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ese

차이나타운을 찾아서

 

2009년5월  량난 梁楠(부산대학교 박사과정) Liang Nan

 

우연히 《한국,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책 제목을 보고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머릿속 단편적인 기억을 더듬어 찾아갔다. ‘인천에 분명 규모가 작지 않은 차이나타운이 있지 않았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부산에도 상해거리가 있다고 들었는데......’라는 의문을 가진 채 나는 그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책을 덮고 마음이 오랫동안 진정되지 않았고 갑자기 상해거리에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부끄럽게도 부산에 온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상해거리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변명 같지만 그곳에는 중국인을 만날 수도 없고 재미도 없다는 친구의 말 때문이었다. 부끄러움과 흥분을 가지고 나는 차이나타운을 찾는 길을 나섰다.

상해거리는 부산 초량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대한민국정부가 부산으로 옮겨지면서 중화인민공화국 주한대사관 역시 부산 초량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후 상해와 부산은 양국의 교류촉진을 위해 자매도시를 맺었고 부산에 “상해거리”를 조성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위치는 초량으로 선택되었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부산대학교에서 상해거리까지 가는 방법은 매우 편리했고 부산대학앞 지하철역에서 1호선을 타고 약 30분 남짓 걸려 부산진역에서 내려서 1번 출구로 나가면 한눈에 띄는 붉은 색의 패방(牌坊, 대문모양의 중국 특유의 건축물)을 볼 수 있다. 그 위에는 황금색으로 크게 쓰인 ‘상해문’이라는 세 글자가 이미 상해거리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패방은 본래 1949년 이전 봉건정치계급(정권)이 공덕을 표창하고 예절과 도덕을 선양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약속이나 한 것처럼 중국의 상징이 되었다. 상해거리의 패방은 중국 고성의 단면적인 패방의 건축 구조와 비슷해서 꼭대기에는 아치형의 처마가 있고, 위에는 기와가 깔려있으며 처마 모서리에는 각각 용의 머리가 새겨져있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패방은 일반적으로 처마 밑에 네 개의 굵은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사이에는 통로가 세 갈래로 형성되어 있다. 중간 통로는 비교적 넓어 차나 말이 다니는 길이며 양옆의 통로는 비교적 좁아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로 쓰인다. 이러한 설계에는 봉건계급의 색채가 나타난다. 반면 상해거리의 패방은 오히려 중간의 두 기둥을 줄이고 아래에 황금빛 술 모양이 늘어뜨려져 있는 것 같이 만들었고. 편액에는 황금빛 글자가 서로 빛나고 있어 부드러우면서 위엄있어 보인다. 나는 설계사의 지혜에 찬탄하면서 어깨를 으쓱하며 패방의 가장 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패방을 지나자 눈앞에는 온통 화려한 중국등으로 가득했다. 붉은색 물결 속에 황금용이 보였다 안보였다하는 사이 자세히 보니 원래 거리의 가로등 역시 하늘을 나르는 용이 띠를 두르고 있었다. 붉은색과 황금색이 서로 빛나면서 마치 ‘이곳이 바로 상해거리, 이곳이 바로 차이나타운입니다’라고 열심히 알리는 듯 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왼쪽 편에는 2층 건물 두 채와 기품이 느껴지는 상호의 중국 식당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식당 안에는 손님이 없고 종업원들만 여유를 부리며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오른쪽 편에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은 왠지 동떨어진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 옆에는 몇 층 높이의 회색의 외국어가 가득 적힌 숙소(여관)가 있어 상해거리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좀 더 앞에는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가 있어 함께 간 친구는 디지털카메라의 메모리를 사고 싶다고 말하고는 우리는 바로 함께 걸어들어갔다. 그곳에는 몇 명의 관광객이 있지만 한국관광객 한명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 갈색눈과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어느 가게 여주인은 장사수완이 대단해 보였다. 한국어와 영어를 쓰면서 관광객들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는 영어로 손님을 배웅하고는 곧 몸을 돌려 산동사투리가 약간 섞인 유창한 중국어로 우리를 불렀다. 친구는 여기 물건이 학교 앞에 파는 것보다 싸다고 하면서 얼른 구매했다. 원래는 주인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계속 바빴고 길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그다지 없는 것 같아 보여 우리는 눈치껏 곧바로 일어섰다. 그녀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화교이며 서른 살 정도 된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부친의 본적은 산동이지만 집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모친은 한국인이고 그때 가게에 함께 있었지만 중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가 몇몇 가게와 식당의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니 가게 주인은 티비를 보거나 의자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드물었지만 진한 화장을 한 러시아 아가씨가 길가에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따금 머리를 들고 우리를 보고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붉은색과 황금빛으로 가득한 떠들썩한 이곳에서 이처럼 어울리지 않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쓸쓸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20여 년 전 이미 이곳에 화교가 생활하고 있었고 그때 그들을 중국상인(华商)이라고 했다. 청나라 광동의 수사제독 오장경(吴长庆)은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3000명의 군대와 3척의 군함, 2척의 상선을 이끌고 산동 옌타이(烟台)를 출발해 경기도 남양주만에 도착했다. 그때 오장경을 따라 조선에 온 40명의 청나라 상인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최초의 한국 중국상인이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정부의 보호와 지지에 따라 많은 수의 중국상인이 벌떼처럼 몰려와 당시 전국적으로 총 170여명의 화상이 있었고 그중에서 부산은 20명 남짓이었다. 그들이 바로 부산 최초의 중국상인인 것이다. 비록 한국화교의 역사는 미국에 비해 조금 늦지만 미국화교의 棄民과 막일을 하는 불법노동자의 신분과 다르게, 청나라 정부의 지지 하에 그들은 매우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신상 안전까지도 모두 청나라 군대가 보호하였다. 위엔스카이(袁世凯)가 조선 주재 총리교섭 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를 맡을 때에는 더 적극적으로 중국상인을 지지하면서 그는 부산에 조계를 개방하도록 한국정부에 강요하였고 계속해서 부산의 중국상인에게 청신호가 켜졌다. 정부의 지지와 중국상인들의 단결, 신용, 근면함이 더해져 한국의 중국상인은 눈부신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이후 일본의 침략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많은 화교들은 하는 수 없이 한국을 떠나야했고 미국, 캐나다, 유럽과 동남아 이외의 지역으로 이민을 가거나 대만으로 되돌아갔다. 또한 한국은 외국인 입국 제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많은 화교들은 문전박대를 당했다. 마지막 부산에 머무른 화교는 만 명 남짓에서 현재 2000여명으로 줄었고 그중 아직 일부는 신고는 했지만 사람은 여기에 없는 경우도 있다.

