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학’, ‘서양 중국학’, ‘세계 중국학’

- "中國國學", "西方漢學", "世界中國學" -

 

2009년 11월 15일 김혜준  KIM Hyejoon  

 

‘중국학과 문화 간 교류’를 주제로 한 제2차 세계중국학대회에 참석했다. ‘중국어 보급사무실’(國家漢辦: 중국의 ‘국가 중국어 국제 보급 지도 소조’의 실무를 담당하는 기구이지만, 실제로는 이를 대리하는 기구나 다름없으며, 바로 이 기구에서 HSK나 공자아카데미 등을 주관한다)과 중국인민대학 공동 주최인 이 대회의 공식 일정은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였고, 논문 발표는 10월 30일과 31일 이틀이었다. 대회 매뉴얼에 따르면 중국 외 세계 각국의 학자 66명, 타이완、홍콩 및 마카오 지역 학자 18명, 중국 국내 학자 114명이 발표를 하는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였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이 대회 홈페이지
http://www.sinology2007.com/sinology2009/ 를 참고하기 바란다)

대회 개막일 전날 베이징에 내리자 오랜 만이어서 그런지 익숙한 느낌과 더불어 낯선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베이징공항은 그 새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수하물을 찾기 위해서는 입국 심사 후 셔틀 경전철을 타고 좀 떨어진 다른 건물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원봉사 학생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가는 길도 익숙함과 낯섦이 혼재했다. 아마 올림픽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예의 대기 오염 때문인지 온 사방이 몽롱한 가운데 오후의 태양은 한밤의 구름 속 달처럼 흐릿했다.

대회 첫날 오전의 개막식은 대회 규모에 걸맞게 성대했다. 중국인민대학의 회의장에는 대략 1,000명에 가까운 대회 관계자와 청중이 들어찼고, 여러 종류의 의례적인 행사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전체 발표가 있었다. 발표는 중국학자와 외국학자 2명의 공동 사회 아래 비교적 중량급 학자 2명이 각 20분간 발언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예컨대 모두 세 조로 된 이 발표에서 첫 번째로는 중국인민대학의 쑨위 교수와 러시아사회과학원의 이리나 포포바 동방문헌연구소장의 공동 사회 하에 케임브리지대학 마이클 로우 교수와 칭후아대학의 리쉬에친 교수의 발표가 있었다.

첫날인 이 날 오후와 둘째 날 오전은 조별 토론이었다. (1) 중국학과 문화대화 (2) 중국학과 역사 연구 (3) 중국학과 중국문학 (4) 중국학과 중국 서적 번역 (5) 중국학과 중국 전통극 (6) 공자아카데미 포럼 등 모두 여섯 조였다. 이와는 별도로 ‘발굴 문헌과 중국학 연구’, ‘중국문학과 현시기 중국학의 상호 작용’이란 제목의 좌담회가 둘째 날과 셋째 날에 있었다. 각각의 조별 발표장에는 대략 4,50명이 앉을 수 있었다. 발언자 1인당 10분이 주어졌고, 대체로 대여섯 명 발표 후 한꺼번에 몇 분 정도 질의 답변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발표한 (3)조는 이틀에 걸쳐 모두 30명이 발언을 했다. 그 중에는 한국 학계에도 잘 알려진 베이징대학의 원르우민, 홍콩링난대학의 룡핑콴 등이 있었다. 다른 조에는 하와이대학의 츠엉중잉, 후아뚱사범대학의 주정후이와 같은 역사학자들이나 프린스턴신학대학의 데니스 올슨, 에든버러대학의 브라이언 스탠리 같은 신학자들이 눈에 뜨였다.

둘째날 오후에는 다시 전체 발표가 있었고, 형식은 첫날 전체 발표와 동일했다. 역시 모두 세 조의 발표가 있었는데, 나와 원르우민 교수가 공동 사회를 본 첫 번째 조에서는 슬로바키아과학원의 조제프 갤릭 교수와 베이징대학의 옌사오땅 교수가 발표를 했다. 전체 발표가 끝난 후 개막식과 비슷한 규모의 성대한 폐막식이 있었고, 이 때 러시아사회과학원의 알렉산더 로마노프가 최근 출간된 중러사전 제4,5권을 증정했다.

