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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문화 수용과 중국 사회사상의 변화
1. 六四 民主運動과 서방문화
민주의 여신상은 이를 세운 이들이 처음부터 언명한 바 처럼 미국 뉴욕 남쪽의 베들로 섬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을 중국적으로 모방한 것이다. 민주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六四 民主運動의 다양한 의의에 관해서는 차후 제분야의 전문가에 의하여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될 것이지만 우리는 우선 여기서 민주의 여신상이 나타내주는 또 하나의 의미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는 중국에서 근대 이후 본격적으로 유입된 서방문화가 이제 왠만큼은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서방문화에 대해 새로운 적극적 수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하나의 단적인 증거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다음의 포스터는1) 이러한 추측에 보다 유용할 것으로 여겨진다.
포스터는 5월 13일 부터 단식에 들어간 2,000여명의 학생들 곁에 온 국민이 함께하고 있다는 내용의 것인데, 그 그림은 분명히 이탈리아의 베드로 성당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한 부분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2. 근대 중국의 서방문화 수용
최초 비단 교역을 통해 시작된 서방문화의 유입은 5세기경 기독교의 한 지파인 景敎(Nestorianism)의 전래 등을 비롯하여 미약하나마 꾸준히 지속되었다.2) 16,7세기 명대 중엽부터 펼쳐진 천주교 예수회의 적극적인 중국 포교는, 문예부흥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던 서방의 과학 기술에 관한 지식이 중국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청간의 서방 과학 기술 지식의 전파는, 일정한 종교적 목적하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특정한 일부 지식인에게 한정되었을 뿐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그나마 이러한 西學東漸은 청 중엽 이후 문화적 전제주의와 쇄국정책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840년에서 1842년 까지의 鴉片戰爭은 中西文化의 본격적 충돌과 구국을 위한 선구적 중국인의 적극적인 서방문화의 학습ㆍ수용을 촉발하였다. 이후 20세기 전반에 이르기 까지의 이러한 서방문화의 수용은, ① 1985년 淸日戰爭 패배까지의 洋務運動 時期 ② 1911년 辛亥革命 직후까지의 維新運動 및 革命運動 時期 ③ 五四運動을 전후한 五四 新文化運動 時期 등 대개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주로 자연과학과 기술을 위주로 하면서 그외 부분적으로 宗敎ㆍ史事ㆍ法政 등과 관련한 서방문화를 받아들인 시기였다. 아편전쟁의 패배와 태평천국의 진압 과정에서 서방의 우월한 점이 船堅砲利ㆍ堅甲利兵에 있다고 판단한 曾國藩ㆍ李鴻章ㆍ張之洞ㆍ沈보楨 등의 洋務派는 군사기술과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의 과학 기술 도입을 적극 주장하였다. 양무파는, 서방 과학 기술과 제도의 수용에 대해서는 그 태도가 상이하였지만, 유가문화의 관념과 가치 기준의 고수라는 점에서는 王개運ㆍ倭仁ㆍ張盛藻ㆍ洪良品ㆍ劉錫鴻ㆍ張楷 등의 頑固派와 동일하였다.3) 또한 서방문화에 대한 전면적 인식이 결핍됨으로써 단순히 서방문화의 한 표면적 현상인 과학 기술에만 주목하였고, 이에 따라 양무파는 자연히 中體西用을 통한 自强新政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서방문화 도입의 주요 방식은 同文館ㆍ製造局 및 敎會 機構에 의한 서방 서적의 번역이었다. 梁啓超가 편집한 1896년의 《西學書目表》에 따르면 1895년에 이르기 까지 종교 부문을 제외한 관련 번역서는 354종이나 된다고 한다.4) 서적 번역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서방 인사의 초빙과 유학에 의한 서방 문화 학습이었다. 서방 인사 초빙의 경우 1862년에서 1844년 사이 同文館에서는 20여명의 서방인이 교수하였다고 한다.5) 청정부의 유학생 파견은 1872년에 시작되었는데, 兵工船政의 학습이 그 주요 목적이었다. 서방 과학 기술의 도입과 전파는, 관념면에서는 유가적 전통관념을 무너뜨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관과 방법론을 제공해 주었고 경제적으로는 농업경제의 붕괴를 초래하기 시작하였다.
