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세욱 선생님과의 만남
선생님의 학계 경력은 대단하다. 중요한 것만 추려도 고려대학교와 외국어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신 것 외에 Univ. of Iowa·U. C. Berkeley·中國西南師大·西北大學·復旦大學 등의 방문교수나 객좌교수 등에다가 한국중어중문학회·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중국어문연구회 등의 회장을 지내셨다. 이는 선생님께서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고 얼마나 커다란 역할을 하셨는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시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이다. 선생님께서 그간 발표하셨던 학술 논문은 그 제목을 나열하자면 몇 쪽은 족히 될 것이다. 단지 저서에만 국한하더라도 《중국문화총설》(1974) 이래 10권쯤 된다. 내가 처음 읽은 선생님의 책은 《중국수필소사》(1981)와 《중국현대문학론》(1982)이었는데, 밑줄을 그어가며 요약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선생님의 학술적 성취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역작이라면 역시 '중국문학사 3부작'인 《중국고대문학사》(1986), 《중국근대문학사》(1995), 《중국현대문학사》(1999)와 《중국현대시연구》(1992)일 것이다. 작년에 선생님은 타이완에서 그전의 《韓中詩話淵源考》(1980)에 이어 또 《中國新詩論》(1998)을 펴내셨다고 한다. 선생님을 두 번째 뵌 것은 1987년 벽두의 홍콩에서였다. 그때 나는 홍콩중문대학에서 연구생 신분으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같은 숙소에 있던 선생님의 제자 한 사람이 선생님께서 이미 고려대학교로 옮기셨으니 다 제자가 아니냐면서 함께 마중을 나가자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선생님과 사모님을 뵈었을 때 선생님은 아마도 좀 의외이셨던 모양으로 그저 나와줘서 고맙다고만 하셨다. 그래서 그 날은 결국 별다른 말씀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쨌든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대면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후에 차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해외 여행이 대단히 잦은 편이시다. '대학 졸업 후 용케 구한 교직을 내동댕이치고' 1960년 '세죽상자에 무명 속옷 열 벌과 모기장 한 개를 싸들고 뜨거운 나라 타이완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 이래로, '미국 땅에서 두 겨울을 나는' 등 기회가 닿는 대로 또는 기회를 만들어가며 자주 외국을 찾으시는 것 같다. 물론 선생님의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일종의 학문적 충전과 예술적 창조다. 이는 여행 후에 반드시 새로운 성과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중국문학기행》(1995)의 출판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선생님의 여행과 관련해서 내게 인상적인 것은, 여행에서 돌아오시면 밤을 새워서라도 그간 신세졌던 분들에게 편지를 쓰신다는 말씀이다. 선생님의 이 말씀은, 귀국 후 그야 말로 마지못해 한두 사람에게 간신히 고맙다는 전화나 하면 다행일 정도인 내게는 참 경이로운 것이었다. '여행' 하니까 다른 한 가지 일이 떠오른다. 중국이나 타이완·홍콩 등지에 갔을 때 초대면인 중국인으로부터 종종 선생님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당연지사로 선생님의 제자라는 답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때부터 '부산대학교 교수'로서의 나는 사라지고 '허세욱 교수의 제자'로만 대접받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선생님의 그늘이 큰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선생님의 유창한 중국어나 뛰어난 풍도도 중요한 요소지만 무엇보다도 중국인이 아니면서도 중국어로 시와 산문을 창작하시는 선생님의 독특한 활동 때문이다.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타이완 유학 시절 선생님의 스승이셨던 중국의 저명 여성작가 謝氷瑩 여사께서 직접 선생님의 중문 습작을 지도해주셨는데, 워낙이 천품이 있으셔서 그런지 1년이 채 안되어 타이완 문단에 정식으로 추천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선생님은 1961년 타이완의 《現代文學》에 시 2편과 《作品》에 수필 2편을 발표한 뒤로 지금껏 수많은 중문 작품을 창작하셨다. 그중 시집으로는 《雪花賦》(1985), 《東方之戀》(1994)이 있고 수필집으로는 《許世旭自選集》(1982), 《城主與草葉》(1988), 《許世旭散文選》(1991)이 있으며 그 외 시수필 합집으로 《藏在衣櫃裏的》(1971)가 있다. 물론 선생님의 문학적 감수성은 당연히 한국어로도 표현되었다. 시집도 《청막》(1969)과 《바람이 멎는 곳》(1989) 등 두 권이나 있고, 수필집은 《움직이는 고향》(1976)을 시작으로 거의 10권에 가깝다. 최근에 내신 《지팡이소리》(1998)는 그간 선생님께서 쓰신 수필 중에서 가려 뽑은 것인데, 선생님의 인생이나 문학을 이해하는 데 퍽 도움이 되는 듯하다. 예를 들면 맨 마지막에 실려있는 〈탈출과 돌파〉에서 선생님은 스스로 서너 번이나 삶의 큰 변화를 선택했던 일을 술회하고 있다. 