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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秋雨 수필 : 최근 중국수필의 추세 엿보기*
1. 머리말
余秋雨(1946- )는 1990년대에 들어 가장 주목받은 수필가 중 한 사람으로, 대학에서 예술이론 및 중국문화사를 연구·강의하면서 《戱劇理論史稿》, 《戱劇審美心理學》, 《中國戱劇文化史述》, 《藝術創造工程》 등을 출판한 바 있다. 그가 수필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上海에서 발간되는 문예지 《收穫》(巴金 주편)에 『文化苦旅』 및 『山居筆記』라는 수필 시리즈를 연재하면서였다. 이들 작품은 연재 당시에 이미 독자들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과 함께 《文化苦旅》, 《文明的碎片》, 《秋雨散文》 등의 수필집으로 출판된 후 그 열기가 더욱 고조되어 중국 대륙은 물론 臺灣·香港 지역에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한때 '余秋雨 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余秋雨 수필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이어서 심지어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余秋雨 수필의 출현은 중국 당대수필의 기백과 경지를 보여주었다."1)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文化苦旅》는 오늘날 수필계의 전형적인 실패의 본보기"2)라는 평가도 있다.
2. 비판, 애착, 혼란
余秋雨의 수필은 문화의 각도에서 중국의 역사와 중국인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로부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내고자 한다. 즉 그의 수필은, 일반적인 많은 수필들이 그저 신변 잡사나 개인의 정감을 서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심원한 전통을 가진 중국 고대 문화에 깊이 침잠해들어가 그것을 반추하고 음미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중국과 중국문화 그리고 중국인의 운명에 대해 진지한 사색에 잠기도록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수필을 '문화수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우선 중국 고대문화의 미개·야만적인 요소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예를 들면 이런 면에서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道士塔〉에서는, 돈황석굴의 문물을 아무런 의식도 없이 함부로 보르체프, 펠리오, 스타인, 요시카와 코이치로오, 타치바나 미즈코시 등에게 넘겨버린 도사 王圓록의 무지몽매함과 이를 방치한 중국의 관료·사대부의 무감각함에 한숨지으면서, 자신이 그 문물 운반의 수레를 막아선 모습을 상상하며 이렇게 울분을 토로한다.
위대한
중국이이라면서 경전 몇 권조차도 보존하지 못하다니! 심지어 어떨 때 나는 독한 마음으로
내뱉고 싶다. 벼슬아치들에게 무수히 짓밟히는 모습에 비하자면 차라리 런던 박물관에
수장하는 게 낫겠다고. 하지만 필경 이 말도 그리 후련치는 않다. 대체 내가 막아선 수레
대열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곳도 안되고, 저곳도 안되고. 나는 그저 사막 한가운데
멈춰세워 놓고는 한바탕 통곡할 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문화가 미개·야만과 문명이 뒤엉켜 있는 존재라고 보는 까닭에, 余秋雨의 수필에는 그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긍정도 없지 않다. 余秋雨의 고대문화에 대한 애착은 주로 정치적으로 불운하면서 문화·예술면에서 탁월한 사람들에 대한 긍정을 통해서 표현된다. 그렇다면 余秋雨가 이와 같은 인물들에게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건전한 인격에 바탕한 문화적 양지 또는 반대로 말해서 문화적 양지에 바탕한 건전한 인격이다."(文 P.116) 그러나 余秋雨의 이러한 시도는 그리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는 고대문화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이지적으로는 현대문화에 대해 수긍하고 인정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태도 탓에 그가 궁극적으로 부각해야 할 현재의 중국, 미래의 중국은 오히려 그의 수필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3. 지식, 상상, 분석, 고색창연
余秋雨의 작품은 대부분 명승고적을 대상으로 한 기행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余秋雨의 수필은, 여행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나 여행지에 대한 묘사는 그리 많지 않고 자신의 사고와 감회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여행수필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余秋雨는 명승고적에 대한 묘사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이러한 명승고적을 빌어 자신의 감회와 사고를 펼쳐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余秋雨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단순히 경치의 감상이나 휴가·오락이 아니라 중국 고대문화의 재발견과 탐구이고, 그의 수필은 "일종의 문화적 감수를 털어놓기 위한 것이었다."(秋 P.10) 이 때문에 余秋雨는 〈文化苦旅·自序〉에서 자신의 마음 속에 내재하는 산수는 '자연산수'가 아니라 '인문산수'라고 설명한다. 余秋雨가 자신의 이러한 의도를 실천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그가 지닌 풍부한 지식의 활용이다. 이와 같은 다양하고 풍부한 지식을 서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중 한 가지는 나열이다. 余秋雨의 이러한 지식 나열의 수법은 문장 표현면에서도 그대로 채용되어 비슷한 이미지나 의미를 가진 문장 또는 유사한 글자·소리·구조를 가진 글귀의 반복적인 열거로 나타난다. 余秋雨의 수필에서 다양하고 풍부한 지식을 서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중 다른 한 가지는 연상이다. 그러나 余秋雨의 수필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되 가장 효과적이면서 다른 사람과 확연히 구별되는 수법은 나열과 연상의 활용이라기보다는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상상의 운용이다. 예컨대 王도사의 벽화 훼손 부분은 다음에서 보듯이 그야말로 소설과 다름없는 장면이다.