두번째 시기는, 서방 과학 기술의 지속적 수용은 물론 서방의 사회과학이 대량으로 중국에 받아들여진 시기였다. 청일전쟁의 패전 이후 양무파가 아직 청일전쟁의 패배 원인을 서방 과학 기술 학습의 부족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음에 비하여 康有爲ㆍ梁啓超ㆍ譚詞同 등 維新派는, 서방은 선진 과학 기술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회ㆍ정치ㆍ법률 제도 및 뛰어난 사회과학 이론을 갖추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방의 과학기술은 물론 서방의 정치 제도 및 철학을 포함하는 사회과학의 모든 부문의 수용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정치 방면에서는 입헌군주제와 민권주의를, 교육 방면에서는 과거 폐지와 서방 과학 지식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을, 법률 방면에서는 재판제도의 도입 등을 주장하면서 變法維新을 내세웠다. 이같은 유신파의 활동이 戊戌政變에 의한 百日維新의 실패와 더불어 저조해지면서, 孫中山 등의 혁명파가 서방의 제도와 사상 도입을 주장하면서도 진화론ㆍ천부인권설 및 공화제를 내세움으로써 유신파와 논쟁을 벌이면서 봉건전제주의를 맹렬히 비판하기 시작ㆍ마침내 신해혁명을 이끌어내었다. 당시의 서방문화 수용은 주로 더욱 늘어난 번역과 유학은 물론 신문 잡지의 간행을 통한 한층 효과적인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컨대 1902년에서 1911년까지 그 명칭에 '譯'자가 붙은 신문사나 잡지사 혹은 출판사는 23개가 된다고 하며,6) 만청의 번역 소설의 수는 대략 1,500종 좌우라고 한다.7) 이같은 서방문화의 도입은 과학ㆍ철학ㆍ문학ㆍ정치ㆍ법학ㆍ교육학ㆍ사학ㆍ언어학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었으며, 특히 과학 부문에서는 嚴復, 철학 부문에서는 梁啓超ㆍ王國維, 문학 부문에서는 林緖, 정치 부문에서는 일본 유학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이러한 서방문화의 수용은 아직 그 심층부에 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었다.
세번째 시기는, 서방의 과학 기술이나 정치 제도에 대한 수용 뿐만 아니라 서방의 문화 사상ㆍ윤리 도덕 즉 의식 형태의 모든 영역의 수용 까지 강조된 시기였다. 신해혁명의 실질적인 실패의 원인이 사상개혁의 결핍에 있다고 본 陳獨秀ㆍ李大釗ㆍ胡適 등은 문화상의 계몽운동 전개와 더불어 서방문화 전체에 대한 심층적 수용을 주장하였다. 비록 杜亞泉 등이 동서문화의 우열을 열거해가면서 신문화의 수입은 유가 사상이라는 '國基'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들은 민주와 과학을 앞세우면서 심지어는 全盤西化라는 구호까지 내세웠다. 五四運動 직후 서방문화 수용에 의한 신문화의 추세가 더욱 강화되자 章士釗ㆍ陳嘉異ㆍ杜亞泉 등은 다시 사실상 中體西用의 변형인 中西調和를 주장하였고, 이에 맞서 張東蘇ㆍ蔣夢麟ㆍ羅家倫ㆍ毛子水 등은 신구 문화의 공존은 있을 수 있으나 조화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논리로 전통문화에 대한 전면 부정과 함께 서방 자본주의 문화의 전면 수용을 주장하였다. 그후 梁啓超ㆍ梁漱溟 등이 서방문화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서방문화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새삼 전통문화를 전면 긍정하자 서방문화 수용 찬성론자들은 다소 상이한 흐름을 보여, 胡適ㆍ吳稚暉ㆍ尙乃悳 등은 서방문화는 문화발전의 유일한 길이라며 주로 자본주의적 서방문화의 전반적 수용을 적극 옹호하였고, 李大釗ㆍ陳獨秀ㆍ瞿秋白 등은 자본주의적 서방문화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적 서방문화의 수용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서방문화 수용은 더욱 증대되고 다양화된 번역이나 유학 혹은 각종 출판물에 의한 수용이 백화문 사용 및 문학혁명과 결합하여 급속도로 촉진되었다. 물론 이러한 서방문화의 수용이 全盤西化라는 극단에 흐른 점은 없지 않으나, 문화 전체에 대한 수용이 이루어지고 또 자본주의문화ㆍ사회주의문화의 관계에도 주목하는 등 심층적 수용이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근대중국의 서방문화 수용은 양무운동 시기의 과학 기술 수용에서 유신운동과 혁명운동 시기의 정치ㆍ사회ㆍ법률 제도 수용을 거쳐 오사 신문화운동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문화 전반에 대한 수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3. 최근 서방문화 수용과 관련한 학술 사상계의 동향 및 문학적 현상
