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담론모임 (상) My Experiences
in The Discourse
School of The Humanities - 1
김 혜 준
1995년
3,4월 경이었다. 당시 나는 중국 베이징에 있었는데, 어느 선생님의 편지에서 담론모임의
시작을 알게 되었다.
교수가
되었을 때 내게는 많은 꿈이 있었다. 자유로운 사색, 치열한 탐구, 진지한 토론 등도
그 중 일부였다. 그러나 내가 만난 것은 그와는 다른 현실이었다. 초보 교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준비해야 하는 강의, 사정없이 정력과 시간을
앗아가는 행정 잡무, 낯선 사람 낯선 환경 낯선 분위기 등 그 모든 것들은. 그러나 바로
그런 것들과 더불어 연구실 문만 닫으면 격리되고 마는 특수한 상황은 서서히 나만의
틀 속으로 옥죄어 넣었다. 답답했다. 알고 싶었고, 묻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다.
인연인가
우연인가. 2,3년 사이에 나와 비슷한 연배의 선생님들이 연이어 부임하셨는데, 복도 같은
데서 조우하는 횟수가 늘다보니 의례적인 인사말을 넘어 다소간의 대화라고 할 만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분들도 나와 유사한 것을 느끼고 있음을. 차츰
소위 전공이라는 자기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남들은 무얼 생각하며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를 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라는 공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한두 사람이
각기 서로 다른 경우로 무슨 집담회 같은 데 참석하고 있었고, 그 유용성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이 생각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통 분모는 있지
않았을까. 뭔가 변화가 필요하며, 그런 변화를 위해 일단 모여서 아무 말이라도 나눠보자는.
아마도 1994년 12월 초였을 것이다. 10명 남짓한 분이 금정산 산성마을에 모였던 것은.
아뿔싸, 나는 뒤늦게 출발하여 장소를 몰라 헤매다가 결국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그 직후 1년 간 출국하게 되었다.
첫
번째 발표는 오경환 선생님의 〈원폭문학과 오오에 켄자부로오〉였다고 한다. 담론모임의
장을 연 그 발표는 듣지 못했지만 다행히 그 후에도 이어진 '기념적인' 발표들은 들을
수 있었다. 최초의 1박 2일 발표이자 제40회 발표인 〈일본우파의 '자유주의 사관'에
대하여〉와 제50회 발표인 〈비평언어와 이데올로기 언어 -- 카라타니 코오진의 최근
저작에 대해〉가 그것이다. 사실 나는 담론모임에서 오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에
관해서는 거의 몰랐다. 예를 들면 오 선생님이 일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워낙 맥주를 좋아한다는 것도
몰랐고, 그래서 이메일 ID마저 OhBeer로 지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오 선생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조금씩 늘어감과 더불어 일본 문화 및 지식인의 동향에 관한 나의 지식도 조금씩
늘어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는 않지만 일본근대문학 이론서나 작품집도 조금씩 늘어갔고.
지금 오 선생님은 1년 예정으로 일본 동경에 체류 중인데, 내년 이맘 때 쯤에는 또 어떤
발표로 나의 무식을 깨우쳐주실지 모르겠다. 좋은 성취와 더불어 내실있는 에피소드를
많이 가지고 돌아오시기를 기원한다.
