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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제국주의론' 문제 있다


김  혜  준


NewsPlus195   지난 주 NEWS+에는 간단하지만 흥미 있는 기사가 실렸다. 〈21세기 권력은 영어에서 나온다〉가 그것이다. 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의 이 기사는 일본 덴츠인간연구소의 〈위기를 넘어 -- 경제회복을 향한 아시아의 도전〉이라는 보고서를 요약한 것인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21세기는 무형의 정보가 상품 노릇을 할 것이다. (2) 앞으로 이런 정보의 생산·유통·소비에서 인터넷은 핵심 역할을 할 것이다. (3) 인터넷의 사용 언어에 따라 지리적 경계보다는 언어적 경계가 경제 블록의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4) 현재 인터넷의 가장 강력한 중심 언어는 영어다. (5) 영어 네트워크는 기존 경제블록이나 다른 네트워크의 붕괴를 촉진하면서 21세기를 미국판 대영제국주의의 구도로 몰아갈 것이다.

   덴츠인간연구소의 보고서를 직접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기사가 전하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는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가 아닌가싶다. 이에 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몇몇 사항에만 국한시켜서 말해보기로 하자.

   인터넷에서 영어의 사용률이 극히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비영어권 인터넷 사용자 수가 증가하면 그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초기 단계에서는 비영어권 사용자들도 대개 영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자신들의 언어로 구성된 자료와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리고 당연히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차이를 해소해 주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올해 3월 11일자 NEWS+에서 보도 한 바로는, 작년 하반기 통계로 온라인 사용자 수가 일본은 인구비례 11.1%인데 비해 중국은 0.1%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청년보》라는 신문은, 지금 막 불기 시작한 인터넷 열풍과 더불어 윈도우98의 중국 판매량이 미국에서의 판매량에 육박한다는 소식을 톱뉴스로 소개했다. 그렇다면 세계 인구의 약 1/4을 차지하는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인터넷을 사용하게 된 후에도 인터넷에서의 영어의 지위가 그대로일까? 다시 말해서 중국인들 스스로가 대량으로 정보의 생산·유통·소비에 가담하게 된 후에도 과연 그들은 영어로 된 정보에만 집착할까?

   이런 생각은 그저 가설이 아니다. 이미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다. 앞의 NEWS+ 기사에 따르면 현재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정보의 80-85%는 영어이지만 그 비율은 2-3년 전보다 7,8% 떨어졌다고 한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근 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어로 된 웹사이트는 전체의 78%로 1,2년 전에 비해 점유율이 상당히 낮아졌다고 한다. 이는 곧 비영어권 사용자의 수가 늘어난 데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NewsPlus195_02.jpg   프로그램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얼마 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은, 일반 텔레비전에 인터넷 연결 장치를 부착해 각종 정보를 전송하는 이른바 '비너스 시스템'을 중국에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중국과학원 산하 카이스그룹은 즉각 중국어의 특성을 살린 인터넷 연결기 운영체계 '여와'를 내세워 '비너스 시스템'과의 대결을 선언했다. 유럽에서는 대규모 인터넷 의류매장 'Boo'를 개장하면서, 독일·덴마크·스웨덴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앞으로는 에스빠냐어·이탈리아어까지 서비스하는 사이버 판매원 '미스 부'를 내세워 비영어권 국가의 소비자들을 공략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세계 최초로 새로운 인터넷 문서규격인 XML 환경에서 사용 가능한 통합저작시스템을 개발한 (주)언어기술이라는 한 소프트웨어 회사는, 최종적으로는 우리말과 글을 이용해 사전 지식 없이도 컴퓨터를 쉽게 쓸 수 있는 기술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아직은 그 성과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번역 프로그램의 적극적인 개발도 주목할 만 하다. 인터넷 소사이어티와 알리스 테크놀로지사가 손잡고 진행중인 '바벨' 프로젝트라든가, 우리나라의 전자통신연구원을 중심으로 7개 업체가 공동으로 이에 착수한 것도 그 한 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인터넷에서의 영어는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것이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것은 지나친 예단이 아닌가 싶다.

   사실 영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가지게 될 효용성은 인터넷에서의 그 역할이라는 한 가지 측면에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어 그 자체는 권력의 원천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영어를 사용하여 제공되는 정보, 영어와 그 정보를 사용하는 실체로서의 미국과 같은 국가의 존재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계에서도 미국의 지위는 그대로일까? 미국의 힘이 단기간 내에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중심의 세계지배 체제가 영속적이라는 보장도 없으며, 미국이 계속해서 유일한 권력자로서 존재할 것이라는 것도 회의적이다.

   다시 중국의 예를 들어 보자. 중국은 동북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주도의 질서를 깨고 그에 도전할 기반을 이미 갖추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2015년쯤 동북아 혹은 범세계적으로 미국의 힘에 맞설 것이라는 예측이 일반화되고 있다. NEWS+가 전하는 바로는, 1997년 1월 중국의 대만 부근 해역에서의 미사일 발사 실험 계획이 알려졌을 때 일이라고 한다. 인터넷 토론자 중 한 사람이 중국인의 영어 수준을 비판하자 당장 "중국의 경제 규모가 너희 미국보다 훨씬 더 커져 봐. 그때는 우리 중국식 영어가 당신네 개떡같은 양키 영어보다 훨씬 더 널리 쓰이게 될 걸."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어쩌면 중국인들은 이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중국어가 영어를 압도하게 될 걸"이라고.

   물론 당분간 영어와 자리다툼할 언어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영어의 효용성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것보다는 그러한 효용성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우리는 또 여하히 대처해야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는 그것이 지리적 세계에서든 사이버 세계에서든 간에 일정한 통합력을 가진 여러 개의 문화권역이 등장하게 될 것이고, 각 권역마다 일종의 지역국제어들이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세계 문화에서도, 인터넷에서도, 경제에서도 그리고 권력에서도 영어가 전부는 아니며 유일한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에 제법 떠들썩하게 진행됐던 소위 '영어 공용어화론'이 주는 반면 교훈을 한번쯤 되새겨봄직도 하다. 21세기의 이른바 '정보화·세계화' 사회에서 우리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길은, '유사성'이 아니라 '차별성'을 바탕으로 한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앞의 기사에서 인용한 덴츠인간연구소의 결론 중 한 마디는, 그것을 이끌어내는 논리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일정한 시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언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언어는 성장하고, 그렇지 못한 언어는 위축될 것이다."


김혜준, 〈'영어제국주의론' 문제 있다〉, 《뉴스플러스》 제195호, 1999년 8월 5일, P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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