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에 관한 토막 이야기들
The Aspects of Taiwan

 

2011년 7월 31일 - 8월 9일 김혜준   KIM Hyejoon  

 

타이완에 관한 토막 이야기들 01

 

 

타이완의 날씨, 야시장, 쇠고기국수

 

 

  어제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이 30.5℃라고 한다. 며칠 전 타이베이는 37.7℃였다. 기온만 보면 타이완의 여름은 사람 살 만한 곳이 못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한 바탕 소나기가 지나가면 시원해질 뿐만 아니라, 건물 안이든 아니면 자동차 안이든 간에 일단 실내로 들어서면 냉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때때로 길거리를 걸어 다닐 때도 양산(또는 우산) 하나만 있으면 대략 견딜 만 했다. 햇빛의 힘이 강하지 않아서 직접 내리쬐는 것만 가려주면 복사열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대낮에 활동하는 건 아무래도 불편했다. 실외와 실내를 계속해서 들락거리다보니 마음과는 달리 신체적으로 체온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냉방이 세다 싶으면 긴소매 옷을 꺼내 입기도 했지만, 종종 배가 아프다든가 머리가 아프다든가 또는 살갗이 따갑다든가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또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땀 때문에 끈적거리는 불쾌감이라든가 주변 사람의 옷에서 나는 상한 냄새도 그랬다. 타이완에는 지역마다 야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는데 아마 이런 이유도 상당히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더운 낮보다는 서늘한 저녁에 활동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테니까.

  타이중(台中)의 중화루야시장(中華路夜市)、훵지아야시장(逢甲夜市), 가오시웅(高雄)의 리우허관광야시장(六和觀光夜市), 타이베이(台北)의 스따야시장(師大夜市)、화시지에야시장(華西街夜市)、스린야시장(士林夜市) 등 각지의 야시장은 제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예를 들면, 타이중의 중화루야시장은 약간 오래된 듯한 다소 넓은 거리 양편으로 제법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식당과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면, 같은 도시의 훵지아야시장은 금방 단장한 듯한 깔끔한 거리에 밝고 화려한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 군것질 노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방문자들 역시 앞의 야시장은 약간 나이가 든 사람들이 많았고 뒤의 야시장은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가오시웅의 리우허관광야시장에는 간간히 비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노점상이든 손님들이든 거의 개의치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야시장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와 같은 관광객이 대다수인 것과 관계가 있을 듯했다. 또 타이베이의 타이완사범대학 부근 스따야시장은 수도의 중심지 가까운 곳이라서 그런지 노점은 거의 없이 조그만 식당、옷가게 등이 촘촘히 들어선 좁은 시장거리에 20대 초반의 젊은 학생들이 넘쳐 났다.

  어디든지 간에 야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역시 간단한 군음식(小吃)들이었다. 과일주스、아이스크림、빙수에서부터 소가 든 찐빵인 빠오즈(包子)、만두 종류인 지아오즈(餃子)、잎사귀에 싸서 찐 밥인 쫑즈(粽子)라든가 노점에서 주로 파는 각양각색의 고명을 얹은 국수들인 딴자이미엔(擔仔麵)에 이르기까지, 또는 발효시킨 두부에 일반적으로 향신료를 발라 튀기거나 구워서 외국인 입장에서는 꽤 난처한 냄새를 풍기는 초우두부(臭豆腐)에서부터 심지어 개구리튀김이나 뱀요리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개구리나 뱀을 식재료로 쓰는 건 타이완에서도 오래된 그리고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전반 타이완의 루쉰이라 불리는 라이허(賴和)가 쓴 〈뱀 선생(蛇先生)〉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인 뱀 선생의 직업이 바로 개구리를 잡는 것이었다.

  내가 만난 많은 타이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타이완의 대표적 음식으로는 루로우판(魯肉飯)과 쇠고기국수(牛肉麵) 등을 들 수 있다고 한다. 루로우판은 원래 같은 발음의 루로우판(滷肉飯)이라는 이름에서 나왔는데, 고명으로 돼지고기와 타이완 특유의 맛을 내는 간수를 얹은 밥으로, 일반적으로 북부에서는 잘게 간 돼지고기를 남부에서는 약간 크게 쓴 돼지고기 편육을 얹는다고 한다. 나는 보기는 많이 보았지만 루로우판은 직접 먹어보지 못했고, 타이완의 쇠고기국수는 제법 여러 종류를 먹어 보았다. 타이완의 쇠고기국수는 고명이 거의 장식용 수준인 우리의 국수와는 달리 국수보다 쇠고기가 오히려 주요 먹을 거리였다. 물론 가게마다 국물 맛, 고기 맛, 국수 가락의 굵기와 맛 등이 달랐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먹어 본 것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양념식 쇠고기국수로는 타이중의 르언아이쇠고기국수집(仁愛牛肉麵)의 모듬쇠고기국수(半筋半肉麵)가, 맑은 국물 쇠고기국수로는 타이베이의 융캉쇠고기국수집(永康牛肉麵)의 삶은쇠고기국수(淸燉牛肉麵)가 가장 맛있었고, 토마토 수프 맛이 나는 홍선생국수집(洪師父麵食棧)의 토마토쇠고기국수(紅麴蕃茄麵)도 특색이 있었다.