상해거리는 61,300 평방미터로 그다지 크지 않고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이 있다. 방금 왔던 상해문이 서문이고 동서방향의 중앙거리(主街)의 반을 걸으면 바로 앞에 길 끝에 있는 또 다른 패방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해문과 멀리 서로 빛나고 있는 동화문이다. 이때 또 중앙거리와 서로 십자형으로 교차를 이루는 남북방향의 길이 나타난다. 좌우를 내다보면 눈앞에는 온통 울긋불긋한 간판이 펼쳐져 여기가 상업거리임을 알려준다. 중앙거리 양쪽, 상업거리의 입구에는 중국 경극 속 인물과 같은 두개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우측은 긴 갑옷과 수염의 위풍당당한 무생(武生)이고 좌측은 여장수 무단(武旦)으로 그 둘은 상업거리의 홍보대사이자 수호신이다. 나는 먼저 무단 쪽으로 걸어가니 장춘방, 장성향, 중남해, 일품향, 낙천각 등 중국식당들 사이에 뒤섞여있는 술집과 노래방, 사우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중앙거리의 깔끔함이 덜했고 많은 가게 앞에는 오히려 세월에 가려진 무거운 어둠이 더했다.

식당과 술집 틈 사이에서 나는 중국서예 예술가게인 ‘상해화묵(上海华墨)’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중국고대의 훌륭한 문방사우부터 명인들의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서예책자까지 없는 게 없었다. 이곳은 가게들이 가득한 상업거리 속에서 진한 먹 향기를 풍기게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무생이 있는 곳을 지나가니 거기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상해거리 최대 규모의 중국요리점인 홍성방(鸿盛坊)이다. 생각해보니 조금 전 상해문을 들어올 때 봤던 가게 이름인 것 같았다. 여기야말로 중국 정통이라고 했다. 장사가 잘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친구는 나에게 정통 교자를 먹으려면 좌측 거리에 있는 일품향(一品香)을 가고 자장면은 우측 거리의 원향재(元香斋)를 가야한다고 알려줬다. 여기를 추천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으로 걸어가니 이쪽 길 역시 규모가 작고 큰 홀과 내부에는 좌석이 가득 늘어서 있는 중국식당들이 즐비했다. 더 작은 가게는 몇 명의 인원만 들어갈 수 있는데 이러한 곳의 대부분의 수입은 배달이나 포장이다.