근대중국의 서방문화 수용은 상술한 바 여러 차례 격렬한 논쟁을 수반하면서 적극적이고도 대규모적으로 진행되었다. 오사 신문화운동 이후에도 이러한 서방문화의 수용은, 지나친 서화 현상에 대한 반성이나 중체서용의 맥락에서 몇 차례 서방문화 수용에 대한 반발이 있기도 하고 또 항일전쟁ㆍ국공내전 등의 전란의 여파로 다소 기복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런대로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 후,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적 저침ㆍ극좌 보수적 사조 등등의 여파로 중국의 서방문화 수용은 다시 저조기를 겪게 되었다. 예컨대 1911년 부터 49년까지 문화사와 관련된 저작이 100여 종이었던 것에 비해 49년 후에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8) 1976년 毛澤東의 사망 및 四人幇의 몰락과 더불어 진행된 개방과 개혁 추구에 따른 중국 사회의 변화는 학술 사상 문화계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이후 문화 문제와 관련한 두 차례의 열렬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곧 계몽ㆍ인도ㆍ인성에 관한 논쟁과 중서문화 비교에 관한 토론이 그것이다.9)
중서문화 비교에 관한 토론은, 전국 각지에서 갖가지 유형의 좌담회ㆍ토론회가 끊임없이 열리고 수많은 연구단체와 기구가 속속 설립되었으며, 상당수 신문 잡지에서는 이를 위한 전문란이 만들어지고 또 문화 문제에 관한 총서류가 경쟁적으로 출판되는 등 이른바 '文化熱'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대단히 열렬하였다. 예컨대 1985년부터 1986년까지 공개적으로 발표된 문화에 관한 논저는 200편을 상회하였다.10) 文化熱에서 주로 다루어진 문제는 ① 문화 이론 일반에 관한 문제 ② 중서문화의 특징ㆍ우열 등과 관련한 중서문화의 비교 ③ 중국 전통문화의 특징ㆍ핵심 및 그 발전 법칙 규명 ④ 특정 문화 문제나 구체적 문화 현상에 대한 탐구 ⑤ 향후 중국문화의 전진 방향을 둘러싼 중국 현대문화와 전통문화 및 서방문화의 관계 검토 등이었는데, 특히 서방문화의 수용과 관련한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11) 文化熱과 서방문화 수용과의 관계를 좀더 깊이있게 알아 보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발생 원인을 보다 자세히 살펴 보는 것이 퍽 유용할 것이다. 첫째, 1978년 제 11기 三中全會에서 중국 공산당은 1975년에 제기된 농업ㆍ공업ㆍ국방ㆍ과학 기술의 현대화를 재확인 이를 강력히 추진하였고, 이러한 四個現代化는 자연히 서방문화의 성취를 여하히 흡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었다. 둘째, 개혁과 개방이 기본 국책으로 추진되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문화 문제에 연관되었다. 즉 대외 개방으로 서방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서방의 과학 기술ㆍ관리 경험ㆍ인문과학 등이 도입됨으로써 중서문화 문제가 새로이 부상하였고, 개혁으로 인한 신사상ㆍ신방법이 전통사상ㆍ전통방법과 충돌하게 됨으로써 이의 해결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세째,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지난날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진행되면서 최초 단순히 봉건주의의 여독과 폐해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 차츰 자본주의 문화ㆍ사회주의 문화와의 비교를 거쳐 마침내 전체 중서문화의 비교 연구로 나아가게 되었다. 네째, 자국의 학술 연구 활성화와 발전 및 최근 수십년간의 세계적인 문화학 열기의 영향으로, 근대중국의 서방문화 대량 수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중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12) 文化熱의 과정중에서는 중서문화의 우열 비교와 관련하여 근대중국의 서방문화 수용시에 이미 제기되었던 많은 주장들이 유사한 형태로 다시 되풀이되었다. 