  하긴 타이완의 맛있는 음식이 어찌 이 두 가지뿐일까? 장후아(彰化)의 녹말가루로 싸서 튀겨낸 왕만두 크기만한 돼지고기완자를 넣은 탕인 로우완(阿璋肉丸)과 역시 장후아의 처음 먹을 때 약간은 쥐똥 냄새가 나던 ‘고양이와 쥐의 국수’라는 재밌는 이름의 마오수미엔(猫鼠麵), 사람들이 더위를 무릅쓰고 한길까지 길게 줄지어 서서 사가던 후아리엔(花蓮)의 돼지고기찐빵(公正包子) 등 내게는 맛있는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식견과 시간이 유한한 탓에 더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특히 기회가 없어서 그 유명한 빈랑(檳榔)을 먹어보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약간은 아쉽다.

  빈랑은 씹는담배처럼 이파리에 열매를 싸서 씹으면서그 즙을 삼키는데, 맛은 달콤하면서도 약간의 마취 작용이 있다고 한다. 빈랑 즙의 첫물은 너무 강해서 목에 자극을 주기 때문에 삼키면 안 되고 뱉어내야 하는데, 그 색깔이 시뻘게서 먹는 사람의 입안도 그 사람이 뱉어낸 흔적도 상당히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주로 북부보다는 남부의, 회사원보다는 운전기사 등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빈랑을 많이 먹는 것으로 보였고, 또 빈랑을 파는 가게도 허름할 뿐만 아니라 대개 외곽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실 내가 내내 벼르기만 하고 선뜻 사먹지 못한 것은 기회가 없어서라기보다 용기가 없었던 탓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2011년 7월 31일, 다음에 계속)

 

 

 

01 | 가오시웅 三鳳宮. 들어가기 전엔 날씨가 좋았다.

 

 

02 | 三鳳宮에 들어가자마자 약20분간 비가 쏟아졌다.

 

 

03 | 타이중 중화루야시장의 빙과류 파는 아주머니

 

 

04 | 타이중 훵지아야시장, 핸드폰 가게도 보인다.

 

 

05 | 50년 역사의 르언아이국수집의 모듬쇠고기국수.

 

 

06 | 타이베이 융캉쇠고기국수집.

 

 

07 | 홍선생국수집의 국수. 공항에도 체인점이 있었다.

 

 

08 | 장후아의 로우완집인 阿璋肉丸.

 

타이완에 관한 토막 이야기들 02

 

 

타이완의 인구, 기차, 도시락

 

 

  타이완은 36,000㎢ 넓이에 약 2천3백만의 인구를 가진 곳이다. 남한과 비교하자면 1/3 크기의 땅에 거의 1/2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섬 한가운데를 3,997m 높이의 위산(玉山)을 비롯해서 3,000m를 넘는 봉우리들이 즐비한 중앙산맥이 세로로 종단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동쪽에는 해안가 바짝 가까이에 산이 치솟아 있고 서쪽에만 약간의 평야가 완만하게 펼쳐져 있다. 이렇게 본다면 타이완에는 곳곳에 사람들이 넘쳐날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다. 대체로 타이완의 대도시인 북부의 타이베이(台北), 남부의 가오시웅(高雄), 중부의 타이중(台中) 등에 사람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 외 대부분의 지역은 오히려 한산해 보일 만큼 그리 많지 않았다.

  단순히 시각적으로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버스나 택시를 탈 때도 이런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중소 도시인 타이난(台南), 컨딩(墾丁), 타이동(台東) 같은 곳에서는 시내버스가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다녔다. 택시도 잘 다니지 않아서 후아리엔(花蓮)의 경우 중심가에서 겨우 20분쯤 떨어져 있는 뚱후아대학(東華大學)에서는 호출한 뒤 20분은 기다려야 택시가 도착했다. 택시 요금제 역시 이런 상황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다. 경제 상황이나 유동 인구에 따라 각지의 기본요금과 주행요금이 다른 것은 한국과 비슷하다 치더라도, 타이완의 최남단인 컨딩 같은 곳에서는 아예 미터기조차 없이 손님과 택시 기사가 직접 택시비를 흥정하는 방식이었다.