상해거리의 식당이 규모가 작은데 반해 이렇게 많은 이유를 찾으려면 사오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한국화교의 전성기로 돌아가보면 당시에는 그들이 한국에 점점 위협이 된다고 느꼈다. 화교들에 대한 제한정책에 따라 한국의 중국섬유업은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고 무역업 역시 잇달아 장애를 받으면서 120여년 역사를 가진 중국식 농업 농작물재배업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요식업과 잡화업만이 살아남아 화교들의 생계를 유지했다. 1950년대 한국의 중국요리집은 모두 화교가 운영하였고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0년대에 들어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요리집은 황금기를 맞았고 당시 전국적으로 모두 4000여개의 (화교가 운영하는)중국집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인이 연 중국요리집이 점점 많아지고 화교가 운영하는데 큰 영향을 주면서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거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 사업을 키워나갔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900여개만이 남았다. 운영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으면서 화교들이 운영하는 요식업의 상황이 갈수록 나빠졌다. 지금 식당들의 대다수는 그때 풍파를 겪었지만 역경을 딛고 함께 견뎌온 곳이다. “자장면의 쫄깃함이 우리들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식당주인의 말과 같다.

동행했던 조선족 친구는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중국식)콩국가게의 老华侨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자아이가 카운터 앞에 서서 티비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티비에는 한국의 인기 오락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어로 아이에게 물었고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며 주방에다 대고 소리쳤다. (아마도 대만어일 것이다) 작고 마른 체구의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어르신이 안에서 걸어나왔다. 그는 예순 남짓 되어보였고 등이 약간 굽었지만 몸과 너무 어울리지 않은 튼튼하고 힘있는 팔에는 담배를 쥐고 있었다. 흐릿한 눈으로 우리를 훑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친구가 서둘러 자기소개를 하니 어르신은 “아, 아...”하고는 우리에게 앉으라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앉고 나서는 모두가 매우 어색해 하는 것 같았고 잠깐 동안은 적당한 화제를 찾을 수 없어 그는 여자아이에게 커피를 타 오라고 했다. 우리는 그가 여기에게 얼마동안 일을 했는지 물었고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약 60년 정도 됐다고 했다. 우리는 그가 가게 주인인지 또 물었고 그는 주방장이 어디 무슨 사장이겠냐고 말했다. 여자아이의 엄마가 가게 주인이지만 최근에 대만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우리는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또 물으니 그의 얼굴에 주름이 조금 펴지면서 모두 미국에 있노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가족들이 많이 그립겠다고 그에게 말하자 그는 심한 산동사투리로 담담하게 “뭐가 그리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때 가게에 젊은 여자 두 명이 간식을 사러 들어왔고 말하는 걸 들으니 역시 산동사투리였다. 두 여자가 간 뒤 그는 우리에게 앞에 있는 마사지샵 사람들인데 모두 한국인에게 시집을 갔다고 했다. 입가엔 경멸하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화교사회에서 특히 1세대가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남자가 한국여자를 아내로 얻는 것은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중국여자가 한국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에는 그다지 너그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언젠가 화교학교의 한 교사가 이곳의 ‘모범’이 되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닌 그의 세 딸이 모두 대만으로 시집을 가서였다. 이곳의 화교는 딸을 이곳의 화교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시집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바로 대만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곳의 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이유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각자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나와 친구는 따로 돌아본 뒤 다시 모이기로 결정했다. 식당에서 나가서 혼자 앞으로 걸어가니 멀지 않은 곳에 눈에 띄는 붉은 문이 있었고 문 위의 붉은 대들보에는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부산화교중학’이라는 여섯 글자가 나란히 배열해있었다. 부산화교학교의 모체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서울화교학교가 부산으로 옮긴 것으로 당시의 설립조건이 너무 어려워 천막을 지어 학교를 세웠다. 지금은 그런 간이천막은 이미 볼 수 없었고 그것을 대신해 부산화교들이 공동으로 자금을 모아 지은 4층 높이의 교실 건물이 있었다. 부산의 화교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있었고 옆쪽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오른쪽에 새로운 3층 건물이 바로 부산화교유치원이었다. 얼마 전에 유치원 교실 공간이 부족해 다시 기부금을 거둬 작년 2월 신설 유치원 준공을 마쳤고 4억 5천여만원의 비용이 소모되었다고 했다. 건물로 들어가니 앞쪽 교실에서 전해오는 피아노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피아노 소리를 따라 걸어가니 음악실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정신을 집중하여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교실은 크지 않았고 칠판, 작고 오래된 검은색 피아노와 열 몇 개의 학생용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고개를 든 남학생은 나를 보고는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이고 피아노를 봤다. 나는 왜 수업에 가지 않냐고 그에게 물어보자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피아노를 보더니 잠시 생각한 뒤 천천히 말했다. “오늘 시험이라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피아노를 어떻게 이렇게 잘 치냐며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쳐주신거냐고 물었다. 그는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학교에는 피아노수업이 없어요. 친구들과 배운거에요”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더 이상 수줍어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문과반이고, 반 학생들이 그다지 많지 않고 수업을 할 때는 대만 교과서를 공부하고 모두 중국어로 수업을 한다고 했다. 그는 또 대만의 연휴뿐만 아니라 한국의 연휴에도 학교는 모두 쉰다고 알려줬다. 한창 얘기하고 있는데 그의 친구가 시험이 끝나 교실로 왔다. 두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말의 속도는 방금보다 더 빨랐다. 뒤에 온 친구가 남학생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준 사람이라고 해서 나는 함께 합주가 가능하냐고 물어보았고 그들은 선뜻 승낙했다. 피아노 연주는 비록 능숙하진 않았지만 너무 듣기 좋았다.