王도사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동굴 안을 돌아보는 걸 좋아했다. 마치 늙은 농부가 자기 집을 둘러보는 것처럼. 그는 동굴 안의 벽화가 좀 불만이었다. 거무죽죽한 것이 쳐다보고 있자면 눈도 좀 침침해졌다. 좀 밝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일꾼 둘을 시켜서 석회 한 통을 가져오게 했다. 장대에 짚으로 만든 솔을 달고 석회통에 담갔다가 칠을 하기 시작했다. 석회칠 한번으로는 칠이 너무 엷었다. 이 색 저 색이 은은히 비쳐 나왔다. 농민이란 일을 하면 성실하게 하는 법이다. 그는 다시 한번 꼼꼼히 칠을 했다. (文 P.2)
일반적으로 수필은 삶의 내재적·본질적 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문학 장르와 동일하지만, 허구적인 이야기나 짜 맞춘 플롯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상상에 의한 서사를 통해 삶의 태도나 인생의 이상을 전달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된다.3) 그렇지만 수필에 대한 이런 관념은 자칫하면 수필에서 허구성을 배제하고 진실성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문학의 가장 중요한 한 요소인 상상의 여지마저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즉 余秋雨가 오히려 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그간 중국 수필계가 수필의 비허구성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 상상을 제한해왔던 것을 고려해 볼 때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余秋雨가 사용한 수법 중 이러한 상상과 연관되는 것은 소설적 기법의 응용이다. 余秋雨의 수필은 건조한 사고의 연속이 아니라 흥미로운 사건·이야기를 통해 사색하게 만든다. 余秋雨 수필은 이처럼 상상과 소설적 작법이라는 독특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와는 성격이 다른 학자수필의 일반적인 특징인 논리적·분석적인 모습도 상당히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분석적인 태도는 때로 단순히 건조한 지식 나열과의 결합에만 그침으로써 감동이나 사색의 이끌어냄을 저해하기도 한다. 余秋雨의 이런 논리적·분석적인 면모는 《文化苦旅》의 작품보다는 그 이후의 작품에서 좀더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어쩌면 그의 초기 작품이 대부분 '명승고적 + 지식 + 정감'의 결합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데서 벗어나서 새로운 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변화가 아닐까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틀, 즉 '명승고적 + 지식 + 논리'의 결합이라는 경향을 보인다. 余秋雨 수필에 일정한 틀거리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는데는 구성면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余秋雨의 수필은 "원래 자신의 젊음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여행에 나섰지만 글은 오히려 과거에 쓴 어떤 문장보다도 나이 들어 보이는"(文 P.3) 고색 창연한 특이한 풍격을 갖고 있다.