  타이완이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어보이는 것 같은 느낌은 주는 데는 자연환경과도 약간은 관계있는 것 같다. 한국의 경우 도시에서는 공지가 잘 없기도 하지만 설령 있다하더라도 콘크리트 바닥 아니면 맨땅이다. 그런데 타이완에서는 공지가 많기도 하거니와 대부분의 공지는 아열대기후의 영향으로 키 높이만큼 자란 풀들이 무성했다. 더구나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도시를 지날 때를 제외하고는 철로 변에 높은 건물이 서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농경지 아니면 그냥 산자락이었다. 거기다가 특히 남부의 경우 야자수 군락, 바나나 농장, 양어장 따위가 계속 이어지니 전체적으로 타이완이 한국에 비해 사람들이 현저히 적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내가 타이완에 있는 동안 중국 대륙에서는 고속철 추돌로 인해 수 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타이완에서도 이 뉴스가 크게 다루어졌는데, 한편으로는 중국 대륙과의 대립적 친밀 관계 내지 경쟁적 협조 관계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이완에도 고속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이완의 고속철은 마치 공항처럼 역사도 훌륭하고 흡사 비행기를 타는 것처럼 승차감도 상당히 좋았다. 다만 표값은 한국의 KTX에 비해 상당히 비쌌는데, 내 감각으로는 대략 두 배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여러 면에서 볼 때 만일 시간을 다투는 상황이 아니라면 기차가 훨씬 나았다. 고속철은 타이완 서부의 타이베이에서 가오시웅까지만 운행되는 데 비해 기차는 타이완섬 전체를 한 바퀴 휘감아도는 데다가 차편도 비교적 많고 또 고속철과 노선이 겹치는 구간이라고 해도 그 거리가 짧기 때문에 굳이 고속철을 타지 않아도 되었다. 단지 흠이라면 기차는 이용객이 워낙 많고 대부분의 차편에는 입석이 허용되기 때문에 다소간 어수선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 속에 섞여서 우리로 치면 새마을(自强號)에서 통근열차(區間號)까지 다 있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느끼는 이런저런 재미는 고속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재미 중 한 가지는 도시락을 사먹는 것이었다. 고속철에서는 냄새를 우려한 때문인지 빵과 스낵류만 팔고 있었지만 기차에서는 도시락이란 의미의 ‘삐엔땅(便當)’까지 팔고 있었다. ‘삐엔땅’은 중국어로 본래 ‘편리하다’ 또는 ‘편리한 물건’이란 뜻으로, 일본에 전해진 후 便道、辨道、辨當 등으로 쓰이다가, 타이완에 역수입되면서 일본어로 도시락이란 뜻의 ‘弁当(벤또)’의 대역어로 사용되었다(대륙에서는 도시락을 ‘盒饭’이라고 하고 홍콩에서는 ‘饭盒’라고 한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이 ‘삐엔땅(벤또)’의 외관이었다. 바탕은 플라스틱 재질이지만 목재 질감이 나는 종이표지를 입혀서 1970년대 이전 한국에서도 흔히 보던 얇은 나무로 만든 네모난 도시락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이는 사회적 복고풍에 편승한 상업 전략이라고 했다.

  기차는 또 고속철에 비해 비교적 속도가 늦기도 하거니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을 지나가기 때문에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적지 않았다. 철도변 논밭에는 삼모작의 나라답게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가둬둔 곳, 금방 모내기를 끝낸 곳, 모가 파릇파릇 자라고 있는 곳,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곳, 벼가 무게를 못 이겨 수그러진 곳, 금방 벼를 베어낸 곳, 그리고 수확을 끝내고 갈아엎어놓은 곳까지 우리의 사계절이 뒤섞여 있었다. 심지어 어떤 동네에는 이런 모습이 한 장면에 축약되어 있어서 모가 파랗게 자란 논과 벼가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곳이 이웃해 있기도 했다. 또 무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밭에 벼가 자라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타이완 역시 지금은 대개 기계농을 하기 때문에 왕년에는 그리도 흔했을 타이완의 그 멋있는 물소를 몇 마리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타이완의 세종문화회관이라고 할 타이베이의 중산당(中山堂) 중앙계단에 전시된 후앙투수이(黃土水)란 조각가의 부조〈물소 군상(水牛群像)〉을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아쉬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이완에서 돌아온 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내 귀에는 타이완 각지 기차역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지금도 대부분 일제 시대에 지어진 듯한 역사를 사용하고 있어서 여행객의 수를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벅차 보였다. 아마도 그런 역사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모든 것이 과거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방학을 맞아 단체 연수를 가는 듯한 똑같은 티셔츠의 아이들을 보면서도 이 시각 이 장소가 아니라 과거의 그 어느 순간 그 어느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떠남과 돌아옴, 헤어짐과 만남, 눈물과 웃음이 있었을까? 마치 내가 소년기에 겪었던 어떤 장면 장면과 같은 그 특별한 분위기는 나의 온 감각기관에 그대로 배어있는 양 당분간은 잊히지 않을 듯하다.