아마 이런 간단한 언급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발표와 토론은 거의 통과의례 수준이었다. 전체 발표의 발표자는 발표 내용보다도 발표자의 학술적 지위 또는 출신 국가에 따라 안배한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전체 발표의 사회자조차도 그런 것 같았다. 전체 발표에서 중국학자와 공동 사회를 본 외국학자는 러시아、벨기에、스웨덴、한국、일본、타이완 등 출신 국가가 모두 달랐다.

만일 중점이 발표와 토론에 있지 않다면 이 대회의 목표 내지 효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세계적으로 중국학을 활성화하고 중국학 학자들 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중국학이라는 중심 주제가 있긴 해도 참석자들의 학문 분야가 대단히 방대하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무언가를 심도 있게 집중적으로 토론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는 일부 외국학자들의 경우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거나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면에 중국학자들 중에는 영어나 기타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정부기구와 학술기구의 주도 하에 세계의 관련 학자와 전문가들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것이 역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참석자들 간의 교류는 사실 회의 때보다는 식사 시간이나 문화 참관 시에 더욱 활발했다. 아무래도 심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모두 여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처음 보는 사람이 많다보니 명함 교환은 필수였고, 화제는 전문적인 것보다 어디서 왔느냐 무얼 연구하느냐 따위의 피상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주로 중국어가 시끌시끌했지만 영어도 만만찮았고 간간히 프랑스어나 독일어도 들렸다. 그 와중에 나는 종교학을 연구한다는 재미 한국인 학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해석학 전공이면서 최근 종교학 연구를 병행하고 있는데, 중국어도 못하고 연구 분야 역시 중국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만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특이한 점을 깨닫게 되었다.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계통의 학자와 활동가가 유난히 많은 것이었다. 혹시 대회 주관자의 개인적인 관심이나 친분 때문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대회가 마칠 무렵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A4 판형의 356쪽으로 된 대회 논문의 요약본을 살펴보니 제출 논문의 분야가 참으로 광범위하고 다양했다. 시대별로는 선진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분야별로는 사상、철학、종교에서부터 역사、문화、문학、예술은 물론이고 언어、교육、정치에 이르기까지 다 있었다. 이 때문에 머릿속에서 간단하게 정리되지를 않았다. 더구나 논문의 전문은 없이 요약본만 제공된 데다가, 참석을 약속하고도 불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논문 없이 발언만 한 사람도 있었으므로, 구체적인 발언 내용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며칠 간 내가 직접 들은 발표와 나눈 대화 및 읽은 자료의 내용에 따르면 초점은 두 가지로 여겨졌다. 한 가지는, 중국학자의 주도하에 ‘국학’(國學: 중국학자에 의한 중국학)과 ‘중국학’(漢學: Sinology, 외국학자에 의한 중국학)을 ‘세계 중국학’(世界中國學)이라는 이름으로 통합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서 구미중심주의적인 중국학을 넘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처럼 중국학을 시발로 하여 여타 분야에서도 중국 학술계의 지위를 구미 학술계와 대등한 정도 내지 그 이상으로 제고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중국 대내외적으로 공자 및 유가에 대한 관심을 더욱 확산시키고, 유가의 종교적 성향을 검토해보면서 근대 시기에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듯이 앞으로 구미를 포함해서 전 세계에 유가의 전파 가능성을 탐색해보자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미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중국의 국력에 상응하여, 경제、정치、군사 분야 외에 문화、사상 영역에서도 그 마땅한 역할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이런 말이 좀 추상적이고 모호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약간의 추가적 설명과 사례가 유용할지 모르겠다. 사실 이 대회에 참석한 것은 약간의 우연이었다. 8월 초순경 참석 요청을 받았는데 보통의 경우였다면 아마도 거절했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한데다가 대회의 배경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오랫동안 매년 지속해오던 조사 작업을 이번을 마지막으로 막 끝낸 참이었고, 나의 작업이 공교롭게도 요청 내용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참석 통보 후 여러 차례 행정적 이메일이 오갔지만 대회 직전까지도 상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대회 규모를 비롯해 약간의 사항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내게는 과거에 참석했던 중국의 통상적인 학술대회와는 달리 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참석하고 또 구미 학자들이 상당히 많은 데 반해 아시아의 학자(특히 한국과 일본의 참석자)가 별로 없다는 점이 다소 색다르게 느껴졌다.