바로 이 〈탈출과 돌파〉에는 선생님께서 서른 살 무렵이던 젊은 시절 사명감과 도전의식 그리고 패기로 《춘향전》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타이완에서 제일 가는 문학월간지에 연재했던 이야기가 들어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선생님은 이처럼 어렵고 품이 많이 드는 번역의 수고로움도 전혀 마다하지 않아서, 틈나는 대로 이 일에 나서셨다. 선생님의 중국어 번역본으로는 앞서 말한 연재물이 나중 《春香傳》(1964)으로 출판되었고, 그 외에도 두 권의 《韓國詩選》(1964 및 1994)과 《徐廷柱詩選》(1978) 등이 있다.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중국현대시선》(1976)을 위시해서 예닐곱 권이 있는데, 학문적으로 볼 때 그중 중요한 것은 《중국고대명시선》(1990)과 《중국현대명시선》(1990)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朱自淸의 〈背影〉을 번역한 〈뒷모습〉일지도 모르겠다. 1972년 여름 선생님은 '모시 접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시던' 아버님을 여의셨는데, 삼우제를 마친 뒤 막 귀경했을 때 당시 창간을 준비하고 있던 《수필문학》이 중국수필을 한 편 번역해달라는 의뢰를 해왔고, 선생님은 그 날 밤 곧바로 이 작품을 번역했다고 한다. 원작이 가진 내용과 품격 그리고 선생님의 정회와 필치가 한데 어우러졌으니 과연 어떤 글이 나왔겠는가? 그런데 인연은 그 뿐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선생님의 효성과 정성이 통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이 교육부 편수관의 눈에 띄어 마침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 후 수십 년 간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고 감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이런 얽힘 때문에 〈뒷모습〉은 선생님의 강의에서 왕왕 '쉬어가는 성황당'이자 강의가 엉뚱한 데로 빠지기 쉬운 '함정'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선생님과 〈뒷모습〉의 이야기를 서너 차례 들었는데, 매번 당신 자신의 일화로부터 받는 감동과 대학 2학년 때 이 작품을 중국어로 읽으면서 느낀 감동이 중첩되고는 했다. 그 전에 두어 번 뵙기는 했지만 이처럼 선생님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은 1988년 내가 고려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다. 그때 나는 고대 중한사전편찬실에서 종일 근무하면서 한편으로는 강사로 두어 군데 강의까지 나가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지도교수이신 선생님의 강의가 있는 날의 전날 밤은 대체로 철야가 거의 정례화되어 있었다. 선생님께서 요구하는 과제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매주 중문으로 된 산문 작품 5편을 읽고 비평문을 써오라는 것이 그랬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추억으로서 또 자랑으로서 뿌듯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때는 참 힘겨웠다. 선생님의 과제 중 또 하나 인상 깊은 것은 학기말마다 당시를 30수씩 외우는 것이었다. 학기초에는 수업을 신청해 주어 고맙다고 선생님께서 식사를 내시고, 학기말에는 강의를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학생들이 자리를 마련하고는 했는데, 이 학기말 행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당시 외우기였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걸 이상적으로 소화해내는 사람은 대체로 한두 명에 불과했을 뿐이고, 우리 각자에게 주는 부담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심지어 어느 해 가을 대학원생들과의 백운대 등반 때는 느닷없이 운자를 내주시면서 등반 종료 시에 각자 자작 고시를 한 수 씩 읊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학생들은 아마도 창작의 고통이 어떠하다는 것을 그야말로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선생님을 가장 최근에 뵌 것은 지난 6월 말이었다. 미리 전화를 드려 시간을 정해놓고 선생님의 댁을 찾았으나 댁은 온데 간데 없었다. 생활에 쫓기느라 선생님의 댁을 찾은 게 좀 오래되기는 했지만 어찌 이럴 수가! 알고 보니 조용한 주택가의 이층집이던 선생님 댁은 그 몇 년의 세월을 못이기고 번화한 상가의 6층 건물로 바뀌어있었다. '땡감 다섯 개'를 매달았던 대문 곁의 감나무도 사라지고, 늘상 '앙살스레' 짖어대던 강아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서재와 선생님 당신 만큼은 여전했다. 서가 위로 천정까지 쌓인 책들, 널따란 탁자 위에 놓인 책 한 권과 만년필, 그리고 웃으시는 눈매와 윤기있는 목소리의 선생님. '청출어람'이라는 말은 있지만 아무래도 나는 이 말을 증명할 수가 없을 듯하다. 학품·문품 등 모든 면에서 그저 모자라기만 하니 말이다. 그래서 한 발짝이라도 선생님께서 이루신 것에 다가가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선생님께 배울 작정밖에 없다. 물론 아무 염려할 일도 없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직업적인 의미에서의 교수직은 은퇴하신다고 하지만 스승으로서 학자로서 은퇴하시는 것은 아니니까. 오직 선생님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할 따름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