 

(2011년 8월 1일, 다음에 계속)

 

 

 

 

 

 

0 9 | 타이완에서는 지금도 일일이 차표검사를 하고 있었다.

10 | 타이난 기차역 앞 버스정류장 표지판

 

 

 

01 | 타이베이 중심가의 한 사거리

 

 

02 | 타이중 기차역

 

 

03 | 타이난 기차역

 

 

04 | 타이완의 고속철

 

 

05 | 黃土水의 물소 군상(水牛群像)
출처
http://www.csh.taipei.gov.tw/MP_119061.html

 

 

06 | 타이완 동부 철로변 모습

 

07 | 타이완 동부 철로변 모습

 

08 | 自强號 안. 가운데 월동문이 있었다.

 

타이완에 관한 토막 이야기들 03

 

 

타이완의 자연 경관, 대륙 관광객, 일본의 흔적

 

 

  타이완이 자랑하는 자연경관으로는 타이루거협곡(太魯閣峽谷), 아리산(阿里山), 위산(玉山), 컨딩(墾丁), 일월담(日月潭), 후아뚱해안(花東海岸), 찐먼도(金門島), 펑후(澎湖) 등이 있다. 그 중 수 백 미터 높이의 수직 절벽 사이로 옥색의 물이 흐르는 타이루거협곡은 그랜드캐년의 장엄함이나 브라이스캐년의 황홀함과는 또 다른 대자연의 오묘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타이완 동북부에 있는 이 협곡의 이름은 타로코(Truku, Taroko)라는 원주민 마을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나는 우연하게도 이 협곡을 한 달 간격으로 두 번이나 방문하게 되었는데, 좋은 곳은 두 번 가지 않는다는 통설과는 달리 두 번째가 오히려 더 나았다. 첫 번째는 큰 비가 온 직후여서 낙석 등의 위험 탓에 곳곳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이에 따라 협곡의 아주 일부만 체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협곡에 들어서자마자 맨 처음 마주치게 되는 것은 까마득히 높은 절벽과 아스라이 깊은 계곡으로, 순간적으로 사고 기능이 정지되면서 그 장면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 능력 또한 어린 아이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저 ‘아~’나 ‘어~’ 아니면 기껏해야 ‘와~ 정말 대단하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지각이 돌아오게 되면서 그제야 ‘아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란 바로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하고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대자연의 신묘함에 압도되었다가 계속 깊이 들어가다 보니 어느 정도 정상을 회복하게 되면서 이런 바위 협곡을 파고 들어가서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낸 것에 대해 새삼스레 감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연의 웅엄함에 파묻혀서 인간의 그와 같은 의지와 분투 그리고 그 결과물인 도로마저도 마치 자연의 일부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인간에 의한 인공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저절로 형성된 자연적인 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타이루거협곡을 둘러보는 버스 안에는 나와 같은 외국인이 절반은 되어 보였다. 벨기에 출신으로 스페인에 산다는 아주머니, 타이완 여성과 동행했지만 일본과 한국에서도 산 적이 있다는 미국인 영어 강사, 공연을 위해 초청되었다는 아일랜드인 탭댄서 커플, 타이완 칭후아대학(淸華大學)에서 포스트닥터를 한다는 한국인 학생, 그리고 말씨나 행색으로 보아 틀림없이 중국 대륙에서 온 듯한 비교적 젊은 편인 여러 명의 여성들 등.

  현재 타이완에는 2008년 이래 대륙으로부터 하루 최대 5,000명의 단체관광객이 입국하고 있으며, 지난 7월부터는 개인여행객도 허용하고 있다. 그 동안 누적 대륙관광객 수는 이미 234만에 달하고, 개인여행객도 지난 한 달 간 600여 명이 다녀갔는데 앞으로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접하게 되면 불가불 우리의 남북한 상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지난 60년 간 거의 단절되어 있다가 최근 몇 년간 그나마 약간 숨통이 터지는가싶더니 다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고향을 두고 떠나오거나 떠나갔던 수많은 분들이 이미 천명을 다했거나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중국 대륙과 타이완의 관계가 부럽기만 하다.