줄곧 물질면을 중시해온 서방문화가 현대에 와서 의식의 위기를 맞게 됨으로써 동방의 정신문화에서 그 해결책을 찾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유학의 부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하였고 ; 서방문화는 진취형이고 중국문화는 보수형이어서 현재의 서방문화가 곧 중국이 필요로하는 문화형이라고 주장되기도 하였으며 ; 각자 우열 판단의 구체적 근거와 관점은 서로 다르지만, 중서문화는 각기 우월한 점과 열등한 점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런 중에도 李澤厚가 내세운 '西體中用'이라는 새로운 주장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원래 西는 서방문화를 中은 중국문화를 뜻하며, 시대에 따라 다소간의 의미 변화가 있으나 '中體西用'이라는 말을 사용한 근대중국에서는 體는 본질적이고 주도적인 治身心의 內學(정신문화)을 用은 응용적이고 부차적인 應世事의 外學(물질문화)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李澤厚는 體란 사회 존재의 본체요 인류 존재의 본체인 생산방식ㆍ생활방식을 의미한다면서, 西體中用이란 사회 존재의 본체(생산방식ㆍ상층건축ㆍ일상 현실생활) 및 본체의식(과학 기술 사상ㆍ의식형태)의 현대화와 중국의 실제 상황이 결합하는 것으로, 여기서 현대화는 예컨대 마르크스 주의와 같은 서방문화에 근거하며 중국의 실제 상황은 儒學을 포함하는 중국 문화 심리의 객관존재라고 규정하였다.13) 그의 西體中用論은 그 자체가 가진 논리적 불완정성 탓에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中體西用을 겨냥하면서도 全盤西化와는 또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상과 같은 文化熱은 문학 분야에도 나타났으며, 이를 통한 문학의 서방문화 수용은 상당히 현저하였다. 그간 중국 현대문학의 서방문화 수용을 돌이켜 보면, 문학혁명 후 상당 기간 동안은 대체로 동구와 북구 및 러시아ㆍ소련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1949년 후에는 소련과 사회주의 각국의 문화 수용에 치중하였는데, 신시기에 들어선 이후로는 이제 자본주의 문화를 포함하는 전체 서방문화에 대한 수용이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시기 문학의 서방문화 수용은 기본적으로는 세계관과 문학관 방면에서 종래의 마르크스 주의와 현실주의 창작 방법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철학ㆍ미학ㆍ심리학ㆍ문화인류학ㆍ정신분석학 등등의 서방 과학문화의 성취를 학습하고, 이와 동시에 직접적으로 現代主義를 비롯한 魔幻現實主義 등의 예술 형식과 예술 수법을 도입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인물 창조면에서는 형상화ㆍ전형화의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예술적 시각을 안으로 돌려 인물의 心靈化 표현에 주목하였고, 예술 구조면에서는 전통적인 스토리 위주의 구조외에도 심리적 역정을 주요 맥락으로 삼는 구조ㆍ共時性의 구조 등이 도입되고 다인칭ㆍ다각도의 서술 방식이 출현하였으며, 예술 방식면에서는 의식의 흐름ㆍ내심의 독백ㆍ꿈ㆍ환각 등을 이용하여 인물의 내심 세계를 드러내거나 象徵ㆍ荒誕(부조리)ㆍ變形ㆍ魔幻ㆍ흑색 유머 등의 수법을 사용하여 복잡한 인물의 내심 세계와 현실 표현하는 방식이 시도되었다. 1979년과 1980년 사이에 출현한 朦朧詩와 意識流 小說은 이러한 문학 방면의 서방문화 수용의 단적인 예이다. 신시기 문학의 서방문화 수용은 그러나 여러 면에서 아직은 충분치 못하였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보기로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서방의 관념을 도입하면서 중국의 현실을 충분히 고려치 않음으로써 발생한 결함이다. 예컨대 도시 생활의 정신적 위기라는 사조를 받아들이면서 중국의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 고독감ㆍ공허감ㆍ당혹감 및 격절감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 소위 도시병을 표현한 것이 그러하다. 둘째 앞의 문제와도 다소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중국의 예술 지평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관념이나 형식을 사용함으로써 일반 독자는 물론 전문 평론가 까지도 혼란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1981년을 전후한 朦朧詩에 관한 토론은 바로 이 점을 나타내준 것이다.14)
4. 최근 서방문화 수용과 관련한 사회적 현상