담론모임
두 번째 발표는 강명관 선생님의 〈조선 후기의 소비 유흥, 기방문화〉였다는데 물론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 대신 담론모임 최다 발표자인 강 선생님의 나머지 여섯 발표인
〈19세기 말 20세기 초 시정 세태〉, 〈조선 후기 서울의 지역별 주민 구성〉, 〈조선
후기 사회와 도박〉, 〈조선시대 풍속사 연구 서설 - 양반, 섹스, 그리고 거짓말〉, 〈琉璃廠의
서적들 - 세계로 열린 지식의 유일무이한 창〉, 〈삼강행실도 -- 약자에게 가해진 도덕의
폭력〉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었다. 강 선생님이 치밀한 논리, 치솟는 격정, 예리한
문필과 열변으로 워크플로우 또는 공개 석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게 된 것은 최근
수 삼년의 일이거니와 사실 애초부터 담론모임에서 그 모습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풍부한
독서와 분방한 사고를 바탕으로 종횡무진 하는 그의 입담을 듣고 있으면, 아, 조선 시대
선비가 이러했겠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때로는 그의 말칼이 너무 서슬 시퍼래서
괜스레 혼자 다치기도 하고 조바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의 이야기에는 듣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견문과 견식과 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절실히 체험하게 된 것은
옛 문헌들이 단순히 글자가 나열된 종이뭉치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사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담당 선생님이 마음에 들면 그 과목은 비교적 열심히 공부하는 치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치기는 어른이 된 후에도 아주 약간은 남아 있는 모양이다. 강명관 선생님이
워크플로우에서 한창 문명을 날릴 즈음 덩달아 좀 유명해지신 분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허'영재' 선생님이시다. 허 선생님은 나보다 몇 해 앞서 부임하셨는데, 나와는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가 담론모임을 전후로 하여 만나는 횟수가 늘어서 역시 여러
면면을 알게 되었다. 비록 담론모임 세 번째 발표인 그의 〈독일문학,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듣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 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본 쥐스킨트의 『향수』〉를
듣기 위해 『향수』라는 소설을 미리 예습하고 가기도 했고, 수십 쪽 짜리 장문의 〈독일
통일과 지식인〉을 전혀 게으름 없이 읽기도 했다. 사실 나의 그런 '치기'가 작동하게
된 가장 큰 까닭은, 어쩌면 허 선생님이 나와 비슷하게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또는
네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간에 콜라만 마시면서 때로는 심지어 물만 마시면서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가, 술값을 계산할 때는 어김없이 N분의 1을 부담한다는 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허 선생님 덕분에 그의 박사논문 대상이었던 폰타네가 누군지
알게 되었고, 귄터 그라스 이래 읽어 본 적이 없던 독일 소설도 읽게 되었고, 독일 지식인들의
사고 방식도 얻어듣게 되었고, 그리고 과거사 반성 문제에 있어서 독일과 일본의 서로
다른 반응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제4,5,6,7,8회
발표인 〈『System Emile』 : 불어작문 학습 시스템〉(윤애선), 〈『의례』 중 '사혼례'
편〉(김세환), 〈전근대 중국의 자연 보호책〉(최덕경), 〈프랑스인의 삶 : 결혼, 동거,
이혼에 대하여〉(박형섭), 〈국어 문장 단위 오류에 대하여〉(김인택) 등은 아직도 내가
중국에 있을 때여서 모두 듣지 못했다. 또 그 이후에도 그분들의 발표를 들을 기회는
없었다. 아쉽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분들의 발표 때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혹은 발표 후의 식사 자리에서 단편적이나마 그분들로부터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윤애선 선생님이 불어학 전공이라고 하던데 왜 컴퓨터와 그리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대체 언어학과 컴퓨터 또는 인문학과 컴퓨터는 어째서
상호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조금씩 인지하게 되었다. 지금 윤 선생님은 담론모임
홈페이지를 운영 중이신데, 나더러 '나와 담론모임' 글을 하명하실 만큼 멀리 있는 나를
잊지 않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김인택 선생님 --윤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을
다루는--과의 접촉은 전혀 또 다른 배움이다. 김 선생님의 언어에 관련된 화제, 그 중에서도
경상도 사투리에 관련된 이야기나 우스개들은 나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때로는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써먹기 위해서, 때로는 집에서 내 처에게 써먹기 위해서.
아마도 김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본 사람들은 대개 실감할 것이다. 다같이 깊이 있는
학술을 바탕으로 한 지식이되 어떤 것이 강의실용이고 어떤 것이 가정용인지를. 얼마
전에 들으니, 담론모임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홍보지원단장을 맡으셨다고 한다.