  대륙관광객인 ‘따루커(大陸客)’는 타이루거협곡에서뿐만 아니라 타이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연령층도 다양해서 연세 드신 분부터 중장년은 물론이고 청년들이나 아이들도 흔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의 태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사회적 지위나 재부에 상관없이 자신감에 찬 당당한 태도와 시끌벅적한 언행이 그 중 일부다. 그런데 가오시웅의 19세기말 영국영사관저 자리에서 만난 한 ‘따루커’ 처녀는 예외였다. 사진을 찍게 포즈를 취해달라고 했더니 상당히 수줍음을 많이 탔다. 실은 내가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순전히 그녀가 신은 신발과 가방의 한글 문양 때문이었다.

  타이완을 다니는 동안 나도 한두 번은 ‘따루커’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이냐고 묻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거의 모든 사람이 내게 일본인이냐고 묻든지 아니면 아예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내 짐작에 한국인 개인여행자는 별로 없는 반면에 일본인 개인여행자는 많은 것, 나의 용모나 옷차림이 일본인과 흡사한 것, 그리고 그들의 생활 속에 일본적인 요소가 깊게 배어 있는 것 등이 작용한 것 같았다. 나중에 몇몇 타이완 지식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타이완에서 일본의 흔적이 일차적으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건물이었다. 일본 총독부를 지금도 그냥 타이완 총통부로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이난의 타이완문학관(구 타이난 주청사), 타이난시 경찰국과 같은 석조건물은 물론이고 장후아의 무도관(武德殿), 지우훤(九份) 근처 광산촌인 찐구아스(金瓜石)의 태자빈관(太子賓館)과 같은 목조 건물에 이르기까지 수도 많고 보존 상태도 양호했다. 또 타이완 각지의 기차역과 같은 공공건물에서부터 우리로 치면 ‘적산가옥’인 개인의 주택까지 해방된 지 무려 70년에 가까운 데도 불구하고 아직 일제시대 건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런 점은 일본식 건물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한국과 비교해보면 뚜렷이 다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한국의 경제 발전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라든가 그에 따른 건물 부지의 부족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최근 반세기 동안 양 지역의 경제 발전 과정이 너무 흡사하고 또 개발 가능한 토지의 상황도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에 대한 양 지역 사람들의 정서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타이완 지식인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2011년 8월 3일, 다음에 계속)

 

 

 

 

 

08 |타이루거협곡. 절벽을 ㄷ자로 파내 길을 만들었다.

09 | 타이루거협곡. 도로건설 중에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長春祠 인근.

 

 

 

 

01 | 타이루거협곡. 석회질로 인해 물이 옥색이다.

 

 

02 | 타이루거협곡. 가운데 폭포가 보인다.

 

 

03 | 난징에서 온 대륙관광객 '따루커(大陸客)' 처녀

 

 

04 | '따루커(大陸客)' 처녀의 한글 문양이 박힌 샌들

  

 

05 | 타이난의 국립타이완문학관

 

 

06 | 타이난시 경찰국.

 

 

07 | 장후아의 일제시대 무도관

 

타이완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 04

 

 

타이완의 종족, 정체성, 대일 감정

 

 