4. '余秋雨 붐'
'余秋雨 붐'은 당연히 작품 그 자체가 가진 매력이 그 첫 번째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파란만장함을 느끼게 하는 고색창연한 풍격, 신변잡사나 일상사에서 벗어나 고대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종횡무진하는 폭넓은 스케일,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상상을 적절히 짜 맞추는 소설적 수법, 풍부한 지식과 어휘·어구를 나열하는 뛰어난 솜씨 등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의 흡인력은 단독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의 사회적 상황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1976년 이래 문화대혁명의 종결, 개혁과 개방 정책의 실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시도 등과 더불어 중국은 실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중 외부문화와의 대량 접촉은 한편으로는 중국 전통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문화를 돌이켜 보고 그로부터 민족정신과 문화전통을 계승·재건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낳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이르러 중국이 본격적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자부감이 증대되는 그만큼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감의 구비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대사회에 대한 이성적 적응과 더불어 고대 중국으로부터 자신감을 확보하고자 하는 일종의 복고주의적 풍조가 결합되는 일종의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余秋雨의 수필이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물론 '余秋雨 붐'의 요인은 이것만은 아니다. '余秋雨 붐'은 당연히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난 것이다. 갖가지 역사적 격변이 다소간 진정된 1980년대 중반 이후 사람들은 집체적 인간과는 또 다른 개체로서의 인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긴박한 사건의 연속에서 벗어나서 삶을 음미하고 관조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풍조는, 자칫 시대와 삶에 대한 관심이나 문학과 민중의 관계에 대한 추구는 진부하고 표피적인 것이라고 간주되고, 주관적 자아에 대한 탐구와 예술적 개성의 강조는 종종 외부와의 관련이 단절된 채 극히 개인적인 세계에만 한정되는 추세로 이어지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그 결과 시대적 분위기와 정신이 결여되고 활기와 예리함이 결핍된 나약하고 미시적인 수필이 대량 창작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余秋雨의 수필이 등장했다. 余秋雨 수필은, 그것이 가진 시각의 타당성이라든가 내용의 정확성과는 상관없이, 적어도 개인의 일상사에 대한 기술에서 벗어나서 중국 고대문화와 역사를 대상으로 삼으면서 중국인과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사고하는 스케일이 크고 기백이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余秋雨의 수필이 변화한 중국의 새로운 면모를 수용하면서 중국과 중국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신감을 표현한 것 역시 독자들의 환영을 받는 데 커다란 작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중국 각지는 물론 싱가포르·홍콩·대만 등지에 대한 기행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곳곳에서 중국인의 개방적·개척적·적극적인 대외 태도를 찬양하고 있다. 또 그의 작품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대표되는 바 자본주의적 문화가 보편화되고 있던 중국 사회의 각종 면모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余秋雨의 수필은 당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시의적절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그 중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余秋雨 본인과 출판사 또는 언론이 余秋雨 붐의 조성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余秋雨는 그의 글 곳곳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가 학문적으로 대단히 큰 성취를 거둔 학자이며 따라서 그의 수필 역시 신뢰할 만한 저작일 뿐만 아니라 그의 창작 대단히 뛰어나다는 점을 은근히 암시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출판사의 행동은 이보다는 훨씬 노골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통해 독자의 역할이 날로 커지고 있으며 출판의 상업성이 날로 강화되고 있는 변화된 중국 문학의 환경이 확연히 드러난다.
5. 수필의 범주 구분, 상상과 비허구성, 상업성과 엄숙성
余秋雨 수필이 중국 수필계에 던진 문제는 적지 않다. 우선 수필의 범주 구분 문제가 있다. 余秋雨의 수필은 기존의 수필에서 존재해왔던 일정한 체제·양식의 구분 및 통상적 기교에 그리 구애받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수필은 서정적이지도 않고 서사적이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평론도 아닌 기존의 기준에서 보자면 그의 말마따나 '일정한 체재도 없는 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그간 문학수필을 서사성 수필·서정성 수필·의론성 수필의 세 부류로 크게 나누면서 최종적으로는 '참된 정감'의 표현에 따른 감동을 최종적 목표라고 간주해왔던 기존의 수필관4)에 상당한 충격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余秋雨의 수필이 제기한 문제 중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수필에서 상상이 가능한가, 그것과 허구 및 사실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필은 허구적인 이야기나 짜 맞춘 플롯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상상에 의한 서사를 통해 삶의 태도나 인생의 이상을 전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수필에서는 삶이라는 재료에 대해 적절한 선택·조정·편집만 가능할 뿐 허구적인 방식의 사용은 불가하다는 것이다.5) 그러나 이와 같은 '수필의 비허구성' 원칙의 지나친 집착은 수필에서 허구성을 배제하고 진실성을 강조하는 데는 대단히 유효하지만 자칫 그 정도에 그치지 아니하고 문학의 가장 중요한 한 요소인 상상의 여지마저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앞서 말했듯이 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余秋雨의 수필은 중국 수필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수필에서 사실을 왜곡한다거나 감정을 분식해도 좋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간혹 상상이 마치 사실 또는 사실에 근거한 것인 마냥 서술·묘사되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余秋雨 수필이 제기한 문제 중 소홀히 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수필(문학)의 상업성과 엄숙성 문제다. 