막상 대회에 참석해보니 앞서 말한 것처럼 참석자들의 언어 구사력이나 전공 분야 역시 특이했으며, 무엇보다도 대회 기간 내내 ‘국학(國學)’과 ‘서양 중국학(西方漢學)’이라든가 ‘공자(孔子)’와 ‘유가(儒家)’가 핵심어였다. 혹시 예민한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른바 ‘서양 중국학’이라는 말은 상용되었지만 ‘동양 중국학’이라는 말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중국 주요 문헌을 구미에 소개하거나 연구한 튀빙겐대학의 한스 큉, 본대학의 볼프강 쿠빈과 같은 ‘서양 중국학 학자’가 전 방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면, 나나 동경대학의 카리마 푸미토시 교수 같은 ‘동양 중국학 학자’는 의례가 필요한 경우에만 자리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나와 그는 전체 발표 때 각기 사회를 맡았고, 대회 폐막식 후 쉬찌아루오 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및 찌바오츠엉 중국인민대학 총장과의 접견 시에도 열 명 남짓한 대표 속에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을 포함해서 전체 발표에서 논문 발표를 한 12명 중에는 ‘동양 중국학 학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 대회 산회 전야에 자금성의 건복궁 안에서 있었던 고별만찬 자리의 간단한 에피소드 역시 시사적일 것이다. 일반인은 출입이 제한된다는 곳들을 둘러본 후 만찬장에 도착해보니 장방형의 식탁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헤드테이블에 해당되는 곳에는 명패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 동안 나의 학술적 지위와는 무관하게 이미 여러 차례 ‘국가 대표’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또 그런가 하여 명패를 찾느라고 약간 헤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번에는 국가에 대한 고려는 없이 ‘중국 국학 학자’와 ‘서양 중국학 학자’들만이 대회 주관자들과 함께 앉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고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사히 평민으로 돌아온 것을 감사하면서 뒤늦게 일종의 일반석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초청자 대표의 만찬 인사가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말씀에 따르면 이곳은 건륭황제가 지은 곳으로 종종 외국 사신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던 곳이란다. 이어서 뒤늦게 도착한 또 다른 대표의 인사가 있었는데, 미처 앞의 말씀을 못들은 탓인지 또 같은 말씀을 반복했다. 그랬더니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독일에서 귀국한 중국학자가 농담을 했다. 그럼 대체 둘 중 누가 건륭황제지?

그 때 문득 나는 2004년 9월 어느 국제학술대회 참석 후 역시 각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공자 탄신을 기념하여 그의 고향인 산뚱성 취후우에서 열린 ‘국제 공자문화제’에 초청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중 중국 국영 티비로 중계된 개막 전야제 프로그램의 대체적인 내용은 대충 이랬다. 1부는 공자 탄생을 맞아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 각지의 소수민족이 찾아와서 춤과 노래로 축하를 한다. 2부는 ‘한국인’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사람이 찾아와서 역시 춤과 노래로 축하를 한다. 3부는 문인들이 아니라 무사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그때까지 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도열한 상태에서 드디어 공자가 등장한다. 아기 예수와 동방박사 이야기와는 달리, 가마인지 수레인지를 탄 공자는 갓난아이가 아니라 이미 성인이 되어 있었고, 비록 용 문양은 없지만 황금색 옷과 황금색 관을 쓰고 있으며, 마지막 순간 온 하늘에는 황금색 반짝이가 휘날린다.