  타이완은 청일전쟁의 패배에 따라 1895년에서 1945년까지 50년 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에 비하자면 15년 정도 더 긴데 그렇다면 한국보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 커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 이에는 많은 복잡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기본적인 이유로는 대략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일본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타이완에 살던 사람들에게서는 아직 강렬한 집단의식 내지는 민족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 일본이 타이완을 식민지화하자마자 철도、도로、병원、학교 등 근대적인 시설과 제도를 도입하여 실제로는 철저히 착취하면서도 외형적으로는 전보다 살기가 더 나아진 것처럼 만든 것, 새로운 교육 제도와 언론 시스템 등을 통해 끊임없이 일본 지배의 우월성을 주입시킨 것 등등이다. 그런데, 이런 이유들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간접적이겠지만, 타이완 사람들에게는 외부 세력이라면 그들이 한족이든 일본인이든 또는 그 밖의 누구든 간에 역사적으로 모두 침탈자일 뿐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정서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타이완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7천 년 전부터라고 한다. 타이동(台東)의 타이완 선사시대 박물관(台灣史前文化博物館)에 가보면 구석기와 신석기의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는데, 이들은 태평양과 인도양의 해양 종족들을 아우르는 이른바 남도어족(南島語族, Austronesian)의 한 지류였다. 그 후 16,17세기에 특히 네덜란드가 타이완을 지배하던 시기에 중국 대륙으로부터 한족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밀려 원주민들은 차츰 높은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오늘날 14개 종족 약 5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고산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족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16세기말부터 유럽인들이 이 지역에 출현했는데, 당시 포르투칼인들이 타이완을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이라고 불러 지금까지도 서양에서는 타이완을 포모사(Formosa)라고 부르기도 한다. 곧이어서 17세기 전반 네덜란드인들이 남부의 안핑(安平, 오늘날의 타이난) 일대를, 에스빠냐인들이 북부의 지룽(雞籠, 오늘날의 基隆) 일대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곧바로 네덜란드인들이 에스빠냐인을 패퇴시키고 타이완 섬 전체를 차지했다. 이들 유럽인들은 크게 볼 때는 문화적으로 타이완을 풍성하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 당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원주민과 한족 이민들을 수탈했다.

  그 뒤 17세기 중반 중국 대륙에서 청나라에 밀린 명나라의 일부 세력들이 다시 대륙으로부터 대거 건너와서 이미 타이완에 정착해 있던 한족들과 합세하여 네덜란드인을 몰아내고 타이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타이난의 츠칸로우(赤嵌樓)는 비록 청나라 말에 중국식으로 새로 지은 건물이긴 하지만 원래는 네덜란드인이 세운 프로방시아 요새(Fort Provintia)가 있던 자리로, 대륙 세력인 정츠엉꿍(鄭成功) 군대가 네덜란드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장소라고 한다. 그러나 이 대륙 세력은 얼마 되지 않아 17세기 후반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다.

  타이완이 청나라에 병합된 후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한족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결국 이들이 오늘날 타이완 사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처음 80년간은 대륙으로부터 타이완으로의 이민을 금지할 만큼 타이완을 무시 내지 경계했다. 따라서 타이완에는 일종의 지배 권력의 공백과 더불어 집단 정체성의 형성이 잘 이루어지 않았다. 후일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에 대한 서양 열강의 침략이 가열화된 후 중국(청나라)정부는 뒤늦게 타이완의 중요성을 깨닫고서 타이완을 성으로 성격시키는 등 다시 타이완의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중국 및 중국인으로서의 의식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이완은 금세 일본의 지배로 넘어가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런 전 과정에서 타이완의 원주민들과 여러 차례에 걸쳐 대거 이주해온 한족들은 미처 집단의식 내지 민족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채 일본의 식민 체제에 편입된 것이다. 물론 일제 시기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타이완에서는 강력한 일본화가 시도되었다.

  타이완의 일본화는 한국보다 더 심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것은 식민 지배의 기간도 길었거니와 사회적 정체성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일본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일제 말기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구두 상으로는 그들의 모어인 중국어(타이완어)와 공용어인 일본어 양쪽에 모두 능숙했지만, 글을 쓸 경우에는 중국어로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일본어로만 썼다고 한다.그래서 광복 후 많은 작가들이 먼저 일본어로 창작을 한 다음 그걸 다시 중국어로 번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타이완 영화〈비정성시(悲情城市)〉에 보면 광복 후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모든 의료 용어를 일본어가 아닌 중국어로 다시 교육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45년에 타이완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새삼 중국의 일부가 되었고, 대륙으로부터 다시 이민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49년까지 대륙에서 실패한 국민당 정부의 핵심 세력이 또 한 번 대거 타이완에 유입되었다.그 무렵 타이완의 인구가 600만 명 전후였는데 새로 100만 명 이상이 옮겨와서 총인구가 약 740만 명이 되었다고 하니 그 수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타이완성이 아닌 대륙에서 새로 이주해온 소위 ‘외성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타이완 사회를 주도하였다. 더욱이 냉전 시기를 거치는 동안 사회 전반에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이 작용했다.이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본래부터 타이완성에 살고 있던 ‘본성인’ 및 특히 소수자인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또 한 번 외부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 셈이었다.