부산대학교를 위해 그 역량을 십분 발휘하실 것으로 믿는다.
내가
정식으로 담론모임에 참석한 것은 1996년 3월 이진오 선생님의 〈인문학 위기론의 허와
실〉 발표 때였다. 하긴 여기서 '정식으로'라는 말은 좀 적합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담론모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따로 조직이 없으므로 담론모임이 있는 날 참석하면 그걸로
그만'이니까. 어쨌든 간에, 실제로 체험하게 된 담론모임은 일종의 경이로움이었다. 나는
그런 학술 모임을 본 적이 없었다. 발표자가 발표하는 도중에도 사정없이 끼어드는 질문,
시도 때도 없이 발표자는 제쳐 두고 참석자끼리 이루어지는 질문과 대답, 발표자와 참석자
또는 참석자와 참석자간에 동시에 진행되는 토론, 그러면서도 서로 간 이야기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는 지력과 집중력, ……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알량한 체면 때문에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여기서는 전혀 구애됨이 없이 불쑥 불쑥 물어보고
대답하고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 그 구체적인 예는 잊어버렸지만, 해당 분야에서는
아주 초보적인 상식이면서도 다른 분야에서는 모를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인 데도, 교수라는
맹랑한 권위를 지키느라고 마치 다 아는 척하며 입다물고 있는 그런 허위가 여기서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원하던 바가 바로 여기 있구나! 나는 흥분했고, 쉽사리 그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전공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고립적 지식에만 매몰됨으로써 내가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내 뇌리 속에서 분탕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그
모든 것들이 각각 다 별개인 것 같지만 실은 오직 한 가지, 우리의 삶을 밝혀내기 위한
접근이라는 것만큼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떠들든 남이 떠들든 간에 떠들 수
있는 자유가 그리도 큰 즐거움인지 분명히 체험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다가
혼자서 킥킥거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던 것, 한밤중에 잠자는 아내를 흔들어 깨워
지금 막 떠오른 내 생각을 들어보라고 하던 것, 아무 관심도 없는 다른 직업의 친구들에게
뭔가를 설명하려고 애쓰던 것, 열심히 듣고는 있지만 반응은 별로인 학생들에게 머뭇거리면서
말하던 것, …… 그게 나 혼자 만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그 구체적인 행동이나
표현은 달랐겠지만.
이
선생님의 발표 내용 역시 비단 사회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내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히 적절하고 또 적확한 것이었다. 이 선생님은 나중에도 〈인문학 방법론의 반성과
모색 -- 인문학자의 윤리적 태도 정립〉라는 발표를 하셨다시피, 인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인문학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고, 나는 그로부터 도대체 내게 중국어문학이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중국어문학을 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서 내게 교수직이란 어떤
의미가 있으며 나는 어떻게 그걸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성찰해보게끔 되었다.
물론 이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된 지식적, 정신적 수확 역시 적지 않았다. 특히
후자, '입사동기'면서도 잘 몰랐던 그의 생활과 내면에 접촉함으로써 받은 자극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면 단신으로 한 달 간 유럽 배낭여행을 한 것이라든가, 도시와
인간의 번잡함과 떨어진 전원주택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 등을 통해서, 진취적이면서도
안거할 줄 알고, 자유로우면서도 집념할 줄 아는 학자의 면모는 내게는 확실히 모범이었다.
같은
해인 1996년 9월, 〈이즈음의 중국문학은 ……〉이라는 제목으로 나도 마침내 담론모임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余秋雨 수필 : 최근 중국수필의 추세 엿보기〉이라든가
〈중국 현대문학의 한글번역 상황 - 1980·90년대를 중심으로〉라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발표를
앞두고 긴장하는 건 설마 나만의 일은 아닐 터이다. 더군다나 참석자들이 모두 자기 분야에서만
일가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전문가마저 위협하는 수준이 아니던가. 또 설령
나의 발표와 관련해서는 (지식의 양이라는 차원에서) 나보다 못할지 몰라도, 워낙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사물을 보는 눈이 예리한 데다가 논리적으로 훈련되어 있는 분들이라, 언제
어느 순간에 나를 쩔쩔매게 만들지 모르는 것 아닌가. 마음이 안쓰였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묘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참석자가 얼마나 될까 염려되는 것이었다.