현재 설비시설은 완비되었지만 학생모집문제가 화교학교의 새로운 위기가 되었다. 위기의 근원은 여러 가지인데 화교인원수의 감소가 그 중 하나이다. 사실 화교는 이미 예전처럼 학교부근의 거주 지역에서 모여살지 않고 부산시내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학교에서 거리가 멀고 학교를 다니는 것이 편리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가까운 곳에 입학시킨다. 게다가 갈수록 많은 젊은 세대의 화교들이 한국을 더 많이 이해하고 한국인과 더 많이 사귀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더 나은 생존과 발전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을 점점 의식하면서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한국학교에 보낸다. 학생문제 때문에 한국의 많은 곳의 화교학교는 모두 폐교의 위험에 직면해있다. 최근 한국정부의 정책이 완화되면서 화교학교가 한국학생을 모집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중국어 열풍’의 영향으로 많은 한국의 학부모가 이중언어 학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화교학교로 보내면서 학교의 위기는 다소 완화되었다. 대만에서 온 무용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니 부산화교유치원은 모두 30명의 학생이 있고 그 중 90%가 한국 어린이라고 했다. 그는 또 초등학생들을 맡고 있는데 10명의 중국학생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두 한국인이라고 했다.

친구와 약속한 시간이 되서 나는 서둘러 만나기로 약속한 동흠(彤鑫)이라는 중국식품가게로 갔다. 아마도 부산에 있는 중국유학생들은 모두 이곳을 알 것이다. 가게 주인은 자신있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유학생들은 아마 대통령이 누구인지 몰라도 우리 가게 주인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가게 주인은 천진(天津) 사람으로 이전에 남개대학(南开大学)의 우등생이었다. 학교를 다닐 때 지금의 한국인 아내를 만나게 되면서 결혼 후 부산에 정착해 이 가게를 열게 되었고 항상 투자하는 명실상부한 ‘新华侨’이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으로 항상 여기 있는 중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해 경기불황에도 장사는 유지될 수 있었다. 가게에는 중국술, 중국차, 중국식품, 중국조미료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고 우리는 오늘 저녁에 함께 먹을 양고기를 사려고 하니 여기에서만 양고기를 살 수 있다고 했다. 돈을 내고 나가려고 할 때 가게 주인은 우리에게 이틀 뒤에 상해와 부산이 협력하여 개최하는 상해거리 축제가 있다고 하고, 이미 6회를 맞이한다고 관심이 있으면 와서 구경해도 좋다고 광고전단지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자세히 광고전단지를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이번 축제를 계기로 상해 거리가 부산 도심 속 이국적 분위기가 물신 풍기는 차이나타운 특구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한국정부는 122억 원을 들여 2012년까지 한중문화관광센터를 건립하는 등 초량동 상해거리 일대 11만4천917㎡를 '차이나타운 특구'로 조성할 계획이다.”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1999년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지금까지 상해거리는 이미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10년 동안 상해거리는 분명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먼저 103억 원을 투자해 상해문을 짓고 이후 1억4천만 원의 비용을 들여 초량 1동 사무소를 보수했고 처마는 기울어진 기와 모양으로 바꾸고 벽 역시 중국을 상징하는 용의 그림을 그려넣었다. 어쩌면 광고전단지에서 말한 것과 같이 2012년이 되면 이곳의 건물들은 더욱 더 중국의 특색을 갖추게 될 것이고 환경 역시 더욱 더 아름답게 변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마치 《한국,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를 쓴 저자의 생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그 답을 찾을 것이고 내 이상 속의 차이나타운을 찾을 것이다.

 

부산대학교 중문과 박사과정 이고은 옮김 LeeKoe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