余秋雨는 〈文化苦旅·自序〉에서 '학문과 놀이의 통일' '진리와 연령의 무관함' 등을 제기하면서 '학식과 금전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주장한다. 사실 余秋雨의 수필에는 산수에 대한 정감, 문화에 대한 사색, 역사에 대한 회고, 과거에 대한 비판 등은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성찰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소간 과시·과장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수필·문화·역사·학문 등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견지해왔던 중국 수필계의 많은 작가·평론가·학자에게 余秋雨 수필의 이러한 면모는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余秋雨의 자기 광고적 모습에 극대한 거부감을 표현하면서 지식의 정확성, 논리적 정합성, 관점의 정당성에서부터 학자적 품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각종 하자를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또 필자가 보기에도 余秋雨의 수필은 이미 본문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갖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다. 학자적 엄숙성과 진지성이란 측면에서 이상의 지적은 당연히 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제 중국 수필도 그간의 경직된 태도를 다소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물론 작가가 전인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의도적으로 과장·왜곡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다소간 자기 광고적 자세를 취하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 이에 적응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미 중국 사회와 문화의 환경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도입에 따라 출판의 상업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고, 사회 전체가 전반적으로 경쟁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문학 행위에서 독자의 글읽기가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6. 맺음말
余秋雨는 문화의 각도에서 중국의 역사와 중국인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로부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국의 역사는 미개·야만과 문명이 박투한 과정이요, 중국의 고대문화는 미개·야만과 문명이 뒤엉켜 있는 존재다. 따라서 그는 미개·야만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고 문명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긍정을 가한다. 그가 특히 중시하는 것은 중국 문인들의 복잡한 문화적 인격 속에서 중국문화의 새로운 활력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余秋雨의 이러한 시도는 그리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대문화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냉청한 이성적 판단에 앞서고 있어서, 이지적으로는 현대문화에 대해 수긍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고대문화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余秋雨는 주로 기행문 형태의 수필을 창작하면서 여행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나 여행지에 대한 묘사는 대부분 생략하고 오히려 자신의 사고와 감회를 적극적으로 서술한다. 그에게 있어서 수필이란 일종의 문화적 감수를 털어놓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주로 나열·연상·상상의 수법을 사용하여 그가 가진 풍부한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그 외에도 소설적 기법과 학자수필의 일반적인 특징인 논리적·분석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의 이런 방식은 때로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상상과 소설적 기법의 사용은 수필의 '비허구성'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 수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흥미진진함 속에서 독자를 사색으로 이끌기도 했지만, 반면에 실제의 인물과 사건이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논리적·분석적인 태도는 가끔 감동이나 사색의 이끌어냄을 저해하거나 심지어는 논리적 오류나 모순을 내보이기도 했다. 특히 그의 이런 방식은 그가 대체로 유사한 구성을 사용하는 것과 더불어서 그의 작품이 '명승고적 + 지식 + 정감' 또는 '명승고적 + 지식 + 논리'의 결합이라는 일정한 틀거리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余秋雨가 주로 취하는 이와 같은 내용과 방식은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관조적 태도와 결합하여 그의 수필에 일종의 고색창연한 풍격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당시 중국 문학(수필) 및 사회 상황과 서로 상응하는 것이었다. 즉, 개체로서의 인간 존재를 강조하는 수필의 성행에 따른 하나의 부작용으로서 나약하고 미시적인 수필의 대량 창작이 불러일으킨 폭넓은 시야와 역동적인 필력을 가진 수필에 대한 기대, 개방과 개혁이라는 사회 조류 하에서 형성된 현대사회에 대한 이성적 적응과 고대중국으로부터 자신감과 긍지를 찾아내고자 하는 모순적인 사회심리, 경제적 발전과 대외 진출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새로운 중국의 표현 욕구, 나날이 커지고 있는 독자의 역할 및 출판의 상업성에 대한 적응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余秋雨의 수필은 강렬한 독자의 호응과 문단의 관심을 받으면서 이른바 '余秋雨 붐'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의 작품은 앞서 말했듯이 그 자체로도 성취와 곤경을 동시에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6) 더 나아가서 중국 수필계에도 새로운 가능성과 난제를 다함께 안겨 주었다. 특히 余秋雨 수필이 던진 수필의 범주 구분 문제, 수필의 비허구성 원칙과 상상의 허용 문제, 수필의 상업성과 엄숙성 문제 등은 중국 수필계 또는 문학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함과 동시에 또 다른 곤혹을 가져다 준 대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余秋雨 수필과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에 관해 한 마디 첨언해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비록 전자는 작가가 문학수필임을 의식하고 있었고 후자는 그러하지 않았다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양자가 중국 지역과 우리나라에서 각각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에는 어떤 동일한 내재적인 원인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양자의 내용과 분위기·작가의 연령과 경력·사회적 상황과 호응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한 본격적인 탐구는 이 짧은 글에서 감당할 수 있는 바는 아닐 터이다.
