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2부작 《온 산에 가득 핀 자형화(遍山洋紫荊)》에서 보다 더 넓은 역사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녀의 이름은 나비(?名叫蝴蝶)》 말미에서 예고한 웡딱완과 화인 통역사 ‘괏아빙’의 이야기를 점진적으로 풀어나가고 있어서 1부작에서는 다소 보잘 것 없었던 그의 역할이 매우 기대가 된다. 또한 화인 작가인 施叔靑이 식민지배자 입장이었던 영국인들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도 후속편을 궁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혈통으로만 따지고 본다면 피지배계급 측인 화인 작가가 서구 지배계층의 입장이 되어 리얼하고 아주 그럴싸하게, 마치 영국인들이 실제로 그랬을 법한 느낌으로 중화문화를 비방, 조롱한다. 이런 자학적 유머 역시 작품을 읽는 데 소소한 재미를 불어넣어 준다. 그런 중에도 격동적이고 감각적인 홍콩 역사를 빠뜨리지 않으니 이 역시 그녀 작품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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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그녀의 이름은 나비(?名叫蝴蝶)》, 施叔靑지음 , 김혜준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王德? 지음, 김혜준 옮김, 《세기를 넘나드는 작가들-현대중문소설작가 22인》 , (서울:학고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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