  세월이 흘러 21세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소 복잡한 역사적 경험의 과정에서 타이완의 원주민 및 본성인의 입장에서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세력은 언제나 침략자로서 기억되는 한편 그 침략자들의 종족이나 집단의 성격에 대해서는 비교적 동일시하는 경향이 형성되었을 법 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늘날 타이완의 본성인들은 경제적 정치적인 실리 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적 정서적인 비실리 면에서도 대륙과의 통일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는 것 같다. 또한 지금은 약간 시들해졌지만 지난 십여 년간 타이완문학이 강조되고 타이난에 국립타이완문학관이 건립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처음 시작했던 타이완의 대일 감정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일본에 대해서도 그들이 외부 세력이라는 점에서는 분명히 거부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해서 중국(대륙)과 비교해서 특별히 반감이 더 심한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는 달리 결국 백 수 십 년 전부터 유입된 일본의 문화와 그 흔적에 대해 상당히 너그럽게 대하게 된 것이다. 단적으로는 보자면 타이완에서는 보통 일제 시대(일본 제국주의 강점 시대)라고 하지 않고 그냥 일거 시대(일본 점거 시대)라고 부를 정도이다.

 

(2011년 8월 6일, 다음에 계속)

 

 

 

0 1 | 높고 깔끔한 야자수 몇 그루가 나란히 서있으면 대개 학교다. 일제 시대의 흔적이다.

 

 

0 2 | 타이동의 타이완 선사시대 박물관

 

 

0 3 | 화리엔의 아메이족 춤. 관광 상품화된 것 말고 전 세계적으로 소수종족의 문화는 사라져 가고 있다.

 

 

0 4 | 타이난의 안핑성터(安平古堡). 네덜란드인이 만든 질란디아 요새( Fort Zeelandia)의 유적이다.

 

 

0 5 | 타이난의 츠칸로우(赤嵌樓). 네덜란드인이 세운 프로방시아 요새(Fort Provintia) 자리이다.

 

 

0 6 | 비정성시(悲情城市)의 배경이 된 지우훤의 거리. 일본영화도 많이 촬영하여 일본관광객이 흔하다.

 

 

0 7 | 타이베이의 일본계 백화점 안에 만들어놓은 대형 일본식 정원.

 

 

0 8 |가오시웅에있는 청나라 말의 영국영사관저 유적.

 

 

0 9 | 타이베이 시내 어느 집앞의 원주민 토템

 

 

타이완에 관한 토막 이야기들 05

 

 

타이완의 지역 차이, 종교, 사회

 

 

  타이완은 한국에 비해 작은 곳이지만 그래도 지역에 따라 자연 환경과 사람 사는 것이 달랐다. 예를 들면, (다소 피상적이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건물이 높고 반듯하고 깨끗하며 남쪽으로 갈수록 낮고 어수선하고 낡았다든지, 북쪽일수록 중화민국 표준어인 ‘구오위(國語)’를 사용하고 남쪽일수록 주로 본성인의 모어인 ‘민난어(閩南語)’나 ‘커지아어(客家語)’를 사용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랬다. 또 다소 억지일지는 모르겠으나 관광지의 경우에도 남쪽일수록 태평양의 파도가 그대로 밀어닥치는 컨딩(墾丁)의 바닷가 어루안비(鵝鑾鼻)처럼 자연 그대로이고 북쪽일수록 광산촌을 관광 상품화한 지우훤(九份)처럼 비교적 인공적인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타이완 사람의 종족 구성과 더불어서 그들의 삶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 중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의 종교적 삶의 표현이었다. 짧은 기간 내가 겪어본 바로는 타이완에서 가장 현저한 종교는 아마도 불교인 듯하다. 텔레비전에서는 여러 개의 불교 채널이 방송되었고, 도처에 불교 사원 또는 학교나 병원 등 불교 재단에서 세운 기관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컨딩의 관광지인 마오비토우(猫鼻頭)에 갔을 때는 단체관광을 온 승려들과 마주쳤다. 선글라스를 끼고 카메라를 든 젊은 남녀 승려들이 마치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처럼 활달해서 한국 승려들이 보통은 비교적 조신하게 행동하려는 것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그런데 사실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타이완에서는 도교 및 민간신앙이 오히려 더욱더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도교가 성행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은 신선 사상, 도가 철학, 불교 영향이 결합되어 종교로 발전한 도교에 관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타이완에서는 도교 중에서도 수행을 통해 신선이 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교단 도교보다는 각종 민간신앙과 강하게 결부되어 현세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민중 도교가 비교적 우세한 것 같다. 즉 노자를 천존(天尊)으로 모시는 도교와 삼국지의 명장인 관우에 대한 숭배, 바다의 여신 격인 마주(馬祖)에 대한 신앙, 그 지역의 토지신에 대한 섬김 등등이 결합하여 도처에 무슨 무슨 궁, 무슨 무슨 묘가 있었다. 심지어는 도교 사원 안에 민간 전설 속에서 중매를 담당한다는 ‘월하노인’까지 모시고 있으며, 도교의 신과 불교의 부처를 함께 모시는 곳도 많았다. 물론 이런 신앙은 일상생활 속에도 깊이 배어 있어서, 거리를 지나다보면 아파트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을 모시는 감실의 빨간 조명이나 가정집 현관에 복을 비는 두 줄로 된 글귀를 보는 일이 흔했다.