오, 그것은 많이 올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적게 올까봐
신경 쓰는 것이었다. 나는 가끔 그런 느낌이 든다. 교수들은 연예계나 스포츠계의
사람들처럼 대체로 남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순전히
나만의 독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발표는
또 다른 경이로움이었다. 중국어나 한자 또는 중국 작가나 작품에 관한 지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미리 각오한 대로 예상치 못한 질문, 나를 대신한 답변이 무수했다. 그래서
가끔은 발표자와 참석자가 따로 없는 예의 그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통상적인
학회와는 전혀 다른 발표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보통의 발표회가 진지함으로
시종일관하는 가운데 종종 열렬한 토론이 전개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마치 기계적인 발성과
기계적인 반향인 듯한 느낌이 들기 일쑤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맥락은 놓치지 아니하되
내 마음대로 유유자적 자유자재할 수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남김없이 이해되었고,
내가 어떤 소리를 하든 다함 없이 받아들여졌다. 뿐만이랴. 물음 속에 호기지심이 있었으며,
반박 속에 동료지애가 있었고, 농담 속에 기상천외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언어의 성찬과 문제의 추구가 동시에 발휘되는 것이었다.
사실
담론모임의 이런 특별한 분위기는 한두 번 참석한 분들에게는 가끔 당혹스러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만일 그 한두 번이 발표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국 신문시장에서 진보적
대중지는 가능한가 - 『한겨레신문』의 사례 연구〉를 발표한 임영호 선생님의 경우가
그랬다. 임 선생님의 발표 초점은 『한겨레신문』의 예를 들어서 한국 신문시장의 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임 선생님으로서는 엉뚱하게도
'진보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나중에 임 선생님이 그때의
곤경을 두고 '마치 상어떼가 물어뜯는 듯했다'라고 표현하신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사회를
봤던 나로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임 선생님의 그러한 인상은 한편으로는 담론모임의
자유분방한 성격에서도 기인하는 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은 사회과학과 인문학 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양자는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앞으로의
대처를 제시하고자 하는 데서는 동일하다. 다만 사회과학은 사회 현상을 각종 요소와
도구를 사용하여 재구함으로써 그러한 현상을 명료하게 인지하고 그 이후를 예측하는
데 중점이 있다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말해서 인문학은 그러한 현상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밝혀내어 앞으로의 우리 삶을 여하히 꾸려나갈 것인가를 제시하는
데 중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담론모임의 출발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학문의 총체성에 대한 추구는
상당히 유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와 동시에 아직도 먼 길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전홍찬 선생님의 〈러시아 정치의 경제적 요인 : '93, 95 총선에 나타난 정당별
지지 기반 분석〉 역시 유사한 경험이었다. 전 선생님의 발표를 통해 참석자 대부분은
러시아의 정치적 지형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예컨대 '맥주당'도
있다는 말에서는 실소와 더불어 인간 삶의 다양성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선생님이 주로 설명하고자 하는 바와 참석자들이 많이 질문한 것 사이에는 뭔가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 '전공의 폐쇄성을 넘어서' 더욱
다양한 접촉과 발표가 필요하다는, 당연한 그러면서도 중요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다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모임의 이름을 '인문학담론모임'이라고 한 까닭에
(좁은 의미에서의) 인문학을 하는 사람끼리만 교류하는 것으로 오인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인문대학의 교수만 참여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런 참에 박을미 선생님의
〈중세 서양음악의 기보발전사 - 성가 기보법에서 프랑코 기보법까지〉라는 발표는 자못
특이한 감을 주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막상 발표를 듣고 보니, 그것은 마치 수학 같기도
했고 논리학 같기도 했으며 언어학의 한 분야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보법의 변화
-- 부호와 부호 표기 규칙의 변화 이면에는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이 작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발표 후 식사 자리에서 박 선생님이 발표 시간에 못다한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
놓으셨을 때는, 그래 그래 서로 듣고 말하고 하는 것이 이리도 필요하고 후련하구나 하는
기분을 느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담론모임 후 갖는 식사 자리는 또 한 가지 즐거움이다. 담론모임이 아무리
자유롭다고는 하나 그래도 발표 시간에는 한계가 있고 발언의 내용에도 제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한 시간 전후쯤 되는 식사 자리는 천방지축이래도 좋고 천마행공이래도 좋을 만큼
화제가 만발이다. 물론 발표의 연장전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대단히 잦다. 상상해 보시라.