주 *
이 글은 제41회 인문학담론모임의 발표를 위해 주로 본인의 〈余秋雨 산문 : 개척과 곤혹〉,
《중국현대문학》 제17집, 서울 : 중국현대문학학회, 1999년 12월, PP.263-288.을 발췌
수정한 것이다.
도사탑위치우위[余秋雨]
뭐까오굴[莫高窟] 정문 앞에는 개천이 있고 이 개천을 지나면 공터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부도가 서 있다. 탑은 원형으로 호리병처럼 생겼고 겉에는 흰 칠이 되어 있다. 무너져내린 몇몇 탑을 봐서는 벽돌로 기초한 위에 탑 가운데 말목을 세우고 그 주변에 황토를 발라 만든 듯했다. 이로 볼 때 그 동안 뭐까오굴의 주지승들이 넉넉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양이 서녘으로 가라앉으며 찬바람이 불어오자 이 퇴락한 탑들은 더욱더 황량해 보였다. 그중 탑 하나는 세운 연대가 그리 오래지 않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탑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읽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탑의 주인이 다름아닌 왕위앤루[王圓록]였던 것이다. 그는, 역사에 기록되어있듯이, 바로 뚠후앙석굴의 죄인이다. 나는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무명 솜옷을 입고서 초점없는 시선에 위축된 그의 모습은 그 시대의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중국인이었다. 그는 원래 후베이성[湖北省] 마츠엉현[麻城縣]의 농민으로 흉년 탓에 깐수성[甘肅省]까지 흘러들어와 도사를 하게 되었고, 여기 저기를 전전하던 끝에 뭐까오굴에 거처하게 되었다. 중국으로서는 참으로 불행하게도 고대 중국의 가장 찬란한 문화를 그가 지키게 된 것이다. 그는 단 몇 푼의 돈에 외국 모험가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뚠후앙의 문물을 바리바리 가져가도록 했다. 그리고 오늘날, 뚠후앙연구원의 전문가들은 매번 굴욕적으로 외국의 박물관으로부터 뚠후앙 문헌의 마이크로필름을 구입해오고, 한숨을 내쉬며 확대기에 넣어야만 한다. 그에게 분노의 불길을 퍼부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비천한 인물이요 너무나 하찮은 존재요 너무나 우매한 작자였다. 아무리 퍼부어도 그에게는 쇠귀에 경읽기일 것이다. 목석 같은 표정으로 대할 테니까. 이런 무지한 자에게 그와 같은 문화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도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민족의 비극이었다. 왕도사는 그저 그 비극에 잘못 등장한 어릿광대일 뿐이었다. 어떤 젊은 시인은 이렇게 썼다. 그 날 저녁 상자를 바리바리 실은 수레 대열이 막 출발하려고 할 때 모험가인 스타인은 고개를 돌려 서녘의 선연한 저녁놀을 바라다보았다. 그곳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한 민족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장엄한 불교 성지를 한낱 도사가 와서 관리를 하게 됐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중국의 문관들은 다 어디로 갔기에 어째서 그들의 그 넘쳐나는 상주문에는 뚠후앙에 대한 이야기가 한 마디로 없는 것인가? 시절은 20세기 초 구미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세기의 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댕은 그의 작업실에서 조각을 하고 있었고, 르누아르·드가·세잔은 벌써 창작 후기에 들어섰고, 마네는 그의 〈풀밭 위에서의 식사〉를 전시한 바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동방의 예술에 대해 선망의 눈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뚠후앙의 예술은 바로 그때 왕도사의 손안에 있었다. 왕도사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동굴 안을 돌아보는 걸 좋아했다. 마치 늙은 농부가 자기 집을 둘러보는 것처럼. 그는 동굴 안의 벽화가 좀 불만이었다. 거무죽죽한 것이 쳐다보고 있자면 눈도 좀 침침해졌다. 좀 밝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일꾼 둘을 시켜서 석회 한 통을 가져오게 했다. 장대에 짚으로 만든 솔을 달고 석회통에 담갔다가 칠을 하기 시작했다. 석회칠 한번으로는 칠이 너무 엷었다. 이 색 저 색이 은은히 비쳐 나왔다. 농민이란 일을 하면 성실하게 하는 법이다. 그는 다시 한번 꼼꼼히 칠을 했다. 이 지역은 대기가 건조해서 금방 석회가 말라버렸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당나라의 미소도 송나라의 의상도. 동굴 속에는 오로지 흰색뿐이었다. 왕도사는 땀을 훔치며 아둔한 웃음을 지었고, 내친 김에 석회 값을 물어 보았다. 이리 저리 셈해보자니 일단 다른 동굴을 더 회칠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선 이 몇 개만 칠해두지라면서 달관한 듯이 솔을 내려놓았다. 사방의 동굴벽이 전부 새하얀데 동굴 한 가운데의 조각상이 너무 눈에 걸리적거렸다. 