내게 있어서 제2차 세계중국학대회는 중국 현대문학 분야뿐만 아니라 중국학의 전 분야에 걸쳐 다양한 학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것은 비단 학술적인 측면에서 뿐만은 아니었다. 학생 시절부터 책으로만 알았던 전 에든버러대학 교수인 보니 S. 맥도겔이라든가 언젠가 칭다오에서 만난 적이 있는 독일 출신으로 지금은 슬로바키아의 한 대학의 교수로 있는 라울 핀다이젠을 다시 만난 것 등은 분명 일종의 행운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아일랜드 출신 참석자에게 위스키 한 잔까지 대접받으면서(아일랜드인은 보통 구두쇠로 알려져 있는데, 어쩌면 잉글랜드인이 만들어낸 편견인지도 모른다) 이틀 연속 아일랜드인과 잉글랜드인 사이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20년 이상 외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상하이에서 기업과 중미 문화 교류 사업을 병행한다는 미국인 참석자로부터 중국에서의 외교적 활동 경험을 들었던 것, 프린스턴 신학대학이나 에든버러대학에서 온 일부 신학자들이라든가 러시아사회과학원이나 스톡홀름대학에서 온 문헌학자들과 함께 소소한 중국 체험들을 이야기했던 것, 말레이시아 출생의 중국계 학자로부터 말레이시아 화인들의 상황을 들었던 것들은 중국학을 매개로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로 보여준 것이었다. 아마 이번 대회에 참석한 모든 학자들과 활동가들 역시 그 점에서 분명히 큰 소득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제2차 세계중국학대회는 그 1차적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일단 의문을 품어보는 학자의 습관 탓인지 지금까지도 깔끔하게 정리가 안 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 중 한 가지는 이렇다. 쉬찌아루오 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중국학자들은 인류에 대한 중국 문화와 사상의 마땅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더욱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특히 중국인민대학, 베이징사범대학, 그리고 산뚱대학이 그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해당 대학 홈페이지에 따르면, 중국인민대학은 1937년 산베이공학으로 개교한 이래 연면히 중국공산당의 혁명 전통을 이어왔고, 베이징사범대학은 1902년 경사대학당 사범관으로 출발한 이래 중국 최초의 사범대학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교육의 핵심이며, 산뚱대학은 중국의 두 번째 국립대학인 1901년 산뚱대학당의 후신으로서 ‘제나라와 노나라의 문화’를 바탕으로 ‘중국 일류、세계 수준’을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랴. 대회 기간 동안 숙소에서 아침 이른 시간이나 밤늦은 시간에 이리저리 티비를 돌려보니, 학자들의 대중 강연인 ‘백가 강단’(百家講壇)에서는 탁월한 유산으로서 끊임없이 유가와 공자가 강조되고, 티비 드라마에서는 찬란한 과거로서 수시로 중일전쟁 시기의 전쟁 이야기나 국공내전 시기의 정탐 이야기와 더불어 청나라의 황실 이야기들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올해는 유가를 그렇게도 반대했던 1919년의 5ㆍ4운동이 있은 지 90년이 되는 해이고, 청나라를 무너뜨린 1911년의 신해혁명이 있은 지 대략 100년이 되는 해이다. 과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귀국하는 날, 그 이틀 전 대량의 첫눈이 내린 때문인지 아니면 올림픽을 거치면서 모든 것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때문인지, 베이징은 모든 것이 쾌청하고 깔끔했다. 하늘도, 공기도, 거리도. 베이징공항 역시 그랬다. 공항 대합실에서 밖을 내다보니 청사 밖 활주로 근처에 관제탑을 새로 세우고 있었다.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그런지 엄청나게 크고 간결하면서도 힘 있어 보이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마치 한 일자 ‘一’을 붓으로 멋들어지게 써서 세로로 세워놓은 듯했다. 세계의 중심 나라라는 뜻의 중국과 숫자 ‘1’ 또는 한자 ‘一’의 모습을 가진 베이징공항의 관제탑을 겹쳐 보는 것은 아마도 순전히 나 혼자만의 우연한 상상이었을 것이다.

 

 

* 이 글은 학술지에 투고한 것을 읽기 편하도록 일부 수정한 것이다. 큰 차이는 없지만 원문을 보고 싶으면 아래 링크를 누르기 바란다.
     
김혜준, 〈‘中國國學’, ‘西方漢學’ 그리고 ‘世界中國學’- 제2차 세계중국학대회 참관기〉 , 《중국현대문학》 제51집, 서울 : 중국현대문학학회, 2009년 12월, pp.309-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