교수들이 한 무더기 앉아서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보지 않고 여기 꼈다 저기 꼈다 하면서
제멋대로 제 이야기를 쏟아 내놓는 장면을. 예의는 지키되 화제의 종류나 수준을 굳이
따지지는 않는다. 그야 말로 말의 잔치다. 그 때문에 한때 발표에는 안와도 이 시간에는
참석하는 분까지 있었을 정도다. 반면에 발표에 참석했다가 식사 자리에는 안가는 분도
왕왕 있다. 급한 원고를 쓴다든가, 식사 생각이 없다든가, 일찍 귀가해야 한다든가 해서다.
주변 사람이 한두 차례 권유는 해보지만 그냥 그걸로 그만이다. 그 점에서도 담론모임은
자유롭다.
내
기억으로 각자가 내는 식사비는 초기 몇 년 동안에는 항상 그 금액이 1만원이었고, 최근
1,2년 사이에는 물가가 인상된 탓인지 2만원쯤 되었다(그러한 변화에는 모 선생님이 기여했다는
설도 있다). 담론모임은 조직이 없으니 조직 유지비도 필요 없고 그래서 따로 회비를
걷지도 않는다. 다만 식사비는 필요하기 때문에 당일 발표를 한 분 그리고 처음 온 분만
제외하고는 모두 균등하게 식사비를 낸다. 그러나 담론모임 자체가 그리 엄격한 모임이
아닌 탓에 아주 가끔 얼결에 제외자가 동참할 때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사정을
알고 나서 투덜대봐야 소용없다. 고정된 회장 총무도 없고 모아놓은 회비 기금도 없으니
돌려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야 말로 일수불퇴다. 그러니 혹시 앞으로 담론모임에 새로
참석하시거나 처음으로 발표하시는 분은 새겨 두시기 바란다.
식사
후에는 기본적으로 뿔뿔이다. 하지만 그것도 자유인만큼 일부 사람들은 종종 조금 더
늦게 헤어지기도 한다. 나도 '일부 사람'에 속할 때가 많았는데, 다른 '일부 사람'들로부터
제법 환영을 받았으리라는 지레 짐작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술을 마시든 콜라를
마시든 물을 마시든 술값은 모두가 똑같이 내기 때문이다. 한번은 김진영 선생님이 늦게
까지 자리하고는, 느닷없이 사람들이 참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이 정도
술값으로 이리도 통쾌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첫째, 누가 대신 내주는 것도 아니고 참석자 전원이 자기 주머니에서 내게 되어 있으니
어찌 심하게 마시랴. 거기다가 그 중에는 술을 잘 못마시는 사람도 가끔 껴서 남들이
약간은 흔들거릴 때도 멀쩡한 얼굴로 전혀 술을 축내는 법이 없으니 어찌 절약이 되지
않으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은 그렇게 밤늦도록 떠들었건만 다음 날
오전에 보면 모두가 다 멀쩡한 얼굴로 강의실에서 또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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