이 깔끔한 농가에 그녀들의 간들간들한 몸매는 너무도 눈길을 끄는 일이었고 그녀들의 아리따운 미소도 좀 거북했다. 도사는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보았다. 도사라면 신선이나 영관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일꾼들에게 철추를 몇 개 빌려 와서 원래의 조각상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을 시켰다. 일은 수월했다. 몇 차례 아니라서 간들간들한 몸매는 부스러기가 되어버렸고 아리따운 미소는 흙이 되어버렸다. 이웃 마을에 미장이가 몇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불러와서는 진흙을 개어 그의 신선과 영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장이가 한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하자 도사는 상관없다, 흉내만 내면 된다라고 다독거렸다. 이리하여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 듯이 여기는 코요 저기는 손발이요 식으로 어쨌든 그럭저럭 상을 세울 수 있었다. 그 일이 끝나자 이제 다시 석회를 가져와 거기다 흰칠을 입혔다. 두 눈도 그리고, 수염도 넣고, 그럴싸했다. 도사는 숨을 돌리면서 미장이들에게 사례를 하고는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오늘 이 동굴들에 들어서서 허여스름한 동굴벽, 허여스름한 괴이한 조각상을 마주 대하자니 내 머리 속도 온통 허여스름했다. 나는 거의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눈앞에는 솔들과 철추만 어른거렸다. "그만!" 나는 마음 속으로 고통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뒤돌아보는 왕도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스런 표정이다. 그래, 그는 자기 집을 정리할 뿐인데 웬 참견이란 말인가? 나는 심지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그에게 빌고 싶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잠깐만. …" 그렇지만 뭘 기다린단 말인가? 내 머리 속은 여전히 허여스름했다.
1900년 5월 26일 이른 아침 왕도사는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서 열심히 동굴 속에 쌓인 모래를 청소했다. 뜻밖에도 동굴 벽에 금이 가면서 틈새가 생겼다. 그 속에는 또 하나의 동굴이 있는 것 같았다. 왕도사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얼른 동굴을 파보았다. 아! 동굴 가득한 옛 문물들! 왕도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날 아침 그가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문을 열어제쳤다는 것을. 한 영구적인 학문 분야가 바로 이 동굴에 의해 이루어지리라는 것도. 재능이 넘치는 수많은 학자들이 이 동굴 때문에 평생을 바치게 되리라는 것도. 중국의 영광과 치욕이 이 동굴로 인해 회자되리라는 것도. 지금 그는 담뱃대를 입에 문 채로 동굴 속을 다니면서 집히는 대로 뒤적여본다. 그는 당연히 이것들이 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일이 좀 묘하다는 것만 느꼈을 뿐이다. 왜 하필이면 내가 여기에 있을 때 동굴벽이 갈라졌을까? 혹시 신령이 내게 내린 보상이 아닐까? 다음 번 현성에 가게 될 때 경전 몇 개를 가져다가 현장에게 좀 보여 봐야지. 이 희한한 일도 좀 들려주고. 현장은 문관이었다. 사안의 중요성을 대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깐수성 교육감[學臺]인 이에츠츠앙[葉熾昌]도 알게 되었다. 그는 금석학자여서 동굴의 가치를 알았고, 인사재무담당관[藩臺]에게 이 문물들을 성정부로 옮겨 보관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문물이 너무 많아 운송비가 적지 않자 관료들은 주저했다. 그저 왕도사가 잇따라 손에 집히는 대로 꺼낸 문물들만이 관리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었다. 중국은 가난했다. 그러나 잠시만 이들 벼슬아치들의 호사로운 삶의 면면들을 들여다본다면, 결코 그까짓 운송비용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중국의 관리들이 모두 학문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도 창 밝고 책상 깨끗한 서재에서 출토된 경전들을 뒤적거리면서 어느 시대에 썼는지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조국의 유산을 잘 보호하겠다는 그런 각오와 결심이 없었다. 그들은 우아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다음에 그 도사더러 다시 몇 개 좀 가져오라고 이르도록 하라!"라며 아랫사람에게 분부하고, 이미 받은 것들은 잘 싸두도록 했다. 누군가 서울 나으리의 생일에 보낼 선물이 생긴 셈이다. 바로 이 때 구미의 학자, 중국전문가, 고고학자, 모험가들은 만리를 멀다 않고 풍찬노숙을 하면서 뚠후앙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문물 몇 가지를 가지고 돌아가는 운송비에 쓰고자 했다. 