상술한 바 문학 부문을 포함하는 文化熱에서 나타난 서방문화 학습 및 전통 비판을 핵심으로 하는 소위 西化思潮는, 비록 그 구체적 실천과 세부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는 다소간 상이한 면모를 보이기는 하지만 최근 중국의 사상계ㆍ문화계 및 특히 청년 지식인 사이에서 이미 주도적 조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관해서 그들 자신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의의를 들어 이러한 서화사조가 중국의 역사 발전에 부합된다고 믿고 있다. 즉 ① 서화사조는 개혁과 개방이라는 방침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보수세력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서방의 과학 기술에 대한 학습만 강조하고 서방의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학습은 무시하는 그릇된 관점을 비판하였다 ② 서화사조는 일련의 서방 과학 이론을 들여와 중국의 현대문화 건설에 새로운 영양분을 제공하였다 ③ 서화사조는 다시 한번 전통문화에 대한 비판 운동을 촉발하여 현대화에 장애가 되는 사상적 보수주의의 극복에 도움을 주었다 ④ 서화사조는 서방의 과학과 민주를 선양함과 동시에, 혹은 공공연하게 혹은 간접적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지적함으로써 정치 개혁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⑤ 서화사조의 발전은 완전히 자발적인 것으로 젊은이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책임감과 지식인의 사회적 역량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등등이다.15) 물론 이러한 학술 사상계의 서화사조 고조는 중국 사회 전반의 조류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반 사회의 서방문화 도입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현상은 대단히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국은 신시기 이후 四個現代化를 재천명하였는데, 이중 관건이 되는 것은 과학 기술의 현대화라고 할 수 있었다.16) 그렇지만 문혁으로 인해 교육 수준이 극도로 저하된 것은 고도로 발달한 서방의 과학 기술을 흡수하는 데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 특히 청년 과학 기술자의 양성은 대단히 시급한 문제였다. 이리하여 중국 정부는 1978년 과학 기술자ㆍ유학생ㆍ연구생의 해외 파견을 결정, 78년 당해에 4,800여명의 유학생을 파견한 이래 86년 현재 매년 약 3,000명의 유학생을 파견하고 있으며, 그동안 14,000명이 귀국하였고 26,000명 이상이 외국에 체류 중에 있다고 한다.17) 그러나 이같은 중국 정부의 유학생 파견은, 서방의 선진 과학 기술 흡수가 그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서방문화 --- 특히 서방 자본주의 문화의 도입이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청말의 유학생 파견과 상당히 흡사하였다. 즉 그들은 서방적인 교육과 생활의 결과로 서방적인 사고방식과 이념을 지닌채 귀국함으로써 중국 사회에 대한 서방문화의 전달자가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中國之春》이라는 간행물을 발행하면서 민주ㆍ법치ㆍ인권ㆍ자유라는 구호하에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있는 일단의 중국 유학생들은 근본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는 중국 인민을 수렁으로 밀어넣는 것이다'라고 여기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이러한 인식이 유학 이전에 이미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18) 이들 유학생 외에도 대외 개방 정책에 따라 급격히 증가된 외래 방문자나 국외 여행자 또한 서방문화의 전파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19) 예컨대 1980년 10월 영국 국립영화관이 주최한 '중국영화의 달' 행사에 참가한 중국 영화계 대표단은 우선 서방영화 한 편의 감상을 요구, 헐리우드의 과학 공상 영화 <2001년>을 선택하였는데, 이는 자신들의 기술 낙후를 느끼고 미국 영화의 트릭 수법을 배우고자 한 것으로 해석된다.20) 일반인의 외형적인 일상 생활에서의 변화는 이러한 서방문화의 영향을 보다 확실히 보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복장면에서의 변화가 뚜렷하였다. 현재도 상당수 사람이 착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 인민복 때문에 '푸른 개미떼'라고 불리웠던 중국인들은 이제 투피스ㆍ블라우스ㆍ넥타이ㆍ와이셔츠 같은 서구식 의복이 보편화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낮은굽의 신발 대신에 군복을 입은 인민 해방군의 여군까지 착용할 정도로 굽높은 하이힐이 유행하고 있다.21) 84년의 정권 수립 기념일에 천안문 광장에서 1백만의 젊은이가 폭스트로트를 출 정도였으며, 댄스 파티의 8할은 디스코 춤이라고 한다.22) 극장에서는 서방문화의 여러 가지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찰리 채플린의 <마천루 시대(Modern Times)>를 비롯한 수많은 서방영화가 상영되고 있는데, <호송대(Convoy)>ㆍ<미래 세계(Future World)> 따위의 미국 영화가 상영될 때 마다 좌석은 연일 만원이라고 한다.23) 마찬가지로 T.V.