  타이완의 도교 또는 민간신앙이 아무리 현세적이라지만 역시 내세의 삶이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 면에서 묘지 역시 상당히 눈길을 끌었다. 묘지가 마을 바로 옆에 있거나 심지어 집들 사이사이에 있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비가 잦은 탓인지 돌과 시멘트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안식과 부활을 위한 조그만 집처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천주교나 개신교의 건물 내지 표지도 눈길을 끌었다. 천주교 쪽은 주로 오래되거나 장엄한 형태의 건물이라서 마치 문화 유적 같은 느낌이 들었고, 개신교 쪽은 (아마도 내가 부주의해서) 미처 교회 건물을 본 적은 없고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십 수 미터는 되어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빨간색 십자가를 몇 차례 보았다.

  종교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각지의 공자묘 역시 상당히 특별했다. 공자묘는 타이베이, 타이중, 장후아, 타이난 등 거의 모든 곳에 다 있었는데, 내가 가 본 곳 중에서는 타이난의 공자묘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이곳은 타이완에서 처음 생긴 공자묘이기도 하거니와 실은 갑자기 비를 만나는 바람에 다른 곳보다 좀 더 자세하게 둘러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입구에는 ‘全台首學’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청나라 초기에 타이완 전체의 어린 과거 준비생(童生)들을 처음으로 교육시킨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 고색어린 장소에서 두드러져 보인 것은 곳곳에 남아 있는 묵적과 붉은 색 위주의 기둥과 벽채였다. 알다시피 중국의 전통 건물은 대개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소한 타이완의 경우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사원이 대체로 복잡한 장식을 가한 황금색 지붕이 유난한 반면에 공자묘는 대체로 약간 퇴색한 탓인지 노란색 지붕보다는 약간 낡은 붉은 색 건물의 외벽과 기둥이 더 두드러져 보였다.

  낯선 사회에서는 낯선 물건과 낯선 현상이 많이 보이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는 타이완 사회를 말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사정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쉴 새 없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어른들도 자주 만났고, 관광 축제가 열리던 후아리엔의 광장에서는 이미 질서 있게 앉아있는 사람들 바로 앞으로 자기가 들고 온 플라스틱 걸상을 들이밀며 남들은 아랑곳 않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그런 한편으로는 물건을 사거나 길을 물을 때마다 가던 길도 멈추고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만났고, 식당의 탁자 위에 카메라를 내려놓자마자 앙증맞은 포즈를 취하는 어린아이를 만나기도 했다. 요컨대 타이완에 관한 토막 이야기들을 맺는 나의 말은 아주 평범하고 단순하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여서 타이완 역시 내가 가 본 세계의 다른 지역처럼, 한국과 너무나 비슷한 다만 조금은 다른,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2011년 8월 9일, 이번이 마지막)

 

 

 

0 9 | 1961년 건립된 장후아의 바꾸아산
대불(八卦山大佛)

10 | 1859년에 생긴 타이완 최초의 성당인 가오시웅의 홀리 로자리 성당(玫瑰聖母堂). 지금 건물은 1928년에 건립.

     

 

 

 

01 | 컨딩(墾丁)의 어루안비(鵝鑾鼻)

 

 

02 | 타이중의 불교 사원 바오쥐에스(寶覺寺). 신도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있다.

 

 

03 | 컨딩의 마오비토우(猫鼻頭)에서 만난 승려들.

 

 

04 | 타이중의 도교 사원 난티엔꿍(南天宮). 지붕 위의 인물은 삼국지의 관우이다.

 

 

05 | 가오시웅의 한 가정집 문앞의 복을 비는 글귀. 길거리에서 신을 벗고 집으로 들어가는 듯.

 

 

06 | 지우훤(九份)의 마치 주택가처럼 보이는 묘지

 

 

07 | 타이난의 공자묘 입구. 현판은 전 타이완의 첫째 학교라는 뜻이다.

 

 

08 | 장후아의 공자묘 대성전                 

 

 

 

11 | 통근열차(區間號) 안에서 잠든 할아버지와 손녀

12 | 식당에서 카메라를 보자 포즈를 취한 아이와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