그들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사막에 뼈를 묻는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두들겨 맞고 살해당한 작정까지 하면서 지금 막 열어제쳐진 이 동굴로 달려왔다. 그들이 사막에서 음식 연기를 피어올리고 있을 때 중국 관리들의 응접실에서는 다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세관도 없었고 수속도 없었다. 외국인들은 곧바로 이 동굴 앞에 도착했다. 동굴에는 벽돌을 쌓아올리고 자물쇠를 채워놓았는데 열쇠는 왕도사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외국인들은 다소간 아쉬운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들이 만리 길을 달려 도착한 종착역에는 삼엄한 문물 보호 관리소도 냉담한 박물관 관장도 만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경비원이나 수위조차도 만날 수가 없었다.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이 꾀죄죄한 촌티나는 도사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유머러스하게 어깨만 한번 으쓱하면 그뿐이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서 금방 도사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원래 세워놓았던 수많은 계획들은 다 필요없는 것들이었다. 도사가 바라는 건 그저 극히 간단한 장사였을 뿐이었다. 마치 바늘 두 개와 닭 한 마리를 바꾼다거나 단추 하나와 채소 한 광주리를 교환하는 그런 식이었다. 이런 장사를 자세히 되풀이하자면 아마도 나의 펜이 제대로 나가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간단히 말해야 하겠다. 1905년 10월, 러시아인 보르체프가 몸에 지니고 있던 러시아 물건 약간으로 서적 한 무더기와 경전을 바꾸어 갔다. 1907년 5월, 헝가리인 스타인[M. A. Stein]이 은전 한 꾸러미로 경전 스물 네 상자, 비단과 그림 다섯 상자를 바꾸어갔다. 1908년 7월, 프랑스인 펠리오[P. Pelliot]가 소량의 은전으로 열 수레의 6000여 권이나 되는 필사본과 그림을 가져갔다. 1911년 10월, 일본인 요시카와 코이치로오[吉川小一郞]와 타치바나 미즈코시[橘瑞超]가 상상할 수도 없는 적은 돈으로 필사본 300여 권과 당나라 조각상 두 점을 가져갔다. 1914년, 스타인이 다시 와서 그때도 약간의 은전으로 경전 다섯 상자 600여 권을 바꾸어갔고, …… 도사도 망설인 적이 있었다. 이렇게 하다간 신령의 노여움을 살까 무서워서. 이런 망설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극히 간단했다. 스타인은 이렇게 그를 구슬렸다. 자기는 당나라 승려를 지극히 숭배하는데, 이번에는 당나라 승려들의 발길을 거꾸로 밟아오면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경을 구하러 오게 되었느라고. 좋다. 기왕에 서양 중이라니 가져가도록 하지 뭐. 왕도사는 시원스럽게 문을 열어 주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외교적 수사도 필요 없었다. 몇 마디 즉석에서 지어낸 동화만 있으면 되었다. 한 상자, 또 한 상자. 한 수레, 또 한 수레. 모두 잘 싣고 단단히 묶은 다음, 휘익--!, 수레 대열이 출발했다. 성정부로 가는 게 아니었다. 일찍이 나으리들이 말한 바처럼 운송비가 없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런던으로 가는 거다. 파리로 가는 거다. 뻬쩨르부르크로 도꾜로 가는 거다. 왕도사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허리숙여 절을 하면서 먼 데로 배웅까지 나갔다. 그는 공손하게 스타인을 '스나으리 타인님', 펠리오를 '펠나으리 리오님'이라 불렀다. 그의 주머니에 생긴 묵직한 은전은 평상시 시주 때는 만지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스나으리, 펠나으리의 '보시'에 감사했다. 수레 대열이 이미 멀어져갔는데도 그는 여전히 길어귀에 서 있었다. 사막에는 두 줄기 깊이 패인 수레 자국만 남아있었다. 스타인네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학술보고와 탐험보고는 언제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종종 이상한 왕도사가 등장했고, 외국의 청중들로 하여금 이렇게 멍청한 인물의 손에서 이와 같은 유산을 구해낸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던가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암시했다. 그들이 산넘고 물건너 먼길을 간 것은 뚠후앙의 문헌을 암흑 속에서 햇빛 속으로 구해내는 일이었다고. 그들은 모두가 실천적 정신이 넘치는 학자들이었다. 학술적인 면에서 나는 그들에게 탄복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글에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이 빠져있다. 나서서 반박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고, 내 마음 속에는 오늘날 한 젊은 시인이 쓴 싯귀 몇 구절이 떠오를 따름이다. 그건 시인이 위앤밍원[圓明園]을 불태운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에게 쓴 것이다. 나는 너무나