의 외화 프로그램 역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 아마도 T.V.등 전파 매체는 현대 중국의 서방문화 도입과 수용에서 빼놓아선 안될 한 부분일 것이다. 신시기 이후 T.V.와 라디오는 四化路線에 따라 영어ㆍ불어ㆍ일본어 등의 외국어 학습 프로를 개설하여, 현재는 식당 종업원이나 택시 운전수가 소리내어 이들 프로의 강사를 따라하는 것은 이미 흔한 풍경이 되었다.24) 특히 1988년에 방영된 T.V.시리즈물 <河상>은, 문화면에서의 현대 중국의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중국의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방의 과학과 민주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중국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시 말해 이들 전파 매체를 통해 많은 서방 영화나 뉴스가 방영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서방문화의 전달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인데, 홍콩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광동성에서는 T.V.를 통한 자본주의 사상의 전파를 우려하여 한때 홍콩 T.V.의 시청을 금지하기도 하였을 정도였다.25)
5. 서방문화의 수용과 중국 사회의 변화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항하는 가운데 자국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된 근대중국에서의 적극적이고도 대규모적이었던 서방문화의 수용이, 최근 수십년간의 정체상태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오늘날의 중국에서 다시금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조류는 정치 경제계나 학술 사상계 뿐만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보편화되어 있는 것으로, 현재 중국 사회의 변화에 커다란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문학과 연관 시켜 잠깐 언급한 바 1949년 이래 중국의 서방문화 수용은 거의 사회주의와 관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시기 이후 사개현대화를 내세우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게 되자 자본주의 문화를 포함하는 서방문화 전체에 대한 수용이 불가피해졌다. 이러한 변화를 사회제도면에서 본다면, 1981년 5월 북경대 철학과가 북경의 각 대학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공산주의 사회가 좋다라는 대답이 25%, 자본주의 사회가 좋다라는 대답이 26%, 인민을 위한 제도가 좋다라는 대답이 49%였다고 한다.26) 또 1981년 12월 24일의 AP통신에 따르면, 1980년말 廣州의 어떤 청년 학생들이 동교 학생들에게 사회주의ㆍ자본주의ㆍ봉건주의ㆍ파시즘ㆍ무정부주의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좋은가 하는 질문을 한 결과 반수 이상이 자본주의가 비교적 좋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27) 물론 이러한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조사를 곧이 곧대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서 《中國之春》의 학생들이 언급한 것과 이를 관계지어 생각해 볼 때 확실히 최근의 서방문화 수용이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결국 六四 民主化運動 중에 민주의 여신상이 건립된 것이라든가 천지창조의 한 부분을 모방한 포스터가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최근 중국의 민주화 요구는, 멀리는 근대 시기로 부터의 가까이는 최근 십수년간의 서방문화 수용에 그 커다란 몫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01. 方良柱
등 편, 《悲壯的民運》, 明報出版社, 홍콩, 1989.6.
주 1)
方良柱 등 편,《悲壯的民運》,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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