한스럽다. 학자들에게 이 싯귀는 어쩌면 너무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진짜 이런 방법으로라도 그들의 수레 대열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사막에서 마주 보고 서서. 그들이 당신네들은 연구할 능력이 없잖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좋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학문의 우열을 겨루어 보자. 뭐든 좋다.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을 이렇게 몰래 가져가는 것만은 안된다. 나는 다시 탄식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수레 대열이 정말 나 때문에 멈춘다면, 그 다음에는 또 어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 당시의 서울로 가져가야 될 것이다. 운송비는 잠시 논하지 말자. 하지만 당시 동굴의 문헌 중 상당량은 분명 서울로 가지 않았던가? 그 모습이라는 것이 나무 상자에 담지도 않고 그저 거적자리로 대충 꾸린 것이었고, 연도의 벼슬아치들은 손을 쑤셔넣어 잡히는 대로 빼갔고, 걸음을 멈추는 곳마다 몇 꾸러미씩 그냥 머물러야 했고, 결국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여기저기 다 흩어져버리고 꼴이 아니었고. 위대한 중국이이라면서 경전 몇 권조차도 보존하지 못하다니! 심지어 어떨 때 나는 독한 마음으로 내뱉고 싶다. 벼슬아치들에게 무수히 짓밟히는 모습에 비하자면 차라리 런던 박물관에 수장하는 게 낫겠다고. 하지만 필경 이 말도 그리 후련치는 않다. 대체 내가 막아선 수레 대열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곳도 안되고, 저곳도 안되고. 나는 그저 사막 한가운데 멈춰세워 놓고는 한바탕 통곡할 밖에 없다. 아, 나는 너무나 한스럽다!
나만 한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뚠후앙연구원의 전문가들은 나보다도 훨씬 더 한스러워한다.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직 굳은 얼굴로 수십 년을 파고들면서 뚠후앙의 문헌을 연구하고 있다. 문헌의 마이크로필름은 외국에서 사오면 되고, 치욕을 느낄수록 더욱더 연구에 전념한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뭐까오굴에서 뚠후앙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수 일 간의 회의가 끝난 뒤 일본학자 한 사람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과거의 관점을 수정하고 싶습니다. 이 수 년 간의 성과가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뚠후앙도 중국에 있고 뚠후앙학도 중국에 있다는 것을!" 중국의 전문가들은 그다지 격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묵묵히 회의장을 나와 왕도사의 부도 앞으로 다가갔다.
중국 깐수성[甘肅省] 뚠후앙현[敦煌縣] 남동쪽 20 km 지점에 있는 불교유적. 소조불상과 벽화 등의 불교미술품 외에 많은 고문서류가 발견되어 동서문화교류사 또는 중국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907년 영국의 A.스타인과 그 다음해 프랑스의 P.펠리오에 의해 알려졌다. 밍사산[鳴沙山] 기슭에 길이 1.6 km에 달하는 크고 작은 600여 개의 불교석굴이 있는데, 뚠후앙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의 조사에 의하면 불상조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은 469개소에 달한다. 빙하기의 충적층에 속하는 수성암으로 된 석굴이어서 불상은 모두 소조상이며 4세기 중반부터 13세기에 이르는 1,000년 간 석굴을 만든 사람들은 벽화의 제작에 힘썼다. 이들 벽화는 표면에 석회를 칠한 벽면 위에 짙은 채색의 불교회화를 치밀하게 묘사했는데, 제작 연대별로는 위나라 때가 22굴, 수나라 때가 90굴, 송나라 때가 103굴이 있다. 그 중에는 청나라 때에 들어와서 그린 것들도 있다. 뚠후앙석굴의 조사보존사업은 1960∼70년대에 걸쳐 행해졌는데 1972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것인 AD 366년의 것으로부터 492개의 동굴이 조사되어 2,000여 채의 채색소조상과 4만㎡의 벽화를 조사 연구하고 500여㎡의 벽화와 30여 채의 소조상이 복구되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북위와 당의 견직물 60여 점, 748년의 문서, 인쇄된 불상 등을 발견 조사하고 계속 연구하고 있다. 뚠후앙문서 중의 불교관계서적을 통해 중국의 불교 수용과